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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73

173화 베아트리체 알리기에로 스페로

베아트리체 알리기에리 스페로는 촉망받는 왕녀였다.

마술로 강성한 풍요로운 왕국의 제1왕녀.

어린 나이에 이미 대마도사로서 이름을 떨친 위대한 마술사 왕녀이자 그 지혜와 지모와 지성을 지닌, 차기 왕권자.

그녀의 왕국은 풍요롭고 평화로웠으며 권력과 영토에 대한 분쟁은 있었을지언정, 왕실은 평안했다.

“비체, 좋은 아침이구나.”

그녀를 사랑하는 부모님이 있었고,

“누님···!”

“언니!”

그녀를 동경하며 따르는 동생들이 있었으며,

“왕녀님, 오늘도 성심껏 모시겠습니다.”

충성스러운 기사들이 있었다.

그녀의 삶은 날 때부터 안정되었고, 평화로웠으며, 미래는 창창했다.

그랬을 것이다.

“아바마마?”

최근 아버지 부왕의 용태가 심상치 않았다. 여왕이신 어머니는 애써 모른 척하지만 궁내에 소문이 돌고 있었다.

부왕이 여자와 약에 취해 산다며.

왕족이나 고위관료가 사치와 향락을 쫓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하지만 베아트리체의 아버지는 여왕과 금슬이 좋았고, 평소에도 현자라며 칭송받던 뛰어난 마술사였다.

그런 그가 어머니를 두고 불륜을 저지르며 비이성적인 마약에 취하다니.

믿기지 않았으나 이는 곧 사실로 드러났다.

“······너희는 무엇도 보지 못한 것이다.”

왕궁의 시녀를 침소로 불러들이고 친구들과 마약을 하며 난교파티를 벌였다. 그 추레한 모습에 모두가 충격에 빠졌으나 여왕은 그것을 묻어두기로 했다.

왕족의 스캔들이 궁내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왕국에는 어떤 악영향을 줄지 뻔했기 때문이다.

때론 추한 진실을 묻어두어야 할 때가 있다며, 여왕은 그저 눈을 돌렸다.

* * * *

여왕부부의 금슬에 금이 간 뒤로 여왕은 국무에 매진했다. 여왕의 옆자리는 비어 있었고, 이제 겨우 열둘이 된 베아트리체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여왕은 차기 여왕의 교육이라고 했지만, 궁내의 모든 이들이 부왕의 타락을 알았다.

“전하, 최근 로마냐 왕국의 치세가 심상치 않사옵니다. 무왕이 하루가 멀다하고 신하와 백성을 직접 베어 죽인다 합니다.”

인접한 로마냐 왕국은 강건한 전사들로 유명한 왕국이었다.

척박한 땅에 산이 대부분을 이루기에 주 수입원은 용병을 수출하며 국왕을 무(武)의 왕이라 불렀다.

당대의 무왕은 현명한 자는 아니었으나 치세를 신하들과 고루 할 수 있는 자였다. 그는 자신이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을 구분할 지혜가 있었고, 성정이 난폭하긴 했지만 왕으로서의 책임은 있는 자였다.

“로마냐의 무왕이 폭주한다면 우리 스페로 왕국을 위협할 수도 있습니다. 사절단을 보내 그들 의향을 알아보시지요.”

“남부의 로스타바 영지에 해괴한 일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영주가 기수가문의 영애를 범하고 잔혹하게 살해했다 합니다. 엄벌을 내리시어 왕실의 지엄함을 보이소서.”

“최근 백성들 사이에서 기이한 설법을 설파하는 자들이 나돌고 있다 합니다. 그 언행이 실로 괴이하여 왕국의 질서를 어지럽힙니다. 그들을 잡아들여 엄벌에 내려야 합니다.”

이 시기에, 기행을 벌이는 왕과 귀족,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기이한 행태를 벌이지 않는 곳이 없었다.

드러난 것만 해도 이 정도인데, 감추어져 음지에서 행해지는 것은 어찌나 많을까?

