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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74

174화 살의

174화 살의

어느새 나는 방으로 돌아와 있었다.

멍하니 허공을 바라봤다. 황토마를 달리며 멀어지는 에스틸리아의 뒷모습이 쉬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 나는 무언가에 끌리듯 옆을 돌아봤다.

디네베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

“디네베.”

디네베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나를 끌어안았다.

그렇게 내 품에서 엉엉 울던 그녀는 잠시 후, 평온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지난번에도 느꼈지만, 신비로운 일이로구나.”

디네베가 구슬 같은 눈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역시 나의 일부가 이 아이의 내면과 동화되어 버린 듯하다.”

나를 보며 부드러운 웃음을 지은 그녀가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았다.

“이 아이는 에스틸리아의 기억 속에서 리아논을 봤다. 그 감정이 내게 이런 아픔을 느끼게 하는구나.”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디네베는 에스틸리아의 기억 속에서 어린 리아논을 봤고, 세상을 떠난 그녀를 떠올리며 슬퍼했다. 그 감정이 디네베와 동화된 신녀의 마음마저 아프게 했다.

나 역시 리아논을 보며 슬픔과 그리움을 느꼈다. 그녀의 어린 시절은 루나와 무척 닮았다.

“울지 말거라. 데미안.”

그때까지 나는 내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아마도 내가 우는 이유는 리아논 때문이기도, 에스틸리아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나는 에스틸리아의 기구한 삶에 연민을 느꼈다. 내가 아는 그녀는 늘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인물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이런 과거가 있었다니.

순간 머릿속에 무언가가 떠올랐다.

“에스틸리아는 나를 만나기 전부터 나를 알고 있었던 거야?”

“그렇단다. 그 아이의 기억에서 보았듯, 에스틸리아는 네가 태어나기 전부터 너를 알고 있었다. 언제, 어떤 방식으로 만나게 될지는 몰랐지만 말이다.”

나는 아르카넘 홀에서 에스틸리아를 처음 만났던 날을 상기했다. 커다란 안경을 쓴 무심한 표정의 여자. 당시의 에스틸리아는 너무 어려 보여서 나와 비슷한 나이일 거로 생각했었다.

원서를 건네자 안경을 벗고 내 얼굴을 꼼꼼히 확인하던 그녀. 그러고는 흐응, 묘한 숨소리와 함께 미소 지었었지.

‘복도를 죽 걸어가면 후문이 보일 거야. 후문을 지나면 돔 경기장이 있어. 그곳으로 가면 돼.’

“에스틸리아는 그날 너를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단다. 그 아이는 그저 쿠훌린의 부탁으로 루나프레나와 친구들을 확인하기 위해 그곳에 있었지.”

“에스틸리아는 나를 알아봤던 거야?”

디네베가 눈웃음을 지으며 나를 흘겨봤다.

“아니라면 왜 너에게 그런 정성을 쏟았겠니?”

그 말대로, 에스틸리아는 루나보다 도리어 내게 더 신경 썼다.

물론 그녀와의 훈련은 상당히 고됐지만, 그리고 이러다가는 정말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아주 많이 했지만 그럼에도 나는 에스틸리아에게서 스승의 애정을 느꼈다.

문득 궁금해졌다.

“에스틸리아는 어느 정도로 강한 마법사인 거야?”

나는 에스틸리아가 누군가에게 패배하는 모습을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 상대가 설령 오필리아 플랑브아즈나, 모르가나일지라도.

“그 물음에 대한 답은 할 수 없어. 나의 기억과 의지는 이 섬에 한정되어 있으니까. 나는 대륙의 마법사들에 대해 알지 못해. 그저 들여다볼 수 있는 이들의 기억을 통해 엿볼 뿐이지. 내가, 아니 우리가 아는 것은 아주 먼 옛날의 마법이야. 그마저도 상당히 훼손된 기억이지.”

‘신녀라고 모든 것을 아는 건 아니야.’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 없니?”

“무엇이?”

“왜 우리에게 신녀가 필요한 것인지.”

그러고 보니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세계수 이그드라실은 왜 ‘신녀’라는 매개체를 통해 의지를 전달하는 걸까.

“우리의 기억과 의지를, 우리 스스로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야.”

“그게 무슨 말이야?”

“너도 알다시피 세계수의 기억은 상당 부분 훼손되었어. 인간에게 비유하자면 두뇌가 온전치 못하다는 이야기지. 그래서 모순되게도 우리는 스스로의 기억을 들여다보는 것에 어려움을 느껴. 그래서 신녀가 필요한 거야.”

