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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97

< 카리나 드라고니아(2) >

신들과의 연결이 끊겼다.

이 세계에 오고 나서 북부군이 가장 먼저 인지한 사실이었다.

“대공 각하, 신들과의 연결이······.”

“성법은 일부 사용가능합니다만, 체내의 잔량에 의존하는 수준입니다.”

라이온하트의 국민들은, 기사들은 나면서부터 신을 섬기고 그들의 기적을 일상처럼 누려온 자들이다.

그런 그들이 신과의 연결이 끊겼음을 직감했을 때, 느꼈을 상실감은 감히 그 누가 예상할 수 있을까.

당장 카리나조차도 느껴지지 않는 신성에 낭패감을 숨기지 못할 정도였다. 신들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망각하지 마라. 우린 복수를 위해 이곳까지 놈들을 쫓아왔다.”

카리나는 방대한 성력으로 그들을 감쌀 어둠을 흩뿌렸다. 성배기사인 그녀의 그릇엔 아직 넘치는 성력이 남아있다.

이것이 악마들을, 강욕대공을 쓰러뜨릴 때까지 남아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 너희들을 보호해주던 성력의 울타리가 사라지고 마지막 남은 잔재마저 사라져가는구나.]

아주 오랫동안 역대 대공들의 심장 속에서 꿈틀거리던 용왕은 이를 놓치지 않았다.

* * * *

[크아아아악···!]

강욕대공과 그 군단과의 싸움은 처절했으나 결국 카리나와 그 군단의 승리로 끝이 났다.

“대, 대공각하! 카리나 대공께서 강욕대공의 목을 베었다!”

“승리했다! 드라고니아의, 라이온하트의 승리다!!”

“벤타시스께 영광을!!”

비록 많은 희생이 있었지만, 강욕대공과 그 군단을 몰살시킬 수 있었다. 이로써······.

“감축드립니다, 각하! 왕후님께서도 기뻐하실 겁니다!”

대공가의 오랜 집사인 델보스케가 카리나 앞에 눈물을 흘리며 넙죽 엎드렸다.

악마와의 대전쟁은 많은 소중한 이들을 잃게 했다.

제국의 황제가 300만 제국민들을 제물로 바쳐 소환한 혼돈의 군주 말루스에게 숱한 기사들이 목숨을 잃었고, 강욕대공, 타락대공, 살육대공, 빙하대공, 지혜대공 등 악마대공들 손에 전 대륙이 유린당했다.

그토록 많은 죽음 끝에 기어이 그 복수에 성공한 것이다.

“이제··· 라이온하트로 돌아갈 방법을 찾아야······.”

사자심왕은, 아버지는 어떻게 됐을까? 결국 왕국은 멸망했을까?

그들도 자신들이 떠난 후의 일을 짐작하지 못하는 게 아니다. 그래서 연합마저 내버려두고 강욕대공을 치러 이세계까지 온 것이다.

라이온하트가 이미 악마들 손에 멸망했다면······.

‘다음 복수가 시작될 뿐이다.’

그날, 벤타시스에게 영혼을 바치기로 맹세한 날, 모든 북부군들이 복수의 겁화로 자신을 불태우리라 맹세했다.

최후의 한 명까지도, 악을 멸하리라고.

“병력을 추슬러라. 돌아갈 방법을 찾는 건 그다음이다.”

기나긴 싸움을 끝내 피로가 몰려온 참이다. 잠시만 휴식을 취한 뒤, 라이온하트로 돌아가야겠지.

-와아아아아아아!!

그때였다. 배후에서 나타난 적의 군세. 순찰병들이 보고해왔다.

“각하! 적습입니다!”

“악마들의 잔당인가?”

“아닙니다. 일곱 왕국의 깃발입니다! 놈들이 우릴 배신했습니다!”

“······.”

악마대공의 군단을 섬멸함과 즉시 이 세계의 일곱 왕국들은 일제히 카리나와 북부군을 배신했다.

의외로 북부군은 이 배신을 염려하지 못했는데, 그들에게 있어 귀족의 명예와 왕의 고결함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배신의 가능성 그 자체를 무시한 건 아니다. 단지, 설마··· 설마, 하고, 이렇게까지 단합할 줄은 상상하지 못했을 뿐.

신앙과 명예, 고결함 속에서 살아온 이들은 어떤 의미에선 온실 속 화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가스파르 경!

-대공 각하를 지켜라!

하나둘 쓰러져 간다.

악마대공군과의 격돌로 지친 북부군은 85만 명이나 되는 대군 앞에서 차츰차츰 무너져 갔다.

이세계에 이주하고 나서 잔재하던 성력은 모두 사용했고, 그건 카리나도 마찬가지.

카리나가 무위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는 건, 용의 심장이라는 스스로 마력을 생산하는 강대한 유물 덕이다.

‘위험해. 이대로 계속 용의 마력을 사용하면······.’

안 그래도 자신은 용의 심장 적정유지기간을 훌쩍 넘겨 사용하고 있었다. 그것도 성력으로 인한 정화작용을 염두해둔 기간이다.

하지만 성력은 이미 고갈되었고, 카리나에게는 넘치는 용의 마력만이 가득했다. 이대로 가면 용화를 피할 수 없다.

하지만.

“내가 선두에 선다. 엄호해라.”

“각하!?”

카리나는 망설임 끝에 성력 대신 방대한 마력을 남용했다. 그녀의 시선과 마주친 적병들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고, 휘두른 검에 실린 마력은 부대 째로 휩쓸었다.

