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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75

174. 소꿉친구 – 거울

레브는 떠나지 못했다.

밥 먹고, 레아에게 작별인사한 뒤 곧장 오르빌을 향해 달려갈 계획이었으나 차마 떠날 수가 없었다.

얼떨떨해져서 방으로 달아난 레브는 어머니의 손에 끌려 나왔다. 딱딱한 육포가 아닌 따뜻하게 요리된 저녁을 먹었다.

‘약초가 들어간 거라 몸에도 좋다’라는 어머니의 강권에 레브는 조금 씁쓸한 맛이 나는 스프를 싹싹 긁어먹을 수밖에 없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가. 이해가 되질 않았으나, 저녁을 다 먹어갈 때쯤에서야 알게 되었다.

“어이고,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이 친구가 한잔 더 하자는 바람에… 실례하겠습니다.”

레슬리 수도사와 아버지가 어깨동무하고 돌아왔다. 부엌에서 육포를 챙긴 두 사람은 집 앞에서 술잔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레브는 방 창문으로 두 사람이 두런두런 떠드는 걸 들을 수 있었다. 제법 길게 이어진 옛이야기를 요약하자면 이랬다.

비자인 부족은 몰살당했다.

십자교회의 공격을 받아 장독에 숨었던 다섯 소년만 살아남았는데, 그들은 복수를 위해 여행을 떠났고, 데모스 마을에서 어머니를 만난 도프 비자인만 친구들과의 맹세를 깨고 이곳에 눌러앉았다는 것이었다.

얼큰하게 취한 도프 비자인이 말을 이었다.

“그때는 참… 십자교회가 싫었네. 원수였지. 하지만 이젠 자네 덕분에 알아. 내가 믿었던 신이 그릇된 신이었다는 걸.”

“레브는 아직 그… 바르바토스라는 신을 섬기는가?”

“조금은? 사실 잘 모르겠네. 누굴 닮았는지 원체 말이 없어서.”

“누굴 닮긴. 자네를 닮았지. 아직도 기억이 나는구만. 도프 자네가 아내를 따라 처음 교회에 왔던 날이 말이야. 나도 그때는 수도사가 되어 고향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는데… 하하. 둘 다 젊었지.”

“흥. 그때 이야기는 꺼내지도 말게. 당시 마을 사제님이 어찌나 꼬장꼬장했던지… 내가 다른 신을 믿는다고 결혼도 반대하고, 아내가 교회를 출입하는 것까지 막으려 들고. 정말이지 자네만 아니었으면 불을 질러버렸을 거야.”

“하하하. 아무리 그래도 설마 불을 질렀겠는가… 나도 그 사제님이랑 참 많이 싸웠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철이 없었던 것 같기도 해.”

“철이 없긴. 우리가 그럴 만도 했…”

레브는 조용히 창문을 닫았다.

아버지가 굴레에서 풀려나면서 삶에 변화가 생겼다는 것만 알았으면 충분했다.

어째서 어머니가 살아계시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애당초 왜 돌아가셨는지도 몰랐으므로 무언가 말 못 할 사정이 있었겠거니… 짐작하고 말았다.

‘이 어머니가 게임을 클리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사람일까?’

─ 이딴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남의 어머니를 바라볼 정도로 민서가 냉혹한 쓰레기는 아니었다.

어머니가 차려준 음식을 먹고 몸이 따뜻해진 그는 금방 잠이 들었다. 엄마가 나오는 꿈을 꾸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진 않았다.

“아니, 얘는 할 말이 있다더니 왜 안 나오는 거야?”

레아는 한참을 기다렸다.

레브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기대한 레나는 잠을 설쳐서 다음 날, ‘새벽 밭일’을 가지 못했다.

* * *

어머니란 존재는 묘하다.

대부분의 시간을 레아와 함께 밖을 쏘다니는 데 쓰는 레브였지만, 어머니가 집에 계시는 것과 계시지 않는 것은 차이가 컸다.

때가 되면 자동으로 밥이 나왔고, 레브는 그걸 감사한 마음 없이 받아먹었다. 당연하게 주어지는 사랑에 목이 메 “엄마, 잠깐 화장실 좀…” 밖으로 뛰쳐나와 서성거렸다.

