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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15

214. 거지남매 – 밤하늘

“좋은 밤 되십시오, 왕자님.”

레오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함께 술잔을 기울이던 갈렌을 돌려보냈다. 그러나 레오는 바로 취침에 들지 않고 적막한, 그리고 무척이나 검소한 교회의 객실 나무 의자에 앉아 남은 술과 안주를 먹어 치웠다. 그의 생각은 바르트 경을 파헤치고 있었다.

복수에 눈이 멀어 손속에 자비가 없는 대단한 실력의 기사다. 그만큼 충성스럽지만, 바르트 경은 테르탄 공작에 관한 일이라면 말도 못 할 적의를 드러내곤 했다. 나를 만난 이후에도 그랬던 걸 보면, 그의 복수심은 단지 공작으로 인해 주군을 잃었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동료들.

이유야 어찌 됐건 동고동락한 동료들이 테르탄 공작이 일으킨 군대에 쫓기다 여럿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레오가 바르트 경의 속내에 관해 아는 전부였다.

도저히 모르겠다.

술도 떨어지고, 안주 부스러기까지 싹싹 긁어먹은 레오는 어질러진 탁자를 정리했다. 제법 더워진 초여름 밤의 열기를 환기하려 창을 열고 잠자리에 들려는데,

– 똑똑

제니아 재커리가 문 앞에 있었다. 그녀는 어두컴컴한 복도에서 무릎을 굽혀 예의를 갖췄다.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다름이 아니오라, 레나 공주님께서 왕자님을 모셔오라 하셨습니다.”

솔직히 조금 늦은 시간이긴 하다. 그러나 레오는 “안내하게.” 후드를 눌러쓰고 군말 없이 제니아를 따라나섰다. 그가 이유를 물은 건 교회를 빠져나와서, 제니아가 타고 온 마차에 몸을 실었을 때였다.

“무슨 일인가?”

“저도 잘 모릅니다. 축하할 일이 생겼다고만 하시더군요.”

…레나가 말하지 말라고 했구나.

제니아 재커리는 이번에도 레나의 호위기사다. 재커리 남작가의 서녀(庶女)이자 제1 기사단의 기사로, 검술 실력과 예법, 그 무엇도 꿀리지 않는 데다가 여성이어서 동생의 곁에 붙여주었다.

사실 레브가 곁에 있는 편이 훨씬 안심이지만, 레브에겐 기사 작위도 없고, 지나치게 젊어서 공주를 호위하기엔 구색이 맞지 않았다. 덕분에 졸지에 백수가 된 레브는 레나의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사람들이 자기를 어쩌다 왕자 한 번 도와주고는 그 대가로 포상을 타 먹으려 따라다니는 속물로 본다는데, 레오는 하하하 웃고 말았다.

어쨌든 동생이 자신을 놀래켜 줄 생각으로 불렀음을 알아챈 레오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대신 “레나를 호위하면서 힘든 점은 없느냐.”, “뭐 재미있는 일은 없었느냐.” 시나리오상, 이 여자에게서 들었어야 할 이야기는 저번에 다 들었기에 사소한 질문들을 던졌다.

제니아는

“실은 공주님께서 그저께 바깥나들이를 다녀오셨습니다. 무척 재미있어하시더군요.”

로 시작해 공주님이 왕궁을 오랫동안 멍하니 쳐다봤다는 것과 벨리타 왕국에서 왔다는 화장품 세트를 샀다가 불량품인 걸 알고는 펄펄 뛰셨다는 것 등을 세세하게 이실직고했다.

하하.

이것도 {이벤트}일까? 레나가 제니아를 만나면 반드시 발생하는?

하지만 저번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특별한 일은 없었으므로 레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마차는 아르네 후작의 저택에 당도해 있었다.

콘라드 왕국의 북부 변경백이자 레오를 지지하기로 약속한 아르네 후작의 저택은 귀족들의 저택이 밀집한 모리츠 대로에 있었다. 그것도 테르탄 공작의 저택 맞은편이어서 레오는 무척 공교롭다고 생각했다.

