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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04

203. 거지남매 – 필요

무더운 여름. 쨍! 한 햇볕이 따갑게 내리꽂혔다. 하지만 공터에 선 레오는 이를 피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눈앞의 붉은 머리 여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이 여자를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해졌기 때문이었다.

레오의 반응이 너무 심각했는지 “에이- 왜 이래요. 다 배웠다는 건 농담이었어요. 한 합의 여유를 숨기는 검술? 그것 빼고 다른 것들은 아직 감도 안 잡히는걸요.” 가볍게 말하던 카트리나는 제 목덜미를 머쓱하게 어루만졌다. 어쨌든 스승님께 거짓말한 게 사실이라 그녀는 평생 해본 적도 없는 용서를 구했다.

“그렇게 됐어요. 죄송해요.”

“죄송? 죄송하면 당장 기사단을 그만둬라. 당장 그만두기 어렵다면 두 달… 아니, 올해가 가기 전에만 그만두면 된다.”

“…전부터 여쭤보고 싶었던 건데, 왜요? 제가 왜 기사단을 그만둬야 하죠?”

카트리나가 그녀의 붉은 눈썹을 미간과 함께 긁었다. 속 시원하게 이유를 밝히지 않는 스승에 대한 답답함의 표출이었으나, 레오도 갑갑하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는 반쯤 애원하듯이 말했다.

“소드마스터로부터 검술을 사사하는 게 소원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혹시 며칠 배우지 못한 게 불만인가? 그, 그럼… 이틀 정도는 시간을 내줄 수 있다.”

“저야 고맙죠. 그런데 그게 제가 기사단을 그만둬야 하는 거랑 무슨 상관이냐고요.”

“…그럼 이건 어떠냐? 나와 함께 떠나자. 나는 콘라드 왕국으로 갈 생각이다. 마차도 있고, 돈도 있으니 여행길은 걱정하지 않아도…”

레오는 자신이 얼마나 멍청한 소리를 하고 있는지를 깨닫고는 이내 말꼬리를 흐렸다.

카트리나가 오르빌을 떠날 리 없었다. 그녀에겐 엘런이라는 연인이 있었는데, 그는 다리를 절었다. 전쟁같이 기사가 반드시 참가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면 그녀는 절대로 움직이지 않을 것이었다.

이를 방증하듯이 레오의 헛소리를 들은 카트리나는 자기한테 왜 이러는지 도통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답답함에, 레오는 기어이 천기를 누설하고야 말았다.

“…내년에 아스틴 왕국과 전쟁이 터진다. 너는 그 전장에서…”

하지만 이것도 멍청한 말이었다. 증거도 없을뿐더러 무엇보다 카트리나는 기사다. “아 그렇습니까? 당장 그만둬야겠군요.” 비겁하게 말할 턱이 없는지라 레오는 낙담했다.

어설픈 사기꾼을 마주한 사람의 반응이 저러할까. 레오의 예언을 들은 카트리나는 무척 당혹스러워했다. “그, 그래요?” 억지로 받아준 말에는 믿음이 담겨있지 않았다.

타인을 움직이는 건 어렵다.

그들은 기대하는 것과 언제나 다르게 움직이기 마련이었고, 설득하기 위해선 충분한 증거, 손해를 감수해가면서까지 따라줄 호의 또는 보장된 이득이 있어야 했다.

{바르바토스의 팔찌}를 다 소모한 게 이토록 원통할 줄이야.

허나 레오에겐 아무것도 없었다. 내년에 전쟁이 터질 것을 증명할 방도도, 네가 그 전장에서 죽으리라는 걸 확신시킬 방법도.

가진 것이라고는

[ 업적 : 카트리나가 목숨 바쳐 지킨 남자 – 카트리나에게 큰 호감을 얻음. ]

이 업적뿐인데, 큰 호감은 개뿔, 저건 사람마다 달랐다. 카트리나는 카시아가 아니다.

정말로 팔을 잘라버릴까.