고작 용의 심장에서 넘치는 마력을 사용했을 뿐인데도 전장은 그녀 한 명에 의해 압도되고 있다.

그러니 어찌 사용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녀가 무리할 때마다 북부군 수백 명이 목숨을 보전했으니.

‘그들을 돌려보내야 한다. 고향으로···!’

그것이 북부를 대표하는 드라고니아 대공으로서의 의무. 기사된 자, 귀족된 자, 이 세상의 자유민들을 위해 기꺼이 그 목숨을 바쳐야 하는 법이다.

하지만.

점점 스러져가는 북부군과, 압도적인 숫자로 포위망을 좁혀오는 연합군.

단 한 명의 힘만으로 역전시키기엔 적은 너무나 많았다.

“끝이다, 이계의 침략자들이여.”

“너희 이교도들은 여기서 모두 죽는 거다.”

그렇게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고, 남은 북부군의 숫자도 불과 천사백여 명 남짓. 마지막까지 카리나의 곁을 보좌하던 델보스케가 말했다.

“각하. 저희가 시간을 벌겠습니다. 각하만이라도 빠져나가십시오.”

“······.”

카리나는 말없이 무너져 가는 전열을 지켜보았다.

당신께서도 이 광경을 보셨어야 했을까?

모두를 이끄는 자로서, 끝내 자신이 실패한 광경을.

그건 분명, 슬픈 일일 것이다.

부아가 치미고, 분통스럽고, 창자가 찢어지는 듯한 고통일 것이다.

자신을 믿고 따르는 이들이 하나둘 쓰러질 때마다의 고통을 당신께선 어찌 견디셨을까?

“저를 용서하지 마십시오.”

이제는 사는 세계조차 달라져 버린, 너무 먼 거리에 있는 아버지를 떠올리며 카리나는 말했다.

“드라고니아. 네게 내 살과 혼을 주겠다.”

카리나 대공이 ‘용제 카리나’가 된 날.

용의 군단 전설의 시작.

드라고니아 건국신화는 85만 명의 일곱 개 왕국군을 학살하며 시작했다.

전설의 전환점.

카리나는 드라고니아 대공이 아닌 드라고니아 황제가 된 것이다.

* * * *

“이미 거래는 끝났습니다. 제 살과 혼은 드라고니아에게 넘겼고, 드라고니아는 그 대가로 북부군의 혼을 중촌석으로 가공했습니다.”

사라진 낙원 대신, 용의 마력은 거짓된 낙원을 만들었다.

중촌이라 이름 붙인 것은, 언젠가 그들을 재건될 낙원에 보내주기 위해.

3만 명. 북부군 모두의 영혼을 결정의 형태로 정착시키기 위해 카리나가 치러야 할 대가는 무엇이었는가.

“카리나······.”

“값싼 대가였죠. 한 사람으로 3만 명을 구제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건 희생이 아니다.

“책무입니다. 당신께서 만신과 만백성의 어버이이기에 망설임이 없었듯이.”

드라고니아 대공인 카리나는 마땅히 3만의 제 병사들을 책임질 의무가 있다.

“폐하께서는 저를 대신해 용의 저주를 짊어질 생각인 듯하지만, 이미 늦었단 겁니다.”

“······.”

딸의 영혼은 구제받지 못한다. 하물며 그 육신조차 이제는 그녀의 것이 아니다.

그 말을 들은 아버지는 대체 어떻게 해야 반응해야 했을까.

“아니, 늦지 않았다. 아직 늦지 않았어!”

부정한다. 눈앞의 딸의 증언과 용의 비웃음에도 그가 아버지인 이상 포기할 순 없는 것이다.

[어리석구나, 라이온하트. 네 혈육이 맺은 계약이 얼마나 합리적인 것인지 이미 알 텐데?]

“닥쳐라···!”

레온이 성검을 뽑았다. 삿된 목소리를 흘리는 검은 기운을 향해 가차 없이 성검을 휘둘렀다.

-캉!

그러나 그 검을 막은 것은 자신의 딸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딸의 육신을 장악한 용의 영혼.

“이놈···! 카리나의 몸에서 썩 꺼져라!”

푸른 벽안이 찢어진 동공을 가진 붉은 눈으로 변모한다. 드라고니아가 말했다.

[나는 네 딸이 원하는 걸 주었고, 네 딸은 그 대가를 치렀다. 네놈이 뒤집을 수 있는 게 아니야.]

-쿵!

강대한 용의 마력이 검을 통해 레온을 튕겨냈다. 성검조차 베어내지 못한 용의 마력. 그것은 순식간에 공간을 장악하고 마법의 형태를 이룬다.

-콰콰쾅!

하나하나가 즉사기급의 대마법. 검은 마력이 폭발하며 먼지구름을 일으킨다.

-히힝!

그것을 빠져나오는 하얀 신수. 사자심왕의 맹우는 폭발의 여파 속에서도 제 기수를 끌고 빠져나온다.

[천마(天馬)의 혈통인가. 시건방진 짐승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려는 신수를 향해 촘촘한 마력의 화살들이 퍼부어진다. 하나하나가 고화력. 별철갑주조차 이 화력 앞에선 녹겠지만──

“달려라, 스탈리온!”

그 무식하기까지 한 대화력 앞에, 마찬가지로 저돌적인 돌격을 감행하는 레온. 스탈리온 또한 한치의 망설임 없이 마력의 화살비를 정면으로 주파한다.

