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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86

185. 소꿉친구 – 군주

패전 중인 군대는 티가 난다.

그 증거는 군영 곳곳에서 드러나는데, 의기양양하게 목청을 높여야 할 병사들이 수군거리고 있다면 틀림이 없었다.

해이해진 군율 사이로 의심과 불만이 번져 깃발이 처지고, 텐트마저 후줄근하다.

산전수전 다 겪은 정예병이라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누구도 지는 전쟁을 좋아하지 않는 법이다.

더욱이 그 군대가 훈련조차 받지 못한 파릇파릇한 신병으로 가득 차 있다면, 지휘관은 집단적인 탈영을 우려할 필요가 있었다.

“빌어먹을! 그럼 증원은? 증원은 언제 도착한다는 거냐?! 급한 대로 용병이라도 고용해 보내준다더니 그것조차 안 보내면 전선을 어떻게 유지하라는 거얏!!”

– 쾅!

오른 왕국군 총사령관이 탁자를 걷어찼다. 잉크병이 쏟아지고, 행여나 젖을세라 댓 명의 부관들이 황급히 서류 뭉치를 집어 들었다.

모두 거듭된 패전을 기록한 종이 쪼가리들이었다.

“기사만 잔뜩 있으면 뭘 해! 검을 휘둘러본 적도 없는 신병들뿐인데. 저쪽은…”

빌어먹을.

신병들의 탓을 하긴 했으나, 사실은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훈련받지 못한 신병이라도 갑옷을 입히고 무기를 손에 쥐여주면 최소한의 밥값은 한다. 참혹한 전장에서 살아남으려 발버둥 치기 마련이다.

하지만 저쪽이 분대 규모를 키운 게 문제였다. 총사령관은 격심한 스트레스로 머리를 움켜쥐었다.

“마법사는 뒀다가 국 끓여 먹으려고 아끼나, 두 명밖에 안 보내주고는… 뭐? 두 달?”

이대로는 두 달은커녕 이 주일을 장담하지 못한다. 전선은 계속해서 밀려나는 중이었고, 어찌 된 영문인지 기사의 사망률도 심상치 않았다.

특히 동부 전선이 그랬다. 그곳에서 죽은 기사만 벌써 열다섯, 북부 전선의 다섯 배에 달하는 숫자였다.

이게 다 마법사가 부족한 탓이다.

마법사가 부족해서 상대의 시야를 보기는커녕 이쪽의 움직임만 노출되고 있으니 기사들이 죽어 나가는 것이었다.

기사단장은 절대 그럴 리 없다, 기사는 ‘구름 눈’ 마법을 피하고자 언제나 나무 아래 또는 수풀 사이로 움직인다 주장하였으나 총사령관은 믿지 않았다.

미리 알고 함정을 파지 않은 이상에야 어떻게 넷으로 묶인 기사들이 몰살을 당할 수 있단 말인가.

기사단장은 저들의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그리 말했음이 틀림없었다.

“저… 총사령관님.”

부관이 눈치를 살폈다. 성질이 나서 씩씩거리는 총사령관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왕자님들이 곧 도착하실 겁니다. 마중을 나가셔야 하지 않을는지…”

총사령관이 눈알을 부라렸다.

이게 문제의 발단이었다.

조금 전, 총사령관은 왕자들이 온다는 보고를 듣고 반색했다. 훈련을 마친 증원군이 드디어 도착한 것이라 지레짐작하고 규모를 물었다가 복장이 터져버렸다.

왕자들이 데려온 건 백여 명의 기사였다. 아마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귀족들을 닦달해 넘겨받은 귀중한 전력이겠으나…

지금은 병사가 필요하단 말이다! 그것도 노련한 병사가!

마법 전력을 확충하지 못할 바에는 병사라도 많아야 했다. 저쪽이 분대 규모를 키운 이상, 현장에서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십인장급의 병사가 많이 필요했다.

한데 왕실은 네비스 수비병마저 보내지 않았다. 아주 오랜 훈련을 받았고, 당장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었음에도 보내길 거부했다.

“마중은 얼어 죽을… 알아서 오라고 해.”