설득할 방도가 없으니 레오는 극단적인 생각을 했다. 이 여자의 팔을 잘라서 전쟁터에 못 나가게 만들면…

─ “…나 같은 팔 병신 데려가서 뭐 어쩌려고.”

레나 아이나르가 떠올랐다. 두 번째 약혼관계 회차, 팔을 잃은 레나 아이나르와 함께 겪었던 슬픔이 레오의 극단적인 생각을 멈춰 세웠다. 만사 부질없구나. 가라앉은 레오는 결국 “네 맘대로 해라.” 어리둥절한 카트리나를 두고 공터를 떠났다.

오랑주 극장으로 돌아가는 길.

터덜터덜 걷는 레오의 심경이 복잡하게 얽혔다. 새삼스럽게 그는 카시아를 떠올리고 있었다.

‘카시아…’

그녀는 참 움직이기 쉬운 인간이었다. 아니다, 내가 그녀를 움직이게 만들었다기보다는 그녀 스스로 나를 따라주었는데, 돌이켜보면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헌신적이었다.

오로지 이 거지남매 시나리오만을 위해 만들어지고, 준비된 사람인 것처럼.

이렌느에게 쫓겼을 때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제 몸을 던졌다. 생면부지의 거지 남매를 위해 돈을 벌어주겠다 말했었고, 기어이 금화 한 닢을 벌어다 주었다.

그리고 콘라드 왕국으로 떠난다는 말에 가게 문마저 닫았다. 머나먼 타국까지, 카시아는 군말 없이 따라와 주었었다.

그래놓고는 단 한 번의 포옹으로 모든 걸 만족하고 돌아간 여자.

문득 걸음을 멈춰선 레오는 그녀가 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염치가 없어서 다시 걸음을 옮겼다.

오랑주 극장 앞에는 크세니아와 브레틴 자우어를 포함한 극장 사람들, 오베르를 위시한 라우노 패밀리의 깡패들이 나와 있었다.

그들은 크세니아에게 잘 가라며, 몸조심하라며 작별 인사를 하고 있었는데, 레오를 보는 시선이 곱지만은 않았다.

오베르가 한 마디 협박인지 충고인지 모를 말을 오지랖 넓게 하였으나, 레오는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네. 네.” 앵무새처럼 말을 반복하다 크세니아를 향해 손을 뻗었다.

“…왔어요?”

어딘가 착잡하게 미소 짓는 크세니아. 그녀는 단출한 여행복 차림이었다. 민소매로 드러난 팔이 가늘다. 물결치는 검은 머리를 걷어 올려 드러난 목선은 하얬다.

민서라면 그 모습에서 채하를 떠올렸을 것이었으나, 기분이 싱숭생숭한 레오는 크세니아와 카시아가 겹쳐 보였다.

카시아를 대신해 나타난 여자라는 생각을 막을 길이 없었다. 완전히 다른 사람이고, 전혀 다른 감정을 품었음에도.

오랑주 극장 3층에서 생활하는 전(前) 창녀들이 크세니아를 배웅하는 것까지 눈에 들어왔을 때는 그 마음이 더욱 굳어져 있었다.

“무슨 일 있었어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럼… 타죠. 레나는 어디 있어요?”

“산티안이랑 이야기한다고 잠깐 갔어요. 곧 돌아올 거예요.”

서서 기다리기도 뭣했던지라 크세니아가 마차에 올랐다. 배웅하러 나온 사람들에게 “어서들 들어가요. 작별 시간은 짧아야 좋은 거래요.” 의젓하게 말하여 돌려보내곤 곁에 앉은 레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레오. 당신 페테르 백작가랑 무슨 관계에요? 어떻게 이 마차를 빌려왔죠?”

페테르 백작이 마부를 딸려 보내준 마차는 거대했다. 직위에 따라 가질 수 있는 마차의 크기가 제한돼 있는지라 이보다 큰 마차를 찾는다면 못 찾을 것도 없지만, 이만해도 어디서 보기 힘든 마차였다.