그는 어둠에 휩싸인 공작의 저택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걸음을 돌려 저택에 들어섰다.

아르네 후작의 저택은 다른 저택들과 비교할 때 좀 독특한 구석이 있었다.

우선 건물이 돌로 지어졌다.

석재가 극히 부족해 벽돌과 나무로 집을 짓는 콘라드 왕국의 특성상 상당히 이질적인 광경이었는데, 그의 영지가 마법 왕국으로 불리는 아이셀 왕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 저택을 짓는 데 들어간 바위들은 아이셀 왕국에서 왔다.

사실 영토 대부분이 산지로 이뤄진 오른 왕국에서 수입하면 더 저렴하다.

그러나 오른 왕국과 콘라드 왕국 간에는 서로의 부를 과시하는 묘한 신경전이 있어서 석재와 같은 사치품은 팔겠다는 사람만 있고, 사는 사람이 없었다.

아르네 후작가는 그 덕을 톡톡히 본 것이다. 마법 왕국과 무역하며 대단한 부를 쌓았고, 이렇게 보란 듯이 저택을 돌로 지었다. 내부에도 아이셀 왕국에서 온 이색적인 물품들로 가득했다.

그렇다고 아르네 후작을 운 좋은 장사꾼으로 폄하했다간 큰코다친다. 그는 온 대륙에서 가장 강력한 함대를 보유한 귀족이었다.

그 함대는 평상시엔 발레이나(balaena, 고래)를 잡는 포경업으로 함대의 유지비를 충당했는데, 제롬 신성왕국의 오스카 백작가가 보유한 함대를 제외하면 적수가 없었다.

솔직히 바다가 우리랑 뭔 상관이냐 싶긴 하지만… 레오는 날씬하고 까무잡잡한 데니스 아르네 후작과 악수했다. 젊은 시절을 거친 뱃사람들과 보낸 후작은 예법을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경우가 잦았다.

“어서 오십시오.”

“…절 부른 게 동생이 아니라 후작님이셨군요.”

피부의 까무잡잡함과는 달리 무척 점잖게 생긴 후작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럴 리가요. 제가 감히 왕자님을 오라 가라 할 수 있겠습니까? 이쪽으로 오시지요. 공주님과 무척 반가운 손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르네 후작이 레오를 이끈 곳은 작은 연회장이었다. 기다란 테이블이 놓여 있고, 반이 넘게 타들어 간 양초들, 빈 술잔과 접시가 깔린 걸 봐서는 이미 저들끼리 한 번 자축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아직 술잔을 기울이는 레나와…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이쪽은 리스타드 제건 도로프입니다. 리스타드 님, 이분이 레오 드 예리엘 왕자님이십니다.”

“…경칭은 필요 없으니 제발 리스타드 제건 도로프라 불러주시지요.”

마법사가 있었다. 옛날에 언뜻 본 적이 있는 그 중년의, 면도하지 않은 사내는 취한 와중에도 자신의 풀네임을 불러주기를 요구했다. 그러나 후작이 어깨를 으쓱이고 레나가 키득키득 웃는 것으로 볼 때, 그의 바람을 이뤄지기 어려울 듯했다.

“정말이지…”

“앗! 또 화를 내시려는 건가요? 그럼 벌칙으로 마법을 보여주셔야 한다는 걸 잊지 마세요. 오라버니, 오셨어요? 여기 앉으세요.”

레오는 마법사와 인사하고 레나가 지목한 옆자리에 앉았다. 이 한껏 풀어진 분위기를 망치지 않으려 입을 다물었으나, 그는 동생이 마법사의 손등을 톡톡 두드리며 장난치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처음 보는 것은 아니다.

