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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69

169화 독백

169화 독백

“데미안!”

고개 돌린 내 눈앞에 은빛 물결이 채워졌다.

봄의 살랑이는 바람. 싱그러운 풀 내음. 루나가 내 목을 끌어안았다. 그녀의 웃음소리가 꽃잎이 흩날리는 들녘에 울려 퍼졌고, 나와 루나의 몸이 하나로 합쳐지며 넘어졌다.

당황해 무어라 외치려던 나는 나의 두 다리를 붙잡은 세실을 발견했다. 그러면 그렇지. 나를 넘어뜨리려고 둘이 합심했구나.

“지금이야! 세실리아!”

루나의 신호에 맞춰 내 다리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우리 셋은 데굴데굴 들판의 경사면을 굴렀다. 땅과 풀잎이 낳은 흙먼지와 초록빛 조각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꽃내음을 품은 바람이 우리를 스쳐 지나갔고, 나는 마치 하늘을 날아다니는 듯한 환상에 젖었다.

“우리는 언제쯤 단체 훈련을 하게 될까?”

구르는 것을 멈춘 나의 배 위에서 루나가 중얼거렸다.

저 멀리 단체 훈련하는 단원들이 보였다.

“······우리도 어엿한 은월의 단원인데.”

루나가 나를 내려다보며 살짝 아랫입술을 내밀었다.

루나는 어서 단체 훈련에 참여하고 싶어 했다.

우리가 아르카넘 홀에 있는 사이 트리스탄과 케일라는 단체 훈련에 합류했다. 게다가 두 사람 모두 오러를 발현할 수 있게 되었다.

“트리스탄이 자꾸 으스댄단 말이야. 자기는 단체 훈련을 한다고. 진정한 은월의 단원이라고. 어서 빨리 훈련에 참여해서 트리스탄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주고 싶어.”

루나의 말대로 트리스탄은 우리를 볼 때마다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물론 악의가 있어서는 아니다. 트리스탄은 그렇게 해서라도 루나의 관심을 끌고, 그녀와 대화하고 싶어 한다.

‘엇? 아직도 단체 훈련에 참여하지 못한 성년 단원이 여기 있었네?’

‘트리스탄 너어!’

못 본 사이 트리스탄의 덩치는 많이 커졌다. 점점 더 벨락을 닮아간다. 하지만 검술은 벨락보다는 라이칸을 더 닮았다. 당연한 일이다. 트리스탄은 훗날 라이칸의 뒤를 이어 ‘흑월의 소드마스터’로 불리는 인물이니까.

케일라는 여전히 트리스탄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녔고, 세실을 볼 때마다 혀를 내밀어 입맛을 다셨다. 세실은 그런 케일라를 부담스러워했다. 나는 원래 케일라가 트리스탄을 좋아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닐지도 모르겠다.

“이잇! 안 되겠어! 데미안을 공격하자! 세실리아!”

루나의 외침에 세실이 즉각 반응했다. 하지만 아까처럼 당하지는 않는다.

나는 세계수의 혼돈을 발현해 두 사람의 다리를 묶었다. 그러고는 나를 덮치려는 루나의 두 팔을 붙잡아 들판에 눕혔다.

“아앗! 비겁해! 혼돈을 사용하다니!”

“비겁하긴 뭐가 비겁해. 너희는 둘이고 나는 혼자잖아.”

“이잇! 이거 놔! 아파! 아프단 말이야!”

“어서 항복하기나 해.”

“저 엉큼한 녀석이 우리 큰 공주에게 뭐 하는 짓이야!”

덜컥, 심장이 내려앉았다. 고개를 돌리니 쿠훌린이 성난 코뿔소 같은 얼굴로 달려오고 있었다.

서둘러 세계수의 혼돈을 해제한 나는 루나와 세실을 양 옆구리에 끼고 달아났다.

“자, 잘못했어요 쿠훌린!”

“음흉한 늑대 같은 놈! 바보인 줄 알고 안심했더니! 거기 서라 이노오옴!”

루나의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하늘 위로 퍼져 나갔다.

.

.

.

나는 흠씬 두들겨 맞은 얼굴로 식당에 앉아 있었다.

리아논이 세상을 떠난 뒤로 식사 준비는 주로 디네베가 맡았다. 루나가 도와준다며 매번 부산을 떨었지만 그리 큰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왜 자꾸 데미안을 때리는 거예요!”

루나가 으르렁대자 쿠훌린이 움찔하며 변명했다.

“때, 때리긴! 검술 대련하다가 그런 거잖아!”