총사령관은 움직이지 않았다. 팔짱 끼고 의자에 앉아 씨근대길 잠시, 애톤, 앨제어 드 로그럼 왕자들이 막사에 당도하였다.

총사령관은 화를 내려고 했다. 하지만 앨제어 왕자가 꺼내든 문서를 보곤 하! 한숨을 뱉었다.

“지휘권을 인계받겠다. 이 시간부로 총사령관은 나다.”

애톤 왕자의 말이었다.

왕의 직인이 찍힌 인계 명령서. 총사령관에겐 뭐라 따질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나라는 이렇게 망하는구나, 절망하며 직위를 넘겨주었다.

마음 같아선 될 대로 돼라. 사직하고 전장을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평생을 장군으로 살아온 사람으로서 차마 그럴 순 없었다. 여기서 뼈를 묻는 한이 있더라도 왕국이 어떻게 망하는지 지켜볼 의무가 있었기에 왕자들이 하는 꼬락서니를 지켜보았다.

그런데,

“전선에 나간 기사 일부를 복귀시켜라. 별동대를 꾸린다. 기사들은 소수의 병사를 이끌고 동부로 가 반역자들의 영지를 쳐라.”

“하오나 지금도 밀리는 중입니다. 기사들이 빠지면 전선이 붕괴될 겁니다.”

“마법 전력에서 뒤처지는 이상, 전선은 밀려날 수밖에 없다. 그럴 바에는 기사를 활용해 반란군의 결집을 흩뜨리겠다. 빈집을 친다. 마흔도 안 되는 귀족들쯤이야… 한 영지에 기사 다섯이면 충분하겠지?”

“…전선은 어찌하시겠습니까?”

일개 장군으로 격하된 총사령관이 물었다. 며칠간 곁에서 지켜본 결과, 왕자들이 소문으로 들은 것보다 멍청하진 않다고 판단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말투였다.

앨제어 드 로그럼 왕자가 싸늘하게 말했다.

“우리도 분대 규모를 늘리면 된다. 저쪽이 서른으로 늘렸다고 했지? 우린 마흔으로 묶어라. 병사들을 물려 전선을 좁히면 가능하다.”

“네? 안 됩니다! 그렇게 많이 묶으면 마법사의 공격을 받게 됩니다. 예로부터 한 분대에 열 명을 배정한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마법사의 피로도와 피해를 비교해 정해진…”

“상관없다. 마법사에게 죽든, 서른으로 묶인 적군과 싸우다 죽든. 죽기는 매한가지 아니냐. 우린 두 달만 버티면 된다. 전선이 무너질 때쯤… 지휘부는 퇴각하겠다.”

아, 미친놈들이었구나. 장군은 이 왕자들이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수염을 푸들거리며 외쳤다.

“차라리 마법사를 더 부르십시오! 네비스 수비병은 왜 오지 않는 겁니까? 지금 훈련 중인 병사들은요?”

왕자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되려 자신만만하게 답했다.

“이까짓 전투에 연연할 필요 없다. 전쟁의 향방은 수도, 네비스에서 갈릴 것이다.”

* * *

휘유…

본인의 막사로 돌아온 왕자 레오가 한숨을 내쉬었다. 뒤따라온 근위기사에게 “수고했네. 자네도 그만 가서 쉬게.” 말하여 돌려보내곤, 본인은 탁자에 앉았다.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들.

전쟁을 치르는 장군과 부관, 참모, 귀족들이 올린 상소들이었다. 시급을 다투는 보급과 병참 계획, 증원, 산발적인 전투 경과와 피해 사실 등이 결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의료 인력 확충을 요구하는 군의관의 성토와 점령한 마을 도시에서 이뤄진 징병이 합법적이지 않다는 불평불만, 일상처럼 벌어지는 명령 불복종과 탈영병 처리 같은 군 재판 문제, 지휘관 교체나 귀족들이 이끄는 군대 간의 알력 다툼까지…

총사령관인 레오가 처리해야 할 문서는 끝도 없이 많았다.

이마저도 부관과 참모들이 본인의 선에서 처리할 수 있는 것을 제하고 올려보낸 것들이었다.

레오에겐 고단한 몸을 눕힐 틈도 없었다. 최대한 빨리 처리하지 않으면, 문제가 더 커져서 돌아오기 마련이었다.