여왕은 그들을 철저하게 색적하여 엄벌에 처하게 했으나 왕국은, 세계는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타락해갔다.

“전하···! 로마냐 왕국이! 로마냐 왕국의 왕성이 불타올랐습니다!”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인가?”

“아니옵니다! 왕이! 무왕이 스스로 왕도를 불태우고 백성들을 학살했다 합니다!”

기이한 일이다. 어찌 국왕이 자신의 왕도를 불태우고 백성을 학살한단 말인가? 신하들은 그것을 두고 보고, 병사들은 어찌 그것을 따랐단 말인가.

스페로 왕국은 전화의 불길이 번질 것을 염려해 서둘러 간자들을 보내 왕도의 상황을 살피게 했다.

그러나 돌아온 간자들 중 절반은 미쳤고, 또 그 절반은 자결했으며, 오직 소수의 간자만이 겨우 왕성에서 보고를 올렸다.

“지, 지옥입니다. 그곳은··· 인간의 세상이 아니었습니다.”

“어미가 아이를 구워 먹고, 자식이 노모를 범하고 있었습니다.”

“끝없는 방종과 타락이 벌어지고 있었나이다.”

그 광경을 목격한 간자들은 벌벌 떨며 가장 충격적인 사실을 전했다.

“그것들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의 가죽을 뒤집어썼으나 필시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모두가 한 입을 모아 고했다.

“”악마입니다.””

베아트리체의 세계에서는 타락한 마술사가 으레 악마와 계약해 흑마술을 펼치기도 하여 경계의 대상이 되는 존재.

어디까지나 계약자로서 차원 너머의 ‘마계’에서만 암약하던 그것들이 인접 왕국의 왕성을 집어삼켰다?

기겁한 인근 왕국들은 일제히 로마냐 왕국을 치기 위해 거병했고, 당대의 마술사 여왕, 베아트리체의 어머니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악마들이 도사린 곳은 로마냐 뿐만이 아니었다. 멸망한 왕국의 왕성에서 쏟아지는 악마들을 막기 위해 출병한 사이 반란이 일어난 것이다.

“아바마마···! 이게···! 무슨 짓입니까!”

병사들을 이끌고 왕성을 점거한 부왕의 행태에 경악한 베아트리체가 소리 질렀다.

“오오~ 딸아. 참으로, 참으로 아름답게 자랐구나.”

그 발언이 평소의 사랑스럽다는 듯 쓰다듬던 아버지의 손길이 아니라, 소름 끼치는 남자의 손길임을 깨달은 베아트리체가 그 손을 쳐냈다.

역겨움 이전에 두려웠다. 친부가 자신을 핥듯이 쳐다보는 시선과, 결코 상상할 수 없었던 추악한 욕구를 마주보았단 사실이.

“딸아, 어찌 그러느냐?”

“머, 멈추세요. 더 다가오지 마세요!”

“그러지 말거라. 너라면··· 그래, 너라면 그분의 간택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너는 알고 있느냐? 네게 욕정을 품은 사내들이 어찌나 많은지? 크크큭, 왕궁의 사내들은 모두 너를 안는 상상을 했을 것이다.”

더럽고 끔찍한 말이 그녀를 어지럽혔다. 믿기지 않는 부왕의 음담패설 앞에서 베아트리체는 혼란스러웠다.

“내 딸을 범하고 싶은 사내는 없느냐? 흐흐, 지금이라면 좋다. 그분께 바치기 전에 충분히 절여둘 필요성이 있겠지.”

어머니와 자식들을 사랑하던 아버지는 어디로 갔는가?

충성스러운 기사들과 병사들, 귀족들은 대체 어디로 갔는가?

이제 열셋이 된 왕녀는 추레한 민낯에 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날.

로마냐 왕국에서 발호한 악마들과의 전쟁에서 여왕이 전사한 날.

베아트리체는 반란을 일으킨 아버지와 병사들을 손수 죽였다.