-키이이이이!!

[흐음?]

격돌의 순간 들려온 것은 살이 쪼개지는 파육음이 아닌 흡사 금속과 부딪쳐 튕겨 나가는 철쪼가리의 소리.

격돌의 순간, 드라고니아늬 마력화살은 스탈리온의 갈퀴조차 상처 입히지 못하고 빗겨나갔다.

빛의 신수 스탈리온. 최강의 돌격자인 사자심왕에게 하사된 여신의 신마. 수백 년 전쟁의 역사를 사자심왕과 함께한 이 신수라면, 정면에서의 어떤 공격도 막아낸다.

돌격시의 절대저항력. 그 힘은 용의 마력조차 예외 없다.

[여전히 성가신 힘을 쓰는 놈들이다.]

드라고니아는 방대한 마력을 아낌없이 퍼부었다. 영락한 용의 사념조차도 성배기사의 육체를 손에 넣으면 과거의 영광을 어느 정도는 재현 가능하다.

그 마력의 폭발력은 지켜보는 모든 이로 하여금 경악하게 할 정도였다.

“괴, 괴물······.”

대마법사 콘월 옹은 폭발의 여파로부터 관객들을 보호하며 두려움 섞인 반응을 보였다.

대마법사인 그이기에 더욱이 저 용의 마력이 가진 무서움을 알 수 있다.

저건 인간이 상대할 수 있는 힘이 아니다.

신들의 숙적이라 자처할 수 있을 만했다.

‘저런 말도 안 되는 파괴력 앞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 거지?’

그렇기에.

“왼쪽 위! 스친다!”

고삐를 당기며 지시하는 사자심왕. 기수의 지시에 0.1초의 딜레이도 없이 즉각 행동에 나서는 신수.

고도의 기마술과 터무니없는 마력(馬力)으로 고기동을 성사시키는 스탈리온의 천재성.

정면에서 오는 공격은 저항력을 믿고 돌파하고, 측면과 상공에서 덮쳐드는 공격은 아슬아슬한 범위로 회피한다.

돌격과 회피를 동시에 진행하며 조금씩 위협적인 마상창을 들이미는 레온을 향해 드라고니아가 귀찮다는 듯 읊조렸다.

[그렇다면 피할 수 없는 압도적인 화력으로 짓뭉개주마.]

카리나의 등 뒤로 거대한 마법진이 모습을 드러낸다.

용언(龍言)──

[레온아, 피해라!]

육신을 잃고 영혼만이 남은 용이 재현하는 자신의 힘. 그 섬뜩함은 신들마저 위협을 느꼈다.

<드래곤 브레스>

쏟아지는 불길. 모든 것을 녹여버리는 용왕의 진노. 이 불길은 반신의 육신조차 태워버린다.

“짐은 승리자. 승리를 이끌어내는 신들의 기사.”

[······?!]

용왕의 화염이 사자심왕에게 닿기 전, 레온의 성창이 정면에서 화염을 받아낸다. 그리고 그 창끝에 서린 힘은······.

신벌 <전장의 불꽃>

사방 모든 불길을 지배하여 집속하는 전쟁신의 신벌이다.

“짐에게는 수백 년 전쟁의 역사와 만신의 가호가 깃들어 있다. 그런 짐을 상대한다는 건, 하나의 세계를 상대하는 것이다, 늙은 도마뱀!”

사자심왕에게 퍼부어진 용왕의 화염이 그대로 되돌아간다. 오히려 창끝에 압축된 그 불길은 이전보다 더욱 밀도가 높다.

[네놈···!]

드라고니아는 곧장 방대한 마력을 실어 마력방패를 생성했다. 찰나의 순간, 실로 성 하나를 압축한 것 같은 대방벽.

“되돌려주마!”

그리고 이를 함락하려는 신벌이 맞부닥친다.

녹아내리는 마력방패를 향해 용왕이 더욱 마력을 퍼부었다. 정말이지 끝이 없을 것 같은 방대한 마력이 기어코 자신의 브레스조차 견뎌낸다.

하지만──

기사란 돌격하는 자.

말에 몸을 싣고, 전속력으로, 일직선으로 정직하게.

검과 창이 닿는 거리까지 그저 돌격 또 돌격.

그렇기에 기사.

절대돌파력을 자랑하는 전장의 꽃.

-콰아!

그리고 눈앞의 이 남자는 모든 기사들의 정점.

기사왕.

──?!!

레온의 창끝이 균열이 간 마력방패를 단숨에 관통하고 드라고니아에게 닿는다.

드라고니아는 검으로 그것을 쳐냈지만, 돌격은 창끝의 충돌에서 끝나지 않는다.

-히힝!

창의 일격이 실패했다면, 전투마의 충격이야말로 제 2격.

하얀 신수는 무지막지한 돌파력을 실은 충격을 드라고니아에게 퍼부었고, 카리나의 육신이 뻥! 하고 튕겨 나갔다.

[이놈···!]

분노하는 드라고니아. 그 찰나, 몸에 실린 방대한 마력이 방패가 되어 충격력을 흡수했다.

드라고니아는 곧장 이 시건방진 짐승과 함께 기수를 쓸어버리려 했지만, 그녀의 찢어진 동공에는 말 위의 기수가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섬뜩한 기운에 위를 올려다보니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성검이 그대로 내리치고 있었다.

[큭···!]

짐승 같은 반사신경으로 그것을 막아내는 드라고니아. 하지만 레온은 공격이 막힘과 동시에 빛의 파동을 일으켜 드라고니아의 자세를 무너뜨린다.

