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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11

210. 거지남매 – 혈육

할아버지라고?

별채의 작은 응접실. 크세니아와 베르크 추기경을 번갈아 본 레오의 생각이 과거를 파고들었다.

추기경과 게스타브 페테르 백작의 관계부터, 도무지 풀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 실타래는 겉보기에만 그랬을 뿐 엉켜있지 않았다.

크세니아가 해결의 단서였다.

그리고 레오는 그 단서가 아주 오래전에 베나르 타티안 후작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었음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 “오, 그렇지. 혈육만큼 가까운 사람이 없지. 옛날에 내 친우가 접시를 깨뜨렸는데…”

후작의 양자로 들어가려고 했었던 거지남매 회차에서였다. 독한 술을 주고받던 중 취한 후작은 자신의 하나뿐인 친우가 급히 결혼해서 딸을 낳았는데, 그 딸이 아주 왈가닥이라는, 다소 사소한 말을 흘렸었다.

그때는 그의 말을 귀담아듣지 못했다.

후작의 힘을 빌리면 동생을 공주로 만들 수 있을 것만 같아서 양자, 양녀로 들어갈 궁리를 하기 바빴고, 나중엔 잊어먹었다.

아… 이 멍청아.

생각이 물살을 타기 시작하자 레오는 괴로워졌다. 어쩌면 거지남매 시나리오의 해결책이 처음부터 주어져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단서를 놓친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물론 과거를 잊어먹은 그로서는 물을 떠 오지 못한 아침에 크세니아가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으리란 걸 알 도리가 없었다.

그녀의 존재 여부조차 알지 못해서 매번 카시아를 찾아가는 게 고작이었고, 그녀와 관련이 있는 오베르를 통해 라우노 패밀리에 들어갔다. 그제야 아들을 암살하려는 타티안 후작을 만나 쥐꼬리만 한 단서를 들을 수 있었다.

더군다나 카시아의 굴레가 해결되면서 창관이 극장으로 변한 다음에야 크세니아를 만났으니, 레오가 잘못을 했다기보다는…

그러나 레오의 안색이 새카매졌다. 자신이 크세니아를 처음 본 게 그때가 아님을, 사실은 알고 있었다.

타티안 후작에게서 단서를 들었던 바로 그 회차. 나는 소이린이라는 꽃집 아가씨와 아릴레이 극장에 갔었다. 거기서 새까만 포대기를 뒤집어쓰고 바둥거리는 배우를 보았고, 가슴이 두근거렸었다.

그건 크세니아였다.

크세니아가 아일레이 극장에서 일했었다는 건 나중에 그녀와 사귀며 듣게 된 것이었지만, 당시에도 분명히 느꼈었다.

레브가 레아를 볼 때와 비슷한 느낌. 레오 덱스터가 레나 아이나르를 볼 때와 같은 그 두근거림을 나는 놓치지 말았어야 했다.

내가 정말 많은 걸 망쳤구나. 레오의 자책이 심화하려는 그때,

“레오?”

크세니아가 그를 흔들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그녀는 어느덧 레오의 곁으로 넘어와 바짝 붙어있었다.

“미안해요. 속일 생각은 아니었는데… 화났어요?”

“아, 아니요. 그럴 리가요.”

레오는 자책을 털어냈다. 슬퍼하는 건 나중에 혼자 하기에 좋은 일이라 허리를 펴며 베르크 추기경을 마주했다.

“호칭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추기경님. 만나서 반갑습니다. 처음 뵙는 건 아닐 테지요.”

“…그렇습니다. 장성하셨군요. 살아 돌아오신 걸 감축드립니다. 호칭은 그만하면 좋습니다.”

추기경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오랜만에 만난 손녀가 죽은 줄로만 알았던 공주님을 데려왔을 때부터 직감했고, 크세니아가 보란 듯이 왕자를 자신의 신랑감이라 소개하면서 계획해온 모든 일이 어그러졌음을 느꼈다.

