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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93

192. 약혼관계 – 행군

에이브릴 성에서의 행복한 나날은 오래가지 못했다. 전쟁이 터졌다는 소식과 함께 주둔군이 술렁거렸다.

임시 기사로서, 레오는 모든 과정을 지켜볼 수 있었다. 디알로 브리나 영주가 장군과 보급관, 기사와 같은 군대의 주요 인물들을 소집하였고, 아이나르 부족의 족장에게 동원령이 떨어졌음을 알렸다.

전시 매뉴얼에 따라 교회에 사제를 보내 달라 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십자교회는 전쟁이 터질 걸 알고 있었다는 듯이 각 교회에 관여치 말라는 명령을 내려둔 상태였다.

에이브릴 성이 분주해졌다. 전장에 나갈 병사를 추려내고, 창고에 쌓인 군수물자를 끄집어냈다.

영주성 지하부터 바깥 연병장까지. 줄지어 선 병사들은 나무 궤짝을 옆 사람에게 건네며 연신 감탄하고 있었다.

“정말 이런 날이 오네.”

“그러게 말이야. 레오 기사님 덕분에 한결 편하겠는걸.”

레오의 평판이 올라가는 소리였다.

실은 레오 덱스터의 평판은 거의 바닥을 치고 있었다. 신입답지 않은 모습으로 호감을 얻었던 건 잠시였고,

“보급품 재고가 부족합니다.”

“모포와 천막을 세척해야 합니다.”

“무기고에 있는 무구들의 상태가 불량합니다. 죄다 녹이 슬었고, 파손된 게 태반입니다. 속히 수리해야 합니다.”

등등 온갖 규정을 들먹이며 일을 벌였다.

다 맞는 말이었다.

에이브릴 성은 군사 거점이므로 건조된 식량을 갖춰둘 의무가 있었다. 전선에 보급할 군수품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에이브릴 성이 대치한 상대는 제롬 신성왕국. 어지간해선 전쟁이 터질 리 없는 왕국이라 경계가 느슨한 게 사실이었다. 보급품을 갖춰두기에 소홀했고, 무기가 망가지거들랑 그냥 창고에 있는 것과 교환해 두기 일쑤였다.

에이브릴 성의 오래된 관행이었다.

파병 온 병사들도 어차피 일 년만 있다가 돌아갈 것이었으므로 이를 문제 삼지 않았는데, 신참 기사가 이 관행을 걸고넘어진 것이었다.

결국, 병사들은 수년간 켜켜이 쌓인 먼지를 털어냈다. 녹슨 무기를 닦고, 망가진 건 수레에 실어 대장간으로 보냈다. 추운 겨울에 모포와 천막을 대대적으로 빨았다.

레오를 바라보는 시선이 날카로워진 건 당연한 결과였다. 병사들은 “그럼 그렇지.” 레오를 두고 세상 물정을 모른다며 깎아내렸다.

하지만 전쟁이 터졌다. 긴급히 출병해야 하는 상황에 부닥치면서 여론이 반전되었다.

만약 두 달에 걸쳐 군수물자를 정비해두지 않았더라면 병사들은 밤낮없이 일해야 했을 터라 중노동을 면하게 해준 레오를 달리 보았다.

“이것 참… 그간 죄송했습니다. 멍청한 건 기사님이 아니라 저였군요.”

레오를 고깝게 바라보던 보급관조차 솔직하게 사과했다. 하마터면 옷을 벗을뻔했노라 말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이었다.

덕분에 출병 준비는 여유롭게 끝났다. 고작 사흘 만에 모든 채비를 마친 군대가 에이브릴 성을 떠났다.

성으로부터 들려오는 북소리와 뿔피리 소리. 말에 탄 레오가 뒤돌아보았다. 병사들과 전사들이 구불구불한 내리막길을 가득 메웠고, 그는 가장 선두에 있었다. 레나는 다른 준기사들과 함께 군수물자가 실린 수레를 호위하는 중이었다.