“필요 이상으로 감정이 실려 있었다고요! 게다가 데미안이 항복한 뒤에도 목검을 휘둘렀잖아요! 대체 왜 데미안과 대련할 때만 그렇게 최선을 다하는데요!”

“무슨 소리냐! 이 아빠는 데미안 따위를 상대로 최선을 다한 적이 없다!”

······따위라니.

하지만 쿠훌린의 말이 맞다. 그가 정말로 최선을 다했다면 나는 살아있지도 못할 거다.

쿠훌린은 여전히 내가 넘을 수 없는 벽이다.

“데미안은 이제 검술보다는 마법 실력이 더 뛰어나다고요!”

“어차피 데미안에게 마법을 가르칠 사람도 없다! 에스틸리아도, 엘리샤도 섬을 떠났으니 말이다!”

쿠훌린은 이제 예전의 모습을 완전히 되찾았다. 루나 덕분이었다. 얄미운 표정으로 히죽히죽 웃는 쿠훌린과 씩씩대는 루나. 그런 두 사람을 디네베가 미소 띤 얼굴로 바라봤다.

디네베가 신녀라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다. 디네베는 여전히 디네베였고, 신녀의 힘은 발현되지 않았다. 보름달이 뜨는 밤에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것이 조금 의아했다. 또한 내심 기대도 했었다. 오랜만에 신녀를 만나고 싶다고.

“아······!”

디네베를 너무 빤히 바라봤던 모양이다. 그녀가 얼굴을 붉히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옆에서 세실의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쿠훌린과 루나가 옥신각신할 때마다 세실은 저렇게 웃었다. 지난겨울의 어느 날이 머리를 스쳤다. 카인과 함께 아르카넘 홀로 떠난 줄 알았던 세실이 흠뻑 젖은 몸으로 성으로 뛰어 들어왔을 때, 나는 매우 놀랐었다.

돌아온 세실이 반가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카인이 염려되었다.

‘녀석은 괜찮을까.’

너무 늦게 깨달았다. 내가 카인과 함께하고 싶어 했다는 것을. 아니, 사실 나는 알고 있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나는 웹소설 무한회귀의 애독자였고, 수없이 소설을 반복해 읽으며 카인에게 감정 이입했다. 소설 속 카인은 나의 영웅이었다. 그러나 마지막 화에서 카인은 동료들을 살해했고, 그를 향한 내 동경은 애증으로 바뀌었다.

“루나프레나. 데미안. 세실리아.”

루나의 표정이 변했다.

쿠훌린이 ‘루나프레나’라고 부를 때는 아버지로서가 아닌, 은월의 단장으로 말할 때뿐이다.

“내일부터 단체 훈련에 참여하도록 해라.”

“저, 정말요?”

“단, 나와의 검술 대련은 앞으로도 계속할 거니 그리 알거라. 각오 단단히 하도록. 앞으로 더 힘들어질 거야.”

“네! 단장!”

루나가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꾀꼬리처럼 외쳤다.

“다, 당장 트리스탄의 콧대를 눌러줘야겠어.”

허겁지겁 입에 음식을 채운 루나가 성 밖으로 뛰어나갔다.

나와 세실도 히죽 웃으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

왜 그런 짓을 했지?

세실리아를 섬으로 돌려보내고 홀로 섬을 떠나오다니. 너는 세실리아를 배려한 건가? 그녀의 무고함을 이용한 너의 이기적인 계획의 일부였던 것은 아닌가? 그녀에게 강요한 선택은 진정으로 순수했나.

이봐, 친애하는 카인. 나를 피하려 하지 말라고. 나는 무한회귀를 반복하며 길을 잃은 너의 등대이자, 하나뿐인 친구니까.

너는 나의 친구가 아니야

내가 없었으면 너는 이미 망가졌을 거야. 나는 네가 망가지지 않도록 막아주는 유일의 존재지. 믿고 싶지 않다면 증거를 보여줄까? 왜 데미안은 너를 따라오지 않았지? 너는 누구보다 그를 신뢰했는데, 그는 왜 네가 아닌 루나를 택했지?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너는 의심하고 있어. 또한 알고 있지. 이 모든 것이 너의 어리석은 결정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너는 그날, 루나를 취할 수 있었어. 네가 그와 그녀를 배려한다는 착각에 빠져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자기연민에 취하지 않았다면, 너의 욕망에 충실해 그녀를 네 것으로 만들었다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어. 그녀는 제 어미의 죽음과 제 아비의 상실감 따위는 무시한 채 너를 따랐겠지. 어떻게 아느냐고? 빌어먹을. 장난치는 건가? 친애하는 카인. 너는 정말로 기억하지 못하는 건가. 단풍이 흩날리던 날, 너를 바라보던 그녀의 눈빛을 말이야.