신분제.

베르크는 온 대륙에 뿌리박힌 이 잘못된 사회 시스템을 뜯어고칠 생각이었다. 그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라 생각해 남몰래 최선을 다해왔는데, 신이시어, 저는 어찌하면 좋단 말입니까. 누이와 통정한 죄가 이렇게 돌아왔습니다. ─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끈끈한 혈육의 정을 끊어버릴 용기가 나질 않았다.

“크세니아. 미안하지만 잠깐 자리를 비켜주겠느냐? 왕자님과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구나.”

“…할아버지. 전 분명히 말씀드렸어요. 이분은 제 남편이 될 분이에요. 만약 저희의 결혼을 거부하실 생각이라면, 그만두세요.”

“아니다. 내가 무슨 염치로 네 혼삿길을 막겠느냐. 다만 따로 드리고 싶은 말이 있어서 그렇단다.”

하지만 크세니아는 자리를 비키고 싶지 않은 듯했다. 되려 더 바싹 붙기에, 레오는 그런 그녀를 부드럽게 달랬다.

“크세니아. 잠깐 자리를 비켜주세요. 저도 추기경님과 대화하고 싶어서요.”

“…네, 알겠어요.”

레오까지 가세하자 크세니아는 조금 뚱한 표정을 지으며 밖으로 나갔다. 비로소 레오는 베르크 추기경을 두 번째로 독대하게 되었는데, 이전과는 분위기가 매우 달랐다.

교묘한 귀족의 대화를 집어치우고, 베르크 추기경은 사제답게 솔직한 어휘를 구사했다.

“왕자님.”

“네, 말씀하시지요.”

“왕자님께선 어떤 왕이 되려 하십니까?”

“…저는 백성들이 배곯지 않는 나라의 왕이 되고자 합니다.”

“그건 왕자님께서 궁핍하게 살아오셨기 때문입니까?”

“그렇습니다.”

“…저는 서자였습니다. 바릭 모나크가 제 본명이었고, 비천한 출생의 어머니는 약 한 첩을 쓰지 못하고 돌아가셨습니다. 부유한 귀족의 첩이셨는데도 말입니다. 왕자님께서는 백성들이 배곯는 까닭이 단지 식량이 넉넉하지 못해서라고 생각하십니까?”

“….”

“아닙니다. 식량은 충분합니다. 개간할 땅도 얼마든지 있으며, 백성들은 그 땅을 풍요롭게 만들 의지로 충만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의 삶이 궁핍한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귀족의 탓이라 말하고 싶으신 것이겠군요.”

“아니요.”

베르크 추기경이 숨을 들이마셨다.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감히 왕자에게 해서는 안 될 말을 뱉었다.

“왕의 탓입니다.”

레오는 침묵했고, [만인사제설]로 수도교회를 시끄럽게 만들었던 추기경의 주장이 이어졌다.

“인간은 ‘평등’합니다. 거룩한 신 앞에서 모두가 같은 피조물에 불과하지요. 물론 이 평등에 대해서는 교회에서도 말이 많습니다. 책임지는 왕족과 고귀한 귀족을 일개 평민들과 동일 선상에 두어서는 안 된다고요. 저도 어느 정도는 동의합니다. 현재의 왕과 귀족들이 과거에 훌륭한 공적을 세운 지도자의 후손임을 부정하지는 않으며, 틀림없이 능력과 노고에 따라 달리 대접받아야만 ‘공평’하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세상이 공평합니까? 천한 출신이라 교육받을 기회도 제공되지 않으며, 온 토지를 귀족들이 대대손손 물려받는 작금의 세계가 평등한 세상입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인류 최초의 왕, 토들러 아키우넨이 바눈을 최초의 귀족으로 삼았을 때부터 평행의 추가 기울어져 온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바라십니까?”