스스로의 손으로 아버지와 평생을 알고 지내던 기사, 병사들을 살해한 베아트리체는 옥좌에 묻은 피가 마르기도 전에 스스로 그 자리에 앉아야 했다.

“전하······.”

왕국은, 세계는 풍전등화에 휩싸였다.

악마들은 계속해서 불어 나가고, 그녀의 아비처럼 타락한 자들이 각국에서 불어나고 있었다.

열셋의 나이에 여왕이 된 그녀는 외적으로는 악마들과 맞서 싸워야 했으며 내적으로는 타락자들을 찾아내 정화해야 했다.

끝없는 싸움이 시작된다.

어린 여왕은 마술사 사단을 동원해 악마들을 끝없이 죽여나갔다. 그녀 스스로도 전선에 섰다.

동시에 내부의 타락자들을 경계하며 수색했다. 타락의 징조가 보인 자들은 여지없이 태워 죽여 공포로 경고했다.

“폐하··· 저 악마는······.”

“안드로진··· 쓰러뜨렸던 대악마가 어째서.”

절망스러운 진실을 깨달은 것은 3년 째에 이르는 전쟁 중이었다.

분명 여왕과 기사들이 직접 쓰러뜨렸던 강대한 대악마. 그 육편 한 조각 남김없이 태워버렸던 안드로진이 또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크크큭, 쓸모없는 발버둥이라는 걸 이제 알아챈 것이냐? 우리는 불멸하다. 우리는 너희처럼 필멸의 한계가 없다. 너희는 결국 패배할 것이다.]

악마들은 죽지 않는다.

죽였다 생각한 육신은 그저 껍데기에 불과할 뿐.

그들은 끝없이 부활해 다시 돌아온다.

“그럼··· 우리들의 싸움은 무의미했다는 건가.”

끝이다.

누구보다도 뛰어난 지모를 지닌 어린 여왕은 전염되는 절망을 막아낼 수 없었다.

왕국이, 또 연합군이 하나하나 무너져내린다.

“히히힛··· 여왕전하. 이 싸움에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싸우고.

“차라리 항복합시다! 그들에게 투항해서──!”

또 싸우고.

“악마의 불멸성을 숨기다니! 무의미한 전쟁에 우릴 밀어 넣은 거냐!”

또 싸워서.

“그 악마 놈들 때문에 내 누이는 미쳐버렸어요. 가족 중에 살아남은 사람은 저뿐이군요.”

잃고.

“언니··· 오빠를 죽여줘. 악마에게 영혼까지 팔아버리기 전에······.”

잃어서.

“빌어먹을 악마 놈들. 끝까지 물어뜯어 주마.”

잃어서.

싸울 사람과, 잃은 자들만이 남았다.

뒤돌아보니 그녀 같은 이들만 남았다.

“복수를.”

“피의 복수를.”

“더 끔찍한 고통을.”

광인이 되어간다.

광인이 아닌 자는 싸울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오늘은 조금 급이 높은 악마군요. 기대하세요. 오늘은 당신을 위해 특별한 솥단지를 준비했답니다.”

뜨거운 건 잘 견디시는지?

그녀 또한 미쳐 버렸다. 왕국의 드높은 꽃이었던 왕녀는 스페로 왕국의 마술사 여왕이 되어 악마들이 두려워하는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결국 몰리고 몰려서 최후의 왕성만이 남았을 때, 그것은 속삭여왔다.

[여왕이여, 나와 거래를 하자.]

악마와의 거래.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면서도··· 거래에 응할 수밖에 없었던 조건이었다.

그렇게 백 년의 타락이 시작되었다. 그녀를 쾌락의 군주로 각성시키기 위해 타락의 정수가 심어지고, 멸망의 역사를 반복한다.

그녀가 타고난 교태와 타락의 재능 속에서 끝내 충성스러웠던 기사들마저 하나하나 타락해갔다.

