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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72

172화 세계수와 신녀 (2)

172화 세계수와 신녀 (2)

디네베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가자.”

“어디를?”

그녀가 싱긋 웃으며 나를 잡아끌었다. 익숙한 감각. 몇 초, 혹은 몇 분의 시간이 흐른 듯하더니, 나는 은빛 늑대로 변한 먼지를 타고 들판을 달리고 있었다.

“우리는 에스틸리아의 기억을 엿볼 거야.”

대답할 틈도 없이 나는 새하얀 빛의 장막을 통과했다. 어두운 동굴이다. 시야의 끝으로 검푸른 밤하늘과 보름달이 보였다.

‘누구?’

속삭임이 들린 순간, 나는 꿀꺽 침을 삼켰다.

어투는 다르지만 분명했다.

에스틸리아.

‘너는. 누구?’

너를 만나러 왔어. 디네베가 답했다.

잠시 후, 동굴의 어둠을 뚫고 긴 은백색 머리카락의 소녀가 우리 앞에 나타났다.

‘어디? 보이지 않아.’

이쪽이야. 디네베의 속삭임에 소녀는 우리를 지나 더욱 깊은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나는 홀린 듯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러면서 깨달았다. 조금 전까지 내 옆에 있던 디네베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이게. 너?’

소녀는 지면을 뚫고 솟아난 새하얀 뿌리를 발견했다.

‘응. 그게 나야. 네 이름은 뭐니?’

‘에스틸리아.’

‘반가워 에스틸리아. 나는 너를 만나러 왔어.’

‘네 이름은?’

‘이그드라실.’

에스틸리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해.’

‘무엇이?’

‘내 이름. 에스틸리아 이그드라실.’

나는 에스틸리아의 말투가 세실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무표정한 얼굴도.

뿌리의 키가 점점 자라났다. 에스틸리아의 고개도 점점 들어 올려졌다. 뿌리의 끝이 에스틸리아를 가리키며 속삭였다.

‘에스틸리아.’

이어 자신을 가리켰다.

‘이그드라실.’

그러고는 부드럽게 그녀의 몸을 휘감았다.

‘에스틸리아 이그드라실.’

이후 에스틸리아는 뿌리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하나가 된 것처럼.

나는 시간의 흐름을 느꼈다. 동굴 밖이 밝아지고, 어두워진다. 그것이 반복되며 에스틸리아의 몸이 조금씩 성장한다.

‘누구?’

나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에스틸리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나를 보고 있었다.

‘너는. 누구?’

그녀가 내 볼을 쓰다듬었다.

‘예쁜. 금발.’

느릿느릿 다가온 뿌리가 에스틸리아의 몸을 휘감고, 자신의 곁으로 데려갔다. 에스틸리아가 나를 가리키며 무어라 말했다.

‘그와 너무 많은 대화를 하면 안 돼. 에스틸리아.’

‘왜?’

‘그와 너의 시간선은 어긋나 있으니까. 하지만 아쉬워하지는 말렴. 너는 그를 다시 만나게 될 테니까.’

‘다시. 만나······.’

에스틸리아의 목소리가 풀어지듯 사라졌다. 나는 재차 시간의 흐름을 느꼈다. 에스틸리아는 더 이상 성장하지 않는다.

은백색 머리칼의 노파가 동굴을 찾아왔다. 그녀는 에스틸리아를 보고 격렬하게 몸을 떨었고, 다른 이들의 부축을 받으며 돌아갔다.

‘너는. 누구?’

시간이 흐른다.

‘예쁜. 금발.’

계속 흐른다.

‘저, 정말로 갈 거야 쿠훌린? 저 안에는 미친 여자가 있다고 어른들이 그랬단 말이야.’

동굴 밖에서 들리는 사내아이의 목소리.

‘겁나면 돌아가 벨락. 나는 내 눈으로 직접 본 것이 아니면 믿지 않아.’

반항기 가득한 표정의 은발 꼬마가 쇠창살 너머로 보인다. 겁에 질린 흑발 꼬마도.

‘금발. 아니야.’

창살 밖으로 손을 내민 에스틸리아가 은발 꼬마의 볼을 쓰다듬었다.

‘쿠, 쿠훌린! 달아나자!’

‘가만히 있어 벨락. 이봐. 너는 왜 여기에 있어? 너는 정말로 미친 여자야?’

에스틸리아가 고개를 갸웃한다.

‘나는. 에스틸리아 이그드라실.’

‘뭐야 그 낯간지러운 이름은. 좋아. 앞으로 나는 너를 에스티라고 부를 거야. 알겠어? 에스티.’

두 꼬마가 증발하듯 사라지고, 다시 나타난다.

은발 꼬마는 단단히 화가 난 것 같다.

‘빌어먹을. 아무리 물어도 너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지 않아. 에스티. 너는 왜 이곳에 갇혀 있어? 답답하지 않은 거야?’

에스틸리아는 고개만 갸웃할 뿐이다.