베르크 추기경의 눈이 빛났다. 신력이 감돌아 하얗게 이글거리는 눈으로 단호하게 요구했다.

“신분제의 철폐를 원합니다.”

“불가합니다.”

그러나 레오 또한 단정적인 어투를 놓치지 않았다. 민서가 사는 세계를 언뜻 들여다본 왕자 레오는 왕으로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정립해 놓은 지 오래였다.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왕자를 쏘아보는 추기경에게 그 이유를 설명했다.

“그건 추기경께서 원한다고 해서, 그리고 제가 받아들여 시행한다고 해서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현실적으로 귀족들의 권익을 빼앗아 백성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느냐 없느냐를 떠나서, 그건 바람직하지도 않습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백성들 스스로가 위에 올라설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베르크 추기경은 현시대 최고의 신학자다. 현명한 그는 왕자가 뱉은 개념을 재빨리, 충격적으로 받아들였다.

“그, 그럼 왕자님께서는…”

“네. 저는 백성들에게 교육의 의무를 부과할 것입니다. 권리가 아닌, 의무입니다. 의무를 다해 저들 스스로가 충분한 능력을 갖췄을 때, 신분제라는 것은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입니다.”

레오가 베르크 추기경을 거꾸로 쏘아보았다. 늙은 당신이 살아생전에 볼 수 있는 세상이 아님을 분명히 하는 것이었다.

“지금 사제들이 백성들에게 역사와 신학을 가르치고 있지요? 저는 교회가 그 일을 맡아주길 바랍니다. 아마도 정말 많은 사제와 수도사가 필요할 터인데… 베르크 추기경님, 도와주시겠습니까? 추기경님께서는 분명 어떤 묘안이 있으시겠지요.”

당신이 ‘그라니아 보육원’을 운영하고 있음을 안다. 오갈 데 없는 어린 거지들을 데려가 사제와 성전사로 육성하고 있었으므로 베르크 추기경은 그 일을 맡기에 최적의 인물이었다.

베르크 추기경은 침묵했다.

왕자를 설득하려 하다가 되려 자신이 설득당했다는 걸 느꼈지만, 왕자의 논리엔 깊이가 있었다.

‘피조물의 책임’

베르크는 굳이 나누자면 ‘피조물의 굴레’보다는 ‘피조물의 책임’을 옹호하는 사제였다.

인간을 스스로 의지를 불태워 나아가는 존재로 인식하였고, 피조물의 삶이란 신으로부터 부여된 책임이지, 권리가 아니었다.

해서 왕자가 말하는, 백성들이 스스로 깨우쳐 올라서야 한다는 개념이 그럴듯하게 느껴졌다. 학술적으로는 차차 연구를 해봐야 하겠으나, 적어도 그가 지지하는 방향성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었다.

내 눈으로 그날을 보지 못하는 건 아쉽지만… 베르크 추기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했습니다. 그럼 서자들은 어찌하실 겁니까? 그들은 평민도, 귀족도 아닙니다.”

“서자들은 백성이 아닙니까?”

“…잠깐만요. 설마 귀족들에게도 의무를 부과하실 생각이십니까?”

“네. 귀족들은 가정교사를 초청해 자녀를 가르치니 교육의 의무에서 빗겨 가겠지만, 서자들은 교회로 보낼 겁니다. 답변이 되었나요?”

휘유- 대단하구나. 느끼며 베르크 추기경이 안도의 숨을 뱉었다. 어쩌면 신께서 크세니아를 통해 내게 이 왕자님을 보내주신 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는데…

왕자가 오른손바닥을 내밀었다.

사탕이라도 달라는 것 같은 행동이어서 추기경은 이제야 소년의 태를 벗어가는 왕자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물론 사탕을 달라고 조르는 건 아니었다.

“혹시 이게 보이십니까?”

“…뭐라도 들고 계십니까?”

