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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02

201. 거지남매 – 집 나간 아내

가라앉은 아침 공기. 창문 틈새로 얇은 햇살이 들이쳤다. 공주는 본래 늦잠 자기를 즐겼으나 부스스,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잠자리가 불편한 까닭이었다. 폭신하지만 거친 베개가 그녀의 잠을 깨뜨렸고, 몸을 뒤척인 공주는 도로 눈을 감았다가 번쩍, 누운 자세로 금빛 눈동자를 굴렸다.

‘납치됐나?’

지금은 전시(戰時)다. 후방으로 잠입한 오른 왕국의 기사들이 영지 곳곳을 누비고 있었다. 어쩌면 잠든 사이 나는 볼모로 잡혀 왔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긴장하며, 공주는 잠시 움직이기를 저어하였다. 발가락을 꼼지락거려 자신의 몸 상태를 점검하곤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아보았다.

방이다. 달콤한 향수 냄새와 꽃향기가 섞인 방. 그것도 아스라한 추억이 묻은 방이었다.

공주는 어리둥절해졌다.

하지만 살그머니 몸을 일으킨 순간, 잠이 달아난 레나는 여기가 어딘지를 깨달았다.

크세니아 언니의 방이다.

어젯밤 언니가 방바닥에 이부자리를 깔아주었고, 나는 그곳에서 잠들었었다. 아무래도 언니는 늘 그랬듯이 날 침대에 눕혀주고는 아침 운동을 나간 모양이었다.

‘늘 그랬듯이?’

나는 분명 이곳이 처음일 텐데…

아리송하였으나, 레나는 주섬주섬 이불을 정돈하기 시작했다. 바닥에 깔린 이부자리까지 접었을 무렵에는 ‘이불을 어디에 넣어두더라?’ 장롱의 위치를 잊어먹었다.

“어머나, 일어났구나?”

레나가 제 키만한 이불을 들고 방황하는 그때, 크세니아가 문을 열었다. 상쾌하게 땀을 흘린 그녀는 인사하며 옷을 갈아입었다.

레나도 꾸벅, 인사했다. 허나 가볍게 고개를 숙였을 뿐 예전처럼 공손한 배꼽 인사가 아니었다. 옷자락을 짚는 기품이 예사롭지 않았다.

크세니아는 움찔했다. 어젯밤과 비교했을 때 어딘가 달라진 소녀를 훑어보았으나 레나는 말똥한 눈길을 돌려줄 뿐이었다.

그런데 뭔가 느낌이…

크세니아가 고개를 저었다. 과민반응이라 생각하며, 통제되지 않는 위엄을 흘리는 소녀를 샤워장으로 이끌었다. 씻고, 식사한 뒤 극장으로 돌아왔을 때는 여전히 아침이었다.

“언니는 이제 일해야 하는데 어떡하지? 아, 혹시 글을 읽을 줄 알면 여기서 책이라도 읽고 있을래?”

“그냥 앉아있을게요.”

배우들이 모여들기 시작한 분장실 한켠에 책이 쌓여 있었다. 레나는 곳곳에 구멍이 났지만, 낡은 만큼 더 푹신한 소파에 앉아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기름칠한 목조 건물.

갖가지 연극 소품이 뒹굴고, 배우의 열정적인 몸짓이 끊이지 않는 분장실이 레나는 낯설지가 않았다. 되려 반가운 기분까지 들며 뭐가 자꾸 기억나려 하였는데…

좁다.

그와 동시에 자신이 있기엔 너무 하찮고, 비좁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내가 왜 이러지? 고민하던 레나는 아무래도 오빠가 없어서 자기가 투정을 부리는 거라고 판단했다.

정말 오래간만에 천장이 있는 잠자리를 가졌고, 따순밥을 얻어먹었으니 투정이란 가당찮지만, 그것 말고는 이유가 될만한 것이 없었다.

다행히 레오가 도착하면서 그녀의 고민은 씻은 듯이 사그라들었다. 레나가 “오빠!” 외치며 달려들었다.

“어이구, 내 동생. 잘 잤어?”

“응. 오빠는?”

“나야 잘 잤지.”

그는 적당히 둘러대었다.

이래저래 고민할 게 많아서 잠을 설치는 바람에 하마터면 곤욕을 치를 뻔했으나, 건물주인을 피해 아슬아슬하게 빠져나왔다.

사실 마주쳐서 곤란할 쪽은 레오가 아니다. 허나 구태여 사고를 일으키고 싶진 않았다.

“크세니아는?”

“언니는 저기.”