“네가 볼 수 없는 기억을 신녀는 볼 수 있다는 거야?”

“정확하지는 않지만, 비슷해. 신녀는 세계수의 훼손된 기억 일부를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어. 그 능력이 가장 뛰어난 이들이 바로 순혈이었던 거고. 그들은 오랜 시간 동안 대를 이어가며 세계수의 손상된 기억을 판독했고, 덕분에 우리는 이전보다 많은 것을 알 수 있게 되었어.”

디네베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세계수가 컴퓨터 같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아스트레아 대륙의 모든 역사를 담아둔 서버 컴퓨터가 어떤 계기로 부서져 흩어졌고, 완전히 망가지지 않은 일부 CPU들이 필요한 부품을 모아 몇 대의 컴퓨터로 부활했다. 이그드라실, 아리아나스, 라바다라는 이름으로.

이그드라실과 아리아나스는 이동이 불가한 데스크탑(Desktop) 컴퓨터. 라바다는 어느 정도 이동성을 확보한 랩탑(Laptop) 컴퓨터라고 하면 적절하지 않을까.

신녀는 대를 이어 ‘이그드라실 컴퓨터’의 메모리 복구 작업을 하고 있다. 어쩌면 이 세계 곳곳에 존재하는 ‘혼돈의 조각’은 최초의 서버 컴퓨터를 구성하던 아주 작은 부품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라바다가 스스로를 ‘소서러’로 칭한 것도 납득이 간다. 소서러는 서버 컴퓨터의 일부이자, 그 자체로 컴퓨팅 파워를 지닌 존재. 그렇다면 나와 카인은 데스크탑과 랩탑처럼 강력한 파워를 지니지는 못했지만 이동성이 극대화된 스마트폰에 비유할 수 있겠지.

“너는 정말 흥미로운 생각을 하는구나?”

디네베가 나를 보며 웃었다.

그녀는 지구의 컴퓨터에 대해 알고 있을까.

“내가 오늘, 왜 너를 찾아왔는지 알겠니?”

“디네베가 너를 불러냈다고 했잖아.”

“맞아. 이 아이는 너와 헤어지는 것을 몹시 두려워해. 그렇다면 너는 어쩔 셈이니?”

“무엇을.”

“세실리아와 함께 섬을 떠날 생각이니?”

바로 대답할 수 없었다.

내가 세실과 함께 섬을 떠난다면 루나는 어떤 선택을 할까.

빌어먹을 데미안 라플라스는 여전히 둘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다.

“죄책감 갖지 말렴. 너의 감정은 잘못되지 않았어.”

정말로 그런 걸까.

“인간은 완전한 존재가 아니야. 갈등하고, 선택하고, 후회하지. 이 아이는 너를 보낸 뒤 후회하고 싶지 않아서 나를 불러냈어. 그리고 나는 느낄 수 있어. 디네베는 너를 붙잡는 것 대신, 다른 선택지를 고를 거야.”

“다른 선택지?”

“너를 따라간다는 선택지 말이야.”

“하지만.”

“네 생각이 맞아. 디네베는 신녀고, 신녀는 섬을 떠날 수 없어. 아니, 이제는 너도 알게 되었듯이 신녀가 섬을 떠나면 신력은 다른 이에게로 옮겨갈 거야.”

디네베의 눈빛이 복잡하게 얽혔다.

“하지만 이 섬에는 더 이상 신력을 받아들이기에 적합한 신체(神體)가 존재하지 않아. 아마도 그들이 신녀가 되면 며칠도 채 버티지 못하겠지. 이그드라실 혈족에게 은월병이 생긴 것도, 계승된 신력이 새로운 신체에 적응하는 데 적정 시간이 필요했던 것도 모두 순혈이 아닌 자가 신력을 받아들인 부작용이니까. 그래서 위기를 느낀 3년 전의 세계수가 고작 열네 살에 불과했던 루나프레나를 신녀로 만들려 했던 거야.”

“만약 섬에 신녀가 존재하지 않으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데?”

“몰라.”

모른다고?

“그래서 더욱 두려운 거야. 세계수는 아주 오랜 세월 동안 늘 신녀와 함께했으니까. 따라서 신녀가 존재하지 않는 섬은 우리에게도 예측 불가능한 미래야.”