이번에는 어떻게 될까.

퓨우. 숨을 깊이 들이쉰 레오가 고개를 돌렸다. 이제는 단순히 생존만이 목표가 아니었기에 고삐를 세게 움켜쥐었다.

[ 사망하셨습니다. 5/5 – 플레이어가 레오와 목숨을 공유합니다. ]

물론 목숨은 이번이 마지막이다. 나야 죽어도 회차가 재시작되면 처음으로 돌아오겠지만, 민서는 그렇지 못할 공산이 컸다. 이제부터는 절대로 죽어선 안 된다.

그리고, 나는 안다.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아주 간단한 방법이 있음을. 정말 여의치 않으면 레나를…

먼저 죽이면 된다.

사망 횟수에 제한이 있다는 걸 알게 된 직후 민서가 한 생각이었다. 참담하지만, 그런 방법이 있음을 부정할 도리가 없다. 실제로도 비슷한 일이 있었고.

[ 강제 종료 : 레나 살해 2/3 ]

레나를 죽이면 게임이 강제로 종료된다는, 정말이지 괴랄한 제약이 달렸지만, 이건 약혼관계 시나리오와는 관계가 없었다.

2/3. 업적의 카운터 표기가 뒤죽박죽이라 확신하기 어려우나, 모든 시나리오의 레나를 ‘종류별로’ 죽여야만 강제 종료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니 이미 카운터에 포함된 레나 아이나르는 죽여도…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퇫! 기분이 매우 불쾌해진 레오 덱스터가 침을 뱉었다. 침은 마침 곁을 지나가던 병사의 투구에 떨어졌다.

구역질 나는 생각이다.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고,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겠다.

또, 민서는 자기가 죽으면 게임이 끝날 거라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레오는 전혀 다르게 판단하고 있었다.

게임은 끝나지 않는다.

민서가 있거나 말거나 남은 회차는 반복될 테니, 본인이 죽으면 다 끝이라는 생각은 오만이다. 제까짓 게 뭐라고.

레오가 잠시 씩씩거렸다. 숨을 거칠게 뱉었으나 이내 후우, 심호흡하여 마음을 가라앉혔다.

이건 단지 어떤 가능성을 이성적으로 점쳐본 것에 불과하다. 민서가 더 이상 레나를 그런 식으로 대하지 않음을 알고 있었으므로 레오는 침을 맞은 병사에게 사과했다. 병사는 기분이 상했지만, 어린 기사님을 용서해주었다.

자, 다시 생각하자.

[ 사망하셨습니다. 5/5 – 플레이어가 레오와 목숨을 공유합니다. ]

이번 회차에선 절대로 죽어선 안 된다. 민서 없이도 게임은 진행될 테지만, 매우 곤란해질 거다.

민서가 없으면 기억을 전달받지 못한다. 만약 내가 이번 회차에서 죽는다면, 당장 다음 시나리오인 거지남매 회차에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게 분명했다.

어떤 기억도 전달받지 못한 왕자 레오는 어떻게 행동할까? 과거의 기억이 없으므로 백치가 될까? 아니면 비로소 불순물이 없는 진짜 레오가 되는 것일까.

모른다.

하지만 진짜 레오가 된다 하더라도 기억이 없어서 좋을 건 없었다.

내게 어떤 업적과 능력이 있는지, 누가 위험인물이고, 누가 도움이 되는 사람인지.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면 클리어는커녕 해피엔딩도 불가능하다.

또 각 시나리오가 조금씩 엮였기에 서로 해줘야 하는 일도 있었다.

솔직히 나는 다른 레오들과 엮인 게 없지만… 그렇게까지 모질게 굴 생각은 없다. 기어이 우리의 손에 죽고야 만 동생 레나를 위해서라도 무언가를 하고 싶었다.

그리고 ‘내’ 레나를 위해서라도.

“이쯤에서 숙영함이 좋겠습니다.”