분장실 저편에선 크세니아가 다른 배우들과 합을 맞춰보고 있었다.

손을 흔들어보았으나 연극 연습에 정신이 팔린 그녀는 이쪽을 눈치채지 못했다. 레오도 방해할 생각은 없어서 동생에게로 관심을 돌렸다.

“여기서 뭐 하고 있었어?”

“그냥 앉아있었지. 오빠, 그런데 나 꿈꿨다? 엄청 생생했어. 기억은 잘 안 나지만…”

“…그래? 어땠는데?”

“몰라. 하지만 뭔가 굉장히 바빴던 것 같아.”

레나가 제 이마를 살포시 짚었다. 기억을 더듬는 것이었는데, 레오는 동생의 성숙해진 몸동작에 조바심을 느꼈다.

동생 레나는 어떤 환경에 놓이느냐에 따라 성장이 크게 갈렸다. 뚜렷한 장래 희망이 있는 소꿉친구의 레아나 약혼관계의 레나 아이나르와 달리 딱히 꿈이랄 게 없어서 뭐든 당장 손에 잡히는 걸 하려 들었다.

카시아의 보살핌을 받았을 때는 신발을 만드는 장인이, 크세니아의 보살핌을 받았을 때는 배우가 되었다. 본인이 공주임을 알았을 때는 홀로 공작(Duke)이 되었었다.

무엇이든 잘하는 재능. 거지남매 시나리오의 열악함에 가려져 꽃피우기가 어렵다 뿐이지 한 번 물꼬가 트이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었다. 또, 그 물길이 어디를 향하게 될 것인지는 레오의 손에 달려 있었다.

이를 잘 이용한다면, 게임을 클리어하는 데 분명 큰 도움이 되리라.

하지만 레오는 도저히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동생을 이용하고 싶지 않을뿐더러, 까닥 잘못했을 때의 파급력을 감당할 수 없었다. ‘홍등가’ 엔딩. 사진 너머까지 요염하게 손 뻗은 동생의 사진을 아직도 잊지 못하겠다.

‘제발… 그냥 평범하게, 행복하게 살아주면 안 되겠니?’

클리어를 위해 레나를 공주로 만들긴 해야 하겠다만, 사실 동생이 그냥 이대로 있어 줬으면 좋겠다.

한데 민서의 그 작은 바람마저도 위기에 처했다. 사진 스무 장. 고작 하루 만에 동생이 변화하였고, 이를 마냥 기쁘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또 무슨 꿈을 꿀지 어떻게 아느냔 말이다. 나는 뭘 어찌해야 한단 말이냐. 동생이 꿀 꿈들이 어쩌면 모두 악몽이고, 내 잘못으로 비롯된 것들일 터인데…

“음? 오빠? 왜 그래?”

“아, 아무것도 아니야.”

레오는 한숨을 삼켰다. 어찌할 도리가 없는 고민을 접고 동생과 잠시 놀아주었다.

마음 같아서는 계속 이렇게 놀아주고 싶다. 그러나 며칠 내로 오르빌을 떠나야 하는데, 그 전에 해두어야 할 일이 많았다.

‘이젠 슬슬 가봐야겠다.’ 생각하는 그때, 레오는 멀리서 다가오지 못하고 꼼지락거리는 소년을 발견하곤 미소 지었다.

“레나야. 오빠 이제 가봐야겠다. 이따 저녁에 다시 올게. 그런데 저기 쟤 네 친구 아니야? 왜 저러고 있데?”

“어? 티안이다! 티안~!”

도도도도 달려간 동생.

덕분에 레오는 마음 놓고 극장을 떠날 수 있었다. 지나치면서 “네가 산티안이지? 레나랑 얌전히 놀아야 한다.” ─ 경고인지 격려인지 모를 말을 남겼다.

* * *

“넌 처음 보는데, 심부름 왔냐? 뭐야, 칼을 차고 있네? 준기사야?”

이윽고 레오는 페테르 백작의 저택에 도착해 있었다. 저택을 지키는 경비병이 앞을 가로막으며 심부름꾼이라면 응당 가져왔어야 할 전표라든지, 출입증 따위를 요구하였으나 레오는 줄 것이 없었다.

그렇다고 그까짓 것을 만들겠다고 허비할 시간도 없다. 레오는 가타부타 말없이 검을 뽑았다.

“지금 뭐 하는…?!”

레오의 검이 지글지글 작렬했다. 경비병의 눈이 휘둥그레졌고, 레오는 이 편리한 수단을 두고 구태여 먼 길을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오러블레이드를 선보이면서 어떤 문제가 생길지도 모르나, 어차피 그는 곧 떠날 것이었다. 기겁한 경비병에게 레오가 말했다.