넉넉한 너비와 최소 말 세 마리가 붙어야 하는 중량감. 레오조차도 이만한 마차를 타보긴 처음이었는데, 바로 페테르 백작 본인이 타는 마차였기 때문이었다. 검소한 백작을 닮은 마차에는 단 하나의 장식도 달려 있지 않았다.

“별 관계는 아니에요. 그냥 후원을 받았는데… 실은 드리고 싶은 말이 있어요. 이따 레나가 오면 말할게요.”

그는 모두 다 솔직하게 털어놓을 생각이었다. 내가 왕자고, 잃어버린 {혈통}을 되찾고자 콘라드 왕국에 간다는 사실을 밝힐 것이다.

한데 레오는 내심 불안했다.

내가 왕자라는 사실을 밝혔을 때, 크세니아가 어떻게 반응할지 걱정이 된다. 카시아처럼 나는 왕자의 반려가 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절망할까 걱정이고, 왕자라니! 기뻐한다면 조금 실망할 것만 같았다.

어딘가 성숙한 크세니아가 설마 그럴 것 같지는 않지만.

불안한 마음에 레오가 크세니아의 손을 잡았다. 곧 깜짝 놀라게 될 그녀를 안심시키려 한 행동이었다.

그런데 흠칫, 크세니아가 붙들린 손을 빼냈다. 그녀의 눈동자도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왜 이러지?

여자의 직감이 발동한 것일까. 걱정이 옮아붙었는지 그녀는 말이 없었다. 내가 표정을 관리하지 못했나 보다.

두 사람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레나를 기다렸다. 이윽고, 동생이 도착했다. 그런데 도도도도도 달려온 레나 역시 어딘가 비장한 표정이었다.

“오빠, 나 할 말 있어. 우리…”

“레나야. 올라와. 사실 오빠도 네게 해줄 말이 있단다.”

“우리 떠나지 말자. 나 여기가 좋아.” 말하려던 레나는 마차 안에서 흐르는 숨 막히는 분위기를 읽었다.

오빠의 목소리 톤이 평소와 달리 단호하고, 일상적인 사람 관계에도 또렷한 경계를 두던 크세니아 언니가 굉장히 흐트러져 있어서 레나는 조심조심 마차에 올랐다.

– 탁.

문이 닫혔다. 마차 내부는 매우 넓었으나, 긴장감에 세 사람은 이를 좁게 느꼈다. 적막 속에서 레오가 입을 열었다.

“크세니아, 제 이름은 사실 레오 드 예리엘입니다. 레나야, 네 이름은 레나 드 예리엘이야. 넌… 공주야. 우리는 십여 년 전 콘라드 왕국에서 쫓겨난 왕자, 공주입니다.”

정적이 이어졌다. 레오는 그들이 자신의 말을 이해할 때까지 기다려주었는데, 레나와 크세니아, 두 사람의 표정이 모두 이상했다.

레나는 척 보기에도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처럼 믿지 못해 하면서 오빠를 바보 멍텅구리, 팔불출로 몰아세우진 않았다. 아마도 ‘꿈’의 영향일 것이다.

반면 크세니아는 뭐라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한 표정이었다.

안도? 실망? 걱정? 당사자가 아닌 이상 그녀의 표정에서 심정을 읽어낼 수 없었다.

크세니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제게 더 해주실 말은 없나요? 전 거짓말을 정말 싫어해요. 레오, 아니, 왕자님께서는 그럼 제게 왜 고백하신 거죠? 혹시… 아니에요. 제게 왜 고백하셨는지 말해주세요. 제가 왕자님께 ‘필요’했나요?”

희한한 반응이었다. 그녀는 레오가 왕자라는 사실이 충격적이지도, 놀랍지도 않은 듯했다. 다만 뚫어지게 바라보는 눈동자가 어떤 답변을 갈구하고 있었다.

“네. 필요합니다.”

