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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70

170화 돌아온 밤

170화 돌아온 밤

밤은 침묵 속에 얼어붙은 것처럼 깊고, 짙었다. 한 치 앞도 분간하기 어려운 어둠이 용병들을 감쌌다.

풀잎 사이로 빠르게 기어가는 카인의 움직임은 사슴처럼 경쾌했다. 그의 눈빛에는 전투의 긴장감이 녹아 있었다. 적의 숨소리, 마른 나뭇잎이 부딪히는 소리, 그 어떤 소음도 카인의 귀를 피해 갈 수 없었다.

한 줄기 화살이 밤하늘을 가로질렀다. 공기를 가르는 소리는 날카로웠고, 카인은 순식간에 몸을 웅크렸다. 화살은 휘파람 소리를 내며 그의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갔다.

공격! 오스카 단장의 외침과 동시에, 카인을 포함한 검은 갈기 용병들은 폭발적으로 움직였다. 강철과 강철이 부딪치는 소리, 비명과 울부짖음이 밤공기를 가득 채웠다.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를 느끼며, 카인은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가······.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니?”

루나의 목소리가 나를 머릿속에서 끌어냈다.

그녀를 돌아보며 말했다.

“떠올리고 있었어.”

“무엇을?”

“과거를. 아니, 과거에 읽었던 책의 내용을.”

“무척 재밌는 책이었나 보네? 내가 다가오는 것도 모르고 얼빠진 얼굴로 있었던 걸 보면.”

“얼빠진 얼굴 아니었거든.”

“무슨 책이었는데 그러니?”

루나가 내 곁에 앉았다. 그녀의 싱그러운 미소와 함께 바람이 들풀을 흔들었다. 루나는 매일 훈련을 마치면 트리스탄에게 대련을 요구해 그간의 울분을 풀었다. 트리스탄은 더 이상 루나에게 으스대지 않는다. 도망치기 바쁘다.

세실은 케일라를 피해 달아났다. 그래서 나는 홀로 언덕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궁금해. 나한테도 이야기해 주면 안 돼?”

오늘은 트리스탄을 두들겨 패지 않은 모양이다. 이렇게 금세 나를 찾아온 것을 보니.

루나가 기대하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다시 웃는다. 그녀의 저런 모습은 나의 목적을 흐릿하게 한다. 내가 웹소설 무한회귀의 내용을 떠올리는 행위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다.

나는 이 세계를 픽션으로 인지하려 한다.

아스트레아의 천칭을 되돌리기 위해.

“듣고 싶어?”

“응.”

“많이 긴 내용인데.”

“오늘 다 못하면 내일 이어서 들려주면 되잖아.”

“트리스탄 때리는 일은 그만둔 거야?”

“때, 때리긴! 검술 대련하다가 그런 거잖아!”

“필요 이상으로 감정이 실려 있던데? 게다가 트리스탄이 항복한 뒤에도 목검을 휘둘렀고.”

“무슨 소리야! 나는 그런 적 없······!”

항변하던 루나가 돌연 입을 다물었다.

고개 숙인 그녀의 귀가 새빨갛게 변했다. 깨달은 모양이다. 자신이 얼마 전의 쿠훌린과 똑같이 말하고 있다는 것을.

“······이, 일부러 따라 한 거 아니거든.”

“알아.”

“네가 어떻게 아니?”

“굳이 따라 하지 않아도 너는 쿠훌린과 똑 닮았으니까.”

“아니거든!”

벌떡 일어난 루나가 목검을 뽑아 들었다.

“덤벼! 오늘은 트리스탄 대신 너야!”

.

.

.

식당에서 마주친 쿠훌린이 나를 보며 낄낄 웃었다.

“누구에게 그렇게 얻어터진 거냐 데미안! 뭐? 루나라고? 으하하하하! 우리 큰 공주가 아주 야무지게도 두들겼군!”

당연한 말이지만 나와 루나의 검술 격차는 더욱 벌어졌다. 루나는 아르카넘 홀에서 검술학부를 다녔고, 나는 마법학부를 다녔으니까.

“데미안. 괜찮아?”

세실이 걱정하는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나는 괜찮다고 했다.

루나가 나를 보며 히죽히죽 웃었다. 얄미운 표정이 쿠훌린과 쌍둥이처럼 똑같다.

“쿠훌린.”

“할 말이 있는 거냐? 세실리아.”

“은월호의 출항일. 알고 싶어요.”

