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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96

195. 약혼관계 – 데로스

오전.

“으휴, 진짜 이게 무슨 꼴이야.”

카트리나가 투덜거렸다. 그녀는 자신의 꼴이 우습게 됐음을 한탄하며 출발 직전, 마지막으로 장비를 점검해보았다.

검, 챙겼고.

짜증 나는 ‘갈색’ 갑옷, 입었고.

머리, 묶었고.

여분의 머리끈, 여기 있고.

비상 의약품이랑 엘런이 챙겨준 약초는…

“야! 가서 내 구급품 가져와. 천막에 가면…”

“여기 있어요.”

종자에게 한 말인데, 곁에 있던 데로스가 끼어들었다. 안 그래도 짜증이 나 있던 카트리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걸 왜 네가 가지고 있냐? 내 천막 뒤졌어? 뒤질래?”

“말 등에 메어 놓은 걸 깜박하셨길래 챙겨둔 건데요…”

“아, 그랬어?”

카트리나가 머쓱하게 구급품을 받아들었다. 하지만 그러길 잠시, 다시 데로스를 쏘아보았다.

“근데 이걸 왜 네가 가지고 있냐? 진작 돌려줬어야 할 것 아니야. 내가 이걸 얼마나 찾았는데.”

“아니, 챙겨줘도 지랄이야.”

─ 라고 말했다간 오늘이 내가 죽는 날이다. 데로스는 공손하게 고개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제가 깜박했어요.”

솔직히 깜박한 건 카트리나다. 여태껏 잊어먹고 있던 게 분명한데, 인제 와서 찾았다고 말하는 게 어처구니없지만, 시시비비를 가려봐야 돌아오는 건 주먹이었다.

또, 그의 첫 사수인 카트리나는 성질이 급하긴 하지만 사과하는 사람을 해코지할 정도로 못돼먹진 않았다.

수 개월간의 관찰 끝에 알게 된 사실이다.

데로스는 이 여자의 신경질이 뇌를 거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고, 이럴 땐 무조건 한발 물러서 주는 게 좋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들어온 자극에 일단 화를 내고 보는 유형의 인간이어서, 그 순간이 지나고 나면 내심 미안해하는 것이었다.

역시나, 카트리나가 헛기침했다.

“…크흠! 앞으로 조심해. 정신 똑바로 차리고. 전쟁터에 나와서도 이렇게 맹하니… 너, 이제부터 내 시야 밖으로 나가지 마라. 뒈진다.”

아무튼, 웃기는 선배다.

여분의 육포와 물주머니 하나를 비상식량으로 챙긴 데로스는 카트리나를 따라 전장에 나섰다. 첫 출전이라 조금 긴장되지만, 듬직한 선배의 등을 보고 있노라면 걱정이 덜했다.

이윽고 능선에 숨어든 선후배는 실전을 겪었다. 카트리나도 전쟁에 나와보긴 처음이었으나, 고작 열세 명의 병사를 보곤 안절부절못하는 후배를 다그치며 검에 피를 묻혔다.

“한따까리 했으니깐, 좀 쉬었다 가자. 어? 야, 야! 대가리 박아!”

카트리나가 데로스의 머리채를 움켜쥐었다. 자기가 있는 덤불로 억세게 잡아당기더니 하늘을 손가락질하며 타박했다.

“멍청아! 내가 구름 조심하라고 했어, 안 했어!”

“죄, 죄송합니다.”

방금 몰살한 분대에서 전령이 달아났다. 기사가 나타났다는 보고를 받은 백인장이 신호탄을 깨뜨렸을 테고, 상대측 마법사가 ‘구름 눈’ 마법으로 이쪽을 주시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우리 측 마법사가 저 구름 조각을 장악하고 있다면 걱정을 덜겠지만, 장악했는지 어쨌는지 우리가 마법사가 아닌 이상에야 알 도리가 없다.

지금 쳐다보고 있는지도 알 길이 없어서 무조건 조심하고 보는 게 상책이었다.

걸리면, 마법사가 말을 타고 달려온다. 마법사로부터는 은‧엄폐가 무용지물이라 싸워야 하고, 싸워 이길 가망이 있냐면 꼭 그렇지도 않았다.

마법사는 그 자체로도 강하지만, 늘 기사의 호위를 받았다.

