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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95

< 용의 저주 >

레온과 불카누스의 결투는 하루 밤낮을 싸워도 끝나지 않았다.

경기장 여기저기가 갈라지고 쪼개졌으며 관중석조차 무사치 못하다. 이틀째부터는 날아드는 경기장 파편 따위에 맞아죽는 일이 없도록 관객들 대부분이 피난을 갔다.

덕분에 경기장에는 전투의 여파로 몰아치는 파편 따위에 죽지 않을 정도의 강자만 남았고──

그렇게 사흘째.

불카누스가 선을 넘었다.

“에이잇! 답답하구만!

[어어, 불카누스 이놈아! 설마!!]

신성강림 <전쟁의 신>.

페토스의 만류에도 불카누스는 만기일자가 한참 남은 적금통장을 해지해버렸다.

[안 된다아아아아아아아──!!]

페토스 신의 절규에도 불구에 비례하여 망나니 성배기사의 불꽃이 거세게 차올랐다.

물론 그도 경우가 있다. 성력을 사용하는 건 일격 한정으로 끝낼 생각이다.

이검의 성검으로 일격 한정의 최강의 일격. 그 위력은 실로 성검의 극광에 다다른다. 하지만──

“경이 먼저 사용한 것이다.”

결투의 열기 속에서 냅다 질러버린 불카누스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자신이 전쟁의 신을 대리하는 성배기사라면──

<극광의 성검>

레온은 만신의 대리자라는 것을.

“음··· 잠시 취소하고 다시 이성을 되찾는 것이 어떻소이까? 내 생각해보니 신들의 성력을 이리 헛되이 낭비하는 것도──”

“난 경의 그런 뻔뻔한 점이 마음에 들어. 헌데 지금은 아니야.”

“······.”

이 결투에 진정한 패배자가 있다면, 몇 달간 성령 기도회 등 갖가지 이벤트를 열며 축적한 성력의 절반을 날려버린 페토스일 것이다.

그렇게 불카누스마저 쓰러졌다.

그러자 구혼자들의 발길이 뚝 끊겼다.

-저런 괴물을 도대체 어떻게 이기라는 거냐?

-아~ 이번 퀘스트는 망했어.

용제의 구혼자들은 결코 넘을 수 없는 벽을 마주했고, 레온은 앞으로 오십 명이 넘는 구혼자들을 상대로 승리해야 하지만, 정작 도전할 구혼자들이 없어져 버렸다.

“흠.”

“폐하, 만족스러워 보이시네요.”

베아트리체는 사흘째 도전자가 없는 레온의 표정이 전에 없이 흡족함을 눈치챘다.

“도적놈들이 사라졌으니 왕의 정원이 이토록 평안해지는구려.”

“조금 주책이라는 말도 많지만요.”

“흥, 왕이 된 자, 아랫것들의 평판을 신경써선 안 되는 법이네.”

그것은 왕족으로서는 마땅한 태도일 수도 있지만, 딸의 혼인활동을 방해하는 것까지 왕족답다고 할 수는 있을까?

물론 베아트리체는 레온이 이러는 이유를 들어 알고 있었다.

“따님께서 정말 폐하의 의도대로 하실까요?”

“그러길 바라네.”

‘서투르신 분.’

처음 레온에게서 자초지종을 들었을 때, 베아트리체는 이 완벽한 사내에게도 평범한 단점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놀랐다.

불카누스가 다소 경박한 표현을 떠올린 것처럼 베아트리체도 레온의 행동에 피식 웃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 이후에 몰려온 건 안쓰러움이다.

죄책감을 가진 아버지가, 자신의 선택을 부정할 수도, 해서도 안 되기에, 스스로 자책하듯 강압적으로 군다.

딸의 계획을 어그러뜨리고, 아버지의 권위를 내세워 선택지를 강요한다.

이 얼마나 서투른 아버지란 말인가.

그는 완벽한 기사였고, 훌륭한 왕이었으며, 신들에게 사랑받는 구도자다.

하지만 그런 완벽한 반신조차도 이토록 어색하고 쑥스러움을 애써 감추며 자신의 서투름을 드러낸다.

정작 본인은 이것이 최선이라고만 생각하고 있겠지.

“폐하의 생각대로만 되지는 않을 거예요.”

“아니, 짐의 뜻대로 되어야만 하네. 그것이 그 아이에게 최선이야.”

글쎄.

그것을 카리나가, 용제 카리나 드라고니아가 어찌 생각할지는 모를 일이다.

* * * *

구혼자의 도전이 뚝 끊긴지도 나흘 째, 하리가 황궁에 떨어진 지는 어느덧 스무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폐에하아아~ 기체후일향만강하셨사옵나이까아!”

사극에서 야매로 배운 극존법은 윗사람들로 하여금 적당한 미소를 짓게 하였다.

“그래, 식사는 했느냐?”

“폐, 폐하를 기다리고 있었사옵나이다아아~”

카리나는 자신을 어렵게 대하면서도 거기에 공포나 두려움이 없는 하리가 이색적이었다.