-쿵!

-콰앙···!

그대로 몰아붙이는 레온. 그는 노련하게 근접전으로 몰아붙였다.

“용왕이라곤 해도 결국은 고화력뿐인 짐승. 접근전이 특기는 아닌가 보군. 검술로 짐을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으냐.”

[건방지다···!]

용은 진노하며 검을 휘둘렀지만, 시시각각 헛발질로 끝나며 레온의 접근을 허용한다.

세계를 상대한다.

그 발언이 결코 실언이 아님을 증명하듯.

조금씩, 조금씩··· 결국은 압도하며.

‘이놈···!’

앞으로.

“내 딸을 돌려내라···!”

「쓰러져라, 용왕이여···!」

언젠가 자신에게 도전했던 그 남자처럼.

용살자 지크.

그저 깡통 같은 갑옷을 입은 하찮은 필멸자.

「어리석은 놈. 내 손톱만도 못한 난쟁이가, 감히 이 용왕에게 도전했느냐.」

절대적인 힘의 차이를 앞에 두고도 남자는 불굴이었다.

가당찮은 신의 이름을 외치며. 앞으로, 또 앞으로. 그렇게 어느 순간──

“드라고니아···!”

모든 불리를 넘어 그 앞에 있다.

‘멈추지 않는 건가?’

멈출 수가 없다.

고작 삼백 년. 고작 삼백 년 산 인간의 역사가 불멸의 용왕을 압도한다.

용언 <멸룡의 격노>

끔찍한 마력의 밀도. 그것은 거대한 빛의 파동이 되어 사자심왕을 덮친다. 하지만──

<극광의 성검>

모든 빛의 주인인 여신의 권능을 성검에 담아 가른다.

그 성검은 이제 빛조차 가르는 극광이다.

[그렇군.]

멈추지 못했다.

모든 힘의 파동이 휩쓸고 간 자리, 성배기사의 육신을 장악한 용왕은 결투장의 바닥에 쓰러져 턱밑까지 파고든 성검을 보며 말했다.

[네놈은 타고난 전쟁꾼이군. 우리 같은 불멸자들에겐 없는, 전쟁의 역사 그 자체.]

한때는 비웃었다.

한때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신이란 작자들이 필멸자들을 내세워 용의 시대를 끝내겠다 선언했을 때는 어리석다 말했다.

하지만 끝난 건 용의 시대이며 승리한 건 신들과 그 기사들이다.

용을 좀먹은 독은 다름 아닌 그들의 오만과 필멸자들의 불굴이다.

[과연, 싸우는 자라면 네놈이 나보다 낫구나.]

“돌려내라. 카리나를.”

그렇기에 어리석다.

뒤집을 수 없는 거래를, 억지로 뒤집으라 외친다.

스스로도 알고 있을 텐데. 어째서 이리 발악하지?

불가능함에 도전하는 게 그들의 기질이라지만, 애초에 불가능한 것은 불가하기에 불가한 것이다.

카리나 드라고니아는 3만 북부군의 영혼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고, 그 대가는 이미 치러졌다.

어찌 됐건, 카리나의 영혼과 육신은 구제받지 못한다. 그녀가 자식을 낳고자 한 것은 자신의 존재가 소멸하기 전에 ‘드라고니아’라는 가문의 후손을 남기기 위한 것일 뿐.

그마저도 레온이 살아있다는 걸 안 이상 별다른 미련도 없어 보였다.

“불가합니다, 폐하. 저는 합리적인 거래를 했고, 덕분에 책무를 완수할 수 있었습니다. 제 선택을 무의미하게 하지 마십시오.”

“카리나···!”

카리나는 제게 겨눠진 성검의 주인을 붙잡으며 말했다.

“델보스케와··· 저를 따라준 3만의 북부군들을, 그들의 영혼을 낙원으로 인도해주십시오. 그것으로 제 책무는 완수됩니다.”

“아니! 그럴 수는 없다! 네가 나를 묻어야지, 결코 그 반대가 있을 수는 없어!”

당신은 이런 표정도 지을 수 있었던 건가.

카리나는 언제나 강직하고 강인했던 사자심왕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왕이기에 마땅히 희생할 수 있었던 자신의 사랑. 백성. 친구. 자기 자신까지도.

그와 똑같은 행보를 걸었기에 이제는 안다.

그 많은 책무를 짊어진 자는 후회해선 안 된다.

그렇다고 울 수도 없다. 그의 등을 바라보는 모든 이들에게서 언제나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야 하기에.

카리나는 분명 자신의 책무를 완수하기에 마땅한 결정을 내렸지만.

그래도 남겨질 아버지가 가여워 미안해질 수밖에 없었다.

[드라고니아여. 우리들 신들의 숙적이여.]

바로 그 순간, 새하얀 빛의 형상과 함께 여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레온의 후광으로 나타난 아리아나는 카리나의 심장에 있는 용왕에게 말을 걸었다.

이제는 그자와 별 다를 바 없는 자신들의 처지를 공유하며.

[조금 전, 만신전의 합의가 끝났다. 어둠이 내건 제안이다.]

그 말에 모두가 여신의 음성에 집중했다. 본능적으로, 다음에 나올 말이 어떤 것인지, 얼마나 중대한 사안인지 직감하며.

여신이 입을 열었다.

[만신전에 합류하라, 드라고니아. 우리는 너를 운명공동체로서 함께할 용의가 있다.]