그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움켜쥐고 사각사각, 깃펜을 놀렸다. 일렁이는 촛불에 그의 얼굴에 새겨진 흉터가 더 깊어 보였다.

전쟁은 순조롭게 진행 중이다. 증원에 실패했는지 상대는 계속해서 거점을 빼앗기며 밀려났고, 네비스가 멀지 않았다. 기사가 많다는 장점을 활용해 반란에 동참한 귀족들의 영지를 습격해왔지만, 우리의 결속은 흔들리지 않았다.

레나 덕분이었다.

거지남매… 아니, ‘내가’ 움직이기 시작한 지도 열 달이 넘었다. 동생은 무서운 속도로 자라나 정말이지 아리따운 여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굽이치는 금발 머릿결 사이로 보이는 뺨이 성숙하고, 눈동자엔 단호한 주관이 잡혔다. 목은 여전히 하얗게 가느다랬으나 꼿꼿하였고, 봉긋한 가슴이 상의를 들어 올렸다.

레나는 더는 소녀가 아니었다. 아리땁기만 한 공주도 아니다. 동생은.. 군주(君主)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선 본인이 어떤 역할을 맡아야 할지 안다는 듯이, 레나는 드레스를 벗었다. 견고한 제복을 입고 각 지역을 돌아다녔다.

중립을 선언한 귀족을 찾아가 회유하였고, 총관을 설득해 제 주인을 배신케 했다. 시민들에게 얼굴을 비친 것만으로도 징병에 막대한 도움을 주었다.

레오는 잠시 깃펜을 내려놓았다. 조금 전에 있었던 회의에서 레나가 보인 위엄을 떠올렸다.

“돌아가선 안 됩니다.”

공주의 단호한 목소리에 소란스럽던 막사가 조용해졌다. 황금빛 눈동자가 번쩍여 귀족들의 불안을 찍어눌렀다.

“지금 사분오열해 영지를 지키러 돌아간다 한들,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하면 결국 토벌당할 것입니다. 우리는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럼 영지가 습격당하도록 내버려 둬야 한단 말씀입니까?”

차분해진 귀족들 사이에서 한 귀족이 입을 열었다. 여전히 불만이 있었으나 직전처럼 얼굴을 붉히며 흥분하지는 않았다.

레나는 공손히 고개 숙였다.

“소녀는 알지 못합니다. 제 무지를 용서하세요. 다만, 이곳에는 훌륭한 장군님들이 계십니다. 영지가 이미 습격당하신 분도 계시고, 습격당할 것이 두려운 분도 계시겠지만, 저희 장군님들을 믿어주세요.”

레나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 귀족들의 눈이 왕자를 포함한 수뇌부에 닿았다. 흥분이 가라앉은 적막 속에서 레오는 본인이 시험대에 올랐음을 깨달았다.

동생이 마련해준 무대다.

여기서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이면, 어렵게 끌어모은 군대가 갈기갈기 찢어질 터였다.

“저희에겐 기사가 많지 않습니다.”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만, 실망한 기색이 스쳤다. 레오는 가라앉으려는 분위기에 방점을 찍었다.

“하지만, 마법 전력에서 압도적인 우위에 있으며 정예화가 완료된 병사가 많습니다. 그 정예부대에 마법사를 딸려 보내겠습니다. 동부의 영지들은 이미 손쓸 도리가 없으나… 죄송합니다. 북쪽과 북동쪽의 영지들은 사수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뒤, 레오는 무척 송구스럽다는 태도를 보였다. 가장 큰 피해자일 동부의 변경백, 하르베이 가이단 후작에게 고갯짓했다.

변경백으로서 소유한 그의 두 번째 영지가 초토화됐다. 영주성이 있는 도시 ‘보스포’와는 연락이 두절되었고, 주변 다른 영지들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전선을 크게 돌아 숨어든 기사들이 영지를 지키는 총관, 관료들을 몰살해버린 것이다. 왕실 기사로서 이곳이 자유도시임을 선포하고, 새 총관을 앉혀 놓았을 수도 있다.

