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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07

206. 거지남매 – 타이머

‘쿠스’는 도둑질당했다.

하지만 그 힘 좋은 흑마는 되려 만족하고 있었다. 너른 초원과 들판, 숲길을 바람처럼 가로지르며 말의 본성을 되찾아갔다.

본래 그는 일평생 쟁기나 끌어야 할 운명이었다.

발굽이 넓은, 농경에 유리한 신체 조건을 지니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쿠스는 저를 달리게 해준 주인에게 감사해하며 푸르륵, 투레질했다.

물론 이번에도 주인은 반응하지 않았다. 그는 어딘가 흐리멍덩한 눈으로 바쁘게 북쪽을 향할 뿐이었다. 이에 어떤 변화가 생긴 건 국경을 억지로 돌파하고 오르빌을 향해 약 일주일을 더 달린 시점이었다.

“레브!”

“어!? 어어엇?”

[ 업적 : 다른 레오를 만남, 3/3 ]

[ ‘다른 레오를 만남’ 업적이 소멸됩니다. ]

[ 퀘스트 : 수호자, 2/3 ]

수호자?

처음 보는 게 튀어나왔다. 그러나 레오는 생각을 이어갈 틈이 없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네가 왜 여기에 있어? 너는…”

“워, 워. 일단 내려서 이야기하자.”

눈망울에서 뿌연 안개가 걷힌 레브는 굉장히 당황해 있었다. 여태껏 잘 달려오던 쿠스까지 갈피를 잃은 고삐질에 놀라 비틀거리면서, 레오 드 예리엘은 급히 말에서 내렸다.

이 친구에겐 설명이 좀 필요한 모양이다. 쿠스의 코를 다독여준 레오는 레브에게서 고삐를 빼앗았다. 이윽고 두 사람은 길가에 나란히 주저앉았다.

“레브. 만나서 반가워. 널 보기는 난 두 번째인데…”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까.

레오는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이 레브는 ‘16’번째 레오다. 거지남매 다음 시나리오가 소꿉친구여서 지난번에 레브가 날 찾아왔을 때는 시간의 격차가 크지 않았다.

그것도 거지남매 회차가 다 끝난 시점에서 찾아온 것이라 ‘15’번째 레오였던 나는 상황을 빨리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친구는 지금 아무것도 모른다. 지금의 레브가 경험한 건 고작 아스타로트(Astroth)를 만나고, 헤르만 포르테 백작에게 죽었던 15번째 회차까지일 터였다.

반란에 실패했던 본인의 16번째 회차는 물론, 소드마스터가 된 17번째 약혼관계 회차도 모른다. 이번 회차에서 내가 무엇을 해두고 오르빌을 떠났는지까지 설명해주어야 하는지라 레오 드 예리엘은 차분히 입을 열었다.

“먼저, 내가 민서야. 지금은 꼭 그렇지도 않지만… 무슨 말인지는 너도 알 거야.”

“…그래. 그럼 레아는 어떻게 됐어? 반란은 성공했어?”

“…아니.”

제법 긴 이야기가 이어졌다.

동생을 극장에 두고 떠나려 했는데, 어찌 알고 우릴 쫓아오는 바람에 함께 오른 왕국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는 것부터, 가이단 후작가에 들러 {바르바토스의 팔찌}를 다 소모하고, 나는(그러니까 레브, 너는) 야만인들을 규합하러 오른 왕국 각지를 돌아다녔다는 것까지.

그런데 레오 드 예리엘은 배신자, 세사르의 존재를 언급하지 않았다. 맞이한 엔딩을 각색해,

“우린 네비스에서 포위당했어. 거기서 죽었지.”

끔찍한 마무리를 덮어주었다. 네가 내 동생을 죽였다는 걸… 굳이 지적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레아는 걱정하지 마. 수도교회에 잘 갔더라. 나중에는 성인으로 추대받기까지 했는데, 문제는… 아니다. 이건 나중에 이야기할게. 그런 다음에 약혼관계 회차가 시작됐어.”

여기도 가슴 아프게 끝났다.

레오는 레오 덱스터와 레나 아이나르가 전쟁에 나갔음을, 그리고 카트리나를 죽여 소드마스터가 됐음을 고백했다. 기사를 사냥하는 데 정신이 팔려 레나 아이나르를 신경 쓰지 못했다는 것까지도…

낙담한 그녀는 두 번 다시 검을 잡지 않았다. 제롬 신성왕국의 수도 루테티아에서 임신해 배가 부른 채로 결혼식을 맞았다.

레브는 묵묵히 이야기를 들었다. 안색에 어떤 변화도 없었으나, 착잡한지 종종 바닥에 깔린 풀을 뜯어다 씹었다.

이번 회차, 오르빌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까지 설명한 레오는 잠시 뜸을 들였다. 레브가 상황을 충분히 받아들인 것 같다 싶은 때쯤에 그에게 돌아가라 권했다.

“길버트 포르테가 수도교회로 갈지도 몰라. 혹시 모르니까 네가 가보는 게 좋겠어. 이번 회차는… 그냥 너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아.”