레나는 만나는 사람에 맞춰 언사를 달리하고, 원하는 분위기를 조율해냈다. 그러나 그것이 대견하다기보다는 오빠로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동생이 왜 이렇게 변했는지…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 업적 : 사진 스무 장 – 레나가 종종 꿈으로 과거를 미약하게 기억해냅니다. ]

촛불이 일렁이는 작은 연회장.

레오는 후작과 공주, 마법사가 하하 호호 담소를 나누는 풍경에 어울리지 않는 죄책감을 느꼈다. 그들과 동떨어진 세계에서 번민하던 레오는

‘배가 불렀구나, 레오 드 예리엘.’

작게 심호흡해 어찌할 수 없는 미련을 속으로 욱여넣었다. 욱여넣고는 눈부시게 아름다워진, 그러나 어딘가 묘한 색기가 흐르는 동생의 손을 테이블 아래로 움켜쥐었다. 동생은 “왜요?” 돌아보며 상큼하게 웃었지만, 레오는 저 미소가 참인지 거짓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된 일이냐? 마법사님께서 어떻게 여기에 계시지?”

“말하자면 좀 길어요.”

레나는 답변에 앞서 자신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살짝 들어 올렸다. 양각으로 튀어나온 물방울들에 문자가 음각으로 파인 백색의 목걸이로, 시나리오가 시작될 때 거지 남매가 나란히 차고 있던 것이었다.

“이게 뭔지 궁금해서 알아봤죠.”

“우리 어머니의 목걸이가 아니냐.”

“맞아요. 하지만 여기에 새겨진 문양이랑 글자들이 뭔지 궁금하기도 했고, 어머니에 관해 제가 아는 게 없어서요. 이 물방울들은 어머니의 개인 문양이 맞아요. 그런데 글자들의 의미는 따로 있었어요. 아르네 후작님께서 알려주신 건데, 차례로 이사도라 왕가, 코르넬 마탑, 제건 학파라는 뜻이라네요.”

“아아…”

{귀족 사회} 정보가 레오의 이해를 도왔다.

레나를 낳다가 사망한 어머니, 아이나스 드 예리엘은 아이셀 왕국의 공주였다. 콘라드 왕국으로 시집오기 전의 이름은 ‘아이나스 드 이사도라’로 이사도라 왕가의 공주였는데, 아이셀 왕국의 정치구조는 엄청나게 복잡했다.

아카이아 제국의 달아난 황족들이 수많은 정략결혼을 통해 세운 왕국. 왕가와 혈연으로 묶인 귀족들의 힘이 강했고, 최초의 마탑이자 아이셀 왕국이 제국으로부터 독립하는 데 일조한 ‘코르넬 마탑’이 정계에 강한 입김을 불어 넣었다.

그만큼 왕권이 약하고, 왕족 개개인과 엮인 외척, 귀족들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혔다. 거기에 코르넬 마탑의 대표적인 두 학파, ‘리디아’ 학파와 ‘제건’ 학파의 대립 구도까지 섞이면서 아이셀 왕국의 정계는 살벌할 정도로 첨예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즉, 우리의 어머니, 아이나스 드 이사도라는 코르넬 마탑의 제건 학파와 끈이 닿은 공주였던 거다.

레나는 이를 알아채고는 루티나 왕궁으로 돈 벌러 온 마법사, 리스타드 ‘제건’ 도르프를 끌어들인 것이고.

“아니에요. 마법사님을 모셔온 건 제가 아니라 아르네 후작님이셔요. 전 리스타드 아저씨… 죄송해요. 아저씨라 불러도 될까요?”

“저, 그 호칭이 문제가 아니라… 후우, 네. 공주님께선 마음대로 부르셔도 괜찮습니다.”

“고마워요. 전 리스타드 아저씨가 여기 계신 줄도 몰랐는걸요. 후작님께서 알려주지 않으셨더라면 제건 학파 분이신 줄도 몰랐을 거예요.”

“그렇지만 왕실과 계약한 마법사가 누구냐고 물어본 건 공주님이셨습니다. 저야말로 한 일이 없군요.”

