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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91

190. 약혼관계 – 입김

“잠깐 얘기 좀 하자꾸나.”

“네.”

노엘 덱스터가 아들을 불렀다. 서재로 돌아와 레오를 앉히곤 아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뒤따라온 레나는 망연자실한 표정이었다.

“언제부터냐?”

“그저께 즈음입니다.”

노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견하다 칭찬하며 어깨를 두들겨주고 싶지만, 쉬이 그럴 수가 없었다.

아들은 날 뛰어넘었다.

그것도 상당히 큰 폭으로.

노엘 덱스터는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몰라서 잠시 입만 뻥긋거렸다. 고작 몇 합에 불과했던 조금 전의 대련을 곱씹다가 “허 참.” 허탈하게 웃고야 말았다.

나름 검술에 자신이 있었다.

아스란 왕국이 자랑하는 최연소 기사였고, 험난한 내전 속에서 나만의 검술을 완성했다.

이 과정이 별로 어렵게 느껴지진 않았다. 검을 들고 있노라면 검은 내게 나아가고 싶은 방향을 일러주었고, 거기엔 분명한 정답이 있었다. 마음에 쏙 드는 검로(劍路)가 나를 유혹해왔다.

널 도저히 따라잡지 못하겠다면서 절망한 형과 나를 괴물처럼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이 되려 이상하기만 하던 시절이다.

물론 내가 최고라 생각하진 않았다. 이 세상에는 소드마스터라는 범접할 수 없는 괴물들이 존재하였고, 은퇴해 에이브릴 성으로 내려왔을 때는 난생처음으로 어떤 벽에 부닥쳤다.

검은 여전히 내게 길을 알려주었지만, 그건 새롭다기보다는 이전 것의 답습. 단순한 습관이었다.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벽에 부닥친 검사의 절망감과 만취한 형의 울부짖음을. 나는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라는 걸.

그래도 마음속엔 어떤 자부심이 있었다. 온 대륙을 통틀어 양손에 꼽힐 만한 실력은 되리라 추측하였고, 나를 가로막은 이 벽이 소드마스터가 되기 위한 마지막 관문이라 짐작하였다.

허나 이조차도 오만이었다.

아들은 나를 뛰어넘었음에도 소드마스터가 아니었다. ‘아르펜’ 선배를 곁에서 지켜봤기에 알 수 있었다. 존경하는 선배와의 격차가 이렇게 넓었었는지를, 중간에 레오가 끼어든 지금에서야 알게 되었다.

나도 일개 검사에 불과했던 거다.

“이제 어쩔 생각이냐.”

노엘 덱스터가 말했다. 더는 네게 가르칠 것이 없음을 시인한 것이었는데, 아들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곤 입을 열었다.

“저는 기사가 되려 합니다.”

…그렇겠지.

허나 노엘은 침묵을 지켰다. 추천장을 써주겠노라는 답변이 목에 걸렸으나, 아들에게는 그런 게 필요치 않아 보였다.

해서 레오가 말했다.

“우선 영주님을 뵙고 싶습니다. 기사단 입단 시험까지는 시일이 많이 남았으니, 임시 기사로서 에이브릴 성에서 경험을 쌓고 싶어요.”

“…그것도 좋겠구나. 알았다. 내일 영주님을 뵙자꾸나.”

아들의 앞길에 가타부타 조언할 것이 없었던 아버지가 일어났다. 반쯤은 대견함으로, 또 다른 반은 경외를 담아 아들의 어깨를 짚었다.

“어머니가 자랑스러워하실 게다.”

“…”

“그럼 잠깐 다녀오마.”

레오는 영주님과 약속을 잡아놓겠다며 나서는 아버지를 배웅했다. 뒷모습을 바라보다 주먹을 쥐었다.

‘아버지를 처음으로 이겼다.’

그동안의 과거가 새삼 떠올랐다.

형편없는 검술 실력 때문에 전쟁에 따라가지도 못했던 첫 회차. 몰래 지원했다가 아버지께 죽도록 맞았다. 며칠이나 다리를 절었고, 레나는 홀로 전장에 나갔다. 그리고 돌아오지 못했다.

