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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86

186화 미국행(1)

땅거미가 지는 밤. 야전진지에 마련된 왕의 천막 안은 적적한 공기를 흘린다.

“······.”

넘겨지는 서류더미. 전장에 와서도 사자심왕은 왕으로서의 업무에 종사해야만 한다.

끊긴 도로와 세수 문제, 각지의 소요에 필요한 병력을 급파하는 문제, 다국적 연합군 사이에서 벌어지는 알력 다툼.

사각사각, 종이의 질감을 긁는 펜촉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울린다.

“······.”

그러한 사자심왕의 모습을, 사자심왕과 똑 닮은 푸른 눈이 응시한다.

화려한 금색에 대비되는 흑단처럼 새까만 머리카락을 제외하면 강직한 자세에서 오는 꼿꼿함이나 두드러진 이목구비는 두 사람의 혈연관계를 짐작하게 한다.

“무슨 일이지. 드라고니아 대공.”

“대공군의 보급물자 요청서입니다, 폐하.”

그러나 서로를 부르는 호칭은 딱딱하다. 어전이라면 모를까 이런 자리에서까지 서로를 경칭으로 부르는 건 비단 그들의 성격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그들이 한 사람을 잃은 뒤, 두 사이에서 윤활유 역할을 해줄 이는 없어졌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공적인 일 이외에 볼일이 없다는 것처럼, 딸은 아버지의 천막을 떠나려 일어섰다. 그런 그녀를 멈춰 세운 건 아버지의 목소리다.

“카리나.”

레온의 목소리가 한층 부드러워진다. 그것은 마치 당장이라도 깨질 것처럼 아슬아슬한 위치게 걸려있던 도자기를 다루듯 조심스러웠다.

“내일 아침, 식사라도 함께하지 않겠느냐.”

평생을 오크와 악마들과 싸우던 사내가, 자유민들에게는 노인의 나이가 되어서야 얻은 자식이었다.

백세를 넘어선 늙었지만, 누구보다도 젊은 아버지는 증손녀뻘의 친딸에게 한없이 조심스럽다.

“군무가 바쁩니다.”

“그러한가······.”

카리나 드라고니아 대공은 딱딱한 말투로 아버지의 시도를 무산시켰다.

차갑고 딱딱한 부녀관계. 두 사람의 관계는 언제나 이런 식이다.

“그래, 일이 바쁘겠지. 그만 들어가 쉬어라.”

“옥체 보중하십시오, 폐하.”

그 한 사람마저 떠나간 천막 안. 남겨진 한 사람은 적적하게 종이를 넘겼다.

[네 뜻대로 하여라, 드라고니아 대공! 꼴도 보기 싫다! 짐의 눈앞에서 사라져라!]

결국 부녀의 관계는 파탄에 이를 것을 내심 짐작하면서.

·········

······

···

“······.”

“폐하? 괜찮으신가요?”

부드러운 목소리가 걱정하듯이 옆자리에서 울린다. 시야에 들어온 것은 붉은머리에 황금빛 눈동자를 가진 소녀다.

“뭘 하려던 것이냐?”

“어음··· 식은땀을 흘리시기에 닦아 드리려고 했어요.”

“흥, 네 녀석이 시녀 노릇을 하더니 제법 눈치가 있구나.”

레온은 하리의 시중을 받아 들며 제게 다가오는 또 다른 이를 보았다.

-폐하, 저온의 분비액체 발산. 긴장으로 인한 무호흡증 증세로 보임.

“폐하가 긴장했다고요?”

야피의 진단에 놀라는 하리. 레온이 제 앞에 놓여진 물을 마셨다. 딱 적당하게 데운 따뜻한 물이었다.

“페하, 괜찮으신가요?”

“별일 아니다. 그저 옛꿈을 꾸었을 뿐이니.”

하리는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레온이 이런 모습을 보여준 적은 그녀가 경험하기로 단 한 번뿐이다.

라이온하트 최후의 전쟁에서, 처음으로 그의 슬픈 눈을 봤다.

“여왕님이라도 모셔올까요? 좋은 꿈을 꿀 수 있게요.”

“딱히 악몽은 아니었다. 오히려··· 더 자주 꾸었으면 했구나.”

