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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79

178화.

한 번 깨고 나니 바로 잠이 오지 않았다.

우리는 나란히 누워서 얘기를 나눴다.

“그럼 엘리는 왜 나를 좋아하는 거예요?”

엘리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멋있으니까요.”

내 외모에 딱히 불만은 없지만, 객관적으로 볼 때 세상에 나보다 잘 생긴 남자들은 많지 않나?

엘리는 회상하듯 말했다.

“처음 진후에 대해 알게 된 건 L6 사태 때문이었어요. 한국증시가 폭락하는 바람에 아시아지사도 난리가 났었거든요. 그때 호기심이 생겼죠. 대체 누가 그런 투자를 한 건지. 그러다가 제시카를 따라 한국에 와서 진후를 만나게 되었구요. 이때까지만 해도 낯선 땅에서 만난 남자를 좋아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요.”

“그럼 첫만남에 좋아하게 된 거예요?”

“음, 그런 것 같아요. 왠지 진후가 눈부시게 보였거든요. 마치 반짝이는 아우라가 있는 것처럼.”

“그래요?”

이 말을 듣는 순간 한 사람이 떠올랐다. 전에 선아도 비슷한 말을 했었지.

누워서 얘기를 하다 보니 슬슬 잠이 오기 시작했다.

불을 끄기 위해 잠깐 옆으로 몸을 돌리는데, 엘리가 등 뒤에서 나를 끌어안았다. 뭉클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몸을 자극하고, 숨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난 참지 못하고 몸을 돌려 엘리에게 키스했다.

“저 출근해야 하는데…….”

“지각 좀 하면 어때요?”

“안 돼요. 제시카한테 혼나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엘리는 나보다 더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해가 뜨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다.

* * *

우리는 룸서비스를 시켜먹었다.

가운을 입은 채 간단하게 조식을 먹고, 커피를 마셨다. 엘리는 샤워를 하고, 정장을 차려입었다.

호텔에서 골든게이트 빌딩까지는 몇 킬로 되지 않았다.

근처에 차를 세운 나는 주위에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고 엘리에게 키스했다.

엘리는 가볍게 투정을 부렸다.

“히잉, 출근하기 싫어요.”

“안 가면 안 돼요?”

“무단결근하면 제시카가 화낼 걸요.”

누나가 화내면 무섭긴 하지.

엘리는 없는 의욕을 억지로 끌어올렸다.

“그리고 앞으로 진후 먹여 살리려면 제가 열심히 일해야죠.”

“말만 들어도 든든하네요.”

난 엘리가 빌딩으로 걸어 들어가는 모습을 본 다음 차를 출발시켰다. 바로 출근하는 대신 옷을 갈아입기 위해 집으로 향했다.

집까지도 금방이다.

지하주차장에 주차하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거실로 올라갔다. 문이 열리자 택규가 팔짱을 낀 채 소파에 떡하니 걸터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난 깜짝 놀랐다.

“헉! 너 여기서 뭐해?”

택규는 날 보더니 준엄하게 꾸짖듯 말했다,

“데이트 갔다는 놈이 밤새 뭐하느라 연락도 없이 집에 안 들어와?”

난 재빨리 변명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런데 내가 왜 얘한테 변명을 해야 하는 거야?

택규는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축하하네, 친우여.”

“뭐, 뭘 축하해?”

“결혼은 언제 할 거야?”

“……뭔 벌써 결혼이야?”

때가 되면 하겠지.

난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옷만 갈아입고 출근할 생각이었는데, 막상 집에 오니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도 귀찮다.

좀 졸린 것 같기도 하고.

“뭐 하느라 잠도 안 잤어?”

“알아서 생각해.”

택규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흐흐흐.”

“…….”

무슨 더러운 상상을 하는 거냐?

“일 얘기나 좀 해보자.”

우리한테는 세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첫째는 예지를 못 본 걸로 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이 경우 지진이 터졌을 때 실리콘밸리에 본사를 두고 있는 자회사와 연구소 등이 피해를 입으며 우리는 엄청난 손실을 보게 된다.

그리고 지진의 타격을 그대로 얻어맞은 미국은 한동안 혼란에 휩싸일 테고, 그 틈을 다 중국, 러시아, 인도 등이 영향력을 확장하려 들 것이다. 어쩌면 그 과정에서 충돌이 빗어지며 세계는 더 큰 혼란 속으로 빠져들게 될지 모른다.

그야말로 최악의 시나리오다.

둘째는 위험을 알린 다음 우리부터 먼저 사업체를 이전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당장 우리가 입을 피해는 최소화시킬 수 있다. 문제는 누가 내 말을 믿고 따르겠냐는 것이다.

재난이란 일어나기 전까지는 그 위협을 알 수 없다.

폼페이 멸망 하루 전에 누군가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할 거라고 말했다면? 동일본 대지진 하루 전에 쓰나미가 몰려와 원전이 폭발할 거라고 소리쳤다면?