           


Chapter 197

Chapter 197

< 카리나 드라고니아(2) >

신들과의 연결이 끊겼다.

이 세계에 오고 나서 북부군이 가장 먼저 인지한 사실이었다.

"대공 각하, 신들과의 연결이······."

"성법은 일부 사용가능합니다만, 체내의 잔량에 의존하는 수준입니다."

라이온하트의 국민들은, 기사들은 나면서부터 신을 섬기고 그들의 기적을 일상처럼 누려온 자들이다.

그런 그들이 신과의 연결이 끊겼음을 직감했을 때, 느꼈을 상실감은 감히 그 누가 예상할 수 있을까.

당장 카리나조차도 느껴지지 않는 신성에 낭패감을 숨기지 못할 정도였다. 신들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망각하지 마라. 우린 복수를 위해 이곳까지 놈들을 쫓아왔다."

카리나는 방대한 성력으로 그들을 감쌀 어둠을 흩뿌렸다. 성배기사인 그녀의 그릇엔 아직 넘치는 성력이 남아있다.

이것이 악마들을, 강욕대공을 쓰러뜨릴 때까지 남아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 너희들을 보호해주던 성력의 울타리가 사라지고 마지막 남은 잔재마저 사라져가는구나.]

아주 오랫동안 역대 대공들의 심장 속에서 꿈틀거리던 용왕은 이를 놓치지 않았다.

* * * *

[크아아아악···!]

강욕대공과 그 군단과의 싸움은 처절했으나 결국 카리나와 그 군단의 승리로 끝이 났다.

"대, 대공각하! 카리나 대공께서 강욕대공의 목을 베었다!"

"승리했다! 드라고니아의, 라이온하트의 승리다!!"

"벤타시스께 영광을!!"

비록 많은 희생이 있었지만, 강욕대공과 그 군단을 몰살시킬 수 있었다. 이로써······.

"감축드립니다, 각하! 왕후님께서도 기뻐하실 겁니다!"

대공가의 오랜 집사인 델보스케가 카리나 앞에 눈물을 흘리며 넙죽 엎드렸다.

악마와의 대전쟁은 많은 소중한 이들을 잃게 했다.

제국의 황제가 300만 제국민들을 제물로 바쳐 소환한 혼돈의 군주 말루스에게 숱한 기사들이 목숨을 잃었고, 강욕대공, 타락대공, 살육대공, 빙하대공, 지혜대공 등 악마대공들 손에 전 대륙이 유린당했다.

그토록 많은 죽음 끝에 기어이 그 복수에 성공한 것이다.

"이제··· 라이온하트로 돌아갈 방법을 찾아야······."

사자심왕은, 아버지는 어떻게 됐을까? 결국 왕국은 멸망했을까?

그들도 자신들이 떠난 후의 일을 짐작하지 못하는 게 아니다. 그래서 연합마저 내버려두고 강욕대공을 치러 이세계까지 온 것이다.

라이온하트가 이미 악마들 손에 멸망했다면······.

'다음 복수가 시작될 뿐이다.'

그날, 벤타시스에게 영혼을 바치기로 맹세한 날, 모든 북부군들이 복수의 겁화로 자신을 불태우리라 맹세했다.

최후의 한 명까지도, 악을 멸하리라고.

"병력을 추슬러라. 돌아갈 방법을 찾는 건 그다음이다."

기나긴 싸움을 끝내 피로가 몰려온 참이다. 잠시만 휴식을 취한 뒤, 라이온하트로 돌아가야겠지.

-와아아아아아아!!

그때였다. 배후에서 나타난 적의 군세. 순찰병들이 보고해왔다.

"각하! 적습입니다!"

"악마들의 잔당인가?"

"아닙니다. 일곱 왕국의 깃발입니다! 놈들이 우릴 배신했습니다!"

"······."

악마대공의 군단을 섬멸함과 즉시 이 세계의 일곱 왕국들은 일제히 카리나와 북부군을 배신했다.

의외로 북부군은 이 배신을 염려하지 못했는데, 그들에게 있어 귀족의 명예와 왕의 고결함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배신의 가능성 그 자체를 무시한 건 아니다. 단지, 설마··· 설마, 하고, 이렇게까지 단합할 줄은 상상하지 못했을 뿐.

신앙과 명예, 고결함 속에서 살아온 이들은 어떤 의미에선 온실 속 화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가스파르 경!

-대공 각하를 지켜라!

하나둘 쓰러져 간다.

악마대공군과의 격돌로 지친 북부군은 85만 명이나 되는 대군 앞에서 차츰차츰 무너져 갔다.

이세계에 이주하고 나서 잔재하던 성력은 모두 사용했고, 그건 카리나도 마찬가지.

카리나가 무위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는 건, 용의 심장이라는 스스로 마력을 생산하는 강대한 유물 덕이다.

'위험해. 이대로 계속 용의 마력을 사용하면······.'

안 그래도 자신은 용의 심장 적정유지기간을 훌쩍 넘겨 사용하고 있었다. 그것도 성력으로 인한 정화작용을 염두해둔 기간이다.

하지만 성력은 이미 고갈되었고, 카리나에게는 넘치는 용의 마력만이 가득했다. 이대로 가면 용화를 피할 수 없다.

하지만.

"내가 선두에 선다. 엄호해라."

"각하!?"

카리나는 망설임 끝에 성력 대신 방대한 마력을 남용했다. 그녀의 시선과 마주친 적병들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고, 휘두른 검에 실린 마력은 부대 째로 휩쓸었다.