가까스로 전쟁에 참전할 수 있었던 약혼관계 두 번째 회차.

카트리나를 만나 혈전을 벌였고, 나는 엄지를, 레나는 팔을 잃었다. 패잔병 같은 모습으로 돌아와 레나와 결혼했었다.

세 번째 회차 때는 {합격술} 덕분에 아버지의 인정을 어렵지 않게 받아냈다. 카트리나와 피 터지게 싸우다 협상해 돌려보냈고, 경계근무를 서던 중, 헤르만 포르테 백작의 손에 죽었다. 제 가슴을 내리쳐 목갑을 깨뜨리던 레나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리고 전쟁을 나가지 않았던 세 번째 회차.

레오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회차였다. 레나와 파혼하겠노라 애썼던,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다. 레나의 울분에 찬 얼굴이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네 번째 회차는…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을 전달해줬어야 할 민서가 정신줄을 놓았던 때라 마지막에 본 엔딩 텍스트들만이 그가 기억하는 전부였다.

그게 전부였다면 당시에 있었던 굵직한 사건들만을 알았을 테지만, 다행히 ‘내’가 사라지는 마지막 순간에 중얼중얼 남겨둔 것이 있었다.

유안과 브리나 자작이란 녀석을 조심하라든가 어머니의 묘지를 찾아갔을 때 큰아버지와 레나의 반응이 이상했다든가 하는 당부들이었는데, 개중에는 굉장히 사소한 이야기들도 섞여 있었다.

아니다. 사소하진 않다. 모두 레나와 관련한 이야기들이니까.

‘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레나와 있었던 추억들을 늘어놓았다. 그녀가 가죽끈을 선물로 주겠다고 숨겼던 일이라던가, 함께 잠자리에 드는 게 부끄러워 만취할 때까지 술을 마셨다던가, 여행 다니며 한시도 손을 놓지 않았고, 자주 키스했다던가…

“…”

나는 어째서 이런 것들을 늘어놓았을까. 어째서 다음 차례에게 전달해야 할 내용이라 판단하고 미주알고주알 떠들었을까.

엔딩 텍스트를 보아선 전혀 기쁘지 않은 결말이었을 텐데.

‘…민서에게 협력하라는 거겠지.’

나도 충분히 행복했으니까 그만하자는 뜻이다. 내가 기억하지 못할 걸 알고 신신당부한 것이었다.

솔직히 처음엔 내키지 않았다.

파혼을 통보받은 레나가 받았을 상처를 생각하면, 이가 갈린다. 아직 내가 민서인 탓에 자책이 뒤섞였으나, 동시에 레오 덱스터이기에 혐오스러웠다.

그 복잡한 감정을 추스르느라 방에서 나올 수가 없었다. 동생을 내 손으로 죽인 감촉까지 되살아나 몸부림쳤다. 그걸 다잡아준 게 이전 회차의 내가 남긴 전언이었다.

우리 행복했다고.

나도 모든 {이벤트}를 무시하며 쏘다녔으니 그만 민서를 용서하라는 당부였다.

‘지만 행복했으면 다냐.’ ─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비난은 내게 고스란히 되돌아왔다. 그래서 달아날 수 없었다.

레오가 고개를 털었다. 아버지를 이겼다는 성취감은 사라진 지 오래라 씁쓸한 안색으로 뒤돌아섰는데, 뒤에는 어쩐지 조용해진 레나가 있었다.

“…장터에 다녀올까? 가죽끈 사러 간다면서.”

“…”

“왜 그래?”

레나가 고개를 들었다. 레오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됐어.” 입술을 꾸욱 아물었다. 가타부타 말없이 뒷마당을 향하는 것이었다.

“레나?”

또 뭐지?

영문이 없어진 레오는 레나를 쫓았다. 공터로 나온 레나는 검을 잡고는 묵묵히 휘둘렀다.

그러기를 잠시 본인이 바보같이 행동하고 있음을 인정하였다. 검을 늘어뜨린 채 뒤돌아보며 말하는 것이었다.