스스로 자결해 데스나이트가 된 리카르도 대장군과 기사들은 마지막까지 자신을 믿었지만, 마술사 여왕은 알고 있었다. 자신이 끝내 견뎌내지 못하리란 걸.

그리고 다시 한번 타락의 정수가 보여주는 세계에 갇혔을 때, 베아트리체는 절망했다.

벗어난 줄 알았던 암흑은 자신의 태내에 도사리고 있었고, 언제든지 자신을 집어삼키려 준비하고 있었다는 걸.

“비체, 내 딸아.”

행복했던 시절.

“누나!”

그 스쳐가는 세상들이 끝내 거짓임을 알아도.

‘나는······.’

이 달콤한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다.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고, 이 모든 일을 없었던 걸로 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건 당연했으니까.

‘폐하라면··· 극복했겠지요.’

오히려 코웃음 치면서 꺼지라고 말했을 지도.

그는 자신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다.

굳건한 의지와 고결한 신념을 가진 영웅.

한낱 필멸자에 불과한 자신과 달리 그는 영원불멸한 진정한 신들의 기사니까.

[정말 그렇게 생각하느냐? 본녀의 신관장아.]

닿을 리 없던 목소리가 닿는다. 사자심왕에게조차 닿지 못했던 신성의 목소리가.

[그대가 누구이더냐.]

“저는······.”

“딸아, 왜 그러니?”

뒤돌아본 그 끝에 잃어버렸던 것들이 있다.

“언니, 뭐해? 어서 가자. 다 같이 나들이 가기로 했잖아.”

잃어버린 가족이 있었고.

“모시겠습니다, 왕녀 전하.”

죽게 내버려 둔 기사가 있었다.

“왕녀님이야!”

“오늘도 아름다우시네!”

지키려고 했던 백성들도 있었다.

[네가 누구더냐?]

이 모든 것을··· 외면할 수가──

[베아트리체 알리기에리 스페로! 너는 누구냐!]

“······스페로의 마술사 여왕.”

[그 다음은!]

“꿈과··· 죽음의 신관장입니다.”

[네 옆에 있는 자가 누구더냐!]

“사자심왕··· 레온 드라고니아 라이온하트.”

[그래, 너는 악마들이 두려워하는 마술사 여왕이자 본녀의 신관장이자 사자심왕 레온 드라고니아 라이온하트의 동맹이다! 악마를 쳐 죽이고 마땅한 법도를 세우기 위한 동반자!]

그러니 꿈에서 깨어라. 너는 꿈을 꾸게 하는 자이지 꿈에 잠식되는 자는 결코 아니다.

“······.”

베아트리체는 한 번, 아니, 찰나. 아주 잠깐, 잃어버린 것들을 뒤돌아보았다.

그것은 아름다운 기억이었고, 간직하고 싶은 추억이었으며 쓰라린 아픔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 무의미한 전장에 서던 마술사 여왕이 아니다.

이제 그녀는 꿈과 죽음의 여신을 섬기는 신관장이었으며, 악마들과의 최전선에 서는 사자심왕의 동료였다.

“추억으로만 남아주세요.”

“누나?”

그녀가 완전히 뒤돌아서 앞으로 나아갈 때,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은 제가 섬기기에 부족함 없던 군주셨습니다.”

노구의 장군이 자랑스럽다는 듯 그녀를 배웅한다. 베아트리체는 그 충성스러운 기사에게 약속했다.

“지금부터 증명해나갈게요.”

그녀는 마술사 여왕. 사자심장을 가진 기사왕과 함께 악마들을 몰살할 동반자다.

꿈이, 타락의 정수가 이룬 환몽이 흩어졌다. 그 앞에 믿고 있었다는 듯 그녀를 응시하는 레온과 믿기지 않는 듯 뒷걸음질 치는 악마대공이 있었다.

[말도 안 돼··· 이건 네 운명이 아니었는데······.]

여왕의 손길이 타락자들의 대공에게 향했다. 싸늘한 죽음의 손길이었다.

“운명은 너희들 따위가 정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쏟아지는 죽음들이 간교한 악마에게 퍼부어졌다.


