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Chapter 213

212. 거지남매 – 딱밤

밤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 이른 아침. 침상에서 몸을 일으키는 앳된 소년이 있었다.

누구처럼 늦잠을 자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그 소년은 끄으응 기지개를 켜는 것으로 게으름을 몰아내었다. 어젯밤에 미리 떠다 둔 물통을 놓고 어푸어푸 세수한 뒤 수건을 적셔 몸을 씻었다.

그런 다음에 한 일은 몸단장이었다. 자고 일어나면 늘 엉켜있는 곱슬머리를 빗질하고, 눈곱이 끼진 않았나, 귀 뒤는 깨끗한가를 살폈다.

이윽고 깔끔한 청색 코사쥬(조끼의 일종)로 갈아입은 소년은 그에겐 다소 낯선 자주색 견장을 왼쪽 어깨에 달았다.

이 코사쥬와 견장 모두 모나크 남작가에 있을 때 받은 것들이었다. 행여나 망가질세라 꼼꼼히 다림질하고 머리맡에 잘 개어놓은 덕분에 아직도 새것 같았다.

이게 다 무슨 일이람.

산티안 라우노는 생각했다. 친구의 말에 따라 충동적으로 마차에 숨어 탄 덕에 별별 일을 다 겪어본다고.

놀랍게도 그 친구는 공주님이셨고 (사실은 그렇게까지 놀랍진 않았다. 얼굴을 보면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더 놀랍게도 귀족이었던 크세니아 누나의 엄명에 공주님을 모시는 시종이 되었다.

하루아침에 친구에서 시종으로 관계가 격하되었으니 어쩌면 억울해 보일지 모르겠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평민이 시종이 되는 건 엄청난 행운이다.

시종은 육체노동을 하는 시녀나 하인과는 엄연히 달랐다. 보좌관 또는 비서에 준하는 일종의 관리직으로 집사가 되기 바로 이전 단계라 할 수 있었다.

그들의 주 업무는 모시는 주인의 일정을 관리하는 일이다. 보통은 집사가 평소 눈여겨본 시동(侍童, 심부름하는 아이)을 추천하곤 했는데, 양질의 교육을 받기 어려운 평민으로선 대단한 신분 상승의 기회로 여겨졌다.

더군다나 그는 무려 공주의 수발을 드는 시종이다. 쫓겨난 공주, 레나 드 예리엘의 사정이 워낙 특이한 경우라 가능한 것이지, 본래 왕족을 모시는 시종은 귀족의 자제만이 하는 일이다. 아무리 못해도 우수한 교육을 받은 서자여야 했다.

가문을 물려받지 못할 둘째나 셋째를 시종으로 보내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왕실의 시종장 자리를 탐내서였다. 왕과 왕실이 곧 국가인 이 세상에서 왕족의 일정을 총괄하는 시종들의 장, 시종장은 말하자면 장관급의 권력자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행운의 사나이, 아니, 소년 산티안 라우노는 빳빳한 견장을 달고 밖으로 나왔다. 새 아침을 맞아 이제부터 그가 할 일은…

없었다.

시종으로서 교육받지 못한 티안은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래도 모나크 남작가에 있는 동안 집사에게 쯧쯧 면박을 받으며 주워들은 게 있는지라 시녀들이 모여 있을 부엌을 향했다. 한 시녀의 근처를 얼쩡거리며 뭐라도 하는 척, 흠흠, 세숫물은 충분히 따뜻한가, 손을 넣어 검사했다. 시녀는 피식 웃었다.

웃어? 감히?

그가 진짜 시종이었다면, 시녀의 무례함을 용서치 않았으리라.

귀한 자주색 견장을 괜히 달고 다니는 게 아니다.

주인의 일과가 원활히 진행되도록 언제나 한발 앞서 움직이는 시종에겐 엄청나게 넓은 재량이 주어지기 마련이었고, 시녀와 하인들에게 하던 일을 멈추고 당장 다른 일을 하라고 명령할 권한이 있었다. 시종에게 밉보였다간 인생이 고달파지는 건 순식간이다.

그러나 이를 어쩌랴.