레온은 하리의 배려와 기특함에 머리를 쓰다듬으며 창문으로 시선을 보냈다. 새하얀 구름들이 자욱하게 낀 창공.

그들은 하늘을 비행하고 있었다.

“합중국까지는 얼마나 걸리더냐.”

“아, 넵! 지금이··· LA를 지났으니 네 시간 정도면 워싱턴 D.C.에 도착할 것 같아요.”

“오래도 걸리는구나.”

“이것도 미군의 전세기 덕에 단축한 것이긴 해요.”

-전용기 제작 필요? 인천에서 워싱턴까지 한 시간이면 감.

야피의 미래세계적 사이버펑크 전세기는 이미 무한저장장치에 설계도가 있었다. 이 시대에는 자기부상해상열차나 대륙간 궤도 이동수단을 고려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지만.

-접수완료.

“또 뭔가 이상한 걸 만들려고 하고 있어······.”

현대 문명사에 획을 그을 과학의 발전을 목도했지만, 하리는 혀를 내두르며 좀 더 인간적인 물건을 만들기를 바랐다.

* * * *

미국 대통령이 직접 마중을 나올 만한 이들은 전세계로 둘러봐도 그 범위가 협소하다.

주요 동맹국의 행정수반 또는 영국 여왕쯤은 되어야 미국 대통령이 기다리고 의전대를 지휘하며 화이트 타이로 격식을 갖추는 것이다.

미국 제49대 대통령 안토니 홉슨이 직접 타이를 고치며 기다리고 있는 인물이 행정수반도 아닌 일개 민간길드의 길드장이라면 그것은 야당과 온 국민의 질타를 받았을 것이다.

세계최강국이자 최대의 부국인 미합중국의 대통령이라는 직함은 그 자신조차 가볍게 여겨선 안 되는 무게가 있어야 하는 법.

적어도 자국의 대통령이 민간기관의 수장에게 굽신거리는 꼴을 보고 싶어하는 국민은 없다.

하지만 이 한 사람에 한해서는 의외로 별다른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한국에서 사자심왕이 온다!]

[규격 외 등급만 넷! 세계최대의 S급 전력을 보유한 사상최강 길드! 미 대륙에 상륙 예정!]

[불타는 검 기사단이 오는가에 전문가들이 집중!]

[역대 최고속도로 성장하는 종교 만신전의 대리인 레온 드라고니아 라이온하트. 과연, 미 기독교 신자들은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이계의 생존자는 언제나 헌터 뉴스에서 이슈가 되는 이들이지만, 최근에는 그 열기도 한층 식었다.

이젠 그 숫자가 흔해졌다고 표현할 정도로 늘어난 것도 있지만, 그들이 지구의 헌터들과 비교하면 유별나게 특출난 것도 적기 때문이다.

하지만 라이온하트의 사자심왕 레온 드라고니아 라이온하트.

스페로 왕국의 마술사 여왕 베아트리체 알리기에리 스페로.

천년도시의 킬링머신 야크트 스피너.

마찬가지로 라이온하트의 전쟁과 불꽃의 성배기사 불카누스.

한명한명이 등장과 동시에 해외토픽 전면을 차지하며 헌터들의 세계를 뒤흔드는 초강자들.

그들의 이번 방문은 미국 대통령뿐 아니라 미 행정부 내각의 주요 장관이란 장관들은 죄 몰려올 정도로 중요했다.

물론 이것과는 별개로 미국이 오랜 시간 모셔온 여신의 조언도 한몫했다.

[레온 왕은 여러분들의 기준에서는 상당히 구시대적인 사람이지요. 비합리적이라는 게 아닙니다. 자신에게 마땅한 힘과 권위가 있다고 확신하는 겁니다.]

게이트가 열린 이후 미국은 이계의 생존자들과 적극적으로 접촉해왔다.

지구와 상이한 그들의 문화와 행동양식에 대해 꾸준히 연구했고, 레온에 대해서도 아주 면밀히 조사를 진행했다.

무엇을 먹는지, 어떤 사상을 가졌는지, 평소에는 어떤 취미생활을 하는지.

“각하, 곧 도착입니다.”