           


Chapter 173

Chapter 173

173화 베아트리체 알리기에로 스페로

베아트리체 알리기에리 스페로는 촉망받는 왕녀였다.

마술로 강성한 풍요로운 왕국의 제1왕녀.

어린 나이에 이미 대마도사로서 이름을 떨친 위대한 마술사 왕녀이자 그 지혜와 지모와 지성을 지닌, 차기 왕권자.

그녀의 왕국은 풍요롭고 평화로웠으며 권력과 영토에 대한 분쟁은 있었을지언정, 왕실은 평안했다.

"비체, 좋은 아침이구나."

그녀를 사랑하는 부모님이 있었고,

"누님···!"

"언니!"

그녀를 동경하며 따르는 동생들이 있었으며,

"왕녀님, 오늘도 성심껏 모시겠습니다."

충성스러운 기사들이 있었다.

그녀의 삶은 날 때부터 안정되었고, 평화로웠으며, 미래는 창창했다.

그랬을 것이다.

"아바마마?"

최근 아버지 부왕의 용태가 심상치 않았다. 여왕이신 어머니는 애써 모른 척하지만 궁내에 소문이 돌고 있었다.

부왕이 여자와 약에 취해 산다며.

왕족이나 고위관료가 사치와 향락을 쫓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하지만 베아트리체의 아버지는 여왕과 금슬이 좋았고, 평소에도 현자라며 칭송받던 뛰어난 마술사였다.

그런 그가 어머니를 두고 불륜을 저지르며 비이성적인 마약에 취하다니.

믿기지 않았으나 이는 곧 사실로 드러났다.

"······너희는 무엇도 보지 못한 것이다."

왕궁의 시녀를 침소로 불러들이고 친구들과 마약을 하며 난교파티를 벌였다. 그 추레한 모습에 모두가 충격에 빠졌으나 여왕은 그것을 묻어두기로 했다.

왕족의 스캔들이 궁내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왕국에는 어떤 악영향을 줄지 뻔했기 때문이다.

때론 추한 진실을 묻어두어야 할 때가 있다며, 여왕은 그저 눈을 돌렸다.

* * * *

여왕부부의 금슬에 금이 간 뒤로 여왕은 국무에 매진했다. 여왕의 옆자리는 비어 있었고, 이제 겨우 열둘이 된 베아트리체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여왕은 차기 여왕의 교육이라고 했지만, 궁내의 모든 이들이 부왕의 타락을 알았다.

"전하, 최근 로마냐 왕국의 치세가 심상치 않사옵니다. 무왕이 하루가 멀다하고 신하와 백성을 직접 베어 죽인다 합니다."

인접한 로마냐 왕국은 강건한 전사들로 유명한 왕국이었다.

척박한 땅에 산이 대부분을 이루기에 주 수입원은 용병을 수출하며 국왕을 무(武)의 왕이라 불렀다.

당대의 무왕은 현명한 자는 아니었으나 치세를 신하들과 고루 할 수 있는 자였다. 그는 자신이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을 구분할 지혜가 있었고, 성정이 난폭하긴 했지만 왕으로서의 책임은 있는 자였다.

"로마냐의 무왕이 폭주한다면 우리 스페로 왕국을 위협할 수도 있습니다. 사절단을 보내 그들 의향을 알아보시지요."

"남부의 로스타바 영지에 해괴한 일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영주가 기수가문의 영애를 범하고 잔혹하게 살해했다 합니다. 엄벌을 내리시어 왕실의 지엄함을 보이소서."

"최근 백성들 사이에서 기이한 설법을 설파하는 자들이 나돌고 있다 합니다. 그 언행이 실로 괴이하여 왕국의 질서를 어지럽힙니다. 그들을 잡아들여 엄벌에 내려야 합니다."

이 시기에, 기행을 벌이는 왕과 귀족,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기이한 행태를 벌이지 않는 곳이 없었다.