고작 용의 심장에서 넘치는 마력을 사용했을 뿐인데도 전장은 그녀 한 명에 의해 압도되고 있다.

그러니 어찌 사용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녀가 무리할 때마다 북부군 수백 명이 목숨을 보전했으니.

'그들을 돌려보내야 한다. 고향으로···!'

그것이 북부를 대표하는 드라고니아 대공으로서의 의무. 기사된 자, 귀족된 자, 이 세상의 자유민들을 위해 기꺼이 그 목숨을 바쳐야 하는 법이다.

하지만.

점점 스러져가는 북부군과, 압도적인 숫자로 포위망을 좁혀오는 연합군.

단 한 명의 힘만으로 역전시키기엔 적은 너무나 많았다.

"끝이다, 이계의 침략자들이여."

"너희 이교도들은 여기서 모두 죽는 거다."

그렇게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고, 남은 북부군의 숫자도 불과 천사백여 명 남짓. 마지막까지 카리나의 곁을 보좌하던 델보스케가 말했다.

"각하. 저희가 시간을 벌겠습니다. 각하만이라도 빠져나가십시오."

"······."

카리나는 말없이 무너져 가는 전열을 지켜보았다.

당신께서도 이 광경을 보셨어야 했을까?

모두를 이끄는 자로서, 끝내 자신이 실패한 광경을.

그건 분명, 슬픈 일일 것이다.

부아가 치미고, 분통스럽고, 창자가 찢어지는 듯한 고통일 것이다.

자신을 믿고 따르는 이들이 하나둘 쓰러질 때마다의 고통을 당신께선 어찌 견디셨을까?

"저를 용서하지 마십시오."

이제는 사는 세계조차 달라져 버린, 너무 먼 거리에 있는 아버지를 떠올리며 카리나는 말했다.

"드라고니아. 네게 내 살과 혼을 주겠다."

카리나 대공이 '용제 카리나'가 된 날.

용의 군단 전설의 시작.

드라고니아 건국신화는 85만 명의 일곱 개 왕국군을 학살하며 시작했다.

전설의 전환점.

카리나는 드라고니아 대공이 아닌 드라고니아 황제가 된 것이다.

* * * *

"이미 거래는 끝났습니다. 제 살과 혼은 드라고니아에게 넘겼고, 드라고니아는 그 대가로 북부군의 혼을 중촌석으로 가공했습니다."

사라진 낙원 대신, 용의 마력은 거짓된 낙원을 만들었다.

중촌이라 이름 붙인 것은, 언젠가 그들을 재건될 낙원에 보내주기 위해.

3만 명. 북부군 모두의 영혼을 결정의 형태로 정착시키기 위해 카리나가 치러야 할 대가는 무엇이었는가.

"카리나······."

"값싼 대가였죠. 한 사람으로 3만 명을 구제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건 희생이 아니다.

"책무입니다. 당신께서 만신과 만백성의 어버이이기에 망설임이 없었듯이."

드라고니아 대공인 카리나는 마땅히 3만의 제 병사들을 책임질 의무가 있다.

"폐하께서는 저를 대신해 용의 저주를 짊어질 생각인 듯하지만, 이미 늦었단 겁니다."

"······."

딸의 영혼은 구제받지 못한다. 하물며 그 육신조차 이제는 그녀의 것이 아니다.

그 말을 들은 아버지는 대체 어떻게 해야 반응해야 했을까.

"아니, 늦지 않았다. 아직 늦지 않았어!"

부정한다. 눈앞의 딸의 증언과 용의 비웃음에도 그가 아버지인 이상 포기할 순 없는 것이다.

[어리석구나, 라이온하트. 네 혈육이 맺은 계약이 얼마나 합리적인 것인지 이미 알 텐데?]

"닥쳐라···!"

레온이 성검을 뽑았다. 삿된 목소리를 흘리는 검은 기운을 향해 가차 없이 성검을 휘둘렀다.

-캉!

그러나 그 검을 막은 것은 자신의 딸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딸의 육신을 장악한 용의 영혼.

"이놈···! 카리나의 몸에서 썩 꺼져라!"

푸른 벽안이 찢어진 동공을 가진 붉은 눈으로 변모한다. 드라고니아가 말했다.

[나는 네 딸이 원하는 걸 주었고, 네 딸은 그 대가를 치렀다. 네놈이 뒤집을 수 있는 게 아니야.]

-쿵!

강대한 용의 마력이 검을 통해 레온을 튕겨냈다. 성검조차 베어내지 못한 용의 마력. 그것은 순식간에 공간을 장악하고 마법의 형태를 이룬다.

-콰콰쾅!

하나하나가 즉사기급의 대마법. 검은 마력이 폭발하며 먼지구름을 일으킨다.

-히힝!

그것을 빠져나오는 하얀 신수. 사자심왕의 맹우는 폭발의 여파 속에서도 제 기수를 끌고 빠져나온다.

[천마(天馬)의 혈통인가. 시건방진 짐승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려는 신수를 향해 촘촘한 마력의 화살들이 퍼부어진다. 하나하나가 고화력. 별철갑주조차 이 화력 앞에선 녹겠지만──

"달려라, 스탈리온!"

그 무식하기까지 한 대화력 앞에, 마찬가지로 저돌적인 돌격을 감행하는 레온. 스탈리온 또한 한치의 망설임 없이 마력의 화살비를 정면으로 주파한다.