떠올리고 싶지 않아

그 후로도 루나는 너의 사랑을 갈구했어. 네게 거절당한 그녀가 아르카넘 홀에 입학한 이유가 무엇이지? 그 이유를 정말 모르겠나? 아니. 너는 알면서도 모르는 체했지. 너는 어리석은 위선에 취해 그녀를 방치한 거야. 결국 그녀는 너와 데미안 사이에서 갈등했고, 데미안을 택했지. 아니지 아니지. 그녀가 데미안을 택한 것이 아니야. 데미안이 루나를 택했다.

그만해

루나는 아직 너를 잊지 못했다. 섬으로 돌아가. 데미안에게서 그녀를 되찾는 거다. 세실리아도 마찬가지야. 그녀는 제가 하지도 않은 일에 죄책감을 느끼며 스스로의 목에 족쇄를 채웠지. 참으로 어리석은 인간이야.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을 뿐, 그 족쇄는 여전히 그녀의 목에 채워져 있어. 너의 한마디면 그것은 마법처럼 되살아나겠지. 너 역시도 잘 알고 있어. 사라진 그녀의 족쇄를 부활시킬 주문을.

그런 짓은 하지 않아

너는 위선자야. 생각과 말과 행동이 따로 놀지. 너는 그들을 증오하고 있어. 다만 인정하지 않을 뿐. 친애하는 카인. 생각해 보라고. 리아논은 죽기 전에 왜 네게 그런 말을 했지? 너는 알고 있잖아. 그녀에게 특별한 힘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라고. 리아논은 너의 미래를 본 거야. 너의 두 손을 피로 물들이며, 모두를 파멸시킬 불변의 미래를.

그건 나의 미래가 아니야

설마 너는 리아논이 본 미래가 실현되는 일을 막기 위해 홀로 섬을 떠났다고 착각하고 있는 건가? 자신에게 솔직해지라고. 너는 위장된 선의에 취해있어. 네가 세실리아를 섬으로 돌려보낸 이유는 그런 게 아니야. 무엇인지 궁금하다고? 이보라고 카인. 너는 이미 답을 알고 있어.

나는 세실리아에게 자유를 줬어

그 말대로 너는 세실리아에게 자유를 줬지.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야. 하지만 무엇을 위해서였지? 너의 가식적인 연설에 감화한 세실리아는 스스로의 의지로 바다에 뛰어들었어. 꼭두각시처럼 행동했던 지금까지의 그녀라고는 믿기 어려운 과감한 행동이었지. 섬을 향해, 아니 자유를 향해 헤엄치는 그녀의 뒷모습을 너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지켜봤어. 하지만 잘 생각해 보라고. 그때, 세실리아를 보며 네 얼굴이 드러냈던 표정을. 떠올랐나? 그렇다면 다시 묻지. 친애하는 카인. 너는 왜 세실리아를 섬으로 돌려보냈지?

“카인.”

이런 이런. 훼방꾼이 등장했군.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라고. 친애하는 카인.

“아리엘.”

“무슨 일 있어 카인? 왜 그렇게 심각한 표정으로······.”

“아무것도 아니야.”

“함께 오지 못한 친구들 때문에 그래?”

그 이야기를 꺼내지 마

“이곳에 없다고 그들이 사라진 건 아니잖아. 루나도, 세실리아도, 데미안도, 마음만은 늘 카인과 함께하고 있을 거야.”

하지 마

“아니면 여름방학 때 만나러 갈까? 그게 좋겠다.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말해준다면 어머니께 부탁드려서 마차를······.”

“그만!”

아리엘의 눈이 커다래졌다. 도서관에 있던 학생들도 깜짝 놀라 카인을 돌아봤다.

잠시 정적이 일었다.

파르르 입술을 떨던 아리엘이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오늘은 도서관도 조금 북적이는데, 이만 나갈까? 산책이라도 하면 기분이 좋아질 거야.”

카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섰다.

도서관을 벗어나는 두 사람을 학생들이 웅성거리며 쳐다봤다. 그러나 그들의 목소리가 카인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지금, 카인의 귀를 채우는 목소리는 오직 하나였다.

친애하는 카인. 너는 왜 세실리아를 섬으로 돌려보냈지?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Status: Ongoing
The protagonist, an infinite regressor, found himself possessed within a novel where the original protagonist had gone mad and turned dark. Now, with my unique abilities, I must write a new ending for the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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