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Chapter 211

210화.

양하나는 상대를 자세히 보았다.

처음 보는 얼굴이다. 통통한 체격에 머리는 짧고, 안경을 썼다. 복장은 청바지에 후드티, 그리고 검은색 패딩.

이런 자리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차림이었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재계 사람들의 이름과 얼굴을 익혔다. 재계 30위 안의 그룹 중에서 이런 사람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

아니, 그런 걸 떠나 재계 쪽 사람 같지도 않았다. 그런데 대체 여기는 어떻게 들어왔지?

‘혹시 어디서 초대장을 주워서 들어온 건가?’

양하나는 소리 지르고 싶은 걸 참으며 차분하게 말했다.

“할아버지가 CL그룹 회장님이세요. 아버지는 CL화학 사장님이시고.”

보나마나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이며 용서를 빌겠지. 하지만 결코 그냥 넘어갈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상대의 반응은 그녀의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그래서요?”

“……응?”

“할아버지가 CL그룹 회장님이고, 아버지가 CL화학 사장님이라는 건 알겠는데, 저보고 뭘 어쩌라구요?”

그녀는 잘 몰랐지만, 상대는 남의 눈치를 보지 않는 성격이다. 지지율 하락을 걱정하는 미국대통령 앞에서 ‘더 떨어질 지지율도 없지 않나요?’ 라고 물은 적도 있었다.

그가 눈치를 보는 사람은 세상에 단 한 명. 바로 누나뿐이다.

양하나는 어이가 없었다.

누구나 몰라서 실수를 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녀의 정체를 알고도 이럴 수는 없다. 재계 4위 그룹의 손녀라는 지위는 바로 그런 것이다.

알면서도 이렇게 나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이미 드레스는 엉망이 되었고, 이런 자리에서 교양 없게 소리 지르거나, 싸울 수도 없는 노릇이다.

‘대체 내가 왜 이런 꼴을 겪어야 하는 거야?’

답답하고 분해서 눈물이 나올 지경이다.

다행히 근처에 있던 다른 남자들이 나섰다.

“하나야.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저 사람은 누군데?”

평소 사교모임에서 자주 보는 이들로, 다들 그녀에게 큰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양하나는 눈가에 고인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저 사람이 음식물을 제 옷에 쏟았는데…… 저한테 사과하라고…….”

그 말에 대여섯 명의 남자들은 험악한 표정으로 상대를 둘러쌌다.

큰 키에 체격이 좋은 청년이 앞으로 나섰다. 건설업과 임대업을 주로 하는 재계 18위 보문그룹 회장의 손자 문성동이다.

“하나 말이 사실입니까?”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놀랍게도 틀린 말은 없네요.”

지가 와서 부딪쳤다는 말은 뺐지만.

그는 위압적인 시선으로 상대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처음 보는 얼굴인 데다가, 어디서 헌옷수거함에서 주워 입은 것 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이런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여긴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뷔페 먹고 친구 찾으러 왔는데요.”

“…….”

다들 할 말을 잃었다.

세상에는 이런 놈들이 있다. 잠깐 놀아줬을 뿐인데, 자신이 재벌과 친구라도 된 것처럼 착각하는 놈들.

역시 재계 사람이 아닌 건가?

싸늘한 시선이 쏟아졌다. 택규는 그 시선을 받으며 곰곰이 생각했다.

‘혹시 이런 게 주인공이 흔히 겪는 위기라는 건가?’

그동안 진후와 함께 투자하며 온갖 일을 다 겪어왔다. 따라서 이 정도 위기쯤은 쉽게 벗어날 자신이 있었다.

문성동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하나한테 사과하셨나요?”

“아니요.”

“당장 사과하시죠.”

그 말에 택규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넵. 죄송합니다. 그럼 전 이만.”

양하나는 너무 황당해서 기가 찼다.

‘이러고 그냥 가려고? 난 파티를 다 망쳤는데.’

딱히 연기를 할 필요도 없이 억울해서 저절로 눈물이 쏟아졌다.

“흑흑.”

그 모습을 본 문성동은 상대의 어깨를 붙잡았다.

“잠깐 밖으로 나가서 얘기 좀 하시죠.”

택규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싫은데요.”

그러자 그의 표정이 차갑게 변했다.

“좋은 말로 할 때 따라오지?”

택규는 씨익 웃었다. 그러고는 팔짱을 낀 채 모두가 들으라는 듯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하아. 그냥 넘어가려 했는데 안 되겠네. 이래서 주인공은 힘을 숨기면 안 돼.”

“뭐라는 거야?”

택규는 친구가 정체를 밝혔을 때를 떠올리며, 당당하게 소리쳤다.

“내가 바로 OTK컴퍼니의 CEO다!”

그 말에 모두가 당황했다.

누군가 말했다.

“CEO는 강진후인데.”

그 말에 택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맞다. 걔가 CEO였지. 그럼 난 뭐였더라? COT? COE?”

그냥 부대표라고 하면 되겠지만, 이런 자리에서는 왠지 영어로 말해야 할 것 같았다.

잠시 생각하던 택규는 손뼉을 쳤다.