그때, 앞서갔던 길잡이가 되돌아왔다. 그는 숙영하기에 알맞은 공터가 근처에 있음을 알렸다.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기에 기사들은 동의를 표했다.

이윽고 숙영지가 꾸려졌다. 레오는 바쁘게 돌아다니며 피로한 병사들을 다독였고, 곧 가로 600미터 세로 800미터 너비로 말뚝이 박혔다.

고작 하룻밤을 보내기 위한 숙영지이지만, 무작정 잠들 순 없다. 언제나 최악의 사태에 대비하는 것. 그게 군대의 존재 이유다.

다행히 병사들은 통솔하기에 불편함이 없었다. 직업 군인인 그들은 익숙하게 진지를 구축하였고, 순식간에 마련한 천막에서 여유롭게 휴식을 취했다.

문제는 아이나르 부족에서 차출된 전사들이었다. 중무장한 채 온종일 행군해보기는 처음인지라 다들 어기적어기적 걸어 다녔다. 천막을 치는 솜씨도 좋지 못해서 쩔쩔거렸는데, 그건 레나도 마찬가지였다.

“냅 둬. 내가 할 거야.”

“어이구. 퍽이나.”

레나는 천막을 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겨우내 준기사로서 교육받았지만, 그래 봤자 한 번이나 쳐봤을까, 영 서투르다.

보다 못한 레오가 도와주려 했다. 하지만 레나는 “내가 한다니깐!” 되려 역정을 내며 그를 물려 세웠다. 그렇게 한참을 고생한 끝에 천막이 완성되었다.

“다 됐다! 어때? 괜찮지?”

안 괜찮다. 그래도 명색이 기사가 쓸 천막인데 입구가 늘어지고 후줄근하다. 레오는 허허, 헛웃음치고는 나지막하게 물었다.

“네 천막은?”

“……아.”

“일단 들어와. 밥부터 먹자.”

식사를 종자가 아닌 기사가 챙겨왔다. 관계가 역전된, 웃기는 상황이지만 레나와 레오가 약혼한 사이임을 알게 된 병사들은 키득거리고 말았다. 먼저 배급받으시라며 순서를 양보해주었다.

“양말부터 벗어.”

“어? 왜?”

“벗으라면 벗어.”

취사장에서 뜨거운 물도 받아왔다. 천장이 늘어진 천막 안에서 레오는 레나의 발을 붙잡아 양말을 벗겼다.

역시나, 발에는 물집이 잔뜩 잡혀 있었다.

요령이 없는 여자다. 준기사들은 은근슬쩍 수레에 돌아가며 타곤 했는데, 레나는 그런 걸 할 줄 몰랐다. 잘 걷지도 못하면서 곧이곧대로 행군한 레나가 멍청하지만, 그래서 더 사랑스럽…

“꺅! 무슨 짓이야! 이것 안 놔?!”

– 퍽!

뭔 생각을 했는지 레나가 발길질했다. 레오는 얼얼한 턱을 붙잡곤 “야이 멍청아! 여기에 발을 담그라고!” 소리쳤다.

잠시간의 푸닥거림 끝에 머쓱함이 흘렀다. 레나는 “헤헤, 미안해. 난 또 네가 나한테 이상한 짓 하려는 줄 알았지.” 사과했다.

“…그럼 이제 먹자.”

달그락 – 하는 소리가 울렸다.

레나는 멋쩍게 웃다가 이내 잠잠해졌다. 작은 물통에 양발을 담그고 있으려니 기분이 이상하다.

두 무릎을 꼬옥 붙인, 아주 얌전히 주저앉은 자세다. 레나는 왠지 쑥스러워서 궁시렁궁시렁 식사하는 레오를 힐끔거렸다.

그때 레오가 말했다.

“우리 그냥 이 텐트 하나만 쓰자. 자리도 넓은데 굳이 하나 더 칠 필요는 없잖아.”

“…그, 그럴까?”

레오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레나는 얼굴을 붉혔다. 해 질 녘, 붉은 햇살이 들이쳐서 다행이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들킬 뻔했다.