이후에도 두 소년은 계속 동굴을 찾았다. 그들은 점점 키가 자랐다. 흑발 소년은 이제 에스틸리아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뭐 해?’

‘너를 거기서 꺼낼 거야. 에스티.’

‘왜?’

‘이건 잘못된 거야. 섬을 지킨다는 근거 없는 명목으로 죄 없는 사람을 가두다니. 나는 절대로 납득할 수 없어. 물러서. 에스티.’

두 소년이 서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손에 든 도끼와 망치로 창살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에스틸리아는 겁먹은 아이처럼 머리를 감싸쥔 채 동굴 구석에서 떨었다.

‘내 손을 잡아. 에스티.’

창살을 부수고 들어온 은발 소년이 에스틸리아에게 손을 내민다.

‘너에게 동굴 밖의 세계를 보여줄게.’

에스틸리아는 주저하며 동굴의 어둠을 응시한다. 새하얀 친구가 어둠 속에서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의 손이 쿠훌린의 손을 잡는다.

‘시끄러워! 당신들의 말 따위는 듣고 싶지 않아!’

쿠훌린이 늑대처럼 으르렁댔다.

풍경이 바뀌어, 세 사람은 마을의 어른들과 대치하고 있다.

‘뭐 하는 짓이냐! 쿠훌린!’

‘빌어먹을 마녀 교관! 물러서! 에스티는 우리와 함께 마을에서 살 거야!’

덩치 큰 어른들이 쿠훌린과 벨락을 제압했다. 마을의 꼬마들이 울음을 터뜨린다. 그 안에는 라이칸과 엘리샤도 있다.

‘아······!’

당황해하던 에스틸리아도 어른들의 손에 붙잡혔다. 겁에 질린 얼굴이다. 에스티! 몸부림치던 쿠훌린이 어른들의 손에서 벗어나 그녀에게 달린다. 그러나 스카자하에게 제압돼 쓰러진다.

입에서 피를 흘리는 쿠훌린을 보며 에스틸리아가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입술에서 잡음의 파동이 인다.

이어, 폭발한다.

‘이게······ 무슨······!’

폐허처럼 변한 마을을 보며 스카자하는 얼빠진 얼굴로 내뱉었다. 놀랍게도 다친 사람은 없다.

에스틸리아가 그녀에게 다가갔다. 스카자하는 검을 뽑아 들지만, 에스틸리아는 그것을 무시하며 쿠훌린을 끌어안았다.

다시 풍경이 변한다.

‘우선 제대로 말을 배워야 해 에스티. 그래야 마을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어.’

‘소통?’

‘자, 따라 해 봐. 미남.’

‘미남?’

‘나 같은 사람을 말하는 거야. 알겠어?’

에스틸리아는 마을의 어느 구석진 집에서 살고 있다.

그녀는 여전히 몸이 자라지 않는다.

나는 그녀의 표정과 말투가 변하는 것으로 시간의 흐름을 느낀다.

‘무슨 일 있어? 에스티.’

쿠훌린과 벨락은 에스틸리아와 키가 비슷해졌다.

‘라이칸이 나더러 미친 여자라고 했어.’

‘뭐라고? 그래서 너는 뭐라고 했어.’

‘아무 말도 안 했어.’

‘내가 말했잖아 에스티. 누가 너에게 그런 소리를 하면 화내야 한다고.’

벨락에게 끌려온 라이칸이 울며 사과한다.

‘알겠지? 에스티. 누구도 너를 함부로 대하게 두어서는 안 돼. 자기 자신은 스스로 지키는 거야.’

계절이 바뀐다.

‘왜 그렇게 우니? 엘리샤.’

‘흐어엉······! 라이칸이······ 라이칸이 자꾸 괴롭혀서······!’

‘흐응. 그래? 왜 그러는 건지는 생각해 봤니?’

‘흐어어어엉······!’

엉엉 울며 하소연하는 엘리샤의 머리를 에스틸리아가 쓰다듬는다.

‘울지 마 엘리샤. 내가 좋은 걸 가르쳐 줄게.’

다시 계절이 바뀐다.

‘스승님! 스승님! 제가 라이칸을 혼내줬어요! 라이칸이 엉엉 울며 항복했다고요!’

신이 난 엘리샤를 보며 에스틸리아가 웃는다.

‘얼간이 엘리샤. 요즘 쿠훌린은 뭐 하니? 못 본 지 오래되었어.’

‘쿠훌린이요?’

‘머리를 염색한 일로 아직 화가 난 걸까?’

‘쿠훌린은 매일 스카자하에게 훈련받고 있어요! 벨락도요!’

‘내 이야기를 하지는 않니?’

‘잘 모르겠어요. 저도 멀리서만 봐서.’

‘쿠훌린에게 넌지시 말해 봐.’

‘뭐라고요?’

에스틸리아의 볼이 붉어진다.

‘에스티······, 아니 에스틸리아가 조금 쓸쓸해하는 것 같다고.’