세실은 이전보다 말을 적게 더듬는다. 카인이 떠나고 세실이 돌아온 그날 시작된 놀라운 변화였다. 말하는 속도도 빨라졌다. 아니, 빨라졌다기보다는 덜 느려졌다는 표현이 정확하겠지.

그런데 출항일은 왜?

“세, 세실리아. 왜 그런 걸 물어?”

루나가 불안한 얼굴로 대화에 끼어들었다. 세실이 떠날까 봐 걱정하는 거겠지.

그러나 나의 생각은 달랐다. 만약 그녀가 섬을 떠날 생각이었다면 내게 말하지 않았을 리 없으니까.

“대륙으로 돌아가고 싶은 거냐? 세실리아.”

“······네.”

뭐라고?

“왜, 왜 대륙으로 돌아가려는 거야? 나랑 데미안도 여기 있는데? 미, 미안해 세실리아! 혹시 내가 서운하게 한 게 있다면······!”

쿠훌린이 손을 들어 루나의 말을 막았다.

세실이 주저하듯 입을 열었다.

“찾고 싶은 게. 있어서······.”

나는 고개 숙인 세실의 어깨가 바르르 떨리는 것을 봤다.

“아버지. 유품······.”

***

식사를 마친 세실은 방으로 올라왔다.

쿠훌린은 스카자하와 은월호의 출항 일정을 조율해 보겠다며, 원하는 날짜가 있으면 말해보라고 했다. 그러나 세실은 대답하지 못했다. 언제 떠나야 할지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세실은 두려웠다.

‘나.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안절부절못하던 루나의 얼굴이 떠올랐다. 세실은 루나의 마음을 이해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만 쿠훌린은 아직 회복되지 않았다. 세실은 지금도 밤마다 대나무 숲에서 쿠훌린과 대련했고, 쿠훌린은 달을 보며 종종 슬픈 표정을 지었다.

루나도 쿠훌린의 상태를 알 것이다. 루나는 누구보다 쿠훌린을 닮은, 그의 딸이니까. 그래서 선뜻 함께하겠다고 말할 수 없었겠지. 데미안 역시도.

‘기대해서는 안 돼. 이건 내 일이야. 나 스스로 결정한 일이야.’

하지만 혼자서 잘 해낼 수 있을까.

나 같은 게.

지금까지 나는 타인의 그림자만 쫓아왔는데.

‘꼭두각시에게는 제 의지가 없지. 그저 주인의 손길에 따라 움직이는 하등 존재일 뿐.’

네몬의 목소리가 머리를 울렸다. 세실은 더욱 두려워졌다. 지금이라도 쿠훌린에게 말해야 할까. 아까 한 말은 진심이 아니었다고. 섬을 떠나지 않겠다고.

아니야. 나는 영원히 섬을 떠나려는 게 아니야. 아버지의 유품을 되찾으면 돌아올 거야. 반드시.

‘그런데 재미있는 점이 무엇인지 아나? 그 생활을 오래 지속할수록 꼭두각시는 저도 모르는 사이 희망을 품게 된다는 거야. 마치 제 의지로 팔과 다리를 움직일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지는 거지. 주인이 손을 놓으면, 그 즉시 허물어지고 만다는 사실을 까맣게 망각하고서.’

돌연 다리에 힘이 풀린 세실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마치 망가진 꼭두각시처럼.

세실은 제 어깨를 두 손으로 끌어안았다. 신중하게 생각하고 내린 결정이다. 그러나 막상 모두의 앞에서 말로 내뱉자, 그리고 방에 올라와 혼자가 되자 해일처럼 공포심이 밀려들었다.

‘모든 인간은 팔다리에 보이지 않는 실을 매달고 살아가지.’

세실은 고개를 흔들어 네몬의 목소리를 떨쳐냈다. 지금 생각해야 할 것은 그자에 대한 것이 아니다.

‘이제 네 것이다. 다만 착용하지는 말고, 항상 몸에 지니고 있거라.’

그토록 증오하던 아버지였다.

하지만 세실은 지금,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돌이켜 보면 아버지가 늘 세실에게 혹독하게 대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했어. 생각하고 싶은 것만 생각했어. 어린아이처럼.

‘우리는 이제 어린아이가 아니잖아.’

세실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다리에 힘을 주며 일어섰다.

그래. 나는 이제 어린아이가 아니야.

‘자신의 미래는 스스로 결정하는 거야.’

나는 나의 길을 걷고 있어. 카인.