“게스타브 페테르 백작에게 레오가 왔노라고 전해라. 내 인상착의를 설명하면 알아들을 것이다.”

그렇게 바로 백작을 만날 수 있었으면 편했으련만, 레오는 한 번의 검열을 더 거쳤다.

감히 백작께 달려가지 못한 경비병이 집사를 데려왔다. 내가 이런 사람이다. 집사에게도 오러블레이드를 자랑한 레오는 그제야 응접실로 안내받았다.

기사 몇 명이 달려와 그에게 경악과 경계의 시선을 던졌으나, 그래도 이만하면 쉽게 통과했다고 평할 만했다. 귀족을 만나기 위해서 번번이 어떤 증표가 필요했던 과거와 달리 이젠 언제든 우격다짐으로 저택에 들어설 수 있었다. 그것도 심지어 평화롭게.

“저… 저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백작님을 모셔오겠습니다. 그런데 무슨 용건이신지…?”

“백작을 만나서 이야기하겠다. 가서 레오라는 사람이 왔노라고 전해라. 혹시 못 알아듣거든, 이 목걸이를 보여주어라.”

게스타브 백작이 내 목걸이를 알아볼까? 의문이었으나 레오는 그의 어머니, ‘아이나스 드 예리엘’의 상징이 새겨진 목걸이를 건네주었다. 이따 돌려받으면 그만이니 손해 볼 것은 없었다.

목걸이를 받아든 집사는 서둘러 달려 나갔다. 시녀에게 다과를 내오라 소리치고는 황망히 사라졌다.

레오는 자수가 빽빽이 새겨진 소파에 느긋하게 몸을 기댔다. 기사들이 여전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으나 신경 쓰지 않았다.

여기에 오기는 두 번째다. 처음 왔을 때는 베르크 추기경을 만났던 경험과 두 사람의 관계, 훨씬 더 전의 회차에서 백작이 보였던 행동을 참고해 게스타브 페테르 백작을 회유하려 했었다.

근위기사가 되어 왕자 만남 업적까지 챙겼던 당시엔 {바르바토스의 팔찌}까지 있어서 그를 설득하는 데 어려움이 없으리라 생각했으나, 문제가 있었다.

[ 업적 : 성녀의 세례(洗禮) – 레오에게 {신력 간파} 능력이 부여됩니다. ]

게스타브 모나크 남작은 사제마냥 주신의 신력을 지닌 인간이었다. 누가 베르크 추기경의 아들이 아니랄까 봐… 그 때문에 바르바토스의 신력을 기반으로 한 팔찌는 무용지물이었고, 아버지의 이야기가 나오자 게스타브 백작 또한 베르크 추기경이 그랬던 것처럼 매우 도발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렇다면 이번엔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레오는 궁리하면서도 그렇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지난번에 실패한 원인은 클로에 공주와 키스하면서 벨리타 왕국의 왕이자 머나먼 고대의 아신, 아스타로트(Astroth)를 만났기 때문이지 백작을 회유하는 데 실패한 게 아니었다. 그는 나를 도와주겠다고 말했었다.

다만, 아직도 이해할 수 없는 건 백작과 추기경의 행동이었다. 부자(父子) 관계임에도 두 사람은 사이가 굉장히 안 좋아 보였다.

{혈통}을 되찾기 위해 오리아스를 물리쳐야만 하는 거지남매 시나리오의 특성상 추기경의 조력을 얻을 필요가 있어 보이고, 그와 연관이 있는 사람이 거지남매 시나리오의 스타팅 포인트, 오르빌에 있으니 백작을 거쳐야 하는 건 분명한데…

‘무슨 일이 있었나? 왜 서로를 싫어하지?’

이번에는 이걸 어떻게든 알아낼 필요가 있어 보였다. 이 몸이 바로 소드마스터이니라, 위압하기보다는 먼저 대화를 나눠봐야 할 듯하다.

자, 그러면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레오는 양손의 다섯 손가락을 부닥치며 {귀족 사회} 정보를 되새김질했다. 기다리길 잠시, 다과가 내오기도 전에 게스타브 페테르 백작이 응접실에 당도하였고, 레오는 밝게 미소 지으며 서론을 건너뛰었다.

“모나크 남작님. 오랜만입니다.”