‘스승님 쓸쓸해요? 그럼 제가 놀아드릴게요! 울보 라이칸도 데려올까요? 걔 요즘 제 말이라면 꼼짝도 못 하······!’

‘얼간이 엘리샤. 오늘의 마법 수업은 무척 괴로울 거야.’

‘히익! 잘못했어요 스승님!’

눈이 내린다.

‘쿠훌린은 요즘도 바쁘니?’

‘······요새는 쿠훌린에게 말도 못 붙이겠어요.’

‘왜?’

‘항상 불만에 가득 찬 얼굴로 으르렁댄단 말이에요. 괜히 행패 부리고.’

‘쿠훌린은 원래 그랬잖니.’

‘아니에요! 전보다 훨씬 심해졌어요! 다들 쿠훌린을 피해 다닌다고요! 엄마 말로는 사춘기가 찾아와서 그런 거래요.’

‘사춘기? 그게 누군데?’

‘누구인지는 저도 모르겠어요.’

에스틸리아가 마을의 대로를 걷는다. 그녀를 두려워하는 사람도, 반기는 사람도 있다.

그녀는 신경 쓰지 않고 당당하게 걷는다.

‘쿠훌린.’

‘뭐야. 에스틸리아.’

그의 냉담한 반응에 에스틸리아는 당황한다.

쿠훌린은 이제 에스틸리아가 한참은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커졌다.

‘누가 찾아왔다고 들었어.’

‘누구.’

‘사춘기.’

쿠훌린의 얼굴이 와락, 찌푸려졌다.

‘그런 재미없는 장난이나 치려고 온 거야? 에스틸리아.’

‘왜 에스티라고 불러주지 않니?’

‘그런 건 어릴 때나 부르는 이름이야.’

에스틸리아의 눈이 살짝 커진다.

쿠훌린의 시선이 그녀를 피해 땅을 향한다.

그가 미안해하고 있다는 것이 내 눈에는 보인다.

‘곤란한 일이 있으면 도울게 쿠훌린. 네가 나를 도왔던 것처럼.’

‘너는 도울 수 없는 일이야.’

‘무슨 일인데? 내가 그를 만나볼까?’

‘그라니.’

‘사춘기.’

‘장난치지 마!’

쿠훌린이 얼굴이 일그러졌다.

‘나는 이 섬이 지긋지긋해. 온몸이 근질거려 참을 수가 없다고. 내가 왜 여기 갇혀 있어야 하는 거지? 이런 코딱지만 한 섬에서! 나의 진짜 세계는 저 밖에 있는데!’

에스틸리아는 바르르 어깨를 떨었다.

‘나에게 동굴 밖의 세계를 보여준 건 너야. 이 섬이 우리의 세계잖아. 너와 나의 세계잖아. 그래. 내가 그를 만나볼게. 분명 그가. 너를 부추겼을 거야. 그. 사춘기라는 자가.’

‘그만해! 한 번 더 그런 말장난을 하면 아무리 너라도 가만두지 않아! 에스틸리아. 네가 어떻게 나를 도울 수 있다는 거지? 내가 아니었으면 아직도 그 시커먼 동굴 속에서 벌레처럼 기어다니고 있었을 네가! 여전히 마을 사람들에게 미친 여자라고 불렸을 네가!’

‘나는 미친 여자가 아니야. 나. 화낼 거야. 네가 가르쳐줬잖아. 누가 그런 소리를 하면. 화내야 한다고. 누구도 나를 함부로 대하게 두어서는. 안 된다고.’

‘마음대로 해! 다시는 나를 찾아오지 마! 처음부터 너를 그곳에서 꺼내지 말았어야 했어! 동굴 속의 미친 여자!’

집으로 돌아온 에스틸리아는 엉엉 울었다.

그리고 다시는 집 밖을 벗어나지 않았다.

눈이 멎고, 꽃이 핀다.

‘스승님!’

이제 그녀를 찾는 이는 엘리샤뿐이다.

‘스승님! 달아나야 해요! 어른들이 말하는 걸 들었어요! 신녀라는 사람이 곧 죽을 거래요!’

‘······신녀?’

‘다음 차례는 스승님이라고 했어요! 스승님을 감시해야 한다고 했어요! 빨리요! 스카자하가 곧 사람들을 이끌고 올 거예요!’

‘······마음대로 하라고 해.’

‘이잇, 빨리요! 빨리요!’

엘리샤가 에스틸리아의 손을 잡아끌었다.

‘얼간이 엘리샤. 나를 내버려둬.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으니까.’

‘얼간이는 스승님이에요! 빨리요! 달아나려면 오늘뿐이에요! 쿠훌린도 오늘밤 섬을 떠날 거라고요!’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Status: Ongoing
The protagonist, an infinite regressor, found himself possessed within a novel where the original protagonist had gone mad and turned dark. Now, with my unique abilities, I must write a new ending for the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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