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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69

168화.

난 전여친이라는 것만 빼고. 사실대로 말했다.

“학교 동기예요. 이번에 결혼한다고 해서요.”

임수미 사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남편 될 사람이 GH건설 고준형인데, 알고 계신가요?”

내 말에 그녀는 눈을 크게 떴다.

“고진광 사장님의 셋째 아들이죠. 아! 이번에 결혼한다고 얘기 들었어요.”

선아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윤선아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임수미예요.”

둘은 악수를 나눴다.

“결혼 축하드려요.”

“감사합니다.”

임수미 사장의 여장부 같은 분위기에 눌렸기 때문인지 선아는 왠지 움츠러든 모습이었다.

“고진광 사장님 며느리 되실 분이 강진후 대표님의 동기인 줄은 몰랐네요. 두 분 친분이 있으면, 나중에 GH건설이 OTK컴퍼니의 도움을 받기도 편하겠는데요.”

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설마 그럴 일이 있겠어요?”

“왜요? OTK컴퍼니는 아킷의 최대주주기도 하잖아요.”

별 걸 다 알고 있다.

영국계 스타트업인 아킷(ArcIt)은 인공지능과 머신러닝을 활용해 건축설계를 하는 회사다. 한국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현재 유럽을 중심으로 급속도로 성장하는 중이다.

그녀는 들고 있던 핸드백에서 명함을 꺼내 나에게 건네주었다.

“호텔에서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언제든 연락주세요. 대표님 전화라면 자다가도 받을 테니까요.”

비즈니스 자리에서 상대의 명함을 받으면, 자신의 명함도 주는 것이 예의.

나도 명함이 있긴 하다. 안 가지고 다녀서 그렇지.

“제 연락처는 아시죠?”

“그럼요. 조만간 꼭 한 번 자리 마련해서 식사대접 할게요. 동생이랑 다 같이 봐요.”

“예. 기대하겠습니다.”

“두 분의 시간을 너무 많이 뺏은 것 같네요. 전 이만 가볼게요. 오늘 커피는 제가 살 테니, 계속 얘기 나누세요.”

“살펴 가세요.”

선아도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히 가세요.”

임수미 사장이 가고 나자 우리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선아는 놀란 시선으로 나를 보았다. 임수미 사장의 등장으로 새삼 내 위치를 확인한 것이다.

물론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겠지만, 머리로 아는 것과 직접 보고 느끼는 건 다를 수밖에 없다.

선아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저 고개를 숙인 채 커피잔을 계속 만지작거렸다.

“만약 내가 네 옆에 있었다면…… 그래도 넌 지금처럼 성공했을까?”

“글쎄.”

난 안정을 추구하는 성격이다. 학교 다닐 때만 해도 사업 같은 건 생각해본 적도 없고, 금융권 취직이 목표였다. 아마 집안이 멀쩡하고 아버지가 계속 살아계셨다면, 평범하게 졸업해서 취직했을 것이다.

예지라는 능력이 있긴 했지만, 투자는 커다란 모험이었다.

과연 선아가 계속 옆에 있었어도 같은 선택을 했을까?

난 그동안 내가 걸어온 길을 떠올렸다. 그곳에 어차피 그녀의 모습은 없었다. 이제 와서 다시 돌이킬 수도 없는 노릇이고.

“어떻게 됐을지는 아무도 모르지.”

선아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하긴 그렇겠네.”

지나간 얘기를 하는 건 무의미하다. 중요한 건 앞으로의 일이다.

“널 보면 하고 싶은 얘기가 있었는데…….”

“응?”

잠시 생각하던 선아는 고개를 저었다.

“역시 안 하는 게 좋겠어.”

난 가벼운 웃음을 지었다.

선아는 나를 보며 물었다.

“결혼식 올래?”

난 한국 재계와 별로 친분이 없다. 그나마 사업 때문에 서성그룹 쪽과는 자주 접촉하지만, 다른 재벌들은 로날드가 주최한 간담회에서 얼굴 한 번 본 게 전부다.

때문에 내가 결혼식장에 나타나면 그 자체로 이슈가 될지도 모른다. 설마 정말 오라는 의미로 청첩장을 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그 반대겠지.

난 고개를 저었다.

“축의금이나 많이 보낼게.”

선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작별인사를 건넸다.

“잘 있어, 진후야.”

나는 진심으로 말했다.

“결혼 축하해.”

* * *

내가 미국에서 쓰러진 이후 사방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유리도 몇 차례 전화했었다.

그때는 당연히 못 받았지만, 깨어난 이후 잠깐 통화했다. 그리고 오늘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역시나 유리는 몸 상태는 괜찮냐는 질문부터 했고, 난 그렇다고 대답하며 화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학교는 방학했겠네.”