눈치 빠른 시녀들이 그가 반푼이 시종이란 걸 모를 턱이 없었다. 몇 달 전에 한 취객에게 흠씬 두들겨 맞아본 티안도 어른 무서운 줄 새삼 깨달았으므로 견장을 내세워 건방을 떨지 못했다.

그럴 성격도 못 되었고.

티안은 세숫물을 들고 가는 시녀를 따라갔다. 똑똑,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니 막 깼는지 몸을 뒤척이는 레나가 있었다.

화악-

얼굴이 붉어진 티안이 고개를 돌렸다. 비록 한 살 누나이지만, 아이처럼 귀여워야 할 레나의 드러난 맨다리가 요염하다.

잠옷 차림. 한쪽 다리가 망측하게 벌어져 있었고, 비몽사몽 일어나며 “티안. 좋은 아침~” 인사했어야 할 그녀가 티안을 가만히 위아래로 훑었다.

왠지 레나가 아닌 것 같다.

나른하게 몸을 일으킨 레나는 작게 하품했다. 말없이 시녀에게 손을 까닥여 세숫물을 가져오라 하더니 제 얼굴을 꼼꼼히 닦았다. 다행히, 정말 다행히도 레나가 세수를 마치고 반짝 고개를 들었을 땐,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티안… 왔네.”

하지만 산티안은 음절을 띄어 발음한 레나의 나지막한 아침 인사가 애달프다고 느꼈다. 그녀가 이보다 더 여자로 느껴진 적이 없었다.

레나가 보인 다음 행동도 평소와는 달랐다. 시녀에게 안 하던 화장을 해달라 요구하더니 화장대에 앉아 허리를 꼿꼿이 폈다. 시녀의 손길을 받으며 뭔가 골똘히 생각하던 그녀는 이윽고 입을 열었다.

“티안. 트리스타 윌렌드 영애한테 같이 식사하자고 전해줘.”

“어, 어응. 알겠습니다.”

산티안 라우노는 레나의 명령에 즉각 반응하지 못했다. 어물쩍거리는 그에게 레나가 고개를 돌리며

“지금.”

말한 다음에야 후다닥 움직이기 시작했다.

트리스타 윌렌드 영애는 이곳 윌렌드 백작가의 막내딸이다.

제오프 윌렌드 백작이 애지중지하는 딸로서 최근 혼기를 맞아 신랑감을 물색하고 있었는데, 백작의 높은 눈높이로 ‘시집가려면 일 년은 더 걸릴 것’이라는 게 세간의 평이었다.

트리스타 윌렌드 영애에겐 딱히 시종이 없었으므로 산티안은 그녀를 직접 찾아갔다.

이른 아침에 실례합니다. 하지만 공주님께서 당신과 식사하길 바라십니다. ─ 선약도, 두서도 없이 전했음에도 ‘공주’라는 이름의 무게가 모든 걸 해결해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레나의 방에서 정갈한 아침 식사 자리가 열렸다.

중간에 왕자, 레오 드 예리엘이 시동을 통해 “동생이 왜 밥 먹으러 오지 않는 거냐?” 물었으나, 레나는 따로 먹겠다고 전하라 이르며 트리스타 윌렌드 영애를 마주했다.

“어제 다 같이 인사드리고 따로 뵙기는 처음이네요.”

“네. 초대해주셔서 기뻐요, 공주님. 밤새 평안하셨어요?”

“덕분에 잘 잤답니다. 기쁘다고 말씀해주시니 제가 더 고마워요. 실은 제가 친구도 없고… 적적한 찰나에 비슷한 연배를 만나 반가웠거든요.”

“어머나, 저라도 좋으시다면 무척 영광이에요.”

꺄르르 맑은 웃음을 교환하는 두 명의 귀인들. 근처에 기립해 있던 산티안은 순진하게 상처받았다.

레나와 트리스타는 서로 칭찬을 주고받으며 말문을 틔웠다.

그러던 중,

“향기가 참 좋네요. 뭘 뿌리셨나요?”, “아니요. 전 아침에 거품 목욕하기를 즐기거든요.”, “아아. 그래서 피부가 그렇게 고우셨군요. 부러워요. 전 여태 거품 목욕이란 걸 해본 적이 없네요.”, “공주님께서요? 아… 그렇죠.”

