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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12

211. 거지남매 – 아침

야심한 시각, 크세니아가 레오를 기다리고 있었다.

베르크 추기경과 이야기를 마치고 돌아온 그는 레나가 잠들어 있는 걸 확인하고(동생은 항상 일찍 자고 늦게 일어났다) 잠옷 차림의 크세니아를 곁에 앉혔다.

어둠에 휩싸인 별채.

거실에 놓인 등받이 소파에서 비밀이 많았던 연인이 눈을 맞췄다. 하고 싶은 말, 해야 할 말이 많았지만, 레오는 조용히 그녀를 끌어당겼다. 크세니아는 저항 없이 딸려왔다.

공기엔 서늘한 감이 있었다. 마지막 장작까지 집어삼킨 벽난로에는 더 이상 집어넣을 것이 없었고, 덕분에 무척이나 고요한 겨울밤, 반쯤 겹쳐 앉은 두 사람은 체온을 나누며 서로의 숨소리에 귀 기울였다.

규칙적으로, 낮고 길게 이어지는 숨결이 서로의 심리 상태를 일러주었다.

허파를 크게 스무 번쯤 비워냈을 무렵, 레오의 가슴을 더듬던 크세니아가 물었다. 그녀의 뒷머리를 어루만지던 레오는 간결하게 답했다.

“할아버지가 뭐래요?”

“도와주시겠대요.”

다시 정적이 깔렸다. 지난 몇 달간 불규칙하게 자고 쉼 없이 달리기만 했던 레오는 이대로 쉬고 싶었다. 다행히 크세니아는 가만히 있어 주었고, 그러기를 한참, 다시 말문을 연 건 레오였다.

“전 아무렇지도 않아요.”

“뭐가요?”

“당신이 귀족이라는 게요. 그러니 그렇게 눈치 보지 말아요. 전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오히려 당신의 비밀을 알게 되어 기뻐요.”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네요. 솔직히 전 당신이 왕자라고 고백했을 때 좀 실망했거든요.”

“왜요?”

“제 아버지가 당신을 보낸 줄로 착각했어요. 당신도 제게 일부러 접근한 거라고… 다행히 아니었어요. 만약 그랬으면 제가 무슨 짓을 했을지 당신은 절대로 모를 거예요.”

하하.

레오는 크세니아의 살기 넘치는 미소를 웃음으로 넘겼다. 가지런히 드러난 치열이 사랑스러워서 톡톡, 앞니를 두드리자 크세니아가 앙- 그의 검지를 깨물었다.

허나 소드마스터가 그런 공격에 당할쏘냐. 레오의 손끝은 그녀의 이를 피해 턱으로, 보드라운 목선을 따라 입이 닿을 수 없는 쇄골까지 달아나 있었다. 그리고 크세니아는 이 옴폭 파인 부분을 쓰다듬어주는 걸 정말 좋아했었다.

크세니아가 뾰로통하게 미소 지었다. 관계를 청하는 손길을 가만히, 목을 뻗어 허락하더니 레오의 뺨에 자신의 뺨을 비볐다. 말랑한 입술이 레오의 턱을 타고 더듬더듬, 그의 입꼬리까지 올라왔는데…

“크흠!”

막 레오의 입술을 탐하려던 크세니아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레오도 황급히 몸을 일으키며 소파 등받이 너머를 돌아보았다.

레브였다. 그는 멀찍한 거리를 두고, 문 앞에 서서 팔짱을 끼고 있었다.

“레오. 잠깐 얘기 좀 하지.”

“아… 그래. 크세니아, 미안해요. 먼저 들어가 있어요.”

“…알겠어요. 제 방이 어딘지는 알죠?”

크세니아는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동시에 무례한 불청객을 못마땅하게 흘겨보며 사라졌다.

무어라 한 마디 쏘아붙이지는 못했는데, 그와 레오의 관계가 상상 이상으로 깊다는 걸 눈치채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잘~ 논다.”

레오 덱스터였다면 이렇게 말했으리라. 그렇지만 말수가 적은 편인 레브는 침묵으로써 자신을 잊어버린 친구의 무심함을 꾸짖었고, 레오는 머쓱하게 고개를 어루만졌다.