[방학한 지가 언제인데요. 학사일정에 관심을 좀 가져 봐요.]

장기휴학생이 학사일정에 관심 가져서 뭐하겠니?

“어디 놀러 안 가?

[놀기는요. 지금 청년실업률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요? 다들 취업스터디 하느라 난리도 아니에요. 저도 OTK컴퍼니 들어가려면 열심히 해야죠.]

“응? 진짜 들어오게?”

[전에도 말했잖아요. 저 졸업할 때까지는 한 자리 꼭 남겨놔야 돼요. 나중에 TO 없다고 하면 안 돼요.]

“…….”

이런 게 바로 세간에서 말하는 부정 취업청탁이라는 건가?

“그런데 중요한 얘기가 있어서 전화했다고 하지 않았어?”

[아! 맞아요. 음, 그런데 선배한테 말해도 되는지 건지 잘 모르겠어요. 어차피 알게 될 거긴 한데…….]

“뭔데? 선아 결혼한다는 거?”

내 말에 유리는 깜짝 놀랐다.

[어떻게 알았어요?]

“직접 들었는데.”

[선아 선배한테요? 설마 만난 건 아니죠?]

“만났는데. 그러면 안 되는 거야?”

[아니, 안 되는 건 아니지만……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어떻게 되긴. 잘 살라고 축하해줬지.”

[흐음, 잘했어요. 아! 그런데 그 얘기 들었어요?]

“그 얘기가 뭔데?”

[아빠한테 들었는데, 다음 주에 워렌 보트가 한국에 방문한대요.]

“그래? 무슨 일로 오는 거지?”

워렌 보트가 CEO로 있는 버크셔캐셔는 처음에 보험업에서 출발했지만, 현재는 금융, IT, 미디어, 제조업, 에너지, 유통,소비재, 자동차 등 산업 전반에 걸쳐 투자한다.

워렌 보트는 잘 모르거나 위험하다고 생각되는 분야에 대해서는 절대 투자하지 않았다. 그래서 닷컴버블 당시에도 끝까지 인터넷주에 투자하지 않아 주주들의 원성을 샀다. 나중에 버블이 터지고 나서는 역시 투자의 귀재라는 찬사를 들었지만.

대신 코카콜라, 코스트코, 월트디즈니 같이 이름만 들으면 알 만한 친숙한 기업들을 사들였다. 최근에는 IT를 포함한 4차 산업혁명 분야에도 큰 관심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엔플 주식을 사들인 게 대표적이다.

[임진용 회장을 만나러 오는 것 같다는데요.]

워렌 보트는 대단히 신중하게 투자대상을 고르고, 웬만해서는 사업영역이 중복되는 기업에는 투자하지 않는다. 그런데 얼마 전 전격적으로 서성전자 주식을 매입해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투자 문제로 임진용 회장과 만나는 건가?

* * *

며칠 후.

워렌 보트의 방한 사실이 언론에 알려졌다.

컴퓨터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라도 빌 게이츠는 알듯이, 금융이나 투자에 대해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워렌 보트의 이름은 들어봤을 것이다.

워렌 보트는 조자아주의 주도라 할 수 있는 애틀란타(Atlanta)에서 조금 떨어진 에덴스(Athens)라는 도시에서 나고 자랐고,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정착했다.

버크셔캐셔 역시 에덴스에 본사를 두고 있고, 워렌 보트는 일생 대부분을 그 지역에서 보냈다. 특별한 일이 아닌 이상 고향을 벗어나는 일이 극히 적었다.

이번 한국 방문도 거의 10년 만이다.

방한 소식이 전해지자, 청와대에서는 즉각 초청의사를 밝혔다. 청와대 대변인은 박시형 대통령이 워렌 보트와 식사를 하며, 투자확대에 대한 논의를 할 거라고 언론 브리핑까지 했다.

조중일보 등의 보수언론을 중심으로 박시형 대통령과 워렌 보트의 만남을 기정사실화하며 기사를 쏟아냈다.

[박시형 대통령, 워렌 보트를 청와대로 초청!]

[임기 말에도 이어지는 비즈니스 프랜들리 행보]

[경제 대통령과 위대한 투자자의 만남!]

[글로벌 기업들의 한국투자를 늘리는 계기로 삼아야]

[워렌 보트의 투자 철학, 창조경제와 큰 틀에서 닮아 있어…….]

이래서는 마치 워렌 보트가 박시형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한국에 오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그런데 막상 기사가 나가고 나자 버크셔캐셔 측에서는 한국 언론의 보도를 부정했다.