레브는 길버트 포르테가 확실하게 처리되지 않았다는 말에 크게 흔들린 것 같았다. 하지만 한참 침묵하던 그는 고개를 저으며 일어났다.

“됐어. 가자.”

“가다니? 어딜?”

“어디긴. 동생 두고 왔다며. 제정신이냐? 난 그냥 내버려 뒀어도 널 알아서 찾아왔을 텐데.”

…아마 그랬을 거다.

플레이어가 아닌 레오들은 지난 회차에서 했던 행동을 그대로 따라 했다. 그런데 나를 찾아온 레브가 오르빌에서 날 발견하지 못했다면? 지난 회차의 행동을 맞추기 위해서라도 {추적술}을 이용해 콘라드 왕국까지 쫓아왔을 터였다.

“아, 네가 타아문 마을을 못 봐서 그러는데, 거기 너희 데모스 마을만큼이나 평화로운 동네야. 그보다도 수도교회에 가야 하지 않겠어?”

“…괜찮아. 페테르 백작이 도와주기로 했다며.”

“그런데?”

“그럼 모나크 남작령에 있는 교회에서 통신을 사용할 수 있겠지. 길버트 포르테를 처리했는지 어쨌는지는 그때 확인하고 출발해도 안 늦으니까, 일단 가자.”

“…알았어. 고마워.”

레오는 가슴이 따뜻해짐을 느꼈다.

별것 아닌 것처럼 말했지만, 저게 레브에게 쉽지 않은 결정이었음을 알고 있었다. 당장 레아에게 달려가고 싶을 텐데도 거지남매 시나리오를 우선해 준 것이었다.

이 험난한 세상에서 절대적으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다. 레오와 레브는 각자 말을 타고 타아문 마을로 돌아왔다.

그들이 타아문 마을, 촌장의 집에 도착했을 때는 어두컴컴한 저녁이었다. 그런데 마부만 제 방에 있을 뿐 크세니아, 레나, 산티안, 아무도 집에 있지 않았다.

“잠깐 산책을 다녀오신다고 하셨습니다, 어르신.”

귀족임이 틀림없어 보이는 십 대 중후반의 청년에게 촌장이 공손하게 말했다. 레오는 어깨를 으쓱,

“크세니아가 나가자고 했나 보다. 알잖아, 크세니아가 매일 아침마다 운동하는 거. 여기까지 오는 동안 마차에 갇혀 있었거든.”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추적술}을 켰다. 동생과 크세니아, 산티안 모두가 같은 방향에 있음을 확인한 두 사람은 느긋하게 걸어 나갔다.

타아문 마을을 휙 둘러본 레브가 말했다.

“그러네. 여기도 살기 좋아 보이는걸?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그냥 카시아 누나랑 마을에서 숨어 지냈어도 괜찮았겠다.”

“어이고. 퍽이나 그랬겠다. 지금이야 검술 실력이 늘어서 괜찮지만, 그때는 잡히면 죽었어.”

“하하. 그랬겠지. 참… 이젠 정말 옛날 일 같다. 그런데도 기억은 생생한 게 신기… 어?”

“어?”

그때였다. 마을 밖으로 나와 반딧불들을 헤치며 걸어가길 잠시, 멀리서 옅은 고성(“이 나쁜 놈아!”)이 들렸다. 불길함에 사로잡힌 레오와 레브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걸음을 재촉했다. 그리고 이내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웬 놈이 상의를 벗은 채 동생과 크세니아를 향해 다가가고 있다. 손에는 칼이 들렸고, 티안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쓰러져 있었다.

“저, 저런 개새끼가.”

레오와 레브는 미친 듯이 달렸다.

와아아악! 급한 대로 고함을 질러 개자식의 시선을 돌렸고, 쏜살같이 날아가 술 냄새를 풍기는 취객을 가로막았다.

“누, 누구냐!”

– 뻥!

일단 걷어차고 봤다.

레브가 넘어진 취객이 휘적휘적 휘두르는 단검을 손목째로 날려버리는 사이, 레오는 레나와 크세니아의 상태를 살폈다.

“괜찮아? 어디 다친 데 없어? 괜찮아요?”

“오, 오빠! 티안이…!”

동생이 울음을 터뜨렸다. 혹시 칼을 맞았나? 덜컥 놀랐지만 티안은 살아 있었다. 머리를 어찌나 많이 얻어맞았는지 완전히 피떡이 되어있었으나 후들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 난 괜찮아.”

“뭐가 괜찮다는 거야 이 바보야!”

“크세니아. 이게 무슨 일이죠?”

크세니아도 창백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오르락내리락 좀처럼 진정되질 않는 가슴을 움켜쥐고 말했다.

“저, 저 남자가 절 겁탈하려고 했어요. 와, 와줘서 고마워요. 정말 큰일 날 뻔…”

“미안해요. 제가 더 빨리 왔어야 하는데… 아니, 처음부터 두고 가는 게 아니었는데.”

레오는 크세니아를 안아주었다.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주고, 놀라서 어쩔 줄 모르는 동생을 쓰다듬었다.

“일어나요. 얼른 들어가게. 여긴…”

으드드드득.

