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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80

179. 소꿉친구 – 장군

영주성이 침울하게 가라앉았다.

시에라 후작 부인이 정신을 차리면서 활기가 붙었던 영주성은 하리에 가이단 영애가 몸져누우며 다시 적막에 휩싸였다.

목이 관통당한 팔라스를 끌어안고, 피바다가 된 돌다리 위에서 며칠 밤낮을 울부짖은 하리에.

그녀는 어찌나 충격이 컸던지 어머니도 알아보지 못했다. 제 어미가 그러했던 것처럼, 눈에 초점을 잃었다.

후작 부인은 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자다가도 비명을 지르며 깨어나는 딸을 돌보느라 다시금 초췌해져 갔다.

“팔찌를 쓰는 게 좋겠어.”

고민 끝에, 레브가 결론지었다.

“시에라 부인을 치료해준 걸로 후작에게 생색을 내야 하는데, 이래서는 죽도 밥도 안 돼.”

레브는 빠르게 선택을 내렸다. 하지만 책상에 앉은 레오 드 예리엘은 착잡한 표정이었다.

{바르바토스의 팔찌} 구슬은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비록 제약이 많고, 호감을 일시적으로 끌어내는 게 고작이었으나 이건 사용하기에 따라 상황을 뒤집을 수도 있는 귀한 물건이었다. 그리고 레오는 이것의 사용처를 정해둔 상태였다.

계획이 다소 어그러졌음을 안타까워하며, 레오가 말했다.

“…그래. 어쩔 수 없지. 오거튼 백작은 내가 어떻게든 해 볼게. 가서.. 매혹을 걸어.”

– 똑똑.

레브는 하리에 가이단의 방을 찾았다. “들어오세요.” 맥아리 없는 허락을 받아 발을 들였다.

하늘색 커튼이 달린 방에는 하리에와 후작 부인이 있었다. 하리에는 침대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보고 있었고, 시에라 부인은 울었는지 눈가가 붉었다.

“무슨 일이시죠? 왕자님께서 절 찾으시나요?”

레브는 답하지 않았다. 말없이 다가가 침상 옆, 시에라 부인 곁에 앉았다.

본래라면 경을 칠 일이었지만, 후작 부인은 그런 레브를 내버려 두었다. 이상하게도 그를 보면 단단히 얼어붙으려던 마음이 누그러드는 것이었다.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레브는 팔찌가 걸린 왼손을 등 뒤로 돌렸다.

“부인께서 그러하셨듯이, 영애께서는 일어나실 겁니다. 단지 마음의 상처가 아무는 데에 시간이 걸릴 뿐입니다.”

눈을 마주쳐야 하는데.

레브가 살그머니 팔을 뻗었다. 무엄하게도 하리에의 손을 붙들어 잡아당겼고, 그녀의 고개가 돌아가는 순간, 등 뒤로 감춘 구슬이 깨졌다.

“힘내세요.”

[ 업적 : 하리에 가이단의 마음을 녹인 남자 – 하리에 가이단에게 미약한 호감을 얻음. ]

기대했던 것만큼 극적인 변화는 없었다. 시에라 부인이 레브를 아들로 착각하고 통곡했었던 것과 달리 하리에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레브를 멀거니 바라보다가… 눈물을 뚝 떨구었다.

그게 전부였다.

레브는 하리에의 손을 부인께 넘겨드렸다. 조용히 밖으로 빠져나오는데, 문틈 사이로 후작 부인이 딸을 끌어안고 흐느끼는 것이 보였다.

바르바토스가 탐냈던 목걸이는 어디로 간 것일까. 의문이 들었지만, ‘…어디에 벗어놨겠지’ 생각하고는 잊어버렸다.

* * *

하르베이 가이단 후작은 그로부터 이틀 뒤에 도착했다.

아내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달려온 그는 3주일에 걸친 강행군으로 피로하였으나 정문을 박차고 들어와 곧장 아내를 찾았다.

“여보! 당신…!”

후작이 부인을 와락 부둥켜안았다.

옷에 찬바람이 묻어있었으나 후작 부인은 개의치 않았다. 그녀 역시 남편의 품을 파고들며 눈물지었다.

“미안해요. 제가… 제가 축복을 받자고 하지만 않았더라면…”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결코 그렇지 않아요.”

가이단 후작이 부인의 뺨을 쓸었다. 엄지로 눈물을 닦아주며 달래었고, 주위에 깔린 시종들은 시큰한 코를 돌려세웠다.

비쩍 마른 중년의 부부.

허수아비처럼 키만 큰 후작과 처량할 지경으로 야윈 후작 부인은 좀처럼 떨어질 줄을 몰랐다. 두 사람 모두 언급하진 않았으나 그들은 덧없이 죽어버린 아들을 가슴에 묻고 있었다.

“…여보. 이리 와요. 소개해드릴 사람이 있어요.”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이러고 있어 줘요.”

얼마나 그리웠던가. 홀로 얼마나 힘들었던가.

