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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16

215. 거지남매 – 어머니의 목걸이

– 댕그랑! 뎅- 댕그랑!

수도 루티나는 평소와 다른 아침을 맞았다.

터오는 동녘과 함께 교회의 종소리가 아스라이 울려 퍼졌고, 갑주가 아닌 단정한 제복을 입은 병사들이 교차하는 모든 도로에서 각자의 위치를 가늠해 보고 있었다.

확실히 평소와는 다른 날이었다.

길거리는 깨끗했고, 이른 아침 행인의 옷차림도 깔끔하니 책잡힐 것이 없었다. 행여나 옷을 제대로 갖춰 입지 않은 사람이 있으면 병사들이 달려가 훈계했다. 벌금을 묻지는 않았다.

바로 아키넨의 사전 준비일이다.

콘라드 왕국의 주인이 바뀌는 날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으므로, 루티나의 시민들은 새 주인을 맞이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새로 장만한 옷을 입어보고, 떨어진 지붕을 고쳤으며, 벽을 새로 칠했다.

일개 시민들의 노고도 이리 가상할진대, 왕궁은 오죽하랴.

시민들보다 한발 앞서 준비를 시작한 왕성은 티끌만큼의 결함도 찾아볼 수 없었다. 세월에 금이 간 바닥은 하인들이 수리했다. 시녀들은 왕궁의 모든 촛대에 새 양초를 꽂았고, 등불마다 값비싼 고래기름을 채워둔 지는 오래였다.

이 모든 게 단 한 사람, 에릭 드 예리엘 왕자를 위해서였다.

귀족들이 삼삼오오 왕성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이 왕실 시종장의 안내에 따라 다음 주에 있을 예식 순서를 맞춰보는 사이 아키넨의 주인공, 에릭 드 예리엘 왕자도 자신의 동선을 체크하고 있었다.

찬란한 왕의 복식. 여름이라 얇게 제작된 의복에 금 자수가 빼곡하다. 어깨에 걸린 수 미터에 달하는 붉은 망토는 그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먼지 한 톨 없는 바닥을 매끄럽게 쓸었고, 예법관의 안내에 따라 왕의 침전(寢殿)을 향하는 왕자의 곁에는 베르크 추기경과 망토를 든 시녀들, 소수의 근위기사들이 있었다.

아카이아 제국의 예법에 따른 동선이다. 왕이 몸져누워 아키넨에 참석하지 못할 시, 후계자는 십자교회의 대리인과 함께 왕을 알현하는 시간을 가져야 했다. 왕이 정무를 볼 수 없는 상태임을 교회가 확인하고, 후계자로 인정을 받는 과정이었다.

아카이아 제국의 긴 역사에도 몇 번 있지 않았던 이 과정은 본래 성녀가 주관하는 일이었으나, 대륙이 7개 왕국으로 쪼개진 상황에서는 추기경이 이를 대리할 수밖에 없었다.

– 뚜벅뚜벅

그러나 여러 개의 홀을 지나쳐 계단을 오르고, 또 몇 개의 홀을 지나친 뒤 다시 계단을 오르는 인원은 그들 12명이 