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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75

175화 조건 충족

175화 조건 충족

“은월호의 출항 예정일이 잡혔다.”

쿠훌린의 말에 세실의 어깨가 설핏 떨렸다.

세실과 내 눈이 마주쳤다. 그런데 나를 보는 이는 세실만이 아니었다.

루나와 디네베도 나를 보고 있었다.

“데미안. 너는 어떻게 할 생각이냐.”

쿠훌린이 으적으적 빵을 씹으며 물었다.

지금은 아침 식사 시간이다.

“저는.”

내가 입을 열자, 나를 보던 이들의 눈빛이 변했다.

세실은 어깨를 움츠리며 내 눈치를 살피고, 루나는 눈도 깜빡이지 않으며 나를 쳐다보고, 디네베는 안절부절못하는 표정.

내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대륙으로 가겠어요. 세실과 함께.”

세실이 환히 웃으며 나를 돌아보다가, 흠칫 놀라 표정 관리를 했다. 하지만 연신 입꼬리가 올라가려 꿈틀거린다.

반면 루나와 디네베의 얼굴빛은 어두워졌다.

“큰 공주는?”

“네?”

“데미안과 세실리아를 따라갈 거냐?”

“아. 저, 저는······.”

오늘따라 쿠훌린은 빵을 오래 씹는다.

“따라갈 거라면 미리 이야기하도록 해라. 단체 훈련에 차질이 생기면 곤란하니까. 알겠나? 루나프레나.”

“네, 네! 단장!”

꾀꼬리처럼 외친 루나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나와 세실을 봤다.

“저······ 아버지.”

“할 말이 있는 거냐? 작은 공주.”

디네베는 하루가 다르게 리아논을 닮아간다.

“저도······ 대륙으로 갈 수 있어요?”

쿠훌린의 빵 씹기가 끝났다.

그가 디네베를 돌아봤다. 그러자 디네베는 쿠훌린을 마주 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루나와 세실도 놀란 얼굴로 디네베를 봤다. 두 사람 모두 디네베가 저런 말을 꺼낼 줄 몰랐을 것이다. 나 역시도 신녀의 언질이 없었다면 예상하지 못했겠지.

‘디네베는 너를 붙잡는 것 대신, 다른 선택지를 고를 거야.’

“작은 공주.”

쿠훌린이 낮게 입을 열었다.

나는 어렴풋이 쿠훌린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그는 자식의 선택을 가로막는 아버지가 아니다.

그러나 디네베의 경우는 일반적이지 않다.

“그, 그래! 이번에는 디네베가 대륙을 여행하고 오면 되겠다! 푸, 풀죽은 수염 괴물 아저씨는 내가 알아서 관리하고 있을게! 나, 요리도 많이 늘었으니까!”

뭐? 요리가 늘어?

“데미안! 세실리아! 디네베를 잘 지켜줘야 해! 그, 그리고 데미안 너! 디네베가 예쁘다고 추근대면 안 돼!”

루나의 횡설수설 헛소리에 디네베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다가, 쿠훌린의 험상궂은 얼굴을 보고 바로 웃음기를 지웠다.

“작은 공주. 꼭 가고 싶은 거냐?”

디네베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쿠훌린을 마주 봤다. 그런 디네베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쿠훌린이 히죽 웃고는, 두 손으로 제 목을 조르는 시늉을 하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크허억······! 큰 공주의 요리를 먹은 아버지는 몹쓸 병에 걸릴지도 몰라······!”

“뭐라고욧!”

그게 무슨 소리냐며 루나가 빽! 소리쳤다.

그러면서 이것은 말도 안 되는 모함이고, 자신도 디네베 못지않게 요리를 잘할 수 있다며 나와 세실의 동의를 구했다.

물론 호응받지는 못했다.

“배, 배신자들······!”

나는 루나의 얼굴을 외면했다.

세실도 미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제 의지를 굽힐 생각은 추호도 없어 보였다.

“으하하하! 그것 봐라 큰 공주! 잘만 연마하면 너는 향후 대륙 최고의 독술사가 될 수도 있을 거다! 으하하하하!”

“너무해! 너무해요! 내 요리를 독에 비유하다니! 디네베! 너도 뭐라고 말 좀 해 봐!”

그러나 디네베는 루나를 도와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녀의 눈빛은 어지러이 얽힌 실타래 같았다. 자신 때문에 루나가 대륙행을 포기할 거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한 듯하다.

사실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나는 디네베의 얼굴을 보며, 그녀가 나와 있었던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분명 제힘으로 신녀를 불러내었음에도.