드러난 것만 해도 이 정도인데, 감추어져 음지에서 행해지는 것은 어찌나 많을까?

여왕은 그들을 철저하게 색적하여 엄벌에 처하게 했으나 왕국은, 세계는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타락해갔다.

"전하···! 로마냐 왕국이! 로마냐 왕국의 왕성이 불타올랐습니다!"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인가?"

"아니옵니다! 왕이! 무왕이 스스로 왕도를 불태우고 백성들을 학살했다 합니다!"

기이한 일이다. 어찌 국왕이 자신의 왕도를 불태우고 백성을 학살한단 말인가? 신하들은 그것을 두고 보고, 병사들은 어찌 그것을 따랐단 말인가.

스페로 왕국은 전화의 불길이 번질 것을 염려해 서둘러 간자들을 보내 왕도의 상황을 살피게 했다.

그러나 돌아온 간자들 중 절반은 미쳤고, 또 그 절반은 자결했으며, 오직 소수의 간자만이 겨우 왕성에서 보고를 올렸다.

"지, 지옥입니다. 그곳은··· 인간의 세상이 아니었습니다."

"어미가 아이를 구워 먹고, 자식이 노모를 범하고 있었습니다."

"끝없는 방종과 타락이 벌어지고 있었나이다."

그 광경을 목격한 간자들은 벌벌 떨며 가장 충격적인 사실을 전했다.

"그것들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의 가죽을 뒤집어썼으나 필시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모두가 한 입을 모아 고했다.

""악마입니다.""

베아트리체의 세계에서는 타락한 마술사가 으레 악마와 계약해 흑마술을 펼치기도 하여 경계의 대상이 되는 존재.

어디까지나 계약자로서 차원 너머의 '마계'에서만 암약하던 그것들이 인접 왕국의 왕성을 집어삼켰다?

기겁한 인근 왕국들은 일제히 로마냐 왕국을 치기 위해 거병했고, 당대의 마술사 여왕, 베아트리체의 어머니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악마들이 도사린 곳은 로마냐 뿐만이 아니었다. 멸망한 왕국의 왕성에서 쏟아지는 악마들을 막기 위해 출병한 사이 반란이 일어난 것이다.

"아바마마···! 이게···! 무슨 짓입니까!"

병사들을 이끌고 왕성을 점거한 부왕의 행태에 경악한 베아트리체가 소리 질렀다.

"오오~ 딸아. 참으로, 참으로 아름답게 자랐구나."

그 발언이 평소의 사랑스럽다는 듯 쓰다듬던 아버지의 손길이 아니라, 소름 끼치는 남자의 손길임을 깨달은 베아트리체가 그 손을 쳐냈다.

역겨움 이전에 두려웠다. 친부가 자신을 핥듯이 쳐다보는 시선과, 결코 상상할 수 없었던 추악한 욕구를 마주보았단 사실이.

"딸아, 어찌 그러느냐?"

"머, 멈추세요. 더 다가오지 마세요!"

"그러지 말거라. 너라면··· 그래, 너라면 그분의 간택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너는 알고 있느냐? 네게 욕정을 품은 사내들이 어찌나 많은지? 크크큭, 왕궁의 사내들은 모두 너를 안는 상상을 했을 것이다."

더럽고 끔찍한 말이 그녀를 어지럽혔다. 믿기지 않는 부왕의 음담패설 앞에서 베아트리체는 혼란스러웠다.

"내 딸을 범하고 싶은 사내는 없느냐? 흐흐, 지금이라면 좋다. 그분께 바치기 전에 충분히 절여둘 필요성이 있겠지."

어머니와 자식들을 사랑하던 아버지는 어디로 갔는가?

충성스러운 기사들과 병사들, 귀족들은 대체 어디로 갔는가?

이제 열셋이 된 왕녀는 추레한 민낯에 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날.

로마냐 왕국에서 발호한 악마들과의 전쟁에서 여왕이 전사한 날.

베아트리체는 반란을 일으킨 아버지와 병사들을 손수 죽였다.