공주가 자신의 결핍을 드러내면서 트리스타 영애의 말이 조심스러워졌다. 레나는 대수롭지 않게 답하여 그녀의 궁금증을 북돋아 주었다.

“목욕할 여유가 없었어요. 이리저리 되는대로 떠돌아다니다가 개울가에서나 씻고…”

“세상에, 정말 놀랍네요. 그런데… 음… 그… 도망 다닐 때 있잖아요? 힘들진 않으셨어요?”

레나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살살 넘어오기 시작한 순진한 영애에게 뾰족한 침을 찔러 넣었다.

“고달프죠. 하지만 누구랑 함께하느냐가 더 중요해요. 전 제 오라버니와 함께여서 많은 보살핌을 받았는데… 영애께서는 그분이 좋은 사람이라고 확신하시나요?”

“네? 어, 어어…”

“이만하면 먹기는 다 먹은 것 같네요. 이것들 좀 다 치워주세요. 그 있잖아요. 영애의 호위기…”

“자, 잠깐만요!”

트리스타 영애가 왕방울이 된 눈으로 일어나 양손을 달달 떨었다. 그 연초록색 드레스를 입은 청순한 아가씨는 마침 시녀들이 식기를 치우느라 자리를 비운 걸 다행으로 여겼으나, 방에 남아있는 산티안 라우노를 불안하게 곁눈질했다.

“티안. 잠깐 나가 있어.”

티안이 밖으로 나왔다. “확인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있어요…” 달콤히 속삭이는 레나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문이 닫혔다.

* * *

“저… 레나. 너 오늘 좀 이상해.”

산티안 라우노가 레나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붙인 건 그날 정오 무렵이었다. 연무장을 구경해보고 싶다는 핑계로 한 기사의 안내를 받는 그녀의 행동이 지나치게 낯설었기 때문이었다.

“저쪽이에요?” 레나는 스스럼없이 기사의 팔을 잡았고, 바로 뒤에 서 있던 티안은 보았다.

레나가 기사의 굵직한 팔뚝을 살짝 손가락으로 긁는 것을.

“왜 이러는 거야?”

“그러는 너는 왜 묻는데?”

인적없는 복도에서 레나가 돌아섰다. 아침에 그랬던 것처럼 티안을 위아래로 훑더니 그를 쌀쌀맞게 몰아세웠다.

“아까 그놈이나 너나 똑같잖아.”

“뭐, 뭐가 같다는 거야?”

레나는 답하지 않았다. 손을 뻗어 그의 턱을 쓰윽 매만지고는 아래를 향한 눈길로 답해주었다.

“알았으면 저리 가. 꼴도 보기 싫으니까. 그리고 앞으론 내 이름을 부르지 마. 말도 놓지 말고.”

우두커니 굳어버린 친구를 두고 돌아선 레나는 후회했다. 내가 왜 이러지? 하지만 아침부터 저 고추 달린 종자들 하나하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단세포 같아서 우습고, 아무렇게나 해도 좋을 하찮은 상대로 느껴졌다.

그렇다고 자존감이 높아진 것도 아니다. 왠지 닥닥닥 바닥을 긁는 심정이 된 레나는 어딘가에 들이받아 망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그녀를 붙잡는 건 고고한 혈통, 자신이 공주라는 자각이었다.

오빠가 보고 싶다. 오빠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는데. 아니, 보기 싫어. 오빠도 미워. 난 더러운 년이 아니…

어지럽다.

현기증을 느낀 레나는 찬 바람이라도 쐬고자 바깥을 향했다. 비틀거리며 눈 내린 정원에 나오자 보인 사람은 다름 아닌 레브 오빠였다.

[ 업적 : 레나와의 첫 만남 – 레나는 레오에게 높은 호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

“오빠…”

“어? 레나야, 왜 그래?”

그런데 참 웃기는 오빠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상하리만치 친한 척하고, 지금도 “어디 아파?” 화들짝 놀라서 달려오는 모습이 영락없는 친오빠였다.