* * *

게스타브 페테르 백작은 집 나간 아내에게 편지를 쓰고 있었다. 일 년 전, 백작 부인은

“이 화상아! 아무리 그래도 당신은 애한테 말을 그따위로밖에 못해요? 마음에 안 들 수도 있지, 나는 뭐 당신을 처음 봤을 때부터 맘에 들었는 줄 알아요?”

화가 나서 외치곤, 해결해놓기 전에는 집에 돌아오지 않겠다며 여행을 떠났다.

갑갑할 노릇이었다. 자식이나 어미나 하는 행동이 어찌 이리도 똑같은지… 그래도 페테르 백작은 그녀에게 꼬박꼬박 편지를 보냈다. 최근에야 화가 좀 풀렸는지 슬슬 돌아오겠다는 답장을 받았고, 그는 이에 대한 답신을 적는 중이었다.

사실 여자가 남편에게 이렇게까지 당차게 나올 수 있는 세상은 아니다. 다만 페테르 백작가에서 ‘게스타브 모나크 남작’의 위치가 다소 애매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쉽게 말하자면 그는 데릴사위다. 콘라드 왕국의 귀족이지만, 벨리타 왕국 페테르 백작가의 무남독녀와 결혼한 그는 아내의 성을 따랐다.

그러니까 엄밀히 말해 백작가의 주인은 백작 부인이었고, 게스타브 모나크 남작은 이를 남편으로서 대리할 뿐이었으니 부인이 집을 나갔다고 해서 어떻게 할 수 있는 권한이 없었다.

쫓아내겠다고 이혼해봤자 백작가에서 쫓겨나는 건 그지, 아내가 아니다.

물론, 양쪽 다 그럴 생각은 없었다. 두 사람은 여전히 서로를 사랑했고, 지금은 단지 자식 문제로 불화가 생겼을 따름이었다.

게스타브 백작은 ‘돌아올 당신을 위해 열여덟 송이 꽃을 준비해 놓으리다.’라고 적으려다가 꽃보다는 아내가 좋아하는 그림을 구해놓는 게 나을까? 마지막 문장을 고심하였다.

집사가 들이닥친 건 그때였다.

“배, 백작님! 소드마스터가 백작님을 찾아왔습니다.”

“헤르만 포르테 백작이? 일언반구도 없이 무슨 일로? 잠시만 기다려달라 이르게. 곧 끝나네.”

“포르테 백작님이 아닙니다! 웬 청년이온데, 이름이…”

뭐라고?

집사는 새파랗게 젊은 소드마스터의 출현에 놀란 듯하였으나, 게스타브는 다른 의미로 놀라고 말았다. 편지나 쓰고 있을 때가 아니어서 그는 서둘러 응접실을 향했다.

이내 마주한 청년은 역시나 그가 예상했던 사람이었다. 아니, 추호도 예상치 못하였으나 내심 지레짐작한 게 맞아떨어졌다.

레오 드 예리엘.

죽었다고 알려진 모국의 왕자가 눈앞에 있었다. 게스타브는 무표정한 가면을 뒤집어쓰려 하였으나 왕자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모나크 남작님, 오랜만입니다.”

“…절 기억하십니까?”

‘누구십니까’라고 물었어야지.

놀라서 헛나간 말을 왕자가 놓치지 않았다.

“아, 저를 기억하시는군요. 저도 남작님을 기억합니다. 워낙 어릴 적에 뵀던지라 걱정했는데, 참 다행입니다. 앉아서 이야기할까요?”

“…그러시죠.”

정적이 흘렀다.

다과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게스타브 백작은 이 바싹 마른 왕자를 어찌 대해야 할지 가늠하였고, 레오는 가벼운 사담으로 포문을 열었다.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A Princess Is Raised After Death, Desperately Making Her a Princess, Princess is Raised by Death, RPOD, The Princess Is Raised After She Dies, 正規エンディングまで異世界ループ転生, 공주는 죽어서 키운다
Score 8.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19 Native Language: Korean
Minseo was trapped in [Raise Lena]. With the emotionless text, “[Starting Raise Lena]” he became Leo and was imprisoned in an unfamiliar worl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Uh-huh?” “Leo? Why the long face? You! Are you messing with me again?” There, he met his childhood friend, Lena, skillfully picking berries. The lovely Lena. Leo marries her in a peaceful mountain village… [Lena is married! Congratulations.] [You have failed to clear Raise Lena.] [Restarting.] The happiest moment. Lena disappeared. An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Huh? Lena!” “Why have you been spacing out? And why are you looking at me like that? You wanna get beat up?” Lena, clad in thick leather armor and a sword on her shoulder, stared at him with unwavering eyes. It was a different scenar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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