스스로의 손으로 아버지와 평생을 알고 지내던 기사, 병사들을 살해한 베아트리체는 옥좌에 묻은 피가 마르기도 전에 스스로 그 자리에 앉아야 했다.

"전하······."

왕국은, 세계는 풍전등화에 휩싸였다.

악마들은 계속해서 불어 나가고, 그녀의 아비처럼 타락한 자들이 각국에서 불어나고 있었다.

열셋의 나이에 여왕이 된 그녀는 외적으로는 악마들과 맞서 싸워야 했으며 내적으로는 타락자들을 찾아내 정화해야 했다.

끝없는 싸움이 시작된다.

어린 여왕은 마술사 사단을 동원해 악마들을 끝없이 죽여나갔다. 그녀 스스로도 전선에 섰다.

동시에 내부의 타락자들을 경계하며 수색했다. 타락의 징조가 보인 자들은 여지없이 태워 죽여 공포로 경고했다.

"폐하··· 저 악마는······."

"안드로진··· 쓰러뜨렸던 대악마가 어째서."

절망스러운 진실을 깨달은 것은 3년 째에 이르는 전쟁 중이었다.

분명 여왕과 기사들이 직접 쓰러뜨렸던 강대한 대악마. 그 육편 한 조각 남김없이 태워버렸던 안드로진이 또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크크큭, 쓸모없는 발버둥이라는 걸 이제 알아챈 것이냐? 우리는 불멸하다. 우리는 너희처럼 필멸의 한계가 없다. 너희는 결국 패배할 것이다.]

악마들은 죽지 않는다.

죽였다 생각한 육신은 그저 껍데기에 불과할 뿐.

그들은 끝없이 부활해 다시 돌아온다.

"그럼··· 우리들의 싸움은 무의미했다는 건가."

끝이다.

누구보다도 뛰어난 지모를 지닌 어린 여왕은 전염되는 절망을 막아낼 수 없었다.

왕국이, 또 연합군이 하나하나 무너져내린다.

"히히힛··· 여왕전하. 이 싸움에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싸우고.

"차라리 항복합시다! 그들에게 투항해서──!"

또 싸우고.

"악마의 불멸성을 숨기다니! 무의미한 전쟁에 우릴 밀어 넣은 거냐!"

또 싸워서.

"그 악마 놈들 때문에 내 누이는 미쳐버렸어요. 가족 중에 살아남은 사람은 저뿐이군요."

잃고.

"언니··· 오빠를 죽여줘. 악마에게 영혼까지 팔아버리기 전에······."

잃어서.

"빌어먹을 악마 놈들. 끝까지 물어뜯어 주마."

잃어서.

싸울 사람과, 잃은 자들만이 남았다.

뒤돌아보니 그녀 같은 이들만 남았다.

"복수를."

"피의 복수를."

"더 끔찍한 고통을."

광인이 되어간다.

광인이 아닌 자는 싸울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오늘은 조금 급이 높은 악마군요. 기대하세요. 오늘은 당신을 위해 특별한 솥단지를 준비했답니다."

뜨거운 건 잘 견디시는지?

그녀 또한 미쳐 버렸다. 왕국의 드높은 꽃이었던 왕녀는 스페로 왕국의 마술사 여왕이 되어 악마들이 두려워하는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결국 몰리고 몰려서 최후의 왕성만이 남았을 때, 그것은 속삭여왔다.

[여왕이여, 나와 거래를 하자.]

악마와의 거래.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면서도··· 거래에 응할 수밖에 없었던 조건이었다.

그렇게 백 년의 타락이 시작되었다. 그녀를 쾌락의 군주로 각성시키기 위해 타락의 정수가 심어지고, 멸망의 역사를 반복한다.

그녀가 타고난 교태와 타락의 재능 속에서 끝내 충성스러웠던 기사들마저 하나하나 타락해갔다.