그녀는 용의 피를 뒤집어쓰고, 용의 심장을 계승해온 용종의 혈통.

그 힘이 강하면 강할수록 발산되는 ‘피어’는 생물로 하여금 본능적인 두려움을 가지게 한다.

라이온하트에 있었을 적에는 괜찮았다.

그녀처럼 오래도록 용의 심장을 담아온 이는 없었다지만, 라이온하트의 시민들은 저마다 용의 피어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이 있었으니까.

신앙.

신들이 마땅히 자신들을 보우해주리라는 것을 믿는 가장 강력한 힘이야말로 용의 저주를 이겨내는 원동력이었다.

그리고 신들의 권위가 존재하지 않는 이세계에서 그녀는 날것 그대로 자신의 존재를 받아들여야 하는 범인들을 보았다.

일곱 왕국의 연합과 기습은 그러한 두려움에서 비롯된 거겠지.

그런 의미에서 자신을 어려워하긴 해도 두려워하지는 않는 하리는 카리나에게 퍽 반가운 인재다.

“저, 폐하. 오늘도 새로운 구혼자가 나타나지 않았다고 들었사옵나이다.”

“그래.”

카리나는 옅은 한숨을 쉬었다. 그녀도 불카누스가 패배한 것은 예상 못한 바가 아니다.

“그대로 피지컬 싸움으로 갔다면 어떻게 비벼봤을 텐데, 섣불리 성력 싸움으로 갔으니 어쩔 수 없지.”

“부, 불카누스 경의 성력 사용량은 어마어마하던데요?”

“어린 것. 그 불카누스 경의 상대가 사자심왕이시다.”

“맞다맞다··· 아하하.”

불카누스의 재능과 그릇은 실로 시대의 괴인이라 할만한 것이다.

하지만 상대도 역대 최강의 사자심왕. 순수한 성력 싸움으로 가면 한 명의 신만을 대리하는 불카누스로선 만신의 대리인을 이길 수 없다.

“순수한 육체대결이었다면 소싯적 사자심왕을 밀어붙였다기에 기대했건만.”

불카누스는 지상 최강의 생명체라 불릴 만큼 강고한 육체를 가진 존재였고, 레온도 수백 년 전쟁의 역사를 체현한 타고난 싸움꾼이다.

레온이 불카누스를 열세 번 쓰러뜨리고 열세 번 놔주었을 때, 그 마지막 싸움에서 두 사람은 일주일 주야를 가리지 않고 혈전을 벌였다.

‘진심으로 싸운 건 아니겠군.’

불카누스가 정말로 사생결단을 내려 했다면 레온도 이렇게 빨리 제압하진 못했을 것이다.

“노처녀 딸내미의 시집을 이토록 가로막다니. 참······.”

자신의 선택지를 좁히는 레온의 훼방은 둘째치고, 카리나는 쓴맛이 섞인 웃음을 지었다.

“그래, 그보다는 네 녀석 세계나 이야기해보아라.”

카리나가 하리를 황궁에 두며 가까이하는 이유는 비단 피어의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녀는 중요한 정보원이기도 했다. 자신의 제국, 자신이 지배하는 세계와 연결된 이세계의 종자들.

그들에 대해 파악하는 것은 훗날 어떤 대응을 하더라도 제국 황제에게 필요한 일이다.

“저희 세계는 악마들의 침공을 받고 있어요. 여러 세계와 연결되며 그곳에서──”

하리는 카리나가 원하는 이야기 보따리를 풀었다.

“너희 세계에선 철로 된 말과 새가 사람을 태우고 다닌단 말이냐.”

“자동차와 비행기라는 이름이에요.”

“그래, 대단히 발전한 문명이라는 것은 알겠다.”

카리나 황제는 지구의 이야기를 기꺼워했다. 하리도 제 이야기를 흥미롭게 들어주는 카리나에게 최선을 다했다.

그곳에서 레온이 넘어왔고 그 뒤에 만신전이 세워졌으며 벌어진 수많은 일들을.

‘폐하와 다시 가까워졌으면 좋겠다.’

라이온하트 왕국의 마지막을 지켜본 한 사람으로서, 레온이 악마와 그토록 오랜 싸움을 외로이 반복하며 끝내 이루어지지 않는 바람을.

“그, 그런데 폐하의 세계는 이제 악마들이 아예 존재하질 않는 건가요?”

“가끔은 넘어오려 하더군. 하지만 최근에는 유독 움직임이 줄었어. 그나마도 게이트를 넘기 전에 처리됐고.”

“아···, 그때 그······.”

헌터들이 게이트를 넘어올 때, 생전 처음 마주한 게이트 현상이 카리나가 개입한 것임을 깨닫고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

“그, 용에서 그러지 않을까 짐작은 했는데요··· 어, 어떻게?”