“미안해.”

“됐어. 별로 급한 건 아니니까. 길버트 포르테는 잘 처리됐대.”

“그래? 다행이네. 그럼 이제 너는 어쩔 거야?”

레브는 답하지 않았다. 레오의 건너편 소파에 걸터앉으며 다른 주제를 꺼냈다.

“바르트는?”

“…바르트 ‘경’이겠지. 못 만났어. 도착했을 땐 도망치고 없더라. 하리에만 잠깐 보고 왔네.”

레오는 그간 있었던 일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하리에 가이단이 정신줄을 놓아버리는 건 어찌 막았는데, 분노한 그녀를 두고 올 수밖에 없었다는 것과 테르탄 공작가의 포위망을 뚫으려던 찰나에 갈렌이라는 근위기사를 만나 데려왔음을 알렸다.

“너는 별일 없었지?”

“왜 없었겠어.”

레브는 레오가 타아문 마을을 떠난 직후부터 여기까지 오는 동안 있었던 일을 전했다.

그가 떠나기가 무섭게 크세니아의 태도가 변했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자신의 정체를 숨기려 들지 않았고 페테르 백작이 딸려 보내준 마부가 그녀를 ‘영애’라 칭하기 시작하면서 일행의 관계도가 크게 요동쳤다.

크세니아가 레나를 공주로 대했다. 그동안 자신이 보인 무례함을 사죄하며 산티안 라우노에게는 경거망동하지 말 것을 권했다.

그녀는 산티안을 자기가 꽤 오래 알고 지낸 동생이나 공주의 친구가 아닌, 수발을 드는 시종으로 대하였는데 레나는 당혹스러워하면서도 이를 상당히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낯설지 않은 귀족의 예법에 무의식적으로 반응해 공주의 품위를 되찾아갔다.

크세니아는 처음엔 레브의 태도도 지적하고 나섰다. 왕자와 무슨 관계인지는 모르겠지만, 칼을 잡았으니 공주를 호위하는 자로서의 간격을 유지하길 바랐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던 레브는 그러겠노라 답했다.

허나 레나를 동생으로 대하는 태도를 고치긴 어려웠고, 크세니아도 레브에게서 풍기는 어떤 {기품}과 유려한 예법에 놀라 그를 차차 인정해나갔다.

이때만 해도 크세니아가 백작가의 방계인 줄로 알았다.

그녀가 페테르 백작의 외동딸인 걸 알게 된 건 모나크 남작가에 도착해서, 크세니아가 순례를 왔다가 불과 며칠 전에 수도로 떠났다는 추기경에게 돌아와 달라는 편지를 보냈을 때였다. 그녀는 돌아온 베르크 추기경을 할아버지라 칭하며 끌어안았다.

“너도 많이 놀랐겠군.”

“그래. 상상도 못 했지. 어쨌든 그렇게 됐어. 교회의 통신도 편하게 사용했고… 추기경은 뭐래?”

“도와주겠대. 그랑 같이 있으면 이것도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레오가 오른손바닥을 펼쳤다.

레브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뭘 보여주려 했는지는 알고 있었다.

“다행이네. 그럼 이제 수도에 가서 에릭 왕자를 몰아내기만 하면 되는 거야?”

“그렇지. 다만, 조금 시간을 들여야 할 것 같아.”

상황이 급반전했다.

오리아스의 눈길을 피하지 못해 언젠간 들키리라 예상했다. 해서 정계의 중심에서 밀려나 저들의 영지에 틀어박힌 소위 반(反) 에릭 왕자파 귀족들을 회유해 내전을 일으킬 것을 계획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처음 계획한 대로 기사들을 모아 거사를 일으키는 편이 훨씬 빠르고 수월한 길이었다.

물론 당장 에릭 왕자의 목을 치러 달려갈 수도 있을 터였다.

어지간한 수비병력은 가뿐히 돌파할 수 있는 소드마스터이겠다, 기사단장급의 실력자인 레브가 있으니 베르크 추기경과 함께 왕궁에 들이닥쳐 에릭 왕자를 죽여버려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간 역풍을 맞는다. 레오가 왕위에 오를 정당한 후계자임을 기사단으로부터 인정받고, 에릭 왕자가 악독한 신의 추종자임을 만천하에 알릴 필요가 있었다.