한국에 가는 것은 업무가 아닌 휴가 목적이고, 개인적인 일정들이 있기 때문에, 청와대 초청은 매우 감사한 일이지만 다음 기회로 미루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임진용 회장과의 만남도 과거 임일권 회장과의 인연 때문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ㅋㅋ각하의 설레발에 지렸다.

-진짜 창조경제 같은 소리한다. 뉴스 창조나 그만 좀 해라.

-여론압박을 통해 만남을 성사시키려고 했나보네. 하는 짓이 너무 양아치 같아서 할 말을 잃었다.

-재벌 회장님들이라면 일정 다 취소하고서라도 청와대로 달려갔겠지만, 워렌 보트가 그럴 리 있나?

-이런 게 바로 국제망신입니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가지.

-조중일보는 쪽팔리지도 않냐? 이러니 기레기라고 욕처먹지.

하지만 이번에는 미국 언론에서 또 다른 보도가 흘러나왔다. 워렌 보트가 임진용 회장뿐 아니라 강진후를 만날 거라는 얘기였다.

-세기의 투자자들끼리의 만남인가?

-우리 각하는 까였는데!

-이제 각하는 별 볼 일 없잖아요. 강진후는 승승장구하고 있고.

-그런 말하지 마세요. 각하 서운해 하십니다.

-강진후 진짜 많이 컸네. 브렉시트 이전에는 명함도 못 내밀었었는데.

-누가 들으면 님이 키운 줄.

* * *

난 버크셔캐셔 쪽의 연락을 받았다.

전화를 끊자마자 택규가 물었다.

“뭐래?”

“같이 점심 먹자는데.”

“그냥 밥만 먹재?”

“응.”

사실 워렌 보트와 같이 점심을 먹는 건 엄청난 일이다.

그는 매년 자신과의 점심식사를 경매에 붙이고, 그 수익금을 기부한다. 작년 낙찰금액은 370만 달러.

점심 한 끼 같이 먹으며 대화를 나누는 금액이 무려 40억 원이 넘는다.

얘기를 들은 택규는 눈을 껌뻑거렸다.

“대체 뭘 먹는데 40억이야?”

“메뉴는 별 거 없어.”

“그런데 왜 그렇게 비싸?”

“인생에 대한 조언을 듣는 게 중요한 거지.”

누누이 말하지만 부자일수록 헛되게 돈을 쓰지 않는다. 대화하며 뭔가를 얻을 수 있다면, 40억이라는 돈도 아깝지 않겠지.

워렌 보트는 단지 뛰어난 투자자라는 것을 떠나서 인간적으로도 존경할 만하다.

90조에 달하는 재산이 있음에도 검소하기로 유명했다. 일반적인 부호들이 헬기착륙장과 여러 개의 수영장을 갖춘 대저택에 사는 반면, 그는 결혼해서 처음으로 산 작은 주택에서 지금까지 살고 있다. 차도 캐딜락 DTS를 10년 넘게 타고 있다.

아침은 주로 맥모닝을 먹는데, 전날 투자실적이 좋으면 팬케익이 추가된 세트메뉴를, 실적이 안 좋으면 저렴한 단품메뉴를 먹는다고 한다.

“그 많은 돈은 다 어디에 쓰고? 죽을 때 가져가나?”

“기부하겠대.”

그는 오래전부터 재산 대부분을 기부하겠다고 밝혀왔다.

일부 한국 재벌들처럼 경영권을 물려주기 위한 편법으로 기부를 이용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사회를 위해 기부하겠다는 것이다.

택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할아버지네.”

어쨌거나 남들은 40억 내고 먹는 점심을 공짜로 먹자는데 거절할 이유는 없다. 저쪽에서 만남을 청한 것인 만큼 장소,인원, 메뉴 등은 내 마음대로 정하라고 한다.

우리는 바로 옆 건물로 건너갔다.

얘기를 들은 엘리는 뛸 듯이 기뻐하며 나를 끌어안았다.

“정말요? 저도 워렌 보트를 만날 수 있는 거예요?”

“그럼요. 같이 가요.”

반면 현주 누나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나도 그날 스케줄 빼놓을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지만, 속으로 대단히 좋아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걸 굳이 말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런데 택규는 그걸 굳이 말했다.

“어! 누나 엄청 기뻐하는 것 같은데. 그렇게 좋아?”

그러자 현주 누나는 바로 인상을 썼다.

“시끄러.”


           


An Investor Who Sees The Future

An Investor Who Sees The Future

미래를 보는 투자자
Score 1.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There may be great entrepreneurs, but there are no great investors. That’s the reality of this country.”

One day, something started to appear before my eyes.
What could I possibly do with this ability?

From now on, I will reshape the global financial landsca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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