덤불에 쪼그려 앉은 카트리나는 한참을 잔소리했다. 여린 데로스의 눈에서 눈물이 쏙 나올 지경이 돼서야 멈추었는데, 그녀는 괜히 미안해졌다. 그래도 나 좋다고 따라와 준 녀석인데…

카트리나가 편히 앉지도 못하는 후배의 어깨를 내리눌렀다. 덤불에 드러누운 두 사람 사이로 어색한 기류가 흘렀고, 이런 걸 참지 못하는 카트리나가 입을 열었다. 잔소리는 충분히 했으므로 그녀가 꺼낸 말은 분위기를 바꾸려는 질문이었다.

“넌 왜 나 따라왔냐?”

“…그냥요.”

“그냥이 뭐야. 그게 쉽게 할 수 있는 결정은 아니잖아. 혹시 너… 나 좋아하냐?”

“네?”

풀이 죽어있던 데로스가 질색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드문드문한 이파리 사이로 경악한 얼굴이 보였지만, 기분이 한결 나아진 카트리나가 이죽거렸다.

“미안하지만, 나 남자친구 있어. 그리고 남자친구가 없었더라도 너는 내 취향이 아니라서…”

“저도 여자친구 있어요! 누가 선배님을 좋아한다는 거예욧!”

“어쭈? 아니면 아닌 거지, 목소리가 크다?”

“……죄송합니다.”

카트리나가 눈알을 부라리자 데로스는 찔끔, 몸을 움츠렸다. 다시 침묵이 깔렸지만 전처럼 어색하진 않았다.

“그런데 너 여자친구가 있었어? 언제부터?”

“음… 작년 겨울 무렵? 아니다, 늦가을쯤에 생겼어요.”

카트리나가 돌아누웠다.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후배를 다그쳤다.

“뭐 하는 여잔데? 어떻게 만났어? 이 자식. 그렇게 안 봤는데, 할 건 다 하고 사는구나.”

“에이, 여자친구 사귀는 게 뭐 그렇게 대수라고… 선배님께서는 남자친구분이랑 동거 중이시잖아요.”

“됐으니깐, 여자 얘기나 좀 해봐.”

“그게… 제 친구 중에 연극을 좋아하는 녀석이 있거든요. 걔가 어떤 극장에서 엄청 예쁜 배우를 봤다고 자랑하는 거예요. 그래서 저도 한 번 속는 셈 치고 가 봤죠. 솔직히 배우들 예쁜 거야 분장을 해서 그런 것 아니겠어요?”

데로스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오랑주 극장이란 곳에 따라간 그는 결국 그 엄청나게 예뻤다는 배우를 보지 못했다.

그날 공연한 연극은 아카이아 제국이 분열할 당시, 황궁에서 탈출해 대륙 동부로 달아난 황족들의 일대기를 그린 것이었다.

혼란한 시기.

몰락하는 제국의 힘없는 황족들.

가진 것이라곤 고귀한 신분뿐인 그들은 동부의 유력자들을 끌어들이고자 사방팔방으로 정략결혼을 맺었다. 개중 ‘이사도라 자작가’에 시집간 황녀가 있었고, 연극은 그녀를 중심으로 당시의 시대상을 그려내었는데…

주황색 눈동자를 가진 아가씨였다. 황녀가 아니라 그 역할을 맡은 배우가 그랬다는 것이다.

그녀는 열정적이었다. 사랑하지 않는 남편을 움직이려 애쓰는 황녀의 비참함을, 그로 인한 오해 속에서 멀어져가는 부부 사이를 섬세하게 표현해냈다.

이사도라 자작이 연극 막바지에 “난 처음 본 순간부터 당신을 사랑했노라.” 고백했을 때, 황녀가 떨군 눈물은 뜨거웠다.

데로스는 그녀의 연기를 인상 깊게 보았다. “진짜라니까! 금발에 황금빛 눈동자를 가진 꼬마였어!” 주장하는 친구와 관계없이 종종 극장엘 들르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데로스는 한 꽃집에서 그 여배우를 만나게 되었다. 분장이 지워져 횡으로 퍼진 주근깨가 사랑스러웠고, 풍성한 오렌지빛 머리칼을 졸라맨 모습이 데로스의 심장을 간지럽혔다.

“스토커냐? 이거 위험한 새끼네.”

“아니라니까요! 선배님 머리카락 색깔도 특이하긴 하지만, 주황색은 눈에 띄잖아요. 못 알아보는 게 이상한 거지. 아무튼, 그래서…”

데로스가 재잘재잘 잘도 떠들어댔다. 가을꽃을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준다는 핑계로 드나들다가, 나중엔 황량한 기사단 건물을 장식할 꽃을 대량으로 구입하러 왔다는 핑계를 댔단다.

