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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73

173화 세계수와 신녀 (3)

173화 세계수와 신녀 (3)

풍경이 바뀌었다.

엘리샤는 에스틸리아의 등 뒤에 숨어 오들오들 떨고 있다.

‘스, 스승님······. 왜 이런 음침한 동굴로 온 거예요? 빠, 빨리 배로 가야 해요.’

‘오랜 친구에게 작별 인사하러 왔어.’

‘치, 친구요? 아무도 없는데요? 왜, 왜 그래요 스승님. 저 무서워요······!’

‘역시 네게는 보이지 않는 거구나.’

내 눈에는 보인다. 여러 감정을 품은 얼굴의 에스틸리아가 새하얀 뿌리를 어루만지는 모습이.

뿌리도 에스틸리아에게 제 몸을 비볐다.

그러고는 점점 흐릿해지더니, 손톱만 한 씨앗으로 변해 바닥에 떨어졌다.

‘겁쟁이 엘리샤. 이게 보이니?’

에스틸리아가 손에 든 새하얀 씨앗을 엘리샤에게 가져간다.

엘리샤는 금세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이다.

‘아, 아무것도 안 보여요······! 그만해요 스승님······! 저 무서워요. 진짜로 무섭다고요······! 흐어어엉······!’

엘리샤를 달래던 에스틸리아의 표정이 변한다.

고개를 갸웃한 그녀가 천천히 발을 움직인다.

내 앞에서 멈춘다.

‘오랜만이야. 너도 나를 배웅하려는 거니?’

그녀가 미소 지으며 속삭인다.

예쁜. 금발.

‘다음에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

그녀의 입술이 내 볼에 닿으며 재차 풍경이 변한다.

두 사람은 달빛이 내리는 들판을 달리고 있다.

‘아직도 우니? 엘리샤.’

‘스승님하고······ 스승님하고 헤어지고 싶지 않아요······! 흐어어어엉······!’

에스틸리아의 표정도 슬퍼진다.

그러나 그녀는 엘리샤를 신경 쓸 여유가 없다.

씨앗이 끊임없이 말을 걸고 있었기 때문에.

정말로 떠날 셈이니? 에스틸리아

인간의 귀로는 들을 수 없는 소리.

마치 달빛의 속삭임처럼.

그러나 나의 귀에는 들린다. 환각처럼.

네가 섬을 떠나면

슬픈 일이 벌어질지도 몰라

섬사람들에게

불행이 닥칠지도 몰라

상관없어. 에스틸리아가 답한다.

네 옆에 있는 엘리샤도

네가 사랑하는 쿠훌린에게도

불행이 닥칠지 몰라

어째서? 에스틸리아가 묻는다.

너의 결정은

섬의 많은 것을 바꾸게 될 테니까

나는 떠날 거야. 이곳은 더 이상 나의 세계가 아니야.

섬이 너의 세계야

너와 나의 세계야

아니. 에스틸리아의 눈빛이 단호해진다.

‘그가 나의 세계야.’

밤의 들판이 흩어져 사라진다.

에스틸리아는 은월호 위에 서 있다.

‘쿠훌린은 저 나무통 중 하나에 숨을 거예요. 라이칸을 혼내주니 녀석이 엉엉 울며 실토했어요.’

‘쿠훌린도 내가 섬을 떠날 거라는 걸 아니?’

‘라이칸에게 절대 비밀을 지키라고 엄포를 놓았어요. 스승님이 싫어하실 것 같아서······. 혹시 저, 실수한 거예요······?’

‘아니야 엘리샤. 잘했어.’

에스틸리아가 엘리샤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헤헤 웃던 엘리샤가 다시 울음을 터뜨린다.

‘흐어어엉······!’

‘울지 마. 엘리샤.’

‘저······, 저······ 스승님께 드릴 선물이 있어요······.’

‘선물?’

엘리샤가 자그만 입술로 주문을 읊는다.

그녀의 손이 희미하게 빛나더니, 에스틸리아의 머리색을 다홍빛으로 물들인다.

‘히익! 시, 실수예요! 그런 색을 하려던 게 아닌데······!’

‘나는 마음에 드는데?’

부드럽게 미소 지은 에스틸리아가 나무통 안으로 들어간다.

닫히는 뚜껑의 틈새로 엉엉 우는 엘리샤의 얼굴이 보인다.

그리고 암전된다.

‘흐어어엉······! 흐어어어엉······!’

엘리샤의 울음소리는 한동안 그 자리에 머문다. 그러다가 점차 멀어지고, 사라진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두근두근 울리는 에스틸리아의 심장 소리.

누군가의 발소리.

‘돌아올 거지? 쿠훌린.’

‘걱정 마 벨락. 꼭 돌아올 테니까. 뭐, 언제일지는 나도 모르지만 말이야. 하하하! 그건 그렇고 라이칸, 너는 또 왜 질질 짜고 있어! 엘리샤에게 괴롭힘당하기라도 한 거냐?’