게이트의 통로에 개입할 수 있는 힘이라니, 그것이 있다면 악마와의 전쟁도 손쉽게 승리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용의 권능이다. 용의 마력으로 이 세계와 이어지는 아공간에 함정을 여럿 설치해뒀지. 과신할 수준은 아니지만, 섣불리 왔다간 낭패를 볼 정도는 된다.”

그것만으로도 전쟁의 양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이었다. 거기에 카리나는 이 힘을 사용할 때마다 부담스럽다고 첨언을 붙였다.

“부담스러우시다고요?”

하리의 의문에 오히려 카리나가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초대 대성녀 르노아 공작의 심장을 이어받은 네가 드라고니아 대공가의 이력을 모르는 건가?”

“아··· 저, 그게······.”

당연하지만 지구인인 하리가 아는 라이온하트의 역사나 이야기는 레온이 말해주는 것에 한정되어 있다.

레온이 신학교육도 담당하고 있지만, 한 사람의 입으로만 전해지는 이야기는 많지 않다. 무엇보다 지금의 레온은 역사 교육보다는 전투훈련에 집중하고 있었으니.

“낡은 이야기다.”

머나먼 시대, 그 시대는 신의 시대가 아닌 용의 시대였다.

인간은 용의 먹잇감에 불과했고, 제대로 된 문명조차 이루지 못했으며 신들 또한 자신을 신앙할 신도들을 찾지 못하던 암운의 시대.

세 명의 영웅들이 신들의 선택을 받았다.

“그중 한 명이 지크 대공. 여러 영웅담으로 유명하지만, 가장 유명한 건 용왕 드라고니아를 쓰러뜨린 것이지. 사악한 용을 쓰러뜨리고──시끄럽다. 그래, 뭐, 난폭한 걸로 해두지.”

“폐하?”

“그래, 뭐 용의 재주 중 하나인 것이지.”

카리나는 드물게 말을 얼버무리곤 하리의 이야기를 좀 더 요구했다. 꽤나 기나긴 여정이었지만, 스무하루를 계속하다 보니 끝내 그 이야기까지 나오게 되었다.

“폐하와, 라이온하트 왕국의 마지막 전투를 지켜봤어요.”

“······.”

라이온하트의 멸망.

그것을 카리나는 지켜보지 못했다.

그녀는 강욕대공과의 전투 중에 이 세계로 흘러들어왔기 때문이다.

“폐하께서 나를 많이 원망하셨겠어.”

그 싸움에서 카리나는 3만의 북부군을 이끌고 연합을 이탈했다.

이미 세계의 멸망이 확정된 상황에서 복수를 맹세한 벤타시스의 복수자들을 이끌고 북부로 진격한 것이다.

그것은 복수를 열망하는 북부의 심정을 대변하는 것이었지만, 동시에 연합을 배반하고 아버지를 저버린 딸의 매정한 선택이었다.

[네 뜻대로 하여라, 드라고니아 대공! 꼴도 보기 싫다! 짐의 눈앞에서 사라져라!]

아버지에게서 들었던 마지막 말. 그것이 마지막임을 직감했음에도 카리나는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레온을 저버렸다.

당연히 레온이 자신을 원망하리라 여겼다.

“그렇지 않아요!”

하지만 하리의 대답은 달랐다. 그녀는 자신이 본 것을 말했다.

“폐하께선 항상 카리나 폐하를 생각하셨어요. 미안해했고··· 그리워했어요.”

레온이 미래에서 온 자신들에게서 왕국의 멸망을 들었을 때, 레온은 좌절하지 않았다.

그는 미래를 위해 기꺼이 길을 열어주었고, 그 과정에서 카리나와 다시 재회했다.

하리는 레온이 분명 카리나를 반가워하고 기뻐했으리라 자신했다.

“그러하냐.”

카리나는 평소 우물쭈물한 하리가 이토록 단호한 시선으로 말하자 그것이 참임을 짐작했다.

조금은, 위로가 되었다.

“어땠나. 사자심왕 폐하는.”

“마지막까지 싸우셨어요.”

끝내 승리했기에 지금 이 순간이 있다.

“그런가.”

카리나는 씁쓸한 표정을 짓더니 더 말하지 않았다. 그때, 포마가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돌아갈 생각은 없느냐.]

“어디로 말이지?”

[너를 마땅히 품어줄 고향.]

카리나의 고향.

그것은 지명이나 국가를 말함이 아니었다.

“이미 늦었소. 너무 오래 돌아왔어.”

[어디까지 진행된 거냐?]

“앞으로 몇 년 더 버티면 다행이지.”

“폐, 폐하? 포마님? 두 분 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이야기를 따라가지 못 하는 하리. 그런 하리에게 카리나가 혀를 차며 포마를 핀잔 줬다.

“신녀 교육을 따로 좀 하시오.”

[지금은 평화의 시대가 아니라서 말이지.]

하리는 당최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어 눈치껏 문맥을 유추했다. ‘몇 년’. 그것이 가장 유추하기 쉬운 단어였고──

“폐, 폐하는 돌아가시는 건가요? 시한부세요?!”