“네 실력이 그렇게 늘었을 줄은 몰랐어. 축하해.”

레나답지 않은 담담한 목소리.

그녀는 차분히 가라앉은 표정이었다. 얼핏 미소가 붙었지만, 눈은 웃지 않아서 처량함이 감돌았다.

“나도… 힘내야겠네.”

레나가 등을 돌렸다. 다시금 검을 다잡아 휘둘렀는데, 하얗게 뿜어진 입김이 그녀의 앞을 맴돌고 있었다.

입김은 찬바람에 날려 이내 사그라들었다.

* * *

에이브릴 성은 산성(山城)이다.

아주 높지는 않으나 제법 험준한 산등성이에 세워진 성이라 공간이 협소하였고, 이 때문에 영주성은 독립적인 생활공간이라기보다는 성벽에 붙은 사령탑의 역할을 겸했다.

그리고 그 사령탑의 주인, 디알로 브리나가 손님을 맞았다. 그는 “어서 오십시오.”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손님들을 응접실로 안내하였다.

군사적인 목적이 강한 산성인지라 손님을 맞이하는 응접실도 다소 투박했다. 바닥은 성벽에 들어간 바위와 다를 바 없는 큼직한 돌덩이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자랑할만한 장식도 없었다.

넓은 방에 덩그러니 놓인 탁자와 조악한 가구들이 전부였는데, 그래도 나름 신경을 썼는지 깨끗한 테이블보가 깔려 있었다.

노릇하게 지져진 빵과 세 종류의 간식거리, 두 개의 찻주전자. 노엘 덱스터는 자리에 앉기 전에 허리를 굽혀 감사를 표했다.

“영주님께서 이렇게 대접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아버지가 고개를 숙이자 따라온 레오도 덩달아 예의를 차렸다. 레나도 따라왔는데, 어제부터 말이 없던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한 박자 늦게 고개를 숙였다.

“하하하. 영광되게 은퇴한 기사님께 이 정도쯤이야… 차린 것이 없어 죄송합니다. 상단이 들르지 않았더라면 이마저도 없었을 겁니다. 아 참, 찻잔이 더 필요하겠군요.”

디알로 브리나가 시녀를 불러 찻잔을 하나 더 가져오라 일렀다.

이내 네 사람은 탁자에 둘러앉았다. “요즘 생활은 어떠십니까?”, “틈틈이 병사들을 지도해주신다 들었습니다. 은퇴하셨는데도 왕국에 대한 충성심은 여전하시군요.” 등 사소한 주제를 던지던 디알로가 레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분이 어제 말씀하신 아드님이시군요.”

“네. 그렇습니다. 그간 제가 가르쳐왔는데, 최근 검술에 큰 성취를 보였습니다. 기사단 입단 시험을 치르기 전까지 에이브릴 성에서 경험을 쌓고 싶답니다.”

“기사로서요?”

“네. 정식 서임을 요청드리는 것은 아니옵고, 임시직으로 충분합니다.”

“흐음…”

디알로 브리나가 통통한 턱살을 쓰다듬었다. 작은 눈으로 레오를 곁눈질한 결과, 어딘가 범상치 않은 청년임을 눈치챘으나 답하기를 잠시 주저했다.

아무리 임시직이라도 기사 서임을 내리는 건 중대한 일이다. 일반적인 영주였다면 옳다구나 좋아할 일이겠지만, 그의 입장은 조금 달랐다.

디알로는 단순한 영주가 아니었다.

이곳 에이브릴 성은 한때 카자크 남작가의 것이었으나 몰수되어 왕의 직할령이 되었고, 그는 이곳을 대리 통치하고 있었다.

왕의 대리인.

이 직함이 가진 무게는 엄청나다. 디알로는 본인의 처지에 만족하고 있기에 이를 놀리고 있다 뿐이지, ‘왕의 명령’이라는 허울로 얼마든지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다.

사법과 행정은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외교와 군사까지.

그는 에이브릴 성으로 파병된 국군(國軍)을 다스리는 자이기도 했다.