“후우~ 긴장되는군.”

홉슨 대통령은 타이를 고쳐매며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상대는 중세 세계관의 절대군주. 거기에 진짜 신들의 권위가 함께한다. 그런 이와 회담하기 위해 주요 비서관들이나 관료들은 모두 왕궁예법을 교육받았다.

“누가 올까? 그 둘은 반드시 오겠지?”

여기서 말하는 그 둘이란 레온와 베아트리체였다.

각국 행정부는 레온의 퍼스트 레이디를 베아트리체라고 사실상 낙점하고 있다. 평소 권위주의적인 레온이 평민과 귀족을 구분하는 태도가 분명했고, 베아트리체는 유일하게 레온과 대등하게 말을 섞는 왕족이었다.

거기다 무언가 행사가 있으면 그 둘이 빠짐없이 함께했으니 베아트리체를 퍼스트 레이디로 여길 수밖에.

“문제는 불카누스 경과 야크트 스피너 경이군요. 대만에서 보여준 그 신병기와 무위··· 마술사 여왕과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대만 전투는 전세계를 쇼크에 빠뜨린 사건이었다.

중국을 사실상 끝장냈다고 평가받는 상하이 참변의 대악마 스카쟈카리어 바로 아랫급으로 추정되는 대악마가 무려 셋이나 출몰했다.

그중 둘을 불카누스가 압살했고 야크트 스피너 또한 한 마리의 대악마를 쓰러뜨리는 데 성공했다.

이것만으로 어마어마한 무위였지만, 그곳에서 새롭게 무위를 선보인 베아트리체는 전보다도 더 강해졌다는 평가다.

닿기만 해도 죽는 죽음의 안개를 휘두르는 대군병기의 결정체. 그녀 한 명이 마탑주급 대마법사 여럿보다 낫다는 평가다.

“간부진들도 중요하지만 그 밑의 기사단도 중요합니다. 불타는 검 기사단 전원은 아니더라도 최소 스무 명은 왔으면 하는군요.”

“최초로 창설한 1기 기사단도 강력한 무력을 자랑합니다. 특히 한하리나 천소연은 이제 어지간한 S급 헌터 상위권이란 평가도 있어요.”

그 자료는 홉슨 대통령도 읽어봤다.

불과 올해 초까지만 해도 A급과 B급 헌터였던 협회의 신입과 아카데미 생도가 반년도 안돼 S급 헌터의 반열에 섰다.

그 휘하 기사단만 해도 어지간한 S급 공략대 수준.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학생 위주였다는 게 믿기지 않는 강함이다.

‘대박은 간부 셋 이상에 불타는 검 기사단 일부. 중박은 천소연 기사단에 간부 둘인가.’

아무래도 대박을 바라기엔 조금 힘들 것 같다. 한국도 자국의 최대급 전력이 우루루 빠져나가는 걸 바라지 않을 테니까.

‘메리엘 여신님이 뭔가 해두었다고 했지만, 중박만 되어도 더 바랄 게 없다.’

대형 수송기가 활주로에서 멈추며 붉은 융단이 깔린 의전 앞에 섰다.

곧이어 문이 열리며 가장 먼저 모습을 보인 건 붉은 댕기머리소녀와 검은머리의 동양인 소녀 둘. 그리고 자료에 있던 기사단원 소년 둘이다.

“좋아, 일단 저 넷이 왔다는 건 일개 기사단이 통째로 왔다는 거군.”

국가 규모의 환영인파에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내려오는 네 사람. 그들을 따라 전 아카데미 생도 출신 기사단원들이 차례차례 내린다.

그들 모두가 데이터베이스에 있던 만신전 1기 기사단원들이자 전원이 A급 헌터부터 시작하는 성법 사용자들.

그들의 전투력은 살육대공 아카샤의 영지를 토벌할 때, 인상적인 영상으로 남겨졌다.

그 뒤로 내린 것은 계단에서 폴짝 뛰며 하리의 정수리에 안착한 거미기계.

“야크트 스피너 경입니다. 그가 왔다는 건 예의 신병기들도 이번 게이트에 동원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좋아좋아. 그 슈퍼로봇 구경 좀 하겠어.”