-키이이이이!!

[흐음?]

격돌의 순간 들려온 것은 살이 쪼개지는 파육음이 아닌 흡사 금속과 부딪쳐 튕겨 나가는 철쪼가리의 소리.

격돌의 순간, 드라고니아늬 마력화살은 스탈리온의 갈퀴조차 상처 입히지 못하고 빗겨나갔다.

빛의 신수 스탈리온. 최강의 돌격자인 사자심왕에게 하사된 여신의 신마. 수백 년 전쟁의 역사를 사자심왕과 함께한 이 신수라면, 정면에서의 어떤 공격도 막아낸다.

돌격시의 절대저항력. 그 힘은 용의 마력조차 예외 없다.

[여전히 성가신 힘을 쓰는 놈들이다.]

드라고니아는 방대한 마력을 아낌없이 퍼부었다. 영락한 용의 사념조차도 성배기사의 육체를 손에 넣으면 과거의 영광을 어느 정도는 재현 가능하다.

그 마력의 폭발력은 지켜보는 모든 이로 하여금 경악하게 할 정도였다.

"괴, 괴물······."

대마법사 콘월 옹은 폭발의 여파로부터 관객들을 보호하며 두려움 섞인 반응을 보였다.

대마법사인 그이기에 더욱이 저 용의 마력이 가진 무서움을 알 수 있다.

저건 인간이 상대할 수 있는 힘이 아니다.

신들의 숙적이라 자처할 수 있을 만했다.

'저런 말도 안 되는 파괴력 앞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 거지?'

그렇기에.

"왼쪽 위! 스친다!"

고삐를 당기며 지시하는 사자심왕. 기수의 지시에 0.1초의 딜레이도 없이 즉각 행동에 나서는 신수.

고도의 기마술과 터무니없는 마력(馬力)으로 고기동을 성사시키는 스탈리온의 천재성.

정면에서 오는 공격은 저항력을 믿고 돌파하고, 측면과 상공에서 덮쳐드는 공격은 아슬아슬한 범위로 회피한다.

돌격과 회피를 동시에 진행하며 조금씩 위협적인 마상창을 들이미는 레온을 향해 드라고니아가 귀찮다는 듯 읊조렸다.

[그렇다면 피할 수 없는 압도적인 화력으로 짓뭉개주마.]

카리나의 등 뒤로 거대한 마법진이 모습을 드러낸다.

용언(龍言)──

[레온아, 피해라!]

육신을 잃고 영혼만이 남은 용이 재현하는 자신의 힘. 그 섬뜩함은 신들마저 위협을 느꼈다.

<드래곤 브레스>

쏟아지는 불길. 모든 것을 녹여버리는 용왕의 진노. 이 불길은 반신의 육신조차 태워버린다.

"짐은 승리자. 승리를 이끌어내는 신들의 기사."

[······?!]

용왕의 화염이 사자심왕에게 닿기 전, 레온의 성창이 정면에서 화염을 받아낸다. 그리고 그 창끝에 서린 힘은······.

신벌 <전장의 불꽃>

사방 모든 불길을 지배하여 집속하는 전쟁신의 신벌이다.

"짐에게는 수백 년 전쟁의 역사와 만신의 가호가 깃들어 있다. 그런 짐을 상대한다는 건, 하나의 세계를 상대하는 것이다, 늙은 도마뱀!"

사자심왕에게 퍼부어진 용왕의 화염이 그대로 되돌아간다. 오히려 창끝에 압축된 그 불길은 이전보다 더욱 밀도가 높다.

[네놈···!]

드라고니아는 곧장 방대한 마력을 실어 마력방패를 생성했다. 찰나의 순간, 실로 성 하나를 압축한 것 같은 대방벽.

"되돌려주마!"

그리고 이를 함락하려는 신벌이 맞부닥친다.

녹아내리는 마력방패를 향해 용왕이 더욱 마력을 퍼부었다. 정말이지 끝이 없을 것 같은 방대한 마력이 기어코 자신의 브레스조차 견뎌낸다.

하지만──

기사란 돌격하는 자.

말에 몸을 싣고, 전속력으로, 일직선으로 정직하게.

검과 창이 닿는 거리까지 그저 돌격 또 돌격.

그렇기에 기사.

절대돌파력을 자랑하는 전장의 꽃.

-콰아!

그리고 눈앞의 이 남자는 모든 기사들의 정점.

기사왕.

──?!!

레온의 창끝이 균열이 간 마력방패를 단숨에 관통하고 드라고니아에게 닿는다.

드라고니아는 검으로 그것을 쳐냈지만, 돌격은 창끝의 충돌에서 끝나지 않는다.

-히힝!

창의 일격이 실패했다면, 전투마의 충격이야말로 제 2격.

하얀 신수는 무지막지한 돌파력을 실은 충격을 드라고니아에게 퍼부었고, 카리나의 육신이 뻥! 하고 튕겨 나갔다.

[이놈···!]

분노하는 드라고니아. 그 찰나, 몸에 실린 방대한 마력이 방패가 되어 충격력을 흡수했다.

드라고니아는 곧장 이 시건방진 짐승과 함께 기수를 쓸어버리려 했지만, 그녀의 찢어진 동공에는 말 위의 기수가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섬뜩한 기운에 위를 올려다보니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성검이 그대로 내리치고 있었다.

[큭···!]

짐승 같은 반사신경으로 그것을 막아내는 드라고니아. 하지만 레온은 공격이 막힘과 동시에 빛의 파동을 일으켜 드라고니아의 자세를 무너뜨린다.