“뭐, 비슷하긴 하지. 백번 말하는 것보단 한 번 보는 게 낫겠지.”

카리나는 대뜸 상의를 풀어 헤치기 시작했다. 황제의 예복이 풀어지며 바닥에 스르륵 떨어졌지만, 하리는 눈을 돌릴 생각도 못 했다.

외투 한 벌이 벗겨졌을 뿐인데도 느껴지는 어마어마한 마력. 피부를 저릿하게 만들 정도로 강력한 기운이 그녀를 떨게 만들었다.

“흡···!”

완전히 드러난 카리나의 상체를 목도하고 숨을 삼키는 하리.

심장. 왼쪽 가슴을 중심으로 시뻘건 기운이 맥동하고, 그 주변의 피부는 강철 같은 비늘로 덮여있었다.

* * * *

용화(龍化).

드라고니아 대공가에 대대로 계승되어온 용의 저주라고 한다.

시조룡 드라고니아의 피를 뒤집어쓰고 그 심장을 가공해 힘의 정수로 사용해온 드라고니아 대공가였지만, 그 힘을 사용하면 할수록 용의 저주에 잠식되었다.

카리나가 드라고니아 대공이 된지는 벌써 이백 년이 훌쩍 넘었다. 본래라면 진작 아이를 낳아 다음 대로 계승했어야 할 용의 심장을 너무 오랫동안 지녔던 것이다.

“폐하, 그럼 폐하··· 사자심왕 폐하께서는 그걸 알고 있으신 거잖아요!”

후계를 낳아야 한다. 그래야만 카리나가 살 수 있다. 그걸 알면서도 레온은 왜 카리나의 혼 결투를 방해한단 말인가?

“뭐, 일단 따라오너라. 보여줄 것이 있다.”

카리나는 옅은 쓴웃음을 지으며 어딘가로 향했다.

황궁 내부의 시종과 시녀들이 넙죽 엎드리고, 병사들이 경례를 한다.

누구도 용제의 나아가는 길을 묻거나 방해하지 못했다.

“용들이 둥지를 지어 금은보화를 쌓는 것을 아느냐?”

“그런··· 가요?”

용을 만나본 적이 있어야지. 하리는 수많은 몬스터들을 보았지만, 용을 마주한 적은 없었다.

“그들은 태생이 탐욕스럽고 번쩍이는 것을 좋아하지. 온 세상의 황금과 보석을 제 것인양 수집해 쌓아두는 습관이 있다.”

그것을 우리들은 ‘드래곤 레어’라 부른다며 카리나는 말했다.

“짐 또한 마찬가지야. 어느 순간부터 금은보화에 집착하게 되더군. 황금의 저주에 걸린 것이지.”

“······.”

하리는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가까워지는 ‘광채’에 할 말을 잃어갔다.

새하얀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길에 황금을 입힌 궁전이 보인다.

기둥부터 지붕에 이르기까지 무엇하나 화려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흡사 전설에서나 묘사되던 황금궁전이 이러할까 싶은 위용이었다.

-꿀꺽!

무심코 침을 삼킨다. 외장재에조차 압도된 하리를 맞이한 건 거인도 출입할 수 있을 것 같은 거대한 문이다.

카리나가 그 문을 직접 열려들자 하리는 습관처럼 앞으로 나섰다.

“제, 제가 열어드리겠습니다!”

아랫것이 윗사람의 편의를 돌본다. 레온을 모시면서 자연스럽게 익히게 된 예법이었다. 하지만 그런 기특한 행동과는 별개로 하리가 손을 댄 철문은 도저히 열릴 기미가 없었다.

“어어? 왜, 왜 안 열리지?”

S급 헌터인 자신의 완력에도 꿈쩍도 하지 않는 철문. 하리는 무언가 잠금장치가 있는가 싶었지만, 카리나가 손을 대자 문이 점차 열리기 시작했다.

“어어? 무, 무슨 마법적인 장치가 있는 건가요?”

지문인식 같은, 사용자를 구별하는 마법이라도 걸린 걸까? 하지만 카리나의 대답은 심플했다.

“아니, 이건 그냥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철문일 뿐이야. 이 세상에서 이걸 밀고 닫을 수 있는 건 짐뿐이지.”

“······.”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철문. 용제의 괴력으로만 열리는 철문이란 말인가.

그런 것까지 만들어 보관해야 할 보물이 무엇이란 말인가?

하리는 곧 철문을 열고 그 의미를 알 수 있었다.

현대 지구로 치면 축구 경기장만한 거대한 궁전. 그 내부에는──

“허억···!”

금은보화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부연묘사 같은 게 아니라 정말로 산더미··· 그것 말고 이것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없었다.

[왔느냐?]

그리고 그 화려한 금은보화 속에서,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어두운 기운이 형상을 이룬다.

그 불길한 존재의 이름을 하리도, 카리나도 알았다.

[나의 복수자여. 네가 치러야 할 대가를 받으러 왔다.]

어둠과 복수의 벤타시스.