다음으로 내린 것은 전중세적인 풀 플레이트 아머를 껴입은 붉은 기사였다. 몇몇은 투구를 벗고 있어 헌터관리국 관계자가 단박에 알아봤다.

“라이하르 데버 경입니다! 불타는 검 기사단의 3번검!”

“갈라탄 경과 타르한 경도 있군요. 게이트를 단독으로 공략하는 영상도 있는 최상위권의 강자입니다!”

불타는 검 기사단의 네임드들이 차례차례 모습을 드러내자 쾌재를 부르는 헌터관리국 요원들.

그들이 왔다는 건 이번 공략에 불타는 검 기사단 일부도 참전한다는 뜻일까?

‘설마 전원이 왔겠나──’

순간 희망적인 관측이 서렸지만, 다음으로 등장한 인물에 모두의 눈이 크게 떠졌다.

-불카누스 경!

-도살자 불카누스다!

-그 불카누스가 미국에 왔어!

불타는 검 성배 기사단의 단장이자 대악마들도 찍어누르던 초력의 강자. 전쟁과 불꽃의 성배기사 불카누스가 그 거대한 모습을 드러냈다.

“저, 전부 왔다.”

안토니 홉슨 대통령은 입가가 씰룩거리는 걸 멈출 수 없었다.

1기 기사단이 왔을 때만 해도 기대치가 최고조를 찍었지만, 불카누스까지 왔다니 크리스마스 선물을 미리 땡겨 받은 기분이다.

안 그래도 인류 최악의 재앙인 흑색 게이트의 워싱턴 D.C. 출몰로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는데, 든든한 만신전 기사들의 도착에 모두 날아가는 듯하다.

이로써 요동치던 나스닥 지수도 빠르게 안정을 되찾겠지. 흑색 게이트가 뜰 때면 괜히 정보통제가 있는 이유가 주가와 주변 땅값이 박살나기 때문이다.

인류는 아직 흑색 게이트의 끔찍한 참상을 항상 두려워하고 있었으니까.

“라이온하트의 사자심왕! 레온 드라고니아 라이온하트께서 내방하셨습니다!”

곧이어 마지막으로 사자심왕 레온과 마술사 여왕 베아트리체가 함께 계단을 내려왔다.

아마 세계에서 가장 유명할 인물.

찬란한 금색머리와 푸른 벽안··· 거기에 300세라는 초월적인 연령에도 한창 때의 젊은이처럼 훤칠한 미남은 인터넷 세계에서 가히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그리고 그런 그를 따르는 베일을 쓴 여인. 언제나 얼굴을 가리고 다니기에 정확한 이목구비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간혹 일부만 드러난 얼굴은 ‘초’가 대량으로 붙는 미녀란 목격증언이다.

그야말로 선남선녀인데, 세계 정점의 무력까지 있으니 두 사람의 인기는 월드 클래스라고 해도 무방했다.

“미합중국에 잘 오셨습니다. 저희 합중국은 두 분 폐하와 기사들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홉슨 대통령은 친애의 징표로 손을 내밀었다. 레온은 기꺼이 대통령의 손을 쥐며 웃음을 띄었고.

“그대가 이 대국의 대표 되는 자인가. 반갑네, 안토니 홉슨 대통령. 짐이 라이온하트 왕국의 15대 사자심왕 되는 레온 드라고니아 라이온하트일세.”

레온은 국민의 투표로 뽑인 행정수반을 자신과 동급의 왕족으로 여기진 않았지만, 그 나름의 대우를 해주었다.

적어도 일개 평민으로 여기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그런 그가 홉슨 대통령의 손을 꽉 잡은 채 놓아주지 않았다.

“······폐하?”

“내 한 가지 확인할 게 있네.”

“그게 무슨······.”

──자네 악종인가?

소름.

홉슨 대통령과 행정부 각료들의 안색이 새파랗게 굳었다.


           


The Knight King Who Returned with a God

The Knight King Who Returned with a God

singwahamkke dol-aon gisawangnim, The King of Knights Returns with the Gods, 신과함께 돌아온 기사왕님
Score 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2 Native Language: Korean
I returned to Earth as the invincible Knight King. But the Gods came with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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