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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71

171화 세계수와 신녀 (1)

171화 세계수와 신녀 (1)

에스틸리아.

내가 신녀를 만나고 싶었던 이유 중 하나다.

그에 대해 그녀가 먼저 말을 꺼냈다.

“마지막 순혈의 아이. 하지만 그 아이는 신녀의 의무를 저버렸어.”

“의무를 저버렸다고?”

“궁금하니? 에스틸리아가 싫어할지도 모르는데? 너는 알고 있잖니. 그 아이가 얼마나 대단한 힘을 지녔는지.”

내 목을 움켜쥐던 에스틸리아의 눈빛을 떠올리자 절로 식은땀이 흘렀다.

잠시 고민하던 내가 입을 열었다.

“내가 비밀로 하면 되잖아.”

“그건 불가능해.”

“왜?”

“에스틸리아는 네 감정의 움직임을 읽을 수 있으니까.”

‘네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거 같아서 놀랐니?’

“에스틸리아가 모르게 하려면 영원히 그녀를 만나지 말아야 할걸? 그래도 괜찮아? 너는 그녀를 사랑하잖니.”

“무슨 말도 안 되는.”

“남녀 간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야.”

디네베가 나를 향해 웃었다.

“에스틸리아는 나의 동굴 속 친구였어.”

동굴.

무슨 의미일까.

“조금 전에도 말했듯 에스틸리아는 은월섬의 마지막 순혈이었어. 이것이 무얼 의미하는지 알겠니?”

“······에스틸리아는 무조건 신녀가 되어야 할 운명이었다.”

“맞아. 에스틸리아는 태어날 때부터 신녀의 운명을 부여받았어. 그녀의 어머니는 에스틸리아를 낳다가 세상을 떠났고, 당시의 신녀는 더 이상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나이였지. 게다가 에스틸리아의 아버지는 아내의 죽음을 견디지 못해 시름시름 앓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어.”

에스틸리아는 은월섬의 마지막 순혈이자, 고아였다.

“섬사람들은 덜컥 겁이 났어. 노쇠한 신녀는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아 보였고, 다음 신녀로 내정된 순혈은 너무 어렸으니까. 게다가 그들은 섬의 탄생 배경을 알고 있었기에 더욱 두려웠어. 만약 신녀가 존재하지 않는 공백기가 생긴다면 섬은 어떻게 될까. 세계수가 더는 이 섬을 지켜주지 않는 것이 아닐까. 섬이 바닷속으로 가라앉지는 않을까.”

“그에 대한 답은 당시의 신녀가 알지 않았어?”

“신녀라고 모든 것을 아는 건 아니야. 하지만 당시 그녀의 눈에는 섬이 가라앉는 미래는 보이지 않았어. 그래서 섬사람들을 설득했지. 처음에는 그들도 납득하는 듯 보였어. 하지만 한 번 발생한 불안의 불씨는 쉬이 꺼지지 않았고, 불안은 의심을 낳았어. 순혈을 향한 섬사람들의 신앙이 흔들리기 시작한 거야.”

나의 귓속으로 여러 사람이 웅성거리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결국 그들은 어린 에스틸리아를 가두어 버렸어.”

“뭐라고?”

“그들은 에스틸리아가 신력을 이어받기 전에 덜컥 죽기라도 할까 봐 겁이 났어. 물론 모든 섬사람이 그 결정에 찬동한 것은 아니었어. 반대하는 이도 있었지. 하지만 섬의 존속이라는 명분 앞에 그들도 암묵적 동의에 이르렀어. 그 결과로 에스틸리아는 쇠창살이 끼워진 동굴에서 지냈어. 아주 오랫동안.”

디네베의 눈은 슬퍼 보였다.

“에스틸리아는 영문도 모른 채 그 안에 있었어. 그녀의 세상은 그 자그만 동굴과, 창살 밖의 조각난 풍경이 전부였지.”

“신녀는 왜 그것을 방치한 거지?”

“당시의 섬은 광기에 휩싸여 있었어. 신녀는 통치자의 자리에서 내려왔고, 섬사람들의 감시를 받았지. 더욱이 신녀는 그들에게 저항할 여력이 없었어. 그녀는 기력의 소모를 극도로 줄여야 했지. 마치 식물처럼. 에스틸리아가 성년이 될 때까지 제 수명을 억지로 늘려 신력을 간직해야 했으니까.”

디네베의 눈빛이 변했다.

“그러던 중, 신녀도 예측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어.”

그 말에 나는 이상하게 가슴이 뛰었다.

“에스틸리아의 몸이 성장을 멈추게 된 거야.”

“성장이······ 멈춰?”