그가 자신의 성배기사를 찾아왔다.


           


Chapter 195

Chapter 195

< 용의 저주 >

레온과 불카누스의 결투는 하루 밤낮을 싸워도 끝나지 않았다.

경기장 여기저기가 갈라지고 쪼개졌으며 관중석조차 무사치 못하다. 이틀째부터는 날아드는 경기장 파편 따위에 맞아죽는 일이 없도록 관객들 대부분이 피난을 갔다.

덕분에 경기장에는 전투의 여파로 몰아치는 파편 따위에 죽지 않을 정도의 강자만 남았고──

그렇게 사흘째.

불카누스가 선을 넘었다.

"에이잇! 답답하구만!

[어어, 불카누스 이놈아! 설마!!]

신성강림 <전쟁의 신>.

페토스의 만류에도 불카누스는 만기일자가 한참 남은 적금통장을 해지해버렸다.

[안 된다아아아아아아아──!!]

페토스 신의 절규에도 불구에 비례하여 망나니 성배기사의 불꽃이 거세게 차올랐다.

물론 그도 경우가 있다. 성력을 사용하는 건 일격 한정으로 끝낼 생각이다.

이검의 성검으로 일격 한정의 최강의 일격. 그 위력은 실로 성검의 극광에 다다른다. 하지만──

"경이 먼저 사용한 것이다."

결투의 열기 속에서 냅다 질러버린 불카누스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자신이 전쟁의 신을 대리하는 성배기사라면──

<극광의 성검>

레온은 만신의 대리자라는 것을.

"음··· 잠시 취소하고 다시 이성을 되찾는 것이 어떻소이까? 내 생각해보니 신들의 성력을 이리 헛되이 낭비하는 것도──"

"난 경의 그런 뻔뻔한 점이 마음에 들어. 헌데 지금은 아니야."

"······."

이 결투에 진정한 패배자가 있다면, 몇 달간 성령 기도회 등 갖가지 이벤트를 열며 축적한 성력의 절반을 날려버린 페토스일 것이다.

그렇게 불카누스마저 쓰러졌다.

그러자 구혼자들의 발길이 뚝 끊겼다.

-저런 괴물을 도대체 어떻게 이기라는 거냐?

-아~ 이번 퀘스트는 망했어.

용제의 구혼자들은 결코 넘을 수 없는 벽을 마주했고, 레온은 앞으로 오십 명이 넘는 구혼자들을 상대로 승리해야 하지만, 정작 도전할 구혼자들이 없어져 버렸다.

"흠."

"폐하, 만족스러워 보이시네요."

베아트리체는 사흘째 도전자가 없는 레온의 표정이 전에 없이 흡족함을 눈치챘다.

"도적놈들이 사라졌으니 왕의 정원이 이토록 평안해지는구려."

"조금 주책이라는 말도 많지만요."

"흥, 왕이 된 자, 아랫것들의 평판을 신경써선 안 되는 법이네."

그것은 왕족으로서는 마땅한 태도일 수도 있지만, 딸의 혼인활동을 방해하는 것까지 왕족답다고 할 수는 있을까?

물론 베아트리체는 레온이 이러는 이유를 들어 알고 있었다.

"따님께서 정말 폐하의 의도대로 하실까요?"

"그러길 바라네."

'서투르신 분.'

처음 레온에게서 자초지종을 들었을 때, 베아트리체는 이 완벽한 사내에게도 평범한 단점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놀랐다.

불카누스가 다소 경박한 표현을 떠올린 것처럼 베아트리체도 레온의 행동에 피식 웃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 이후에 몰려온 건 안쓰러움이다.

죄책감을 가진 아버지가, 자신의 선택을 부정할 수도, 해서도 안 되기에, 스스로 자책하듯 강압적으로 군다.

딸의 계획을 어그러뜨리고, 아버지의 권위를 내세워 선택지를 강요한다.

이 얼마나 서투른 아버지란 말인가.

그는 완벽한 기사였고, 훌륭한 왕이었으며, 신들에게 사랑받는 구도자다.

하지만 그런 완벽한 반신조차도 이토록 어색하고 쑥스러움을 애써 감추며 자신의 서투름을 드러낸다.

정작 본인은 이것이 최선이라고만 생각하고 있겠지.

"폐하의 생각대로만 되지는 않을 거예요."

"아니, 짐의 뜻대로 되어야만 하네. 그것이 그 아이에게 최선이야."

글쎄.

그것을 카리나가, 용제 카리나 드라고니아가 어찌 생각할지는 모를 일이다.

* * * *

구혼자의 도전이 뚝 끊긴지도 나흘 째, 하리가 황궁에 떨어진 지는 어느덧 스무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폐에하아아~ 기체후일향만강하셨사옵나이까아!"

사극에서 야매로 배운 극존법은 윗사람들로 하여금 적당한 미소를 짓게 하였다.

"그래, 식사는 했느냐?"