죽여 버리겠다. 내 동생과 크세니아를 위협한 저 개자식의 팔다리를 자르고 눈알을 도려내겠다. 아니, 그전에 네놈의 지저분한 성기부터 잘라다 입에 처넣어주지.

레오가 분노에 휩싸여 고개를 돌렸다. 레브더러 그 버러지를 잡아놓고 있으라, 애들과 크세니아를 집에 데려다주고 오겠다. 말할 생각이었는데, 웬걸, 레브의 눈이 뒤집혀 있었다. 개자식을 마구 걷어차면서 뭔가 ‘분풀이’를 하는 것이었다.

“…레브, 왜 그래?”

“야. 이것 봐봐.”

레브가 강간 미수범의 벗은 상체를 가리켰다. 어두워서 눈살을 찌푸린 레오는 그제야 레브가 왜 이러는지를 알아차렸다.

나팔 모양 문신. 놈의 가슴에 바르바토스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아…

지금의 레브는 16번째 레오다.

그러니까 13번째 회차, 바르바토스의 사도였던 회차의 감정을 아직 추스르지 못한 레오였다.

지금껏 우리가 겪은 회차 하나하나가 모조리 끔찍했다. 시나리오가 새로 시작하면 이전 회차의 엔딩을 곱씹고, 마음을 다잡으려 노력했다.

그런데 이건 시간이 걸린다. 제아무리 새로운 회차에 덮어씌워 져서 없던 일이 된다지만, 감정은 고스란히 남았다. 그리고 그 감정은 ‘본인’이 다독이는 수밖에 없었다.

다음 차례였던 내가 그 원통한 감정을 추슬러 놓기는 했다(중간에 있었던 14번째 약혼관계 회차는 민서가 없어서 기억을 전달받지 못했다).

바르바토스에게 잡아먹힌 레아에게 미안해하고, 내가 한 일은 아니지만, 자신을 대신 질책해주었다.

그러나 이건 어쩔 수 없는 남의 일이다. 나와 관련된 시나리오가 더 급하고 중해서 레브의 감정을 충분히 해소해주지 못한 것이다.

눈이 완전히 뒤집힌 레브를 보자 레오의 이성이 조금 돌아왔다.

“네가 알아서 해라.” 말하곤 산티안을 부축해 레나, 크세니아와 함께 마을로 돌아갔다. 레브도 최소한의 분별은 있는지 동생 앞에서 빌어먹을 바르바토스의 신도놈을 죽이지 않았다.

그러나 레오는 레브가 그놈을 언제 죽였는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아이고! 무, 무슨 일입니까? 꼬마 신사분의 얼굴이 왜 이러죠?” 호들갑 떠는 촌장을 지나쳐 티안을 침대에 눕혔을 때였다.

레오는 순간적으로 세상, 아니, 세계가 흔들렸다고 생각했다.

알 수 없는 파동이 그를 스쳤고, 눈앞으로 어떤 메시지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뜨려다 만 것인지, 아니면 정말 빠르게 점멸한 것인지는 몰라도 레오는 메시지의 네모난 테두리밖에 보지 못했다.

허나 분명한 건…

‘이, 이게 뭐야?’

그의 손바닥에 있던 문양이 사라졌다. 그가 바르바토스의 사도임을 증명하는 증표가 없어지고는, 일그러진 소 발자국이 대신 찍혀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인지는 이내 제대로 된 메시지가 떠올라 알려주었다.

[ ‘바르바토스(Barbatos)의 사도’ 업적이 소멸됩니다. ]

[ 디버프 : 오리아스의 발자국 – 도발, 달아날 수 없습니다. 13년 3개월 21일 5시 25분 9초. 손상됨. ]

그건 오리아스(Oriax)의 발자국이었다. 어두운 밤하늘을 뚫고, 썩은 피로 가득한 ‘소눈’으로 나를 보았던 오리아스의 디버프가 아직까지도 남아 있었다. 17년이었던, 째깍째깍 떨어지는 타이머가 이를 증명했다.

레오는 온몸이 섬찟해졌다.

갑자기 누가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만 같다. 그것도 아주 강렬한 악의를 가지고.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A Princess Is Raised After Death, Desperately Making Her a Princess, Princess is Raised by Death, RPOD, The Princess Is Raised After She Dies, 正規エンディングまで異世界ループ転生, 공주는 죽어서 키운다
Score 8.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19 Native Language: Korean
Minseo was trapped in [Raise Lena]. With the emotionless text, “[Starting Raise Lena]” he became Leo and was imprisoned in an unfamiliar worl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Uh-huh?” “Leo? Why the long face? You! Are you messing with me again?” There, he met his childhood friend, Lena, skillfully picking berries. The lovely Lena. Leo marries her in a peaceful mountain village… [Lena is married! Congratulations.] [You have failed to clear Raise Lena.] [Restarting.] The happiest moment. Lena disappeared. An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Huh? Lena!” “Why have you been spacing out? And why are you looking at me like that? You wanna get beat up?” Lena, clad in thick leather armor and a sword on her shoulder, stared at him with unwavering eyes. It was a different scenar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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