단지 그를 쳐 죽이는 게 능사가 아니다.

레나를 무사히 공주로 만들고, 엔딩 이후로도 무탈히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게 궁극적인 목표였으므로 레오는 서두르지 않을 생각이었다.

완벽한 엔딩.

그는 레나가 완벽하게 행복할 수 있는 마무리를 원했다. 그리고 이젠 불가능해 보이지만은 않았다.

레오 드 예리엘이 빙긋 미소 지었다. 그의 눈에는 정말이지 아름다운 엔딩이 그려져 있었고, 일을 섣불리 그르칠 생각이 없었다. 차근차근, 물샐틈없는 대비를 갖춰 도전할 것이다.

레브는 그의 신중한 미소에 마음이 한결 가라앉았다.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겠다 안도하며 잘 자라, 크세니아의 침실로 향하는 레오에게 인사했는데, 깜박 전하지 못한 말이 떠올랐다.

지금 말해두는 게 좋을까. 고민했으나 레오의 사생활에 또 훼방을 놓을 정도로 눈치가 없진 않았다. 그렇게 중요한 것도 아니고, 사실 레오도 아는 일이니까.

아무래도 우리의 동생이… 레나가 날 이성으로 여기는 것 같다.

곤란하게도.

* * *

왕이 승하하기까지는 거의 일 년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내년 초겨울 즈음에나 서거할 터라 레오는 모나크 남작가를 급하게 떠날 생각이 없었는데, 돌연 그래야만 하는 일이 발생했다.

에릭 드 예리엘 왕자의 ‘아키넨’ 일정이 잡혔다. 왕자의 대관식, 또는 즉위식으로서 각지의 귀족들에게 필히 참석하라는 공문이 날아들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병상에 쓰러졌을망정 왕이 아직 살아있는데, 왕자가 독단으로 아키넨을 열다니. 온 왕국이 술렁였으나 레오는 그 까닭을 짐작하였다.

오리아스의 몸이 달아오른 거다.

표식을 찍은 적이 없는데, 표식이 찍힌, 도무지 알 수 없는 존재가 저의 영역을 활보하고 있다. 베르크 추기경이 곁에 붙으면서 추적조차 어려워지자 오리아스는 이를 정말 심각한 위협으로 받아들인 게 틀림없었다.

북부 두 왕국을 장악한 마르하스(MalHas)도 그렇고, 벨리타 왕국의 왕 자리를 꿰찬 아스타로트(Astroth)도 그렇고, 아신들이 인간의 왕 자리를 탐내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리 놀라울 것도 없는 공양 효율의 문제다.

전쟁(戰爭)의 소용돌이를 먹이로 삼는 마르하스나, 두려움을 사랑하는 공포(恐怖)의 대공 아스타로트는 이종족이 없는 지금 인간으로부터 신력을 수급했다.

턱없이 낮은 공양 효율로 고통받기는 그들도 매한가지였는데, 만백성의 주인, 왕(王)은 정말이지 탐스러운 자리가 아닐 수 없었다. 제물들이 저들 스스로를 왕에게 종속된 존재로 여겼으므로 본디 주신의 소유인 걸 비틀어 뽑아먹기에 아주 적격이었다.

그래서 위협을 느낀 오리아스가 대관식을 서두르는 것이었다. 무엇이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는지 몰랐으므로 일단 최대한의 대비를 마쳐두려는 거다.

그래. 아주 잘 걸렸다. 지금 네놈에게 다가가는 적이 부당하게 내쫓긴, 적법한 왕자임을 모르는구나.

오리아스의 실책을 무척 기꺼워하며, 레오는 즉시 모나크 남작령을 떠났다.

레나와 레브, 산티안 라우노, 갈렌을 비롯한 모나크 남작가의 몇몇 기사와 순례를 나온 베르크 추기경 일행, 아키넨에 초대받아 왕궁에 들어갈 크세니아 모나크 남작 대리가 레오와 함께했다.

아키넨이 예정된 날은 앞으로 다섯 달 뒤의 여름이었다.