“맞다. COO. 이제 생각났네.”

하지만 그 말을 진지하게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문성동은 손을 뻗어 상대의 목덜미를 세게 붙잡았다. 그나마 멱살을 붙잡지 않은 건 주위에 보는 눈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 나와.”

“아, 아니. 진짠데. 왜 안 믿는 거야? 진후야! 강진후!”

목덜미를 붙잡힌 채 끌려가는데, 누군가 앞을 막아섰다. 다름 아닌 강진후였다.

“무슨 일인가요?”

문성동은 웃으며 말했다.

“아! 강진후 대표님.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이상한 사람이 소란을 일으켜서 내보내는 중이었습니다.”

그러자 택규는 손을 흔들며 말했다.

“야, 마침 잘 왔어. 얘들한테 내가 COO라고 말 좀 해줘.”

양하나를 포함한 모두가 동시에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설마 진짜로 아는 사이는 아니겠지?’

강진후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모르는 사람이에요.”

오택규만 빼고 모두가 안도했다.

“친우여!”

그러자 강진후가 다시 말했다.

“농담이고, 얘가 OTK컴퍼니 COO 맞아요.”

그 말에 문성동은 동작을 멈췄고, 양하나는 깜짝 놀라 택규를 보았다.

“마, 말도 안 돼…….”

이 후줄근해 보이는 남자가 강진후와 함께 지금의 OTK컴퍼니를 키워낸 장본인이라고?

한 남자는 놀라서 중얼거렸다.

“그, 그냥 편의점 알바 같이 생겼는데.”

그러자 택규는 분노했다.

“너 지금 편의점 알바 무시해?”

“이건 그냥 널 무시한 것 같은데…….”

텍규는 강진후의 말을 무시하며, 계속 소리쳤다.

“그들의 노력 덕분에 우리 누나가 24시간 담배를 피울 수 있는 거야!”

뒤이어 나타난 오현주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 동생에게서 손 떼시죠.”

“예, 예!”

기세에 눌린 문성동은 자신도 모르게 힘차게 대답하며 재빨리 손을 뗐다.

택규는 보란 듯이 강진후에게 다가가 어깨에 팔을 얹었다. 그러고는 양하나와 문성동을 가리키며 고자질하듯 말했다.

“진후야. 이 사람들이 나한테…….”

* * *

택규의 얘기를 들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러니까 가만히 서있다가 부딪쳤는데, 이런 상황이 벌어진 거라고?”

“바로 그거야.”

“니가 잘못한 건 아니고?”

“난 억울해!”

“알았어.”

난 현주 누나를 보았다. 겉으로 보기에 큰 표정 변화는 없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대단히 화가 난 상태다.

그 표정은 ‘누구든 내 동생 건드리면 바로 적 되는 거야’ 라고 말하는 듯했다.

현주 누나는 방금 택규를 끌고 나가려던 남자에게 말했다.

“아까 인사했었죠? 보문건설 문성동 상무님.”

택규는 옆에서 들으라는 듯 중얼거렸다.

“흐음, 보문건설 문성동. 이름 적어놔야겠다.”

그의 얼굴은 마치 데스노트에 이름 적힌다는 얘기를 들은 것처럼 사색이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목덜미 붙잡고 끌어내려던 사람이 OTK컴퍼니 부대표일 줄은 몰랐겠지.

현주 누나는 양하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먼저 와서 부딪친 게 맞나요?”

“저, 저는 그게…….”

기세에 눌렸는지 그녀는 제대로 변명조차 하지 못했다. 그저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으로 주변만 살폈다.

그 순간, 임진용 회장과 임수미 사장, 그리고 양하나의 아버지 양호영 사장도 함께 나타났다.

대충 얘기를 들은 양호영 사장은 낭패라는 표정을 지었고, 임진용 회장은 웃으며 말했다.

“실수로 부딪칠 수도 있죠. 오택규 부대표님께서 먼저 사과하셨다니, 두 분께서도 사과하시고 화해하시면 되겠네요.”

파티장에서는 무슨 일이 생기든 호스트 책임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게스트들은 호스트 체면이 상하지 않도록 문제를 일으키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문제가 생기더라도 웬만하면 참고 넘어가고.

결국 양하나와 문성동이 택규에게 사과하는 것으로 일이 마무리 되었다.

주위의 시선 때문인지 양하나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모습이었다. 다행히 임수미 사장이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많이 놀랐죠? 드레스 갈아입어야겠네요. 호텔에 여벌 드레스가 있을 테니, 따라오시겠어요?”

“예, 감사합니다.”

양하나는 임수미 사장을 따라갔고, 직원들은 쏟아진 음식을 치웠다.

아까 양하나의 편을 들던 남자들은 슬금슬금 물러났다.

그들을 향해 택규가 말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가기 전에 이름 말해주고 가세요.”

그 말에 그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이 자식 악취미네.

“그냥 가세요.”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들은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났다.

“니들 얼굴 다 기억했어.”

몇몇은 오늘 잠 못 드는 밤이 되겠구나.

현주 누나는 골치 아프다는 듯 손가락으로 이마를 꾹꾹 눌렀다.