그러자 꽃집 아가씨가 상냥하게 웃으며,

“그럼 저한테 기사단 건물을 보여주시겠어요? 어떤 꽃이 어울릴지 보고 싶네요.”

말했다는 것이다. 당연히 일반인을 기사단 건물에 들일 수는 없었으므로, 두 사람은 주변을 거닐었다.

“저렇게 큰 건물을 채울 만큼 많은 꽃을 팔 수가 없어요. 죄송해요. 대신 제가…”

“아, 거기까지. 안 들어도 알겠다. 등신아.”

꽃집 아가씨의 대사를 읊는 데로스. 카트리나가 싹뚝 끼어들었다.

“그렇게 자주 만나다가 고백했다는 거지? 설마 네가 먼저 고백한 게 아니면 넌 진짜…”

“당연히 제가 먼저 고백했죠.”

“어휴, 그래. 천만다행이다. 내 후배가 병신이 아니어서. 그만 일어나. 충분히 쉬었잖아. 가서 적들이 어디 있는지나 찾아.”

“아니, 선배님이 먼저 물어봐 놓고는…”

“얼른 안 일어나? 평생 누워있게 해주랴?”

뭐 이런 깡패 같은 여자가…

투덜투덜, 데로스가 덤불을 헤치고 일어났다. “이 병신아!” 카트리나가 그의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겼지만, 손길이 전처럼 험하지는 않았다.

‘그래. 내가 아니면 저 모지리를 누가 챙기겠어. 어떻게든 살려서 여자친구한테 돌려보내야지.’

카트리나가 생각하는 그때, 데로스가 외쳤다.

“뭐, 뭐야! 선배님!”

데로스가 성급히 헤친 덤불 속에 한 여기사와 거구의 기사가 있었다. 척 보기에도 만만찮아 보이는 상대다.

“…아이고. 병사를 찾으라니깐, 기사를 찾아왔네. 데로스! 비켜!”

카트리나가 검을 뽑았다. 깜짝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진 기사에게 선공을 날렸다.

* * *

“레오! 위험…!”

– 타앙!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레오는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여기사의 공격을 검집으로 막았고, 수세에 몰린 건 레나였다.

곁에 있던 다른 기사가 달려들었다. 레오가 눈앞의 붉은 머리 여기사를 처리하지 못하고 어쩐지 우물쭈물하는지라 레나가 검을 뽑았다.

– 카앙!

십 대 후반? 많이 쳐봐야 이십 대 초반일까?

꽤 젊은 기사였다. 올해 들어서야 성년이 된 레나보다는 나이가 많지만, 이만하면 해 볼 만하겠다는 생각으로 레나가 검을 쳐냈다.

아니, 쳐내려 했다.

“으윽!”

데로스가 허구한 날 카트리나에게 두들겨 맞지만, 그래도 기사다.

데로스의 상반신이 부풀더니 레나의 검이 주춤주춤 밀려 나갔다.

“뭐야? 기사가 아니잖아?”

상대가 준기사임을 확인한 데로스가 기세등등해졌다.

준기사라면 오히려 다수의 병사보다 상대하기 편하다.

카트리나 선배님이 퇴근하고 나면 준기사들과 곧잘 대련하곤 했으므로 그 익숙함이 데로스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주었다. 그가 경험해본 준기사들은 대체로…

“어라?”

양손검을 맞댄 채, 데로스가 다리를 넓게 잡았다. 손잡이를 흔들어 틈을 만들려 했는데, 상대의 검이 무난하게 따라오는 것이었다.

기본기가 탄탄하다.

양손검은 다루기 어려운 무기다.

종류에 따라 천차만별이나, 검신이 길어서 무겁고, 손잡이는 저 아래에 있었다. 반면 검과 검이 맞닿는 부위는 (하기 나름이지만) 보통 눈앞에 있기 마련이었다.

이때 손잡이를 조금만 흔들어도 다채로운 각이 나온다.

내가 들어갈 건지, 상대로 하여금 찌르도록 유도할 것인지, 맞닿은 부위를 내려 힘싸움으로 몰고 갈 건지, 검을 서로 밀어내며 발차기를 주고받을지. 그것도 아니면 맞닿은 검을 쳐내고 휘두를 채비를 갖출지.