“큰 공주. 작은 공주.”

쿠훌린이 빽빽대는 루나의 입을 틀어막았다. 루나가 발버둥 치며 쿠훌린을 노려봤다.

“아빠는 신경 쓸 것 없다. 그러니 진정으로 원하는 선택을 하도록 해.”

쿠훌린이 씩 웃었다.

“어떤 결정을 내리든 아빠는 너희들 편이니까.”

.

.

.

저녁 훈련을 마친 후, 나는 쿠훌린을 찾았다.

그는 언덕 위의 커다란 나무에 등을 기댄 채 석양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쿠훌린.”

“오. 금발 꼬마.”

쿠훌린이 히죽 웃으며 솥뚜껑 같은 손으로 제 옆자리를 두드렸다.

“······금발 꼬마라니. 저 이제 성년이거든요? 키도 많이 자랐어요.”

“하하하! 내가 보기엔 아직 어린애야!”

나는 툴툴대며 쿠훌린의 옆에 앉았다. 그러나 그가 오랜만에 금발 꼬마라고 불러주는 것이 나는 싫지 않았다.

“많이 자랐구나 데미안. 이제는 정말로 루시엔을 빼다 박았어.”

쿠훌린은 마치 그리운 친구를 대하듯 그 이름을 말했다.

“흑기사를 원망하지 않으세요?”

“원망이라. 글쎄. 사랑하는 두 공주가 부모 없는 아이가 될 뻔했다는 점에서는 조금 그럴지도 모르겠군.”

쿠훌린은 어릴 적 부모를 잃었다.

또한 쿠훌린은 알지 못하지만, 소설 속의 루나에게도 부모가 없었다.

“디네베가 섬을 떠나도 괜찮은 거예요?”

나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쿠훌린은 루나와 디네베에게 진정으로 원하는 선택을 하라고 했다. 하지만 신녀인 디네베는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는 위치다. 그녀의 행동은 섬의 미래를 크게 바꿀 수 있다.

그 사실이 나도 마음 아팠다. 그럼에도 할 말은 해야 한다.

“섬에 큰 변화가 생길지도 몰라요. 에스틸리아가 섬을 떠났을 때처럼.”

“알고 있었던 거냐. 에스틸리아의 일을.”

“조금은요.”

대충 둘러댔다. 에스틸리아의 기억을 들여다봤다는 것을 쿠훌린에게 밝히기 껄끄러웠기 때문이다.

그녀의 기억 속에서 나는 쿠훌린의 어린 모습을 봤다. 에스틸리아에게 동굴 밖의 세계를 보여주는 장면도. 큰 상처를 주는 장면도.

“디네베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데미안, 너는 알고 있지?”

내 입으로 그 이유를 말하기 부끄러워서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쿠훌린이 내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요 바람둥이 녀석.”

“······아니거든요.”

“디네베는 배려심 깊은 아이야.”

“알아요.”

“디네베는 지금껏 나와 리아논의 말을 한 번도 거스른 적이 없어. 게다가 제 언니를 끔찍이 아껴, 무엇이든 양보하는 삶을 살았지. 때로는 안타까웠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 아이가 루나를 위하는 마음이 보기 좋아 내버려두었다. 하지만 그러지 말았어야 했어.”

쿠훌린의 시선이 다시 석양을 바라봤다.

“잔인한 이야기지만, 부모는 모든 자식을 똑같이 사랑할 수 없어.”

나는 놀랐다.

쿠훌린의 입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올 줄은 몰랐다.

“이유는 설명하기 어려워. 어쩌면 루나를 더욱 오래 봤기 때문인지도 모르지. 나는 루나를 향한 디네베의 배려를 당연시했다. 디네베는 어른스러우니까, 가족을 향한 사랑이 남다르니까, 그렇게 제멋대로 합리화하며.”

“제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아요. 쿠훌린도, 리아논도, 루나와 디네베를 똑같이 사랑했어요. 디네베도 분명 그렇게 느낄 거예요.”

진심이었다.

나는 단 한 번도 쿠훌린이 루나를 편애한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다. 누가 보아도 그럴 것이다.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나를 돌아보는 쿠훌린의 얼굴 반쪽에는 석양이 드리워 있었다.

“하지만 내가 디네베를 내버려둔 것은 사실이다. 그 무책임함이 결국 디네베에게 돌이킬 수 없는 희생을 치르도록 만들었지.”