“응. 나 아파.”

“어, 어디가? 왜? 뭘 또 잘못 먹었어? 다, 당장 교회에 가… 아니다, 추기경 어디 있어.”

레브 오빠가 나를 가타부타 번쩍 안아들었다. 마구 달려가려 하길래 레나는 일이 커지기 전에 손을 들어 오빠의 목을 감쌌다.

“잠깐만. 나 할 말이 있어.”

“그런 건 나중에 하고 일단은…”

“뽀뽀해주면 나을 것 같아.”

레나가 레브의 목을 잡아당겼다. 애달프게 매달려 키스하려는 찰나에

“악!”

딱밤을 맞았다.

어지간히도 세게 얻어맞은지라 키스고 꿈이고 나발이고 다 잊어버린 레나는 이마를 부여잡고 한참을 끙끙거렸다.

고통이 잦아들자, 울컥 화딱지가 난 레나가 외쳤다.

“오빠 너 이씨! 난 공주야! 감히 공주한테 이게 무슨 짓이… 꺄악!”

팽팽하게 당겨진 중지가 눈앞에 있었다. 몸을 바둥거려 떨어진 레나는 후닥닥 달아났고, 동생의 비명을 듣기가 무섭게 뛰쳐나온 오빠의 품에 안겼다.

“오빠! 레브 오빠가 나 때렸어!”

“뭐?”

“여, 여기 봐봐.”

레나는 벌겋게 달아오른 이마를 보여주며 고자질했지만, 오빠는 영 신통찮다는 표정이었다.

“네가 맞을 짓을 했겠지. 레브, 무슨 일이야?”

“묻지 마. 열 받으니까.”

“뭔데 그래?”

“아, 아니, 오빠는 동생이 맞은 건 신경도 안 써?”

“…걔가 나한테 아픈척했어.”

“여자가 아픈 척 좀 할 수도 있지. 그걸 그렇게 받는 남자가 세상에 어디 있… 악!”

“네가 잘못했네!”

똑같은 자리에 또 딱밤을 얻어맞은 레나는 분을 참지 못하고

“다 미워!”

외치며 제 방으로 달려가 틀어박혔다.

못된 오빠들. 두 번 다신 안 볼 거야. 여기서 밥도 안 먹고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버릴 거야!

─ 각오했으나 따뜻한 침대 속에서 꾀꼬닥 잠들었다 일어난 레나는 각오했던 걸 잊어먹었다. 어젯밤에 꿨던 꿈도 잊어버리곤 저녁에 일어난 그녀는 본래의 천진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오전 중에 한 레나의 행동으로 윌렌드 백작가는 벌집을 건든 것처럼 뒤집혀 있었다.

트리스타 윌렌드 영애가 제 호위기사를 더러운 파렴치한으로 규정했다. 그녀는 아버지께 그가 자신을 꼬드겨 멀리 달아나자 했다며 일러바쳤고, 기사는 옥에 갇혔다.

레오와 레브는 이 모든 과정을 어리둥절하게 바라보았다. 오래지 않아 레나가 트리스타 영애를 도와줬다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진실은 어두컴컴해진 티안만이 알고 있었다.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A Princess Is Raised After Death, Desperately Making Her a Princess, Princess is Raised by Death, RPOD, The Princess Is Raised After She Dies, 正規エンディングまで異世界ループ転生, 공주는 죽어서 키운다
Score 8.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19 Native Language: Korean
Minseo was trapped in [Raise Lena]. With the emotionless text, “[Starting Raise Lena]” he became Leo and was imprisoned in an unfamiliar worl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Uh-huh?” “Leo? Why the long face? You! Are you messing with me again?” There, he met his childhood friend, Lena, skillfully picking berries. The lovely Lena. Leo marries her in a peaceful mountain village… [Lena is married! Congratulations.] [You have failed to clear Raise Lena.] [Restarting.] The happiest moment. Lena disappeared. An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Huh? Lena!” “Why have you been spacing out? And why are you looking at me like that? You wanna get beat up?” Lena, clad in thick leather armor and a sword on her shoulder, stared at him with unwavering eyes. It was a different scenario.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