사람들은 그 말을 믿고 대피했을까, 아니면 말한 사람을 미친놈 취급했을까?

차라리 경고를 안 했다면 모르겠지만, 괜히 어설프게 경고했다가는 막상 일이 터진 이후에는 ‘혼자만 도망쳤다’, ‘어째서 더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않았냐’는 비난을 받게 될 것이다.

“나쁜 사마리아인이 되는 셈이지.”

“셋째는 뭔데?”

“모든 것을 걸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 최대한 많은 인원을 대피시켜 피해를 최소화시키는 거지.”

“이미 그렇게 하기로 한 것 아니었어?”

“맞아.”

“사람은 살리고 봐야 하잖아.”

“그게 우리가 사는 길이기도 해.”

911테러 사상자는 약 1만 명.

그것만으로도 전 세계 증시가 줄줄이 폭락했다. 한국 역시 예외가 아니라 코스피, 코스닥 할 것 없이 거의 전종목이 하한가를 치는 진기록을 연출했다.

그런데 미국이 그 100배의 피해를 받게 된다면?

물론 테러냐 재난이냐 차이가 있긴 하지만, 한동안 금융과 산업이 마비될 건 불을 보듯 뻔하다. 시스템이 멈추면 생산이든 소비든 제대로 이뤄질 리가 없다.

OTK컴퍼니가 소유한 기업들은 대부분 필수품이 아닌, 소비재와 서비스를 판매한다.

당장 카로스만 해도 하반기에 신차출시를 앞두고 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누가 차를 사고, 누가 포르노를 보고, 누가 피자를 시켜먹겠는가?

즉, 피해를 최대한 막는 것만이 우리가 살 길이다.

그럼에도 계속 고민했던 이유는…….

“지진이 일어나기 전까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비난과 조롱을 받게 될 거야. 만에 하나라도 예지가 틀리면, 모든 것을 잃게 될지도 모르고.”

괜한 유언비어로 사회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면, 그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한다. 그동안 쌓아온 명성은 한순간에 무너질 테고, 온갖 배상 책임을 떠안게 될 것이다.

“하지만 지진은 일어날 거잖아.”

“그렇겠지.”

옳은 일을 하기 위해 때로는 크나큰 용기가 필요하다.

어제 엘리와 얘기를 하며 깨달았다.

“이게 내가 해야 하는 일인지, 할 수 있는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고 싶은 일인 것만은 확실해.”

택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네. 하고 싶으면 해야지.”

“넌 어때? 각오는 됐어?”

“내가 각오하고 말고 할 게 뭐있어? 어차피 욕은 니가 다 먹을 텐데.”

“…….”

그렇긴 하지.

* * *

언제나 그렇듯이 소문은 말보다 빠르다.

내가 키란 모한 교수의 연구를 지원하기로 했다는 사실은 금세 여기저기에 알려졌다.

김호민 교수 때와는 경우가 좀 달랐다. 배터리는 우리 사업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반면, 지진은 별 관련이 없다.

그리고 김호민 교수는 업계와 학계에서 인정받고 존경받는 실력자인 반면, 모한 교수는 얼토당토하지 않은 주장으로 학계의 이단아로 불린다.

괜히 주정부가 지원을 끊었겠는가?

비록 괴짜 취급을 받기는 해도 그는 칼텍의 교수. 실력 자체는 의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다만 주장이 극단적이고 근거가 빈약할 뿐이지.

내 행동에 대해 여러 가지 추측과 뒷말이 나왔다. 지진학계도 황당하다는 반응이었다.

난 그 반응에 대해 일일이 신경 쓰지는 않았다. 내 돈 내가 쓴다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캐리는 바쁜 모한 교수를 대신해 요구하는 자료들을 정리해서 보내주었다. 거기에는 최근 10년 사이 환태평양 조산대에서 일어난 지진들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놀랍게도 수백 개가 넘었다. 그나마도 직접적으로 피해가 발생한 게 이 정도다. 해상지진이나 관측이 안 된 것까지 포함하면 셀 수조차 없을 것이다.

택규는 기가 차다는 표정이었다.

“세상에 이 정도로 지진이 많이 일어나나?”

“작년에 경주에서도 한 번 터졌잖아.”

일본은 국토전역이 환태평양 조산대에 걸쳐 있어서 지진이 일상이나 다름없다. 반면 그동안 한국은 상대적으로 안전지대로 분류되었다.

하지만 경주 지진으로 한국도 안전하지 않다는 것이 확인되었고, 한동안 재난대비용품이 날개 돋친 듯 팔렸다.

어쨌거나 지진은 셀 수 없이 많아도 그중에서 대지진이라고 부를 만한 건 한 해에 한두 번 일어날까 말까하고, 그중 상당수는 환태평양 조산대에서 발생한다.

“이걸로 모두를 설득할 수 있을까?”