“신녀는 까닭을 찾기 위해 노력했어. 게다가 언젠가부터 그녀는 세계수와 소통하는 일에 어려움을 느꼈지. 처음에는 노쇠한 육체 때문이라고 여겼지만, 어쩌면 에스틸리아의 변화와 관련이 있으리라 생각한 신녀는 섬사람들을 다그쳐 동굴을 찾았어. 그리고 발견한 거야. 동굴의 깊은 어둠 속에 돋아난 새하얀 빛. 신녀에게는 매우 익숙했던 그 빛은 바로, 세계수의 뿌리였어.”

‘나는 늙지 않아.’

“놀랍게도 에스틸리아는 신녀가 아닌데도 세계수와 교감하고 있었어. 세계수 또한 뿌리의 일부를 뻗어 그녀의 의지에 답했지. 신녀가 자신의 수명을 연장하며 오직 신력의 갈무리에만 집중하는 동안 세계수는 제 갈 길을 찾아낸 거야. 게다가 에스틸리아는 세계수의 기억 속 ‘일부’에 큰 관심을 보였고,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어.”

내 눈이 부릅떠졌다.

“설마 그 일부라는 건······!”

“그래. 네 생각이 맞아 데미안. 에스틸리아는 세계수의 기억을 통해 마법을 발견했고, 스스로 깨쳤어. 사실 동굴 속의 에스틸리아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것뿐이었지. 세계수와 교감하고, 그 안의 기억과 의지를 탐색하고, 습득하는.”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에스틸리아가 그토록 강력한 마법사가 될 수 있었던 이유.

기척을 느낄 수 없었던 이유.

디네베의 모습을 보았던 이유.

모두 그녀가 세계수의 힘을 지녔기 때문이었다.

‘데미안 시니야카. 축제가 끝난 뒤 치유실에 기이한 기운이 떠돌고 있었습니다. 마력임에는 분명하지만, 미묘하게 다른.’

나를 향해 피식 웃던 그녀의 얼굴.

‘염려 마시길. 마력의 흔적은 말끔히 지워두었으니.’

“에스틸리아는 소서러인 거야?”

“아니. 에스틸리아는 소서러가 아니야. 하지만 평범한 마법사도 아니지. 그녀가 익힌 마법은 과거의 마법이니까.”

과거의 마법.

“비츠크 산맥 너머를 떠올리는구나?”

“부서진 땅에 대해 알아?”

“나는 알지 못해. 라바다에게 들었듯, 우리의 기억은 훼손됐으니까. 하지만 나는 너와 브류나크를 통해 그곳을 보고 있어. 희미한 그리움을 느끼고 있어.”

디네베가 내 곁에 앉았다.

그녀의 손 위에는 먼지가 혀를 날름대며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내 머릿속에 무언가가 떠올랐다.

‘에스틸리아는 나의 동굴 속 친구였어.’

“잠깐. 설마 그 동굴 속에 돋아난 세계수의 뿌리라는 게······.”

디네베가 나를 보며 웃었다.

“맞아. 동굴 속 에스틸리아에게 다가간 세계수의 뿌리가 바로 나야. 물론 지금의 나와는 다른 존재지. 세계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의지가 결합해 탄생한 복합체니까. 나조차도, 아니 우리조차도 세계수의 근원에 대해 알지 못해. 우리는 기억의 일부만을 인지하고, 이어갈 뿐이야.”

‘섬에 몇 해 동안 신녀가 등장하지 않았다고 해서 의아했는데, 그 안에 숨어 있었니?’

그랬던 거였다.

에스틸리아는 그때, 디네베의 몸 안에서 자신의 친구였던 세계수의 뿌리를 발견했다.

“에스틸리아는 왜 신녀가 되지 않은 거지? 아니, 그녀는 이미 신녀였던 것이 아니야?”

내 의문은 타당했다.

동굴 속의 에스틸리아는 세계수와 교감했다.

신녀는 세계수 이그드라실과 교감하는 자.

나의 지식대로라면 에스틸리아는 의심할 것 없는 신녀다.

“에스틸리아는 신녀가 아니야. 아까도 말했듯, 그녀는 신녀의 의무를 저버렸거든.”

“뭐지? 그 의무라는 건.”

“신녀는 섬을 떠날 수 없어.”

디네베가 나를 보며 슬픈 미소를 지었다.

“세계수의 의지는 이 섬에 한정되어 있어. 따라서 신녀는 섬을 떠날 수 없어. 신력은 섬 안에서만 유효한 힘이니까. 디네베도 마찬가지야. 신체로서 터무니없이 높은 잠재력을 지닌 이 아이는 그만큼 오랜 시간을 신녀로 살아가겠지. 이 자그만 섬에 갇혀서. 가엾게도.”