해서 디알로가 내리는 기사 서임은 귀족가의 기사 채용과는 달랐다. 왕국 기사를 뽑는 것이나 다름없어서, 자칫 기사단에서 월권이라며 항의해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도 그 유명한 귀족도살자의 아들인데… 괜찮지 않을까?’

잠시 턱을 쓰다듬던 디알로가 결론을 내렸다. 본인의 자리가 위태로워지는 일은 결단코 피하고 싶었으므로 다른 이와 책임을 나눠들 궁리를 마쳤다.

“기사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최소한의 테스트는 있어야 할 것 같군요.”

그 궁리란 기사로 하여금 레오의 실력을 평가하게 하는 것이었다.

에이브릴 성은 군사적 요충지인 만큼 왕국 기사가 네 명이나 파견을 나와 있었다. 디알로 브리나는 이들을 즉각 소집했고, 노엘 덱스터의 아들이 임시 기사가 될 자격이 있겠느냐며 팔밀이했다.

나는 뭐, 기사들의 평가를 받아 검토했을 따름이니 책임질 게 없을 터였는데…

“……졌습니다.”

걱정은 기우에 그쳤다. 레오는 고작 여섯 합으로 왕국 기사를 패퇴시켰고, 소집된 기사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대련에서 패한 게 문제가 아니다. 승자의 나이와 실력이 문제였다.

“대체 저 나이에 어떻게…?”

갓 성년이라고 들었다.

저 나이에 기사가 된 사람이 없는 건 아니었다. 당장 옆에 있는 노엘 덱스터만 해도 저 나이 즈음에 기사가 되었으니까.

하지만 기사가 된 것과 한창 현역인 왕국 기사를 ‘가볍게’ 격파한 건 엄연히 달랐다.

네 명의 기사는 레오를 마치 괴물 보듯이 힐끔거렸다. 그러다 레오가 노엘 덱스터의 아들임을 깨닫고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 이견은 없겠군요!”

대련을 지켜본 디알로 브리나가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대단한 기사를 배출해내는 것도 영주의 덕망인지라 이게 웬 떡이냐,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역시 저명한 기사님의 아드님은 뭔가 다르군요. 원하시는 데로 임시 기사 서임을 드리겠습니다. 경험을 쌓길 원하신다고 하셨으니 근무도 배정해드리고요. 사수는…”

신입 기사에게 사수가 붙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해서 디알로가 돌아보았으나, 네 명의 기사들은 고개를 저었다. 쭉쭉 올라갈 게 분명한 후배의 선임이 되는 건 사양이다.

디알로는 이해했다는 듯이 사수에 관한 언급을 자제하였다.

“임시 기사인데, 사수는 없어도 괜찮겠지요? 은퇴한 기사님께 죄송하지만, 노엘 덱스터 님께서 넉 달만 수고해주시지요.”

노엘은 고개를 끄덕였고 그렇게 일이 마무리되는 듯했다. 레나가 튀어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저도 테스트를 보게 해주세요!”

영주와 왕실 기사들 앞으로 나선 레나의 눈동자가 이글이글 불타오르고 있었다.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A Princess Is Raised After Death, Desperately Making Her a Princess, Princess is Raised by Death, RPOD, The Princess Is Raised After She Dies, 正規エンディングまで異世界ループ転生, 공주는 죽어서 키운다
Score 8.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19 Native Language: Korean
Minseo was trapped in [Raise Lena]. With the emotionless text, “[Starting Raise Lena]” he became Leo and was imprisoned in an unfamiliar worl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Uh-huh?” “Leo? Why the long face? You! Are you messing with me again?” There, he met his childhood friend, Lena, skillfully picking berries. The lovely Lena. Leo marries her in a peaceful mountain village… [Lena is married! Congratulations.] [You have failed to clear Raise Lena.] [Restarting.] The happiest moment. Lena disappeared. An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Huh? Lena!” “Why have you been spacing out? And why are you looking at me like that? You wanna get beat up?” Lena, clad in thick leather armor and a sword on her shoulder, stared at him with unwavering eyes. It was a different scenar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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