난 작은 목소리로 엘리에게 말했다.

“누나는 편두통이 이마 쪽으로 오나 봐요. 전 주로 옆머리가 아프던데.”

엘리는 웃으며 목소리를 낮췄다.

“그것도 그런데, 주름 생길까봐 그러는 거예요. 인상 쓰면 이마에 금방 주름이 생기잖아요. 그래서 손가락으로 이마를 위로 당기는 거죠.”

“아…….”

그런 이유가 숨어 있었어?

현주 누나는 한숨을 내쉬듯 말했다.

“담배 좀 피우고 올게.”

실내는 금연이라 담배를 피우려면 밖으로 나가야 한다.

“같이 가요.”

안 그래도 바람 좀 쐬고 싶고, 주위 사람들 이목도 피하고 싶다.

우리는 다 같이 밖으로 나갔다.

날씨는 많이 쌀쌀했다. 남자들이야 정장이나 턱시도지만, 여자들은 얇은 드레스다. 헨리는 재빨리 자신의 웃옷을 벗어서 현주 누나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고마워요.”

훈훈한 모습이다.

나도 웃옷을 벗어 엘리의 몸을 덮어주었다. 옷을 벗으니 확실히 춥다. 택규는 지퍼를 잠그며 말했다.

“아, 춥다.”

“…….”

지 혼자 두꺼운 패딩을 입고 있는 놈이 뭐가 추워?

현주 누나는 담배를 피우며 택규를 쏘아보았다.

“넌 오면 온다고 얘기를 해야지.”

“누나 놀라게 해주려고 했지.”

정말 놀라긴 했다. 오자마자 사고를 칠 줄이야.

혼날 것 같은 분위기를 감지했는지 택규는 재빨리 양쪽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말했다.

“와우! 누나 오늘 엄청 예쁘네. 우리 누나인지 못 알아볼 뻔. 평소에도 좀 이렇게 꾸미고 다녀.”

“닥쳐.”

“넵.”

현주 누나는 나를 보았다.

“이런 자리 와보니 어떤 것 같아?”

“글쎄요. 워렌 보트와 식사할 때만큼 재밌진 않네요.”

내 말에 다들 공감한다는 표정이었다.

“그래도 앞으로 이런 자리 올 일이 많아질 거야. 너도 그렇고, 택규도 그렇고.”

현주 누나는 또다시 택규를 쏘아보았다.

“넌 나중에 나랑 얘기 좀 해.”

여기까지 와서 혼나기도 쉽지 않은데.

난 울상을 짓는 택규에게 티슈를 건네주었다.

“아직 안 울었어.”

“아니, 어깨에 묻은 잼 닦으라고.”

아까 닦긴 했는데, 어깨는 놓친 모양이다.

“이따 빵 찍어먹으려고 놔둔 건데.”

말은 그렇게 해도 열심히 닦았다.

그 뒤로 파티는 계속 이어졌다. 무대에서 간단한 공연이 있었고, 임수미 사장이 인사할 때는 모두가 박수를 쳤다.

난 신병두 부회장과도 잠깐 인사를 나눴다.

유리는 나에게 말했다.

“저 먼저 가보려구요.”

“벌써? 아까 남자들이 계속 말 거는 것 같던데.”

유리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

“쳇, 저런 남자들 별로 관심 없어요.”

“그럼 어떤 남자에게 관심이 있는데?”

“선배한테는 말 안 해줄래요.”

괜히 심통 부리는 것 같은 표정이 귀엽다.

“선아 선배 왜 안 왔는지 안 궁금해요?”

“응?”

그러고 보니, GH그룹 쪽 사람들은 왔는데 선아와 고준형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듣기 전까지는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왜 안 왔대?”

“임신했데요.”

“그래?”

역시 속도위반이었나?

유리는 웃으며 말했다.

“그럼 다음에 봐요, 선배.”

“잘 가.”

* * *

개관파티는 자정쯤 끝났다.

앞에는 대형세단들이 줄을 지어 서있었고, 사람들은 인사를 나누며 각자 차에 올라탔다.

상엽 선배와 기홍 선배는 함께 있었다.

“우리는 한 잔 더 하러 가려고.”

“같이 오신 여자 분은요?”

“피곤하다고 먼저 갔어.”

기홍 선배가 말했다.

“안 챙겨주니 삐쳐서 간 것 같던데요.”

“그런가?”

나는 임진용 회장과 임수미 사장과 인사한 다음 엘리와 함께 차에 올라탔다.

술기운 때문인지 엘리의 얼굴은 살짝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몸매라인이 드러나는 이브닝드레스, 보기 좋게 쭉 뻗은 새하얀 다리, 그리고 검은색 에나멜 하이힐.

평소에도 매력적이지만, 오늘은 전혀 다른 느낌이다.

엘리는 내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진후 집으로 갈까요? 그래도 되죠?”

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An Investor Who Sees The Future

An Investor Who Sees The Future

미래를 보는 투자자
Score 1.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There may be great entrepreneurs, but there are no great investors. That’s the reality of this country.”

One day, something started to appear before my eyes.
What could I possibly do with this ability?

From now on, I will reshape the global financial landscape!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