‘쿠훌린. 에스틸리아를 만나지 않아도 괜찮겠어?’

에스틸리아의 심장 소리가 더욱 커진다.

‘벨락. 나는 그녀에게 해서는 안 될 말을 했어.’

‘진심이 아니었잖아.’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녀의 표정이 잊히지 않아. 나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질렀어. 어쩌면 의도적이었는지도 모르지. 그렇게 해서라도 섬을 떠나야만 하는, 비겁한 구실을 만들려는.’

‘쿠훌린.’

‘너까지 그런 표정 하지 마 벨락. 음? 라이칸 저 녀석은 왜 갑자기 히죽히죽 웃고 있어?’

묵직한 발소리가 가까워진다.

에스틸리아의 심장 소리는 이제 천둥처럼 울린다.

나는 어둠 속에 웅크린 그녀가 기대와 두려움이 뒤섞인 눈으로 머리 위를 보는 것을 느낀다. 쿠훌린은 어느 나무통의 뚜껑을 열까. 그를 다시 볼 수 있을까. 만약 그렇게 되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덜컥, 뚜껑이 열린다.

그러나 그녀의 시야는 여전히 어둡다.

‘미안해. 에스티.’

그의 목소리와 함께, 시간이 부서져 흩어진다.

그녀는 배의 진동을 느낀다.

울고 있니?

에스틸리아

내게 말 걸지 마. 지금은.

나의 친구 에스틸리아

너에게 부탁할 것이 있어

······부탁?

나는 섬을 떠나면

오래 버티지 못해

그런데 왜 나를 따라오겠다고 한 거야?

너를 붙잡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실은 알고 있었어

너를 막지 못하리라는 것을

내게 부탁할 것이 뭔데.

육지에 닿으면 알게 될 거야

내가 이런 모습으로 변해야 했던 이유도

배의 진동이 멎는다.

에스틸리아는 태어나 처음으로 대륙의 도시를 마주한다.

내게는 익숙한 곳.

항구도시 브리즈.

‘어머. 저 근사한 사내 좀 봐.’

‘누구지? 저렇게 아름다운 남자가 있다니.’

‘어디에서 온 걸까?’

거리의 여인들이 쿠훌린을 보며 얼굴을 붉힌다.

에스틸리아는 그것이 달갑지 않다.

멀찍이서 그의 뒤를 쫓는다.

‘방금 봤니?’

‘무엇으을?’

‘은빛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지나간 사람 말이야! 마치 동화 속의 왕자님 같았어!’

‘왕자아?’

두 아이의 목소리가 에스틸리아의 발길을 붙잡는다.

에스틸리아는 고개를 돌린다.

제 얼굴보다도 커다란 모자를 눌러쓴 여자아이와 사내아이.

‘아앗!’

행인에게 부딪친 여자아이가 넘어진다.

소녀의 머리카락이 허공에 흩어진다.

‘누나아아······!’

사내아이가 제 누이를 일으키려 한다.

그러나 먼저 소녀의 손을 잡은 이는 에스틸리아다.

‘가, 감사해요.’

소녀가 몸을 털며 일어선다.

에스틸리아는 멍한 얼굴로 소녀의 앞에 쪼그려 앉는다.

그렇게 둘의 눈높이가 맞춰진다.

‘흐어어엉······! 누나아······!’

사내아이가 우는 이유는 제 누이의 얼굴에 상처가 생겼기 때문이다.

에스틸리아가 손을 뻗어 소녀의 볼을 만진다.

‘너는······.’

그리고 에스틸리아는 깨닫는다.

동굴 속의 친구가 왜 자신을 따라왔는지.

자신에게 하려던 부탁이 무엇인지.

고마워

나의 친구 에스틸리아

에스틸리아의 손끝이 은은한 빛을 발하며 상처를 치유한다.

그러면서 그녀는 느낀다.

동굴 속의 오랜 친구가 자신의 곁을 떠났다는 것을.

‘저는 리아논이에요.’

그렇게 이 자그만 소녀의 운명이 바뀌었다는 것을.

‘혹시 여행자이신가요? 머무를 곳이 필요하지는 않으세요? 저와 브란델은 아버지와 함께 여관을 운영하고 있어요!’

소녀의 곁을 떠난 에스틸리아는 거리를 헤맨다.

쿠훌린이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의 세계를 잃어버렸다.

‘이그드라실.’

대답은 없다.

아니, 대답하지만 에스틸리아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다.

그녀의 오랜 친구는 인간의 모습이 되어 내 곁을 걷고 있다.

눈물을 흘리고 있다.

“디네베.”

“······쉿. 그녀를 따라가자.”

우리는 에스틸리아의 뒷모습을 쫓았다.

에스틸리아는 아무 행인이나 붙잡으며 묻는다.

쿠훌린의 인상착의를 설명한다.

‘아. 그 사내라면 북쪽으로 간다더군. 머리색이 워낙 눈에 띄어서 기억하고 있지.’