스스로 자결해 데스나이트가 된 리카르도 대장군과 기사들은 마지막까지 자신을 믿었지만, 마술사 여왕은 알고 있었다. 자신이 끝내 견뎌내지 못하리란 걸.

그리고 다시 한번 타락의 정수가 보여주는 세계에 갇혔을 때, 베아트리체는 절망했다.

벗어난 줄 알았던 암흑은 자신의 태내에 도사리고 있었고, 언제든지 자신을 집어삼키려 준비하고 있었다는 걸.

"비체, 내 딸아."

행복했던 시절.

"누나!"

그 스쳐가는 세상들이 끝내 거짓임을 알아도.

'나는······.'

이 달콤한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다.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고, 이 모든 일을 없었던 걸로 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건 당연했으니까.

'폐하라면··· 극복했겠지요.'

오히려 코웃음 치면서 꺼지라고 말했을 지도.

그는 자신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다.

굳건한 의지와 고결한 신념을 가진 영웅.

한낱 필멸자에 불과한 자신과 달리 그는 영원불멸한 진정한 신들의 기사니까.

[정말 그렇게 생각하느냐? 본녀의 신관장아.]

닿을 리 없던 목소리가 닿는다. 사자심왕에게조차 닿지 못했던 신성의 목소리가.

[그대가 누구이더냐.]

"저는······."

"딸아, 왜 그러니?"

뒤돌아본 그 끝에 잃어버렸던 것들이 있다.

"언니, 뭐해? 어서 가자. 다 같이 나들이 가기로 했잖아."

잃어버린 가족이 있었고.

"모시겠습니다, 왕녀 전하."

죽게 내버려 둔 기사가 있었다.

"왕녀님이야!"

"오늘도 아름다우시네!"

지키려고 했던 백성들도 있었다.

[네가 누구더냐?]

이 모든 것을··· 외면할 수가──

[베아트리체 알리기에리 스페로! 너는 누구냐!]

"······스페로의 마술사 여왕."

[그 다음은!]

"꿈과··· 죽음의 신관장입니다."

[네 옆에 있는 자가 누구더냐!]

"사자심왕··· 레온 드라고니아 라이온하트."

[그래, 너는 악마들이 두려워하는 마술사 여왕이자 본녀의 신관장이자 사자심왕 레온 드라고니아 라이온하트의 동맹이다! 악마를 쳐 죽이고 마땅한 법도를 세우기 위한 동반자!]

그러니 꿈에서 깨어라. 너는 꿈을 꾸게 하는 자이지 꿈에 잠식되는 자는 결코 아니다.

"······."

베아트리체는 한 번, 아니, 찰나. 아주 잠깐, 잃어버린 것들을 뒤돌아보았다.

그것은 아름다운 기억이었고, 간직하고 싶은 추억이었으며 쓰라린 아픔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 무의미한 전장에 서던 마술사 여왕이 아니다.

이제 그녀는 꿈과 죽음의 여신을 섬기는 신관장이었으며, 악마들과의 최전선에 서는 사자심왕의 동료였다.

"추억으로만 남아주세요."

"누나?"

그녀가 완전히 뒤돌아서 앞으로 나아갈 때,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은 제가 섬기기에 부족함 없던 군주셨습니다."

노구의 장군이 자랑스럽다는 듯 그녀를 배웅한다. 베아트리체는 그 충성스러운 기사에게 약속했다.

"지금부터 증명해나갈게요."

그녀는 마술사 여왕. 사자심장을 가진 기사왕과 함께 악마들을 몰살할 동반자다.

꿈이, 타락의 정수가 이룬 환몽이 흩어졌다. 그 앞에 믿고 있었다는 듯 그녀를 응시하는 레온과 믿기지 않는 듯 뒷걸음질 치는 악마대공이 있었다.

[말도 안 돼··· 이건 네 운명이 아니었는데······.]

여왕의 손길이 타락자들의 대공에게 향했다. 싸늘한 죽음의 손길이었다.

"운명은 너희들 따위가 정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쏟아지는 죽음들이 간교한 악마에게 퍼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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