내가 언제 이런 호의를… 이런 사랑을 받아 보았던가.

혹독한 게임을 헤쳐나가던 민서와 레브는 그 따스함에 갈피를 잃고 허우적거렸다.

그렇게 이틀이 흘렀다.

“저 여행을 다녀오고 싶어요.”

레브가 어머니, 아버지를 앉히고 고백했다. 이대로 부모님과 함께 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더는 미룰 수가 없었다.

“좀 멀리… 다녀올까 해요.”

어떤 지원을 받고자 한 말은 아니었다.

다만 당신의 아들이 어쩌면 돌아오지 못할 여정을 떠난다는 걸 알리기 위함이었는데, 의외로 아버지는 흔쾌히 허락하셨다.

“그래. 남자가 한 우물에 갇혀 살면 안 되는 법이야.”

“여보.”

어머니는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주섬주섬 돈 꾸러미를 꺼내는 남편을 째려보다가 아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꼭 가야 되겠니?”

“…네.”

“왜? 좀 속상하구나. 엄마는 아들이 레아랑 결혼해서 여기서 쭉 같이 살았으면 했는데…”

“레아는 사제가 될 거예요.”

어머니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의 덤덤한 말투에 아들이 마음을 정리했음을 깨닫고 한숨지었다. 아들이 떠나려는 것도… 레아랑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닌가 싶어서 설득하기를 그만두었다.

“받아라.”

도프 비자인이 레브에게 돈 꾸러미를 내밀었다.

은화가 든 주머니.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되겠지만, 이전 회차에서 몇 번 받았었던 돈보다 적었다. 그 까닭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돈이 부족해 보였는지 어머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거울’을 가져와 레브에게 내밀었다.

“이것도 팔아서 경비에 보태렴.”

“아니, 여보 그건…!”

“왜요? 아들이 떠나는데 이것도 못 해줘요?”

이번엔 아버지가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저게 어떤 거울인데! 생각하는 게 빤히 보여서 레브는 혹시 떠나지 말라고 말을 바꾸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다행히 말을 번복하지는 않았다.

“감사합니다…”

[ 업적 : 귀속 아이템, 1/3 ]

[ 검 – 파괴되지 않음. ]

[ 거울 – 연결 불가. ]

손거울을 받아든 순간 업적이 떠올랐다.

기이하게도 0/3이었던 귀속 아이템의 카운트가 올랐는데, 그것도 이해가 안 되지만, 레브는 연결 불가라는 표시를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그때, 어머니가 질문했다.

“언제 떠날 거니?”

“…내일 떠날까 해요.”

“알았다. 혹시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하렴…”

어머니는 뭔가 해주고 싶은 말이 많으신 듯했다. 혹시 중요한 이야기일까 싶어서 경청하였는데,

몸조심하라는 당부였다.

하지만 레브는 시간을 낭비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 * *

다음 날 주말, 레브는 새벽같이 마을을 떠났다.

레아는 배웅을 나오지 않았는데, 전날 밤에 레브가 여행을 떠날 것이라 밝혔기 때문이었다.

“하려던 말이 그거였구나…”

레나는 상심한 말투로 레브의 가슴을 헤집었으나 이내 밝게 웃었다. 새벽 밭일을 다녀오지 않은 그녀는

“몸조심하고. 잘 다녀와! 그때쯤 난 사제가 되어있을 거야!”

라며 의지를 북돋웠다. 배웅을 나오지 않고 아침 일찍부터 교회에 가서 책을 읽고 있었다.

“그럼 다녀올게요.”

레브는 배웅을 나온 마을 청년들에게 인사했다. “이야- 잘 다녀와!” 예전보다 친한 척하는 한스를 무시하곤 한적한 숲을 가로질렀다.

레브의 걸음은 빨랐다.

어머니가 챙겨준 육포를 입에 물고, 밥 먹을 시간도 아껴가며 ‘큰 마을’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중천에 걸린 오후였다.

자, 이제 어떻게 하면 가을이 오기 전까지 오르빌에 당도할 수 있을 것인가.

걸어서는 절대로 무리였다.