그녀는 마구간의 늙은 사내에게서 원하는 답을 얻는다.

사내는 쿠훌린이 구입한 말과 친했다는 황토마를 추천한다.

‘어이쿠. 이렇게 비싸 보이는 보석을!’

도시를 벗어난 에스틸리아는 황토마에 올라탄 채로, 들판에 서 있다.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흩트린다.

‘너는 왜 여기에 있어? 너는 정말로 미친 여자야?’

‘나는. 에스틸리아 이그드라실.’

‘뭐야 그 낯간지러운 이름은. 좋아. 앞으로 나는 너를 에스티라고 부를 거야. 알겠어? 에스티.’

에스티.

‘너를 거기서 꺼낼 거야. 에스티.’

‘왜?’

‘이건 잘못된 거야. 섬을 지킨다는 근거 없는 명목으로 죄 없는 사람을 가두다니. 나는 절대로 납득할 수 없어.’

다시 한번 불러주었으면 좋겠어.

‘내 손을 잡아. 에스티.’

에스틸리아는 허공을 향해 손을 뻗는다.

‘너에게 동굴 밖의 세계를 보여줄게.’

동굴 안은 나의 세계.

동굴 밖은 너의 세계.

‘나에게 동굴 밖의 세계를 보여준 건 너야. 이 섬이 우리의 세계잖아. 너와 나의 세계잖아.’

에스틸리아의 시선이 북쪽을 바라본다. 쿠훌린이 떠난 방향.

말고삐를 당기려다가, 주저한다.

‘저는 리아논이에요.’

그녀의 눈이 반대 방향을 돌아본다. 떨리는 손끝이 고삐를 당긴다.

이히힝! 소리 내며 황토마가 달린다.

에스틸리아는 웃는다.

그녀에게 승마술을 가르쳐 준 이는 쿠훌린이다.

‘하하하하! 그래! 그렇게 하는 거야 에스티!’

광활한 하늘과 대지가 에스틸리아를 반긴다.

머리를 스치는 것은 먼 옛날의 기억.

나의 세계는 어느 자그만 동굴.

창살 밖의 조각난 풍경.

너를 만나러 왔어

나를 찾아와 준 새하얀 친구.

네 덕분에 나는 어두운 동굴 속에서 빛으로 가득한 세계를 봤어.

넓게 트인 대지와 높다란 탑.

탑과 탑 사이를 잇는 구름다리.

나는 많은 사람을 봤어.

아름다운 마법을 봤어.

‘빌어먹을 마녀 교관! 물러서! 에스티는 우리와 함께 마을에서 살 거야!’

나의 친구 이그드라실.

그는 내게 동굴 밖의 또 다른 세계를 가르쳐줬어.

‘우선 제대로 말을 배워야 해 에스티. 그래야 마을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어.’

‘소통?’

‘자, 따라 해 봐. 미남.’

‘미남?’

‘나 같은 사람을 말하는 거야. 알겠어?’

타인과 소통하는 방법을 가르쳐줬어.

‘라이칸이 나더러 미친 여자라고 했어.’

‘뭐라고? 그래서 너는 뭐라고 했어.’

‘아무 말도 안 했어.’

‘내가 말했잖아 에스티. 누가 너에게 그런 소리를 하면 화내야 한다고.’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줬어.

‘알겠지? 에스티. 누구도 너를 함부로 대하게 두어서는 안 돼. 자기 자신은 스스로 지키는 거야.’

사랑을 가르쳐줬어.

‘다시는 나를 찾아오지 마! 처음부터 너를 그곳에서 꺼내지 말았어야 했어! 동굴 속의 미친 여자!’

아픔을 가르쳐줬어.

‘미안해. 에스티.’

괜찮아 쿠훌린.

네가 섬을 떠나면

슬픈 일이 벌어질지도 몰라

내 선택이 어떤 결과를 불러온다 해도.

설령 그것이 나를 후회하도록 만든다 해도.

‘나는 이 섬이 지긋지긋해. 온몸이 근질거려 참을 수가 없다고. 내가 왜 여기 갇혀 있어야 하는 거지? 이런 코딱지만 한 섬에서! 나의 진짜 세계는 저 밖에 있는데!’

쿠훌린. 보여?

저 끝없이 펼쳐진 푸른 하늘이.

바람에 몸을 흔드는 황금빛 들판이.

만개한 꽃들이.

‘북쪽은. 너의 세계.’

내 눈에도 보여.

푸른 하늘을 나는 새들도.

그들이 만들어 내는 들판 위의 그림자도.

만개한 꽃 사이를 오가는 날벌레들도.

‘그리고 남쪽은. 나의 세계.’

우리의 세계는 이렇게나 커졌어.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Status: Ongoing
The protagonist, an infinite regressor, found himself possessed within a novel where the original protagonist had gone mad and turned dark. Now, with my unique abilities, I must write a new ending for the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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