"폐, 폐하를 기다리고 있었사옵나이다아아~"

카리나는 자신을 어렵게 대하면서도 거기에 공포나 두려움이 없는 하리가 이색적이었다.

그녀는 용의 피를 뒤집어쓰고, 용의 심장을 계승해온 용종의 혈통.

그 힘이 강하면 강할수록 발산되는 '피어'는 생물로 하여금 본능적인 두려움을 가지게 한다.

라이온하트에 있었을 적에는 괜찮았다.

그녀처럼 오래도록 용의 심장을 담아온 이는 없었다지만, 라이온하트의 시민들은 저마다 용의 피어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이 있었으니까.

신앙.

신들이 마땅히 자신들을 보우해주리라는 것을 믿는 가장 강력한 힘이야말로 용의 저주를 이겨내는 원동력이었다.

그리고 신들의 권위가 존재하지 않는 이세계에서 그녀는 날것 그대로 자신의 존재를 받아들여야 하는 범인들을 보았다.

일곱 왕국의 연합과 기습은 그러한 두려움에서 비롯된 거겠지.

그런 의미에서 자신을 어려워하긴 해도 두려워하지는 않는 하리는 카리나에게 퍽 반가운 인재다.

"저, 폐하. 오늘도 새로운 구혼자가 나타나지 않았다고 들었사옵나이다."

"그래."

카리나는 옅은 한숨을 쉬었다. 그녀도 불카누스가 패배한 것은 예상 못한 바가 아니다.

"그대로 피지컬 싸움으로 갔다면 어떻게 비벼봤을 텐데, 섣불리 성력 싸움으로 갔으니 어쩔 수 없지."

"부, 불카누스 경의 성력 사용량은 어마어마하던데요?"

"어린 것. 그 불카누스 경의 상대가 사자심왕이시다."

"맞다맞다··· 아하하."

불카누스의 재능과 그릇은 실로 시대의 괴인이라 할만한 것이다.

하지만 상대도 역대 최강의 사자심왕. 순수한 성력 싸움으로 가면 한 명의 신만을 대리하는 불카누스로선 만신의 대리인을 이길 수 없다.

"순수한 육체대결이었다면 소싯적 사자심왕을 밀어붙였다기에 기대했건만."

불카누스는 지상 최강의 생명체라 불릴 만큼 강고한 육체를 가진 존재였고, 레온도 수백 년 전쟁의 역사를 체현한 타고난 싸움꾼이다.

레온이 불카누스를 열세 번 쓰러뜨리고 열세 번 놔주었을 때, 그 마지막 싸움에서 두 사람은 일주일 주야를 가리지 않고 혈전을 벌였다.

'진심으로 싸운 건 아니겠군.'

불카누스가 정말로 사생결단을 내려 했다면 레온도 이렇게 빨리 제압하진 못했을 것이다.

"노처녀 딸내미의 시집을 이토록 가로막다니. 참······."

자신의 선택지를 좁히는 레온의 훼방은 둘째치고, 카리나는 쓴맛이 섞인 웃음을 지었다.

"그래, 그보다는 네 녀석 세계나 이야기해보아라."

카리나가 하리를 황궁에 두며 가까이하는 이유는 비단 피어의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녀는 중요한 정보원이기도 했다. 자신의 제국, 자신이 지배하는 세계와 연결된 이세계의 종자들.

그들에 대해 파악하는 것은 훗날 어떤 대응을 하더라도 제국 황제에게 필요한 일이다.

"저희 세계는 악마들의 침공을 받고 있어요. 여러 세계와 연결되며 그곳에서──"

하리는 카리나가 원하는 이야기 보따리를 풀었다.

"너희 세계에선 철로 된 말과 새가 사람을 태우고 다닌단 말이냐."

"자동차와 비행기라는 이름이에요."

"그래, 대단히 발전한 문명이라는 것은 알겠다."

카리나 황제는 지구의 이야기를 기꺼워했다. 하리도 제 이야기를 흥미롭게 들어주는 카리나에게 최선을 다했다.

그곳에서 레온이 넘어왔고 그 뒤에 만신전이 세워졌으며 벌어진 수많은 일들을.

'폐하와 다시 가까워졌으면 좋겠다.'

라이온하트 왕국의 마지막을 지켜본 한 사람으로서, 레온이 악마와 그토록 오랜 싸움을 외로이 반복하며 끝내 이루어지지 않는 바람을.

"그, 그런데 폐하의 세계는 이제 악마들이 아예 존재하질 않는 건가요?"

"가끔은 넘어오려 하더군. 하지만 최근에는 유독 움직임이 줄었어. 그나마도 게이트를 넘기 전에 처리됐고."

"아···, 그때 그······."

헌터들이 게이트를 넘어올 때, 생전 처음 마주한 게이트 현상이 카리나가 개입한 것임을 깨닫고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

"그, 용에서 그러지 않을까 짐작은 했는데요··· 어, 어떻게?"