다행히 가이단 후작은 양 손바닥을 펼쳐 들었다. 영지가 습격당한 다른 동부의 귀족들은 그런 후작의 태도에 별달리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마법사 일곱 명이 진영을 떠났다. 각기 천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후방을 교란하는 기사들을 저지하고자 북동부를 향했다.

전황에 차질이 올지도 모를 손실이었으나 그 정도는 필요했다. 귀족들이 제 병사와 기사들을 데리고 이탈해버리는 것보단 이러는 편이 나았다.

반란을 일으킨 귀족들이 똘똘 뭉쳐 함께해야만, 아직도 어느 편에 설지 저울질하는 귀족을 끌어들일 수 있었다. 귀족 하나하나는 단순히 병력을 지원하는 존재가 아니라 왕국의 얼마만큼 되는 비율이 반란을 지지하는지를 드러내는 척도였다.

수많은 귀족 가문이 모여 하나의 왕국을 이루고 있는 것이니까.

레나가 빙긋 웃었다.

남몰래 살짝 윙크해주었는데, 레오는 그것이 마치 시험을 통과했음을 알리는 증명 같아서 마음이 놓였다.

조금 전의 상황을 떠올리던 레오는 내려놓은 깃펜을 만지작거렸다. 아까는 안도감에 별다른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우리가 뭔가 잘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레브로부터 민서의 생각을 전해 들었음에도.

레나는 이미 훌륭한 군주다. 그간 레브를 왕위에 앉히기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어쩐지… 영 삽질하고 있다는 생각을 버리기 어려웠다.

‘그냥 레나가 알아서 하게 내버려 뒀으면 일이 쉬웠을까? 이건 ‘레나 키우기’이지 우리가 주인공이 아니잖아.’

하지만 이 소꿉친구 시나리오에서는 레아가 레나인 걸. 근데 걔는… 사제가 되고 싶어 해.

기막힌 모순이다.

레브는 이 골 때리는 상황을 해결하고자 본인이 왕위에 오르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레아의 신분을 상승시켜 민서가 바라는 클리어도 이루어 주고, 공주가 사제가 되지 못하란 법이 없으니 레아는 본인의 소원을 성취할 것이었다.

레오는 고개를 흔들어 의심을 털어버렸다. 레브를 만나 시나리오가 얽히면서 혼란이 왔을 뿐이다.

소꿉친구 시나리오와 거지남매 시나리오는 다르다. 동생에게 위대한 군주가 될 재능이 있는 건, 거지남매 시나리오가 {혈통}을 되찾기 위해 발버둥 쳐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 무엇도 주어지지 않는 시나리오에서 재능마저 없으면 곤란하지 않은가.

그걸 좀 더 일찍 깨닫지 못한 게 원통스러울 뿐…

레오는 다시 깃펜을 들었다. 문서 하나하나를 읽고 서명하였고, 간간이 편지를 작성했다.

서명한 문서는 옆에 쌓아두었는데, 이때 익숙한 이름이 섞인 한 줄의 문장이 있었다.

– 동부 보급로를 지원하던 보칼리 자작, 전사.

산더미 같은 서류들.

레오는 자작의 죽음을 기릴 시간이 없었다. 나이 든 자작에게 미안한 감정을 느꼈으나 그뿐, 금방 잊혀졌다. 문서는 이내 다른 서류에 덮여 자취를 감췄다.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A Princess Is Raised After Death, Desperately Making Her a Princess, Princess is Raised by Death, RPOD, The Princess Is Raised After She Dies, 正規エンディングまで異世界ループ転生, 공주는 죽어서 키운다
Score 8.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19 Native Language: Korean
Minseo was trapped in [Raise Lena]. With the emotionless text, “[Starting Raise Lena]” he became Leo and was imprisoned in an unfamiliar worl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Uh-huh?” “Leo? Why the long face? You! Are you messing with me again?” There, he met his childhood friend, Lena, skillfully picking berries. The lovely Lena. Leo marries her in a peaceful mountain village… [Lena is married! Congratulations.] [You have failed to clear Raise Lena.] [Restarting.] The happiest moment. Lena disappeared. An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Huh? Lena!” “Why have you been spacing out? And why are you looking at me like that? You wanna get beat up?” Lena, clad in thick leather armor and a sword on her shoulder, stared at him with unwavering eyes. It was a different scenar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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