난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힘들겠지.”

* * *

채권은 신용에 의해 발행된다.

국채는 국가의 신용을 담보로 하고, 회사채는 회사의 신용을 담보로 한다.

국가가 발행하는 국채는 안전할 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2015년 그리스 구제금융 때 국채를 가지고 있던 국가들은 채무탕감으로 원금을 절반 가까이 날렸고, 1998년 러시아 모라토리엄 때 투자자들은 그야말로 천문학적인 손실을 입었다.(그 유명한 롱텀캐피탈 사건이 이때 일어났다)

제때 상환된다고 해도 한 가지 변수가 남아있다. 바로 환율이다. 만기시점에 해당국가의 화폐가치가 폭락하면, 외국인 투자자 입장에서는 채권에서 수익을 얻어도 환차손을 입게 된다.

현재 브라질 10년물 국채금리는 무려 10퍼센트 안팎이다. 이는 웬만한 선진국 국채금리의 4배에 달했다. 일부 투자자들이 높은 금리를 보고 투자했으나, 최근 헤알화 가치가 폭락하며 오히려 큰 손해를 입었다.

공짜 점심은 없다고, 금리를 더 주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다.

뭐, 처음부터 달러표시 채권을 발행하면 그런 문제는 신경 안 써도 되지만.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채권은 당연히 미국국채다.

버크셔캐셔 회장 워렌 보트는 유보금을 대부분 미국국채에 투자했고, 항상 미국국채야말로 가장 안전한 자산이라고 말해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미국국채는 미국이 망하지 않는 이상 안전하다. 만약 미국이 국채의 원금과 이자를 상환하지 못할 정도의 상황이라면, 그때는 전 세계 금융시스템이 파괴되었다고 봐도 좋을 테고.

현주 누나는 채권시장을 분석해 바로 결과를 내놓았다.

발행량은 200억 달러. 금리는 3.8퍼센트. 이자지급은 1년 단위로 하기로 했다.

현재 미국 3년물 국채금리가 2퍼센트 초중반이고, 신용등급이 AA+로 평가받는 엔플의 회사채금리는 3퍼센트다.

“OTK컴퍼니 회사채면 3퍼센트 중반도 가능할 거야. 그런데 아무래도 물량이 만만치 않다보니.”

이 정도 물량이면 보통 입찰을 통해 주간사를 선정하지만, 우리는 늘 그렇듯 골든게이트에 일임했다. 수수료는 매각대금의 8bp(0.08퍼센트)로 책정되었다.

매각주간사는 거액의 수수료를 챙기는 대신, 판매물량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자기도 사기 싫은 채권을 남에게 판다는 건 말도 안 된다.

골든게이트는 만약 수요가 미달될 경우 총 발행량의 20퍼센트까지 떠안기로 했다. 금액으로는 40억 달러다.

골든게이트는 OTK컴퍼니 회사채발행과 조건 등을 공개하고 수요를 모집했다.

금융위기 이후 전 세계 국가들은 금리를 낮췄고 돈을 풀어 경기를 부양했다. 그 영향으로 시중에는 유동성이 넘쳐났다.

저금리에 갈 곳을 잃은 돈들은 조금이라도 수익이 높은 곳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OTK컴퍼니는 다른 회사들과는 달리 채무도 거의 없는 편이다. 자회사들 중 일부는 대출이 있긴 하지만,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정도다.

한마디로 어지간해서는 손해 볼 일 없는 회사채다. 만기도 짧고, 금리도 괜찮다. 그리고 3년 안에 더 이상의 채권발행은 없다고 미리 못 박았다.

기관과 연기금을 중심으로 수요가 폭발했다.

싱가포르 투자청(GIC), 네덜란드 연기금, 노르웨이 국부펀드 등도 큰 관심을 보였고,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 에미리트 등의 석유부국들도 가세했다.

물량이 너무 많다는 우려와는 달리 수요모집에서 100퍼센트를 가뿐하게 넘었다.

이는 OTK컴퍼니의 안정성을 높게 평가하는 것과 동시에 글로벌 유동자금이 얼마나 풍부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200억 달러의 회사채는 발행과 동시에 완판되었다.

전 세계를 상대로 3.8퍼센트 이자로 200억 달러를 빌린 셈이다. 3년 이자는 총 11.4퍼센트. 매년 7억6천만 달러씩, 3년 동안 총 22억8천만 달러를 이자로 지급해줘야 한다.

어차피 3년 후면 갚아야 할 돈이지만, 그때까지 어디에 어떻게 쓸지는 내 마음이다.


           


An Investor Who Sees The Future

An Investor Who Sees The Future

미래를 보는 투자자
Score 1.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There may be great entrepreneurs, but there are no great investors. That’s the reality of this country.”

One day, something started to appear before my eyes.
What could I possibly do with this ability?

From now on, I will reshape the global financial landsca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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