식사를 마쳤다.

레나는 서둘러 식기를 챙겼다. “좀 쉬고 있어, 네가 천막을 쳤으니까 설거지는 내가 할게.” 말하는 레오에게 떽! “이건 내가 할 일이야!” 윽박질러놓고는 밖으로 나왔다.

아야야야야야야야야. 아야야.

무진장 아프다. 뜨거운 물에 담가뒀던 덕분에 아까보다는 나아진 것도 같지만, 발은 잠시 쉬었던 걸 잊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설거지를 마친 레나는 뒤뚱뒤뚱, 칼발로 걸어 돌아왔다. 어떻게 된 게 아까 행군할 때보다 더 아파진 것 같아서 도로 물에 발을 담갔다.

레오는 그새 어딜 나가고 없었다. 잠깐 일하러 갔겠거니 생각하던 레나는 다시금 얼굴을 붉혔다.

이렇게 무릎을 감싼 채 천막 입구에 앉아 있자니 뭔가 부끄럽다. 꼭 남편이 돌아오기를 조신하게 기다리는 새색시가 된 것만 같아서 가슴이 간질간질해오는 것이었다. 평소라면 크흠! 헛기침하고 검술을 훈련해 잊어버렸을 테지만, 지금은 발이 너무 아파서 그럴 수가 없었다.

‘…어딜 간 거지?’

내가 언제 레오를 기다려봤던가.

항상 따라잡기 바빴고, 그의 방문은 걷어차거들랑 언제나 열렸다. 이렇게 꼼짝없이 기다리고 있으려니 레오의 자취가 더욱 커져만 갔다.

그때, 레나가 간지러운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레오가 선물해준 손거울로 자신을 돌아보았다.

엉망이다.

종일 행군하느라 땀에 젖은 머리가 뭉쳤고, 얼굴도 깨끗하지 못했다. 검술 실력도 형편없고, 천막도 제대로 치지 못한다. 하지만

레오는 이런 나를 사랑해준다.

레나는 거울 속의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기쁘지만, 어딘가 씁쓰레한 감정이 일었다.

이런 나를 사랑한다… 라.

작아지는 느낌.

싫다.

레나가 일어났다. 찰랑. 흔들리는 물통을 보곤 ‘얼굴을 좀 닦아둘까.’ 생각했지만, 손거울을 품에 넣은 그녀는 검을 집었다. 발에서 느껴지는 고통을 참으며 검을 내리그었다.

“레나. 좀 쉬지 않고.”

하지만 오래가진 못했다. 레오가 돌아왔고, 물을 갈아줄 요량이었는지 그의 손에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물통이 들려 있었다.

레나는 벅차게 차오르는 감정과 쪼그라드는 자신 사이에서 길을 잃었다. 갈팡질팡하다 레오의 손에 이끌려 도로 물에 발을 담갔고, 다행히 저문 해가 변명이 되어주었다.

그러니까, 이것도 변명이다.

레나가 후줄근한 천막 입구 가림막을 내렸다.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A Princess Is Raised After Death, Desperately Making Her a Princess, Princess is Raised by Death, RPOD, The Princess Is Raised After She Dies, 正規エンディングまで異世界ループ転生, 공주는 죽어서 키운다
Score 8.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19 Native Language: Korean
Minseo was trapped in [Raise Lena]. With the emotionless text, “[Starting Raise Lena]” he became Leo and was imprisoned in an unfamiliar worl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Uh-huh?” “Leo? Why the long face? You! Are you messing with me again?” There, he met his childhood friend, Lena, skillfully picking berries. The lovely Lena. Leo marries her in a peaceful mountain village… [Lena is married! Congratulations.] [You have failed to clear Raise Lena.] [Restarting.] The happiest moment. Lena disappeared. An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Huh? Lena!” “Why have you been spacing out? And why are you looking at me like that? You wanna get beat up?” Lena, clad in thick leather armor and a sword on her shoulder, stared at him with unwavering eyes. It was a different scenar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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