크세니아의 얼굴에 절망이 스쳤다. 하지만 뒤따른 말에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제겐 당신이 필요해요. 제 곁에 있어 주길 바라고, 그래서 고백했어요. 제가 왕자이건 아니건 그런 건 중요치 않아요. 신경 쓰지 말아 주셨으면 해요. 전 당신을…”

카시아가 가슴에 박혔다. 그러나 그녀를 여자로 느껴본 적은 없다. 동정과 애증. 그러나 눈앞의 이 여자는…

“사랑해요.”

크세니아를 처음 봤던 순간부터 심장이 뛰었다. 내 운명이 그녀에게 향해 있었다. 이조차도 주신의 장난일지도 모르지만, 이것만큼은 그래도 좋았다. 감사하다.

시시각각 변화하던 크세니아의 표정이 활짝 밝아졌다. 무척이나 안심했다는 듯이 레오의 손을 쥐어왔다.

“저도 그래요. 왕자님. 아니, 그냥 레오라고 부를래요.”

어째서 이 여자는 항상 내 멱살을 잡을까. 크세니아가 키스를 청했다.

예전, 극장 3층 난간에서 했던 키스와 달리 그녀의 움직임에는 확신이 있었다. 자신에게 느닷없이 물을 쏟았던 거지 소년이 그녀의 운명이 맞았음을 기뻐하는 것이었다.

레오의 시야가 가려졌다.

얇고 기다란 눈썹. 콧잔등의 살짝 왼쪽으로 치우친 점이 코앞이었다.

“자, 잠깐. 옆에…”

레오가 길게 이어지려던 입맞춤을 떨어냈다. 고개를 돌려보니 레나가 두 사람을 말똥말똥 들여다보고 있었다.

“크흠. 레, 레나야. 그러니까 이건…”

“뭘~ 괜찮아. 오빠랑 언니가 사귀는 거 옛날부터 알고 있었는걸. 그리고 내가 공주라고 했지? 그럼… 하나쯤은 내 맘대로 해도 되겠네?”

“뭐, 뭘?”

“그런 게 있어. 나도 나중에 알려줄 거야.”

레나가 황금빛 눈동자를 반짝반짝 빛내며 말했다.

흥! 저에게 공주라는 사실을 숨긴 오빠에게 단단히 토라졌다는 듯이 창가에 팔을 기대곤 고개를 돌리지 않았는데, (저 창은 언제 열렸지?) 그녀는 씨익 웃고 있었다.

내 맘대로 할 거야.

레오는 이게 무슨 뜻인지를 마차가 출발해 오르빌 외각을 빠져나온 뒤에야 알게 되었다. 저녁노을이 깔릴 무렵. 마부가 한 숙소 앞에 마차를 세웠을 때였다.

“저, 저기… 안녕하세요?”

갈색 곱슬머리 소년. 산티안 라우노가 마차 짐칸에서 기어 나왔다.

레오는 충격받은 눈으로 동생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레나는 눈을 데록데록 굴리며 딴청을 피울 뿐이었다. 누구한테 배웠는지 모를 휘파람을 불면서.

이놈의 꼬맹이들이…

진짜 이젠 믿을 사람 하나 없구나. 라고 레오는 생각했다.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A Princess Is Raised After Death, Desperately Making Her a Princess, Princess is Raised by Death, RPOD, The Princess Is Raised After She Dies, 正規エンディングまで異世界ループ転生, 공주는 죽어서 키운다
Score 8.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19 Native Language: Korean
Minseo was trapped in [Raise Lena]. With the emotionless text, “[Starting Raise Lena]” he became Leo and was imprisoned in an unfamiliar worl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Uh-huh?” “Leo? Why the long face? You! Are you messing with me again?” There, he met his childhood friend, Lena, skillfully picking berries. The lovely Lena. Leo marries her in a peaceful mountain village… [Lena is married! Congratulations.] [You have failed to clear Raise Lena.] [Restarting.] The happiest moment. Lena disappeared. An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Huh? Lena!” “Why have you been spacing out? And why are you looking at me like that? You wanna get beat up?” Lena, clad in thick leather armor and a sword on her shoulder, stared at him with unwavering eyes. It was a different scenar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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