죽은 아들과 쓰러진 아내를 잊고자 일에 파묻혀 살아왔다. 하루가 갈수록 어미를 닮아가는 딸을 보기 괴로웠고, 쉽지 않았지만 냉혹한 귀족인 척, 감정을 숨기려 애썼다.

후작은 부인의 가는 허리를 다시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시에라가 남편의 손을 붙들며 부드럽게 다그치는 것이었다.

“저 어디 가지 않을 거예요. 나중에 얼마든지 안아드릴 테니, 지금은 만나 뵐 분이 있어요.”

“…알겠소. 왕자님께 안내해주시구려. 아, 그보다 하리에는 괜찮소?”

“…많이 나아졌어요. 이쪽이에요.”

왕자는 응접실에 있었다.

제아무리 왕자라지만 객(客)이 주인을 방에서 맞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그곳에서 한참을 기다렸고, 후작 부부가 나란히 절을 올렸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레오 드 예리엘 왕자님. 이야기는 모두 전해 들었습니다.”

“저야말로 오른 왕국의 방패를 뵙게 되어 기쁩니다, 변경백님. 제가 두 분의 재회를 방해한 것은 아닐까 싶어 걱정입니다.”

“겸양해주시니 송구합니다. 왕자님이 아니었더라면 저는 오늘 이토록 기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하하. 그리 말씀해주시니 제가 더 감사하군요. 하지만 공(功)을 돌려야 하겠습니다. 후작 부인께 도움을 드린 건 제가 아니라 저의 친우이자 호위기사인 레브입니다.”

잠시 공치사가 오갔다.

으레 타국의 왕족과 귀족의 만남이 그렇듯, 서로 조심조심 예법을 교환하였다. 이윽고 시에라 후작 부인이 안주인으로서의 역할을 다했다.

“어머나- 제 정신 좀 봐. 간단한 다과를 준비해오겠어요. 말씀들 나누고 계셔요.”

왕족이든 귀족이든 이 시대의 남성이라면 고귀한 부인이나 영애에게 한발 물러서는 게 통례였다.

후작 부인이 너스레를 떨어 틈을 열어주었고, 끝없이 오가던 예법이 일단락되었다. 손님인 왕자도, 집주인인 후작도 먼저 권유할 필요 없이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그럼… 왕자님께서는 무엇을 얻고자 저를 찾아오셨습니까?”

후작은 돌려 말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물었다. 이미 도와주겠노라 마음을 먹은 상태였기에 왕자의 속내를 떠보거나 할 생각이 없었다.

잠시 뜸을 들인 레오가 답했다.

“저는 군대를 원합니다.”

후작은 나지막이 나오려는 한숨을 삼켰다. 그가 예상했던 요청 중에서도 가장 강한 요구였다.

“…그러시리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저 혼자서는 왕자님의 복위를 이뤄드리지 못할 것입니다. 콘라드 왕국에 왕자님을 도와드릴 세력이 있다면 모를 일이지만요.”

“아니요. 저는 저희 콘라드 왕국의 왕자가 되고자 요청을 드린 것이 아닙니다.”

그럼 군대가 왜 필요하단 말인가?

후작은 아리송한 눈을 들었고, 레오는 뒤에 기립한 레브를 힐끗 확인하고는 말을 이었다.

“제가 이 오른 왕국의 왕이 되고자 합니다.”

“…죄송합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레오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후작 부인이 오기 전에, 얼른 본론을 던져넣었다.

“가이단 후작가는 지금 상당히 곤란한 처지에 놓였다고 들었습니다. 왕자들은 따님을 시집보내라 압박하는데, 변경백께서는 저희 콘라드 왕국의 테르탄 공작가와 혼약을 맺으려다 실패하셨죠.”

“자, 잠시만요. 그걸 어떻게…”

“감당할 수 있으신지요? 아니면 그 젊고, 미친 왕자들에게 충성을 바치다 서서히 몰락하시겠습니까?”

커지는 후작 부인의 걸음 소리. 레오는 그만큼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저는, 후작께 좋은 대체재가 되어 드릴 수 있습니다. 짐작이지만… 친우이신 ‘드라진 후작’께서도 그리 생각하지 않을까 싶군요. 아,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래 기다리셨나요? 오늘 아침에 구운 것들이랍니다. 왕자님의 입맛에 맞으실는지 모르겠네요.”

“하하. 이미 여러 번 먹어보았습니다만, 언제나 맛있었습니다. 부인.”

레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소 다과(茶菓)를 가져온 후작 부인에게서 쟁반을 넘겨받으며 어떤 대화도 나누지 않은 척, 사소한 주제로 말문을 돌렸다.

“제 동생에게 요리를 가르쳐주셨더군요. 예법도 가르쳐주시고… 부인의 마음 씀씀이에 부족함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답니다.”

갑작스러운 감사 표시. 후작 부인은 왕자의 의중을 알아차렸다. 남편에게 공치사하려는 듯해서 고마운 마음을 한껏 담아 되돌려주었다.

“어머나… 전 은인께 행해야 할 도리를 다했을 뿐이랍니다.”