게이트의 통로에 개입할 수 있는 힘이라니, 그것이 있다면 악마와의 전쟁도 손쉽게 승리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용의 권능이다. 용의 마력으로 이 세계와 이어지는 아공간에 함정을 여럿 설치해뒀지. 과신할 수준은 아니지만, 섣불리 왔다간 낭패를 볼 정도는 된다."

그것만으로도 전쟁의 양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이었다. 거기에 카리나는 이 힘을 사용할 때마다 부담스럽다고 첨언을 붙였다.

"부담스러우시다고요?"

하리의 의문에 오히려 카리나가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초대 대성녀 르노아 공작의 심장을 이어받은 네가 드라고니아 대공가의 이력을 모르는 건가?"

"아··· 저, 그게······."

당연하지만 지구인인 하리가 아는 라이온하트의 역사나 이야기는 레온이 말해주는 것에 한정되어 있다.

레온이 신학교육도 담당하고 있지만, 한 사람의 입으로만 전해지는 이야기는 많지 않다. 무엇보다 지금의 레온은 역사 교육보다는 전투훈련에 집중하고 있었으니.

"낡은 이야기다."

머나먼 시대, 그 시대는 신의 시대가 아닌 용의 시대였다.

인간은 용의 먹잇감에 불과했고, 제대로 된 문명조차 이루지 못했으며 신들 또한 자신을 신앙할 신도들을 찾지 못하던 암운의 시대.

세 명의 영웅들이 신들의 선택을 받았다.

"그중 한 명이 지크 대공. 여러 영웅담으로 유명하지만, 가장 유명한 건 용왕 드라고니아를 쓰러뜨린 것이지. 사악한 용을 쓰러뜨리고──시끄럽다. 그래, 뭐, 난폭한 걸로 해두지."

"폐하?"

"그래, 뭐 용의 재주 중 하나인 것이지."

카리나는 드물게 말을 얼버무리곤 하리의 이야기를 좀 더 요구했다. 꽤나 기나긴 여정이었지만, 스무하루를 계속하다 보니 끝내 그 이야기까지 나오게 되었다.

"폐하와, 라이온하트 왕국의 마지막 전투를 지켜봤어요."

"······."

라이온하트의 멸망.

그것을 카리나는 지켜보지 못했다.

그녀는 강욕대공과의 전투 중에 이 세계로 흘러들어왔기 때문이다.

"폐하께서 나를 많이 원망하셨겠어."

그 싸움에서 카리나는 3만의 북부군을 이끌고 연합을 이탈했다.

이미 세계의 멸망이 확정된 상황에서 복수를 맹세한 벤타시스의 복수자들을 이끌고 북부로 진격한 것이다.

그것은 복수를 열망하는 북부의 심정을 대변하는 것이었지만, 동시에 연합을 배반하고 아버지를 저버린 딸의 매정한 선택이었다.

[네 뜻대로 하여라, 드라고니아 대공! 꼴도 보기 싫다! 짐의 눈앞에서 사라져라!]

아버지에게서 들었던 마지막 말. 그것이 마지막임을 직감했음에도 카리나는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레온을 저버렸다.

당연히 레온이 자신을 원망하리라 여겼다.

"그렇지 않아요!"

하지만 하리의 대답은 달랐다. 그녀는 자신이 본 것을 말했다.

"폐하께선 항상 카리나 폐하를 생각하셨어요. 미안해했고··· 그리워했어요."

레온이 미래에서 온 자신들에게서 왕국의 멸망을 들었을 때, 레온은 좌절하지 않았다.

그는 미래를 위해 기꺼이 길을 열어주었고, 그 과정에서 카리나와 다시 재회했다.

하리는 레온이 분명 카리나를 반가워하고 기뻐했으리라 자신했다.

"그러하냐."

카리나는 평소 우물쭈물한 하리가 이토록 단호한 시선으로 말하자 그것이 참임을 짐작했다.

조금은, 위로가 되었다.

"어땠나. 사자심왕 폐하는."

"마지막까지 싸우셨어요."

끝내 승리했기에 지금 이 순간이 있다.

"그런가."

카리나는 씁쓸한 표정을 짓더니 더 말하지 않았다. 그때, 포마가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돌아갈 생각은 없느냐.]

"어디로 말이지?"

[너를 마땅히 품어줄 고향.]

카리나의 고향.

그것은 지명이나 국가를 말함이 아니었다.

"이미 늦었소. 너무 오래 돌아왔어."

[어디까지 진행된 거냐?]

"앞으로 몇 년 더 버티면 다행이지."

"폐, 폐하? 포마님? 두 분 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이야기를 따라가지 못 하는 하리. 그런 하리에게 카리나가 혀를 차며 포마를 핀잔 줬다.

"신녀 교육을 따로 좀 하시오."

[지금은 평화의 시대가 아니라서 말이지.]

하리는 당최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어 눈치껏 문맥을 유추했다. '몇 년'. 그것이 가장 유추하기 쉬운 단어였고──

"폐, 폐하는 돌아가시는 건가요? 시한부세요?!"