-쿵!

-콰앙···!

그대로 몰아붙이는 레온. 그는 노련하게 근접전으로 몰아붙였다.

"용왕이라곤 해도 결국은 고화력뿐인 짐승. 접근전이 특기는 아닌가 보군. 검술로 짐을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으냐."

[건방지다···!]

용은 진노하며 검을 휘둘렀지만, 시시각각 헛발질로 끝나며 레온의 접근을 허용한다.

세계를 상대한다.

그 발언이 결코 실언이 아님을 증명하듯.

조금씩, 조금씩··· 결국은 압도하며.

'이놈···!'

앞으로.

"내 딸을 돌려내라···!"

「쓰러져라, 용왕이여···!」

언젠가 자신에게 도전했던 그 남자처럼.

용살자 지크.

그저 깡통 같은 갑옷을 입은 하찮은 필멸자.

「어리석은 놈. 내 손톱만도 못한 난쟁이가, 감히 이 용왕에게 도전했느냐.」

절대적인 힘의 차이를 앞에 두고도 남자는 불굴이었다.

가당찮은 신의 이름을 외치며. 앞으로, 또 앞으로. 그렇게 어느 순간──

"드라고니아···!"

모든 불리를 넘어 그 앞에 있다.

'멈추지 않는 건가?'

멈출 수가 없다.

고작 삼백 년. 고작 삼백 년 산 인간의 역사가 불멸의 용왕을 압도한다.

용언 <멸룡의 격노>

끔찍한 마력의 밀도. 그것은 거대한 빛의 파동이 되어 사자심왕을 덮친다. 하지만──

<극광의 성검>

모든 빛의 주인인 여신의 권능을 성검에 담아 가른다.

그 성검은 이제 빛조차 가르는 극광이다.

[그렇군.]

멈추지 못했다.

모든 힘의 파동이 휩쓸고 간 자리, 성배기사의 육신을 장악한 용왕은 결투장의 바닥에 쓰러져 턱밑까지 파고든 성검을 보며 말했다.

[네놈은 타고난 전쟁꾼이군. 우리 같은 불멸자들에겐 없는, 전쟁의 역사 그 자체.]

한때는 비웃었다.

한때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신이란 작자들이 필멸자들을 내세워 용의 시대를 끝내겠다 선언했을 때는 어리석다 말했다.

하지만 끝난 건 용의 시대이며 승리한 건 신들과 그 기사들이다.

용을 좀먹은 독은 다름 아닌 그들의 오만과 필멸자들의 불굴이다.

[과연, 싸우는 자라면 네놈이 나보다 낫구나.]

"돌려내라. 카리나를."

그렇기에 어리석다.

뒤집을 수 없는 거래를, 억지로 뒤집으라 외친다.

스스로도 알고 있을 텐데. 어째서 이리 발악하지?

불가능함에 도전하는 게 그들의 기질이라지만, 애초에 불가능한 것은 불가하기에 불가한 것이다.

카리나 드라고니아는 3만 북부군의 영혼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고, 그 대가는 이미 치러졌다.

어찌 됐건, 카리나의 영혼과 육신은 구제받지 못한다. 그녀가 자식을 낳고자 한 것은 자신의 존재가 소멸하기 전에 '드라고니아'라는 가문의 후손을 남기기 위한 것일 뿐.

그마저도 레온이 살아있다는 걸 안 이상 별다른 미련도 없어 보였다.

"불가합니다, 폐하. 저는 합리적인 거래를 했고, 덕분에 책무를 완수할 수 있었습니다. 제 선택을 무의미하게 하지 마십시오."

"카리나···!"

카리나는 제게 겨눠진 성검의 주인을 붙잡으며 말했다.

"델보스케와··· 저를 따라준 3만의 북부군들을, 그들의 영혼을 낙원으로 인도해주십시오. 그것으로 제 책무는 완수됩니다."

"아니! 그럴 수는 없다! 네가 나를 묻어야지, 결코 그 반대가 있을 수는 없어!"

당신은 이런 표정도 지을 수 있었던 건가.

카리나는 언제나 강직하고 강인했던 사자심왕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왕이기에 마땅히 희생할 수 있었던 자신의 사랑. 백성. 친구. 자기 자신까지도.

그와 똑같은 행보를 걸었기에 이제는 안다.

그 많은 책무를 짊어진 자는 후회해선 안 된다.

그렇다고 울 수도 없다. 그의 등을 바라보는 모든 이들에게서 언제나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야 하기에.

카리나는 분명 자신의 책무를 완수하기에 마땅한 결정을 내렸지만.

그래도 남겨질 아버지가 가여워 미안해질 수밖에 없었다.

[드라고니아여. 우리들 신들의 숙적이여.]

바로 그 순간, 새하얀 빛의 형상과 함께 여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레온의 후광으로 나타난 아리아나는 카리나의 심장에 있는 용왕에게 말을 걸었다.

이제는 그자와 별 다를 바 없는 자신들의 처지를 공유하며.

[조금 전, 만신전의 합의가 끝났다. 어둠이 내건 제안이다.]

그 말에 모두가 여신의 음성에 집중했다. 본능적으로, 다음에 나올 말이 어떤 것인지, 얼마나 중대한 사안인지 직감하며.

여신이 입을 열었다.

[만신전에 합류하라, 드라고니아. 우리는 너를 운명공동체로서 함께할 용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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