어쩌면 신녀는 세계수의 기억을 복원하고, 그들의 의지를 전하는 것 외에 더욱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것은 아닐까.

이를테면 컴퓨터 바이러스와 싸우는 백신처럼.

“디네베가 섬을 떠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그건 이 아이의 선택이야. 또한 너의 선택이고.”

“나의 선택?”

“너는 결국 섬을 떠날 거고, 이 아이는 네 말을 따를 테니까.”

나는 디네베의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내가 왜 너에게 에스틸리아의 기억을 보여줬는지 아니?”

모르겠다.

나의 궁금증을 해소해 주기 위해서였다기에는, 그녀는 내게 너무도 많은 것을 보여줬다.

“이 방에서 에스틸리아가 네 목을 쥐었을 때를 기억하니?”

잊을 리 없다.

나는 그날, 정말로 죽음의 공포를 맛보았으니까.

“에스틸리아의 살의가 어디에서 왔다고 생각하니?”

줄곧 의문이었다.

에스틸리아가 왜 나를 죽이려 했는지 나는 여전히 납득하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도 그날 보았던 에스틸리아의 살의는 ‘진짜’였다.

“에스틸리아는 너를 죽일 생각이 있었어. 그러나 또한 그럴 생각이 없었고, 그러지 못하리라는 것도 알았지.”

“그렇다면 왜 에스틸리아는.”

“네가 라플라스니까.”

두근, 내 심장이 뛰었다.

“너는 루시엔 라플라스, 다시 말해 흑기사의 핏줄이야. 그리고 흑기사는 쿠훌린을 죽음에 이를 뻔하게 만든 존재지. 쿠훌린이 에스틸리아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게 된 지금의 너라면, 왜 그녀가 네게 그런 살의를 보였는지 납득하겠니?”

‘그가 나의 세계야.’

“하지만 나는······.”

“그래. 에스틸리아도 알고 있어. 네가 그 일과 무관하다는 것을. 오히려 너는 쿠훌린을 구한 은인이지. 먼지와 함께 말이야.”

먼지를 손에 들고 속삭이던 에스틸리아가 머리를 스친다.

“에스틸리아는 흑기사에게 강한 원한을 품고 있어. 그렇다면 생각해 보렴 데미안. 네가 아는 에스틸리아라면, 앞으로 무엇을 하려 할까?”

내 눈이 점점 커졌다.

“설마 에스틸리아는······!”

“이제 알겠니? 내가 너에게 에스틸리아의 기억을 보여준 이유를. 네가 섬을 떠나게 될 것이라고 말한 이유를.”

디네베의 눈동자가 칼날처럼 빛났다.

“에스틸리아는 흑기사를 죽이려 해.”

* * *

에스틸리아는 멍하니 창밖을 보고 있었다.

지금처럼 들풀이 무르익어갈 때면 어쩔 수 없이 그날이 떠오른다.

푸른 하늘을 비행하는 새들.

춤추는 황금빛 들판.

바람처럼 달리던 황토마.

똑똑.

문을 두드리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지만, 에스틸리아는 무심하게 답했다.

“들어오시길.”

문이 열리자 흐어어엉······! 환청처럼 소녀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에스틸리아는 피식,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 아직 추억의 회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모양이지.

“스, 스승님. 왜 웃으세요······? 혹시 저, 뭐 실수한 거라도 있는 거예요······?”

“아니.”

에스틸리아는 소녀를 손짓해 부른 뒤,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느새 이렇게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자란 아이.

“가, 갑자기 왜 이러세요? 역시 뭐 잘못한 게 있는 거죠······? 요, 용서해 주세요 스승님. 말씀해 주시면 고칠게요······!”

“앉으렴. 팔을 올리는 게 힘들구나.”

엘리샤가 불안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는다.

에스틸리아는 엘리샤의 볼을 어루만지며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언제 이렇게 어른의 모습으로 변한 걸까. 아쉬워. 네가 자라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고 싶었는데.

“저······, 스승님.”

눈치를 살피던 엘리샤가 조심스레 입을 떼었다.

“보고드릴 게 있어요.”

“말하렴.”

이어진 그녀의 목소리가 에스틸리아를 회상에서 끌어냈다.

“흑기사의 흔적을 찾았어요.”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Status: Ongoing
The protagonist, an infinite regressor, found himself possessed within a novel where the original protagonist had gone mad and turned dark. Now, with my unique abilities, I must write a new ending for the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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