나는 충격을 받았다.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세계수와 신녀의 이야기.

평화로워 보이기만 했던 은월섬에 그런 광기로 가득했던 시절이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섬의 통치자였던 신녀를 끌어내리고, 게다가 어린 에스틸리아를 동굴에 가두었다니.

“고인 물은 결국 썩는 법이니까.”

내 머릿속을 읽은 것처럼 디네베가 속삭였다.

“에스틸리아가 섬을 떠난 이유가 뭐지?”

물으면서도 나는 스스로를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평생을 동굴 속에 갇혀 지냈던 사람이 섬에 좋은 기억이 있을 리 없는데.

“네 생각과 달라 데미안. 당시의 에스틸리아는 섬을 싫어하지 않았어.”

“말도 안 돼. 어떻게 그럴 수가.”

“에스틸리아에게는 그 어두운 동굴과 세계수의 기억만이 자신이 살아갈 곳이었으니까. 처음부터 가진 게 없었던 자는 빈곤을 느낄 수 없는 법이야. 에스틸리아가 그랬지. 그래서 그렇게 대단한 마법 실력을 갖추고도 동굴을 벗어나지 않았어. 자그만 속삭임 한 번이면 그런 창살쯤은 날려버릴 수 있었는데도.”

나는 에스틸리아에게 연민을 느꼈다.

“동굴 속의 에스틸리아가 세계수와 교감하는 광경을 본 당시의 신녀는 혼란스러웠어. 지금껏 성년이 되기 전에 세계수와 교감한 이는 아무도 없었으니까. 더욱이 그녀의 눈에 비친 에스틸리아는 이미 절반쯤은 신녀였어. 한 시대에 두 명의 신녀가 나타나다니. 그야말로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 벌어진 거야.”

“에스틸리아는 완전한 신녀가 아니었다면서.”

“맞아. 그래서 엄밀히 말하면 두 명의 신녀라는 말에는 어폐가 있어. 그런데 신녀는 이후 더욱 무서운 사실을 깨달았어. 에스틸리아뿐만 아니라, 억지로 수명을 연장해 오직 신력의 보존만을 강구했던 자신 역시 반쪽짜리 신녀가 되어버렸다는 것을 말이야.”

디네베의 시선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그렇게 무언가가 꼬여버렸어. 두 명의 신녀. 그렇지만 누구 하나 완전하지 않은 반쪽짜리. 섬사람들의 공포심은 극에 달했어. 그들은 신녀를 닦달하며 해결책을 요구했지.”

이제 와서 해결책을 요구한다니.

나는 그들에게 분노를 느꼈다.

“하지만 신녀도 알 수 없었어. 게다가 그녀는 섬의 누구보다도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지. 성년이 되기 전에 성장이 멈춘 에스틸리아. 세계수의 영향 때문이라는 것은 분명했지만 정확한 원인도, 해결책도 알 수 없었어. 당시의 신녀는 미성숙한 채로 시간이 멈추어버린 에스틸리아에게 완전한 신력이 넘어가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했어. 지금까지의 신녀가 모두 성년이었다는 것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으리라고 생각한 거야. 그래서 그녀는 에스틸리아의 성장을 기다리며 악착같이 자신의 수명을 연장했어.”

“수명을 연장한다니. 그런 일이 정말로 가능한 거야?”

“순혈의 신녀는 세계수 이그드라실과 가장 가까운 존재니까. 하지만 아무리 순혈의 신녀라도 영원히 살 수는 없어. 그녀의 시간은 멈춘 것이 아니니까. 해가 갈수록 신녀는 늙어갔어. 마치 그에 대한 반발처럼 에스틸리아는 나이를 먹지 않았지. 신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 것인지.”

어느새 나의 눈앞에는 동굴 속의 늙지 않는 소녀와, 고목처럼 말라가는 신녀의 모습이 번갈아 그려지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신녀는 자신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어. 그즈음 흰 새가 날아와 알려주었지. 섬을 향해 다가오는 배가 있다는 것을. 오래전 세계수의 의지를 받아 대륙의 어느 동굴 속에 감춰두었던 그 배에는 아르테미스의 후손이 타고 있었어. 머지않은 훗날 에스틸리아에게 동굴 밖의 세계를 알려주는 사내. 망국의 왕자, 쿠훌린 아르테미스가.”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Status: Ongoing
The protagonist, an infinite regressor, found himself possessed within a novel where the original protagonist had gone mad and turned dark. Now, with my unique abilities, I must write a new ending for the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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