아키넨을 치를 준비야 바로 시작하면 된다고 하더라도 국경을 접한 다른 왕국들(벨리타, 오른, 아이셀)이 축하 사절을 꾸려 루티나에 도착하려면 그 정도의 시간은 필요했다.

덕분에 시일에 여유가 있는 레오는 베르크 추기경의 권유에 루티나로 가는 길 중간에 있는 윌렌드 백작가에 들렀다.

에릭 왕자의 정통성을 문제 삼으며 테르탄 공작가와 대립한 제오프 윌렌드 백작이 가주인 곳이었는데, 레오가 기사단을 금방 장악할 수 있음을 모르는 베르크 추기경이 그를 회유하는 게 좋겠다고 추천한 것이었다.

나쁠 것이 하나도 없었다.

되려 엔딩 이후의 삶을 생각하면 권력을 공고히 다져둘 필요가 있었으므로 레오는 쾌히 승낙했다.

허나 문제가 있었으니…

“왕자님이 맞으시군요. 공주님께서도 이렇게 살아 돌아오셨으니 우리 콘라드 왕국의 경사입니다. 하지만 저는 정계에 관심이 없습니다. 마지막 남은 막내딸만 시집보내고, 아들에게 작위를 물려줄 생각입니다.”

제오프 윌렌드 백작의 말이었다. 그는 더 이상 권력에 욕심이 없음을 밝히며 돌아온 왕자, 공주의 편에 서기를 거절했다.

그의 말이 진심인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어쩌면 기세등등한 테르탄 공작가 파벌과 맞부딪치는 게 무리라고 생각해 적당히 발을 빼려는 것일 수도 있었다.

에릭 왕자가 이기면 저는 돕지 않았다며 발을 뺄 것이고, 레오 왕자가 이기면 그때 가서 백작위를 물려받은 아들을 내세워 친한 척을 해도 늦지 않았다. 권력 기반이 약한 레오 왕자는 괘씸해도 아들을 거부하지 못하리라.

이게 귀족 사회의 생리다. 베르크 추기경이 눈살을 찌푸렸다.

“왕자님. 여긴 틀린 것 같습니다. 하지만 소개해드리고픈 대귀족이 하나 더 남았습니다. 데니스 아르네 후작이라고… 콘라드 왕국의 북부 변경백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윌렌드 백작과 아르네 후작은 사돈지간이라고 들었습니다. 기왕이면 둘 다 끌어들이는 게 좋으니 며칠 머무르면서 회유해 보지요. 정 안되면 아르네 후작을 설득해 백작을 끌어들이고요.”

뻔뻔하게도 레오는 백작에게 저택에 며칠 체류하겠다고 통보했다. 그동안 백작을 설득하려 했는데, 결과적으로 백작을 회유한 건 레나였다.

[ 업적 : 사진 스무 장 – 레나가 종종 꿈으로 과거를 미약하게 기억해냅니다. ]

하나씩, 과거를 되짚어가던 꿈이 그 엔딩에 닿았다.

늦잠을 자고 일어난 레나의 눈빛이 발랄하다. 하지만 저의 봉긋한 가슴골을 느릿하게 내리긋는 손길엔 다소곳한 매력이 있었고, 철없이 벌어진 다리가 매끄러운 호선을 그리며 그녀의 아침을 열었다.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A Princess Is Raised After Death, Desperately Making Her a Princess, Princess is Raised by Death, RPOD, The Princess Is Raised After She Dies, 正規エンディングまで異世界ループ転生, 공주는 죽어서 키운다
Score 8.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19 Native Language: Korean
Minseo was trapped in [Raise Lena]. With the emotionless text, “[Starting Raise Lena]” he became Leo and was imprisoned in an unfamiliar worl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Uh-huh?” “Leo? Why the long face? You! Are you messing with me again?” There, he met his childhood friend, Lena, skillfully picking berries. The lovely Lena. Leo marries her in a peaceful mountain village… [Lena is married! Congratulations.] [You have failed to clear Raise Lena.] [Restarting.] The happiest moment. Lena disappeared. An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Huh? Lena!” “Why have you been spacing out? And why are you looking at me like that? You wanna get beat up?” Lena, clad in thick leather armor and a sword on her shoulder, stared at him with unwavering eyes. It was a different scenar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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