가이단 후작이 본론으로 돌아오기까지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벨리타 왕국과 아스틴 왕국 간에 곧 전쟁이 터질 것이라던가, 오른 왕국의 후계자 수여식 ‘아키네’는 내년 초여름쯤에 열리지 않겠느냐 짐작해본다든가…

레오 드 예리엘은 시에라 부인이 있는 내내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후작 부인이 뭔가 눈치채고 자리를 비켜주었을 때는 전하고 싶은 말을 모두 간접적으로 끝낸 다음이었다.

뒤에 조용히 기립한 레브는 레오의 뻔뻔한 화술에 얼굴을 붉혔다.

내가 다 부끄럽다.

* * *

다음 날, 레브는 영주성을 떠났다.

후작을 설득하는 데에 그가 관여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고, 아직 후작이 확답을 내리진 않았으나 왕자 레오에게 맡겨도 될 듯했기 때문이었다.

해서 레브는 야만인들을 규합하고자 오른 왕국 남부를 향했다.

동생 레나가 어쩐지 퉁명스럽게 굴며 배웅해주지 않아 섭섭했지만, 쿠스를 타고 오르락내리락 언덕길을 달려 나갔다. 그러는 동안 레브는 어느덧 레아를 떠올리고 있었다.

레아는 잘 도착했을까.

수년 만에 만난 친구를 몇 번 보지도 못하고 마을을 떠난 게 한스러웠다. 처음 만난 어머니와 별다른 대화도 하지 못했고, 이전보다 말이 많아진 아버지와 뱀술 한잔 걸쳐볼 시간도 없었다.

왕이 되고자, 모든 걸 버리고 떠나왔다.

– 다그닥 다그닥.

발굽이 넓은 쿠스는 눈이 깔린 숲길도 잘 달렸다.

사실 쿠스는 승마보다는 농경에 적합한 품종이었는데, 레브는 이 녀석이 퍽 마음에 들었다.

반테처럼 약삭빠르지도 않고.

‘반테는 어디서 잘 지내고 있으려나? 아니다. 내가 걱정해줄 필요가 없는 놈인걸. 우디는 지금쯤 농경 말이 되었을 테지…’

레브는 가급적 쓸데없는 생각을 떠올려 머리를 어지럽혔다. 그리고 슬슬 견디기 힘들 정도로 추워진 어느 겨울날, 한 야만인 부락에 도착했다.

“누구냐!”

높은 목책이 둘러쳐진, 꽤 규모가 있는 부족이었다. 정문을 지키던 야만인 청년 다섯이 바짝 날 선 목소리로 레브를 멈춰 세웠다.

“수상한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드위너 부족’의 족장님을 뵈러 왔습니다.”

“네가 뭔데?”

‘자격’이 있는지를 묻는 말에 레브는 잠시 멍청해졌다. 비로소 자신이 시험대에 올랐음을 깨닫고, 침음을 삼켰다.

내게 왕(王)이 될 자격이 있느냐.

광활한 대지에 본인의 문양을 휘날리고, 수백만의 백성과 명예로운 기사들, 고귀한 귀족들 위에 군림하고자 한다면 지배자로서, 그에 걸맞은 행보를 보여야 하는 것이었다.

만약 눈앞의 이 다섯 청년조차 어찌하지 못한다면…

그에겐 자격이 없었다.

주제 파악하고, 그동안 민서가 해왔던 대로 레아를 어떻게 하면 왕자에게 시집보낼 수 있을지 궁리함이 옳으리라. 비루하게.

‘그럴 순 없다. 절대로.’

레브가 이를 악물었다. 이제 그는 위대한 왕족이─ 아니, 야만인들의 영웅이 되어야만 했기에 고개를 높이 치켜들었다.

끝없는 자기 확신과 오만함.

청년들은 그의 달라진 기도(氣度)에 주춤주춤 발을 물렸다.

[ 퀘스트 : 전쟁광 10000/10000 – {통솔} 능력이 한 단계 상승합니다. ]

[ 퀘스트 : 귀족도살자 50/50 – {기품} 능력이 한 단계 상승합니다. ]

[ 퀘스트 : 반역자 10/10 – {왕의 피} 능력이 한 단계 상승합니다. ]

“난 너희들의 장군(將軍)이 될 사람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왕이 되리.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A Princess Is Raised After Death, Desperately Making Her a Princess, Princess is Raised by Death, RPOD, The Princess Is Raised After She Dies, 正規エンディングまで異世界ループ転生, 공주는 죽어서 키운다
Score 8.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19 Native Language: Korean
Minseo was trapped in [Raise Lena]. With the emotionless text, “[Starting Raise Lena]” he became Leo and was imprisoned in an unfamiliar worl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Uh-huh?” “Leo? Why the long face? You! Are you messing with me again?” There, he met his childhood friend, Lena, skillfully picking berries. The lovely Lena. Leo marries her in a peaceful mountain village… [Lena is married! Congratulations.] [You have failed to clear Raise Lena.] [Restarting.] The happiest moment. Lena disappeared. An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Huh? Lena!” “Why have you been spacing out? And why are you looking at me like that? You wanna get beat up?” Lena, clad in thick leather armor and a sword on her shoulder, stared at him with unwavering eyes. It was a different scenar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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