"뭐, 비슷하긴 하지. 백번 말하는 것보단 한 번 보는 게 낫겠지."

카리나는 대뜸 상의를 풀어 헤치기 시작했다. 황제의 예복이 풀어지며 바닥에 스르륵 떨어졌지만, 하리는 눈을 돌릴 생각도 못 했다.

외투 한 벌이 벗겨졌을 뿐인데도 느껴지는 어마어마한 마력. 피부를 저릿하게 만들 정도로 강력한 기운이 그녀를 떨게 만들었다.

"흡···!"

완전히 드러난 카리나의 상체를 목도하고 숨을 삼키는 하리.

심장. 왼쪽 가슴을 중심으로 시뻘건 기운이 맥동하고, 그 주변의 피부는 강철 같은 비늘로 덮여있었다.

* * * *

용화(龍化).

드라고니아 대공가에 대대로 계승되어온 용의 저주라고 한다.

시조룡 드라고니아의 피를 뒤집어쓰고 그 심장을 가공해 힘의 정수로 사용해온 드라고니아 대공가였지만, 그 힘을 사용하면 할수록 용의 저주에 잠식되었다.

카리나가 드라고니아 대공이 된지는 벌써 이백 년이 훌쩍 넘었다. 본래라면 진작 아이를 낳아 다음 대로 계승했어야 할 용의 심장을 너무 오랫동안 지녔던 것이다.

"폐하, 그럼 폐하··· 사자심왕 폐하께서는 그걸 알고 있으신 거잖아요!"

후계를 낳아야 한다. 그래야만 카리나가 살 수 있다. 그걸 알면서도 레온은 왜 카리나의 혼 결투를 방해한단 말인가?

"뭐, 일단 따라오너라. 보여줄 것이 있다."

카리나는 옅은 쓴웃음을 지으며 어딘가로 향했다.

황궁 내부의 시종과 시녀들이 넙죽 엎드리고, 병사들이 경례를 한다.

누구도 용제의 나아가는 길을 묻거나 방해하지 못했다.

"용들이 둥지를 지어 금은보화를 쌓는 것을 아느냐?"

"그런··· 가요?"

용을 만나본 적이 있어야지. 하리는 수많은 몬스터들을 보았지만, 용을 마주한 적은 없었다.

"그들은 태생이 탐욕스럽고 번쩍이는 것을 좋아하지. 온 세상의 황금과 보석을 제 것인양 수집해 쌓아두는 습관이 있다."

그것을 우리들은 '드래곤 레어'라 부른다며 카리나는 말했다.

"짐 또한 마찬가지야. 어느 순간부터 금은보화에 집착하게 되더군. 황금의 저주에 걸린 것이지."

"······."

하리는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가까워지는 '광채'에 할 말을 잃어갔다.

새하얀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길에 황금을 입힌 궁전이 보인다.

기둥부터 지붕에 이르기까지 무엇하나 화려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흡사 전설에서나 묘사되던 황금궁전이 이러할까 싶은 위용이었다.

-꿀꺽!

무심코 침을 삼킨다. 외장재에조차 압도된 하리를 맞이한 건 거인도 출입할 수 있을 것 같은 거대한 문이다.

카리나가 그 문을 직접 열려들자 하리는 습관처럼 앞으로 나섰다.

"제, 제가 열어드리겠습니다!"

아랫것이 윗사람의 편의를 돌본다. 레온을 모시면서 자연스럽게 익히게 된 예법이었다. 하지만 그런 기특한 행동과는 별개로 하리가 손을 댄 철문은 도저히 열릴 기미가 없었다.

"어어? 왜, 왜 안 열리지?"

S급 헌터인 자신의 완력에도 꿈쩍도 하지 않는 철문. 하리는 무언가 잠금장치가 있는가 싶었지만, 카리나가 손을 대자 문이 점차 열리기 시작했다.

"어어? 무, 무슨 마법적인 장치가 있는 건가요?"

지문인식 같은, 사용자를 구별하는 마법이라도 걸린 걸까? 하지만 카리나의 대답은 심플했다.

"아니, 이건 그냥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철문일 뿐이야. 이 세상에서 이걸 밀고 닫을 수 있는 건 짐뿐이지."

"······."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철문. 용제의 괴력으로만 열리는 철문이란 말인가.

그런 것까지 만들어 보관해야 할 보물이 무엇이란 말인가?

하리는 곧 철문을 열고 그 의미를 알 수 있었다.

현대 지구로 치면 축구 경기장만한 거대한 궁전. 그 내부에는──

"허억···!"

금은보화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부연묘사 같은 게 아니라 정말로 산더미··· 그것 말고 이것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없었다.

[왔느냐?]

그리고 그 화려한 금은보화 속에서,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어두운 기운이 형상을 이룬다.

그 불길한 존재의 이름을 하리도, 카리나도 알았다.

[나의 복수자여. 네가 치러야 할 대가를 받으러 왔다.]

어둠과 복수의 벤타시스.

그가 자신의 성배기사를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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