쿠훌린의 목소리는 거칠었고, 나는 크게 심장이 뛰었다. 그의 말속에 담긴 의미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알고 계셨던 건가요?”

“에스틸리아가 말해주더구나.”

어쩌면, 에스틸리아는 어린 리아논을 처음 만난 순간 직감했을 것이다. 이 어린 소녀가 훗날 쿠훌린의 짝이 되고, 그 결과로 태어날 아이에게 씨앗의 힘(신력)이 전해지리라는 것을. 그리고 루나와 디네베를 만난 뒤 깨달았다. 예정된 신녀는 디네베가 아니라, 루나였다는 것을.

“그런 디네베가, 처음으로 자신을 위한 선택을 했다.”

나는 부모가 아니라서 쿠훌린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는 디네베의 결정을 존중해 주고 싶구나.”

그래서일까.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 * *

성에는 하루가 멀다고 스카자하가 찾아왔다.

스카자하는 디네베가 섬을 떠나면 안 된다는 입장을 강경히 고수하며 쿠훌린과 말다툼을 벌였다.

나는 내 방의 침대에 누워 고민하고 있다.

‘너는 결국 섬을 떠날 거고, 이 아이는 네 말을 따를 테니까.’

신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디네베의 대륙행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나다.

‘나는 디네베의 결정을 존중해 주고 싶구나.’

그러나 쿠훌린의 목소리가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용기를 내어 말하던 디네베의 얼굴도.

‘그래서 더욱 두려운 거야. 세계수는 아주 오랜 세월 동안 늘 신녀와 함께했으니까. 따라서 신녀가 존재하지 않는 섬은 우리에게도 예측 불가능한 미래야.’

예측 불가능한 미래.

그것을 예측할 수는 없을까.

어떻게든.

‘······!’

순간, 내 머릿속에 번개가 쳤다.

왜 이제야 떠오른 것일까.

‘어쩌면, 나는 예측할 수 있다.’

웹소설 무한회귀의 내용을 떠올렸다.

루나의 행적과, 그녀가 했던 말과 생각들.

‘내게는 돌아갈 가족이 없어. 모두 나를 남겨두고 떠나버렸으니까.’

루나의 자조적인 독백.

‘흐흑······! 흑······! 조금만······, 조금만 더 일찍 알았다면······! 그랬다면······!’

은월병의 치유에 성공한 루나가 가슴을 쥐며 오열하던 장면.

‘나는 계속 앞으로 나아갈 거야. 그래서 그 아이의 몫까지 당당하게 살아갈 거야.’

‘그 아이’는 분명 디네베를 말하는 것이다. 소설을 읽을 때는 몰랐던 사실.

즉, 소설 속의 디네베는 죽었다. 아마도 은월병으로.

‘이 섬에는 더 이상 신력을 받아들이기에 적합한 신체가 존재하지 않아. 아마도 그들이 신녀가 되면 며칠도 채 버티지 못하겠지.’

신녀는 그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소설 속의 은월섬은 어떻게 되었을까.

루나도, 디네베도 없는 그 세계의 은월섬은.

‘떠올려라, 데미안 라플라스. 아니, 김우진.’

내 기억은 계속 흐릿해져, 이제는 소설의 내용마저 소실되기 시작했다.

억지로 기억을 되살리자 무거운 잡음과 함께 두통이 인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최근 소설의 내용을 떠올리려 할 때마다 이런 현상이 발생한다.

[아스트레아의 천칭이 기울어집니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메시지에 나는 눈을 부릅떴다.

2년 전, 흑기사와의 전투 이후 처음으로 등장한 천칭 메시지.

스테이터스 창을 열었다.

◎ 특수 스킬: [리메이크(봉인)]

아쉽게도 리메이크 스킬은 여전히 봉인된 채다.

설마 아스트레아의 천칭이 여기서 더 오른(현실)쪽으로 기울었을 리는 없으니, 왼쪽으로 기울었을 텐데.

‘하지만 스킬 봉인은 해제되지 않았어.’

그렇다면 얼마나 더 천칭을 왼쪽으로 기울여야 리메이크 스킬을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일까.

[새로운 스킬 해금을 위한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뭐라고?

[■■■■]

눈앞에 검은 사각형의 배열이 나타났다.

그것이 진동을 시작하더니, 활자로 바뀌었다.

.

.

.

[파노라마]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Status: Ongoing
The protagonist, an infinite regressor, found himself possessed within a novel where the original protagonist had gone mad and turned dark. Now, with my unique abilities, I must write a new ending for the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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