“리스타드. 제건. 도로프입니다, 후작님. 제발 좀 이름을 똑바로 불러주세요.”

“그런데 마법사들은 왜 성을 두 개나 사용하는 거예요?”

꺄르르, 레나가 밝게 웃으며 불쑥 질문을 던졌고, 세 사람은 다시금 저들끼리 담소를 나누기 시작했다. 레오는 그들의 잡담에 끼어들지도, 집중하지도 못했는데, 그는 동생이 분노한 공작이 됐었던 12번째 회차의 엔딩을 떠올리고 있었다.

– 루티나 왕성에서 태어난 레나는… (중략) …공작가를 병합해 예리엘 공작위에 올랐다. 레나는 왕위를 되찾기 위해 아이셀 왕국의 제1 왕자, 비비안 드 이사도라와 정략적으로 약혼했으나, 아이셀 왕국으로 가던 중 아이셀 왕국의 대마법사, ‘안젤리카 리디아 키르기스’가 보낸 암살자들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

저 안젤리카 ‘리디아’ 키르기스라는 년이 왜 레나를 암살했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나와 레나가 제건 학파와 관련되어 있었고, 비비안 드 이사도라 또한 그러하다면… 수긍이 가는 것이었다.

하아.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레오는 상념을 털어버리며 레나가 또 한 건 해낸 것을 솔직하게 칭찬해주었다. 동생은 한쪽 어깨를 으쓱하며 겸양을 떨었지만, 이건 대단한 성과였다.

에릭 왕자는 끝났다.

오리아스를 상대할 대책도 있겠다, 현 상태로도 기사단을 잃은 그에겐 살아날 구멍이 없었다. 그런데 왕궁의 마법적 방위를 책임지는 마법사까지 우리의 편이 되었으니 반란은 이미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바르트와 목걸이?

바르트 경은 곧 루티나로 돌아올 터였다. 갈렌이 그에게 연락하겠다면서 노야르 항구로 심부름꾼을 보낸 게 몇 달 전이니, 바르트가 오거들랑 그때 물어보면 그만이었다.

레오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동생이 어설픈 오라비가 남긴 빈틈을 메워버렸다. 내일모레, 아니, 자정이 지났으니 내일, 나와 동생은 무사히 혈통을 되찾으리라. 그리고

…이번을 마지막으로 이 거지남매 시나리오는 끝나리라.

‘……’

고개를 치켜든 채, 레오는 허공을 응시했다. 감격스러워야 할 순간이었음에도 기쁘지 않았다.

레나. 미안한 내 동생아.

그만 자러 가야겠다고 일어난 동생이 여태껏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종자, 산티안 라우노를 차갑게 스쳐 가는 걸 보았다. 교회로 돌아가는 길, 레오는 이게 끝이 아니며, 절대! 절대로! 이렇게 끝나선 안 된다고 하늘에 대고 빌었다.

밤하늘은 칠흑같이 어두웠지만.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A Princess Is Raised After Death, Desperately Making Her a Princess, Princess is Raised by Death, RPOD, The Princess Is Raised After She Dies, 正規エンディングまで異世界ループ転生, 공주는 죽어서 키운다
Score 8.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19 Native Language: Korean
Minseo was trapped in [Raise Lena]. With the emotionless text, “[Starting Raise Lena]” he became Leo and was imprisoned in an unfamiliar worl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Uh-huh?” “Leo? Why the long face? You! Are you messing with me again?” There, he met his childhood friend, Lena, skillfully picking berries. The lovely Lena. Leo marries her in a peaceful mountain village… [Lena is married! Congratulations.] [You have failed to clear Raise Lena.] [Restarting.] The happiest moment. Lena disappeared. An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Huh? Lena!” “Why have you been spacing out? And why are you looking at me like that? You wanna get beat up?” Lena, clad in thick leather armor and a sword on her shoulder, stared at him with unwavering eyes. It was a different scenar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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