***

밤하늘에는 달과 별이 떠 있었다.

나는 침대에 누워 방의 고요함에 몸을 맡겼다. 바람이 창문을 흔들며 은은한 소음을 만들었고, 그 소리가 나를 더욱 깊은 사색에 잠기게 했다.

‘아버지. 유품······.’

세실의 말이 머리를 맴돈다.

나는 세실이 찾는 유품이라는 게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아지드의 망토.’

모르가나의 마법진에서 일루산은 내게 그에 관한 말을 한 적이 있다. 조금 의외였고, 그래서 기억에서 잊혔던 이야기. 그도 그럴 것이 그림자 망토는 블레오파드가 영력을 처음 익힐 때 사용하는 기초 훈련 장비니까.

다른 그림자 망토와는 다른 건가? 그럴 가능성은 충분하다. 일루산이 굳이 그 망토를 세실에게 준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세실이 그런 이야기를 꺼낼 줄은 몰랐어.’

세실이 무언가를 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세실은 늘 나를 포함한 주변인의 결정에 따라 움직였다. 간혹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었지만, 그마저도 결국은 동료를 위한 것이었다.

그런 세실이 섬을 떠나겠다고 한다. 아버지의 유품을 찾기 위해.

아무래도 세실에게 큰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것 같다. 빌어먹을. 궁금하다. 그날, 은월호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정확히 그때부터 말투가 변한 것도 의아하고.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니?”

지척에서 들려온 목소리. 나는 흠칫 놀라 몸을 일으켰다. 처음에는 루나인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나를 향해 고개를 기울이며 웃는 그녀는, 디네베였다.

“서운해라. 벌써 나를 잊은 거니?”

“······잊지 않았어.”

창밖에는 보름달이 떠 있었다.

한동안 그녀가 나타나지 않아 신경 쓰지 않았다.

“오랜만이야 데미안. 보고 싶었어.”

디네베가 나를 끌어안았다.

나는 어떤 위화감을 느꼈다.

“······너는 지금 신녀가 맞아?”

“응. 나는 지금 신녀야.”

“그런데 왜.”

말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녀의 분위기는 지금까지 내가 알던 신녀와는 다소 달랐다.

“네가 알던 모습이 나의 전부였다고 생각하니?”

그런 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을 감안하고서라도 지금의 디네베는 무언가 이상했다.

“흐응. 눈치챈 거로구나.”

디네베의 말투가 변했다.

“이 아이가 나를 불러냈단다.”

“디네베가, 너를?”

“지금까지는 내가 디네베의 몸을 빌려 너를 찾아왔었다. 한데 오늘은 이 아이가 나를 불러내더구나. 그것도 아주 강한 의지로.”

그녀의 눈이 매혹적인 웃음을 머금었다.

“그 이유를 알겠니? 데미안.”

‘여자의 말과 행동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야.’

“지난번에 말하지 않았니? 이 아이는 너에게 연모의 감정을 품고 있다고.”

‘그때 디네베는 데미안, 네가 자신의 몸을 치유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무의식중에 내게 도움을 청했고, 너의 기억 일부를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견딜 수 없이 부끄러웠던 게지. 자신도 모르는 새 연모의 감정을 품고 있던 이에게 알몸을 내보이는 것은.’

“그런 네가 다시 섬을 떠날 것 같아지자, 이 아이는 몹시 불안했단다. 하지만 너에게 직접 물을 용기는 나지 않았지. 그래서 이전처럼 내게 도움을 청했다. 달라진 점은 그때는 무의식중에 벌어진 일이었지만, 오늘은 이 아이가 의식적으로 벌인 일이라는 거겠지.”

이제 디네베는 자신이 신녀라는 것을 안다.

또한 디네베는 자신이 신녀로서 행동했던 일을 어렴풋이나마 기억하고 있다.

“놀랍더구나. 동굴 속에 숨어있던 나를 불러낼 정도로 이 아이의 신력이 강해졌다는 것이니까.”

“동굴이라고?”

“오랜만에 너를 만나 무척 반갑지만, 솔직히 아직은 동굴에서 나오고 싶지 않았다. 나에게는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으니까.”

나는 그녀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물끄러미 나를 보던 그녀가 입술을 떼었다.

“에스틸리아가 다녀갔더구나.”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Status: Ongoing
The protagonist, an infinite regressor, found himself possessed within a novel where the original protagonist had gone mad and turned dark. Now, with my unique abilities, I must write a new ending for the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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