“아니요. 제 손바닥에… 역시 보이지 않으시는군요. 그럼 뭔가 이상한 게 느껴지지는 않나요?”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흐음…

왕자는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저의 오른손바닥을 쥐었다 폈다, 불편하게 꼼지락거리며 고민하더니 토로하는 것이었다.

“추기경께서는 악신이라는 걸 들어보셨습니까?”

“물론입니다.”

“실존한다고 믿으시나요?”

“글쎄요. 하지만 신(神)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어떤 괴이한 존재가 있다는 보고를 들었습니다. 개종하지 않은 토착민들이 종종 이해하기 어려운 힘을 부린다고…”

“네. 명칭이야 어찌 되건 상관없습니다. 다만 어떤 초월적인 존재가 있다는 건 분명합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음, 지금 이렇게 말해봐야 믿지 못하실 테니 잠깐 산책하러 나가시겠습니까? 마침 저녁이군요.”

“…좋습니다.”

추기경은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으나, 순순히 레오를 따라 나왔다.

그는 ‘고대신학사’에 박식하지 못했다. 그의 전공 분야가 아닌지라 그 악신인지 아신인지 하는 것들에 대해 잘 알지 못했고, 왕국 전체가 거의 하나의 드넓은 평야나 다름없는 콘라드 왕국의 특성상, 콘라드 왕국에는 개종하지 않은 토착민이 거의 없다시피 했기에 베르크가 성전사들을 부려 야만인들을 축출하러 돌아다닐 이유가 없었다.

해서 야만인이 많은 오른 왕국의 추기경과 달리 아신에 대해서만큼은 좀 순진한 구석이 있었다.

물론, 순진하다는 게 꼭 연약하거나 무기력하다는 걸 뜻하진 않는다.

저녁노을이 깔리고, 어둠이 잦아들자 왕자와 함께 공원을 거닐던 베르크 추기경이 흠칫 몸을 떨었다. 온몸에서 새하얀 신력을 줄기줄기 내뿜으며 외치는 것이었다.

“할(喝)!”

사특한 종자들이 근처에 있다. 한때 성전사였기에 항시 패용하는 검을 뽑아 크게 휘두르자 뿌연 안개가 쏟아지며 끈적하게 달라붙던 공기가 단번에 가라앉았다. 레오는 오리아스의 잡졸들이 달아났음을 알았다.

“추기경님.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아닙니다. 뭔가 있기는 있군요.”

“…끝까지 들어주시지요. 제게 저주를 내린 자는 에릭 왕자입니다. 그는 오리아스(Oriax)라는 악신을 모시는 사도입니다. 제 아버지께서 쓰러지신 이유도, 그와 무관하지 않을 겁니다.”

레오는 진실에 근접한 사실을 밝혔다. 걔 사실 아주 나쁜 놈이래요! ─ 고자질하는 소년이 된 것 같아 조금은 쑥스럽지만 이건 장인어른, 아니, 장인어른의 아버지만이 해결해 줄 수 있는 문제였다.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A Princess Is Raised After Death, Desperately Making Her a Princess, Princess is Raised by Death, RPOD, The Princess Is Raised After She Dies, 正規エンディングまで異世界ループ転生, 공주는 죽어서 키운다
Score 8.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19 Native Language: Korean
Minseo was trapped in [Raise Lena]. With the emotionless text, “[Starting Raise Lena]” he became Leo and was imprisoned in an unfamiliar worl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Uh-huh?” “Leo? Why the long face? You! Are you messing with me again?” There, he met his childhood friend, Lena, skillfully picking berries. The lovely Lena. Leo marries her in a peaceful mountain village… [Lena is married! Congratulations.] [You have failed to clear Raise Lena.] [Restarting.] The happiest moment. Lena disappeared. An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Huh? Lena!” “Why have you been spacing out? And why are you looking at me like that? You wanna get beat up?” Lena, clad in thick leather armor and a sword on her shoulder, stared at him with unwavering eyes. It was a different scenar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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