맞닿은 검을 흔드는 건 이 수많은 선택지를 좁혀나가는 과정이다. 검과 검이 닿은 순간에 서로가 행할 동작을 읽어낼 수 있다.

보통 준기사들은 이런 기본기가 딸렸다. 기초를 다져야 위로 올라갈 수 있음을 모르고, 충고해줘도 허투루 듣기 일쑤다. 기본기를 다지는 과정이 워낙 재미없기에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지만.

한데 눈앞의 준기사는 기본기에 충실했다. 미세한 흔들림을 놓치지 않고 따라붙는다. 내 선택지를 좁히고, 제 선택지는 넓히려 드는 것이었다.

‘제법이긴 한데…’

그래봤자 준기사.

데로스가 넓게 잡은 다리 힘으로 손잡이를 들었다. 검을 눕혀 상대의 검을 들어 올리면서 한 발 전진해 어깨를 들이밀었고, 어디보자… 상대는 역시나 한발 물러섰다. 검을 세워 들어오는 어깨를 막으려 든다.

걸렸다 이 자식아!

손잡이를 들어 올리면서 비틀린 허리로 데로스가 발차기를 날렸다. 엄밀히 말하면 왼쪽 무릎으로 상대의 허리를 찍으려 들었다.

이게 힘 차이다.

데로스는 검이 닿은 순간 상대의 힘이 약하다는 걸 알아차렸고, 검을 들어 올리거든 쉽사리 반응하지 못하리라 예상했다. 그리고 내 예상이 맞았…?!

– 빠악!

무릎과 무릎이 맞부딪쳤다.

데로스의 수작을 눈치챈 레나가 대응책을 내놓은 것이었다. 이걸 위해 일부러 힘을 빼놓긴 했는데…

“이 자식이!”

데로스가 왼발을 빠르게 거둬들였다. 그 힘으로 몸을 뒤로 삼분지 일 바퀴쯤 돌리면서 머리께에 들려 있던 손잡이를 제 뺨까지 내렸다.

– 끼기긱!

맞닿은 검날이 레나의 머리로 돌아 들어왔다. 이대로는 큰일 나겠다고 생각한 레나는 마침 땅에 내려선 오른발을 지지대로 삼아 돌아오는 검을 밀어내었다. 그런데,

“어엇!”

어째 미는 대로 밀려난다 싶더니 데로스의 무게중심이 바뀌어 있었다.

앞으로 나온 오른발이 편하게 들렸고, 레나의 복부를 밀어 찼다. 차이는 순간, 넘어지는 레나의 눈에 맹렬하게 내리꽂히는 검이 보였다.

검을 당기면 막을 순 있다.

내 상체는.

하지만 하체를 노리면 당장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데로스의 검도 그녀의 다리를 쪼개버릴 요량으로 내리꽂혔다.

크, 큰일났…

– 쩌엉!

하지만 레나는 검을 맞지 않았다.

넘어진 레나가 눈을 질끈 감았다 떴을 때, 허벅지 옆 땅에 레오의 검이 박혀 있었다. 어찌나 세게 박혔는지 검이 부르르르르 진동하였고, 데로스의 검이 이에 막혀 있었다.

레나의 다리는 레오의 검 아래에서 안전했다.

“일단 넌 좀 죽어야겠다.”

카트리나의 검을 멀리 쳐낸 레오가 맨손으로 다가와 검을 든 데로스를 위압적으로 내려다보았다.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A Princess Is Raised After Death, Desperately Making Her a Princess, Princess is Raised by Death, RPOD, The Princess Is Raised After She Dies, 正規エンディングまで異世界ループ転生, 공주는 죽어서 키운다
Score 8.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19 Native Language: Korean
Minseo was trapped in [Raise Lena]. With the emotionless text, “[Starting Raise Lena]” he became Leo and was imprisoned in an unfamiliar worl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Uh-huh?” “Leo? Why the long face? You! Are you messing with me again?” There, he met his childhood friend, Lena, skillfully picking berries. The lovely Lena. Leo marries her in a peaceful mountain village… [Lena is married! Congratulations.] [You have failed to clear Raise Lena.] [Restarting.] The happiest moment. Lena disappeared. An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Huh? Lena!” “Why have you been spacing out? And why are you looking at me like that? You wanna get beat up?” Lena, clad in thick leather armor and a sword on her shoulder, stared at him with unwavering eyes. It was a different scenar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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