그랬다간 가을이 아니라 한겨울에 도착할 것이 분명했으므로 레브는…

못된 짓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장터가 열려 시끌벅적한 ‘토리토’에서 그는 도둑질했다. 상단을 지키는 용병의 감시가 저녁 식사시간을 맞아 허술해진 틈을 타 말을 타고 달아나버렸다.

[ 업적 : 도둑질 – ‘1’ 주인에게 들킬 확률이 미약하게 상승합니다. ]

레브는 “참나.” 어이없어했다. 일전에 칼을 들고 개울가에서 강도질했을 때는 어떤 업적도 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체 주신이란 놈의 선악 개념은 어떻게 되먹은 건지…

– 푸르륵!

레브가 탄 흑마가 투레질했다.

이 녀석은 목이 굵고 힘이 좋았다. 먼 길을 가야 하는지라 튼튼해 보이는 녀석을 골랐으니 당연한 결과였지만, 레브가 기대했던 것보다도 훨씬 잘 달려주었다.

얘는 뭐라고 부르는 게 좋을까.

오르빌을 향해 바쁘게 달려가는 동안 레브는 그 수말의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래. 넌 앞으로 ‘쿠스’다. 잘 부탁한다. 쿠스.”

– 히히잉!

마음에 들었는지 쿠스가 더욱 빠르게 달려나갔다.

거센 바람이 레브의 머릿결을 흩날렸고, 오르빌을 향해 한 발 한 발 다가갈수록 민서의 정신도 흩날려 희미해지고 있었다.

+ + +

“…그렇게 왔어. 늦어서 미안해. 국경을 뚫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았어. 하루라도 일찍 출발했어야 했는데…”

레브가 미안해했다. 하지만 모든 이야기를 들은 레오 드 예리엘은 고개를 저었다.

“미안해할 것 없어. 그래도 어떻게 시간을 맞췄네. 말은 어디에 있고?”

“숙소에 맡겨놓고 달려왔지.”

“좋아. 그럼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야?”

“…”

“괜찮아. 편하게 말해. 사실 나도 짐작이 가.”

잠시 망설인 레브가 입을 열었다. 미안함과 각오를 담아 말했다.

“내가 왕이 되겠어.”

레오 드 예리엘은 예상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지남매 시나리오는 끝났다.

콘라드 왕국으로 가서 에릭 왕자를 몰아내고 {혈통}을 되찾을 수도 있겠으나, 회차가 끝난 이상 의미가 없는 행동이었다.

이전 회차의 엔딩이 변경되었다 한들 어떤 보상도 주어지지 않는 것처럼, 동생 레나를 공주로 만들어도 클리어가 되지 않을 것이다.

사실은, 정말 사실은, 레아를 공주로 만들 손쉬운 방안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그걸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지만, 말하지 않았다.

레오 드 예리엘이 왕자가 되어 레아와 결혼하면 된다.

일개 평민인 레브가 반란을 일으켜 왕이 되는 것보다 왕족인 레오 드 예리엘이 {혈통}을 되찾는 게 훨씬 쉬웠으므로… 그것이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하지만 레브도 레오 드 예리엘도 그 선택지를 언급하지 않았다. 희미해진 민서조차도 그럴 생각이 없었다.

왜냐하면…

레브가 레아를 좋아하니까.

모두가 그걸 알고 있었다. 결국 레브가 이런 선택을 하리라는 것을 예상했기에 레오 드 예리엘이 미소지었다.

“잘 생각했어. 그럼… 갈까?”

도와달라는 말이 없었음에도 몸을 일으킨 레오가 손을 내밀었다. 도와주는 것이 당연했고, 어차피 나는 죽을 생각이었다.

평민 레브가 왕자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튼튼한 말 한 필이 있고, 동생 레나는 극장에서 안전하게 살아갈 것이 확실했기에 두 사람은 이제 달아날 생각이었다.

오른 왕국으로.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

두 사람이 마주 보며 웃었다. 이번에는 꼭 잘해보자 말없이 다짐하는데…

“오빠!”

레나가 나타났다. 검은 망토를 쓰고 달려와 레오를 끌어안고

“오빠. 거짓말이지? 나 두고 떠나버리려고 한 거 아니지?”

눈물 콧물을 흘리며 펑펑 우는 것이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오빠를 붙들고 놔주질 않았다.

오빠가 미안해. 미안해. 동생의 머리를 거듭 쓰다듬어주던 레오가 고개를 들었다.

“…레브. 미안한데…”

“아니. 괜찮아.”

일이 상당히 번거로워졌다.

당장 레나를 데리고 어떻게 국경을 뚫어야 할지가 문제였고, 아직 어린 동생을 챙겨줘야 했으며, 반란을 도모하면서도 그녀를 지킬 방도가 필요해졌지만…

울먹이는 동생을 두고 갈 순 없었다.

“…우리, 동생부터 좀 쉬게 할까? 이대로는 못 가겠는데?”

“잠깐만, 기다려봐. 나한테 좋은 생각이 있어. 레나야. 오빠 아주 잠깐만 어디 다녀와도 될까?”

“안… 힉, 안 돼!”

“꼭 돌아올게. 약속. 응?”

“오빠 약속, 히끅, 약속 하나도 안 지켰잖아. 저번에… 저번에도 매일… 오겠다고 약속했으면서.”

“미안해. 하지만 이번엔 정말이야. 여기 옆에 오빠랑 기다리고 있어. 해 떨어지기 전에 돌아올게.”

레나는 퉁퉁 부은 눈으로 레브를 흘겨보았다. 망토 자락으로 콧물을 훔치던 그녀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 업적 : 레나와의 첫 만남 – 레나는 레오에게 높은 호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

“……좋아. 하지만 정말 잠깐이야. 늦으면 안 돼.”

동생의 허락을 받은 레오 드 예리엘은 가슴에 묻은 콧물을 문지르며 왕궁으로 들어갔다.

레브와 레나가 어색하게 통성명하고 기다리길 잠시, 레오는 약속대로 일찍 돌아왔다.

“됐어. 가자.”

“왕궁엔 왜 다녀온 거야?”

“나중에 설명해줄게. 지금은… 아차, 우리 한 군데 더 들려야겠는데? 돈이 없어. 크세니아한테 돈을…”

“이거?”

레나가 묵직한 돈 꾸러미를 꺼냈다. 조금 전에 크세니아 언니한테 받은 것이었는데, 오빠는 안도인지 씁쓸함인지 모를 한숨을 뱉었다.

동생의 손을 붙잡고, 레오는 마차 대여소를 찾았다. 코롤라 패밀리의 깡패에게 돈 꾸러미를 내밀었다.

[ 업적 : 코롤라 패밀리 만세 – 코롤라 패밀리에 소속된 깡패들에게 미약한 호감을 얻음. 코롤라 패밀리가 적대중인 패밀리로부터 미약한 적의를 삼. ]

레오가 입은 근위기사의 제복, 그리고 ‘코롤라 패밀리 만세’ 업적으로 마차 한 대를 저렴하게 구입한 세 사람은 오르빌을 떠났다. 레브는 마부석에, 레오는 동생을 안고 마차에 올라 덜컹덜컹, 남쪽을 향했다.

오른 왕국으로.

힘 좋은 흑마 ‘쿠스’는 작은 마차를 부지런히 끌었다.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A Princess Is Raised After Death, Desperately Making Her a Princess, Princess is Raised by Death, RPOD, The Princess Is Raised After She Dies, 正規エンディングまで異世界ループ転生, 공주는 죽어서 키운다
Score 8.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19 Native Language: Korean
Minseo was trapped in [Raise Lena]. With the emotionless text, “[Starting Raise Lena]” he became Leo and was imprisoned in an unfamiliar worl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Uh-huh?” “Leo? Why the long face? You! Are you messing with me again?” There, he met his childhood friend, Lena, skillfully picking berries. The lovely Lena. Leo marries her in a peaceful mountain village… [Lena is married! Congratulations.] [You have failed to clear Raise Lena.] [Restarting.] The happiest moment. Lena disappeared. An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Huh? Lena!” “Why have you been spacing out? And why are you looking at me like that? You wanna get beat up?” Lena, clad in thick leather armor and a sword on her shoulder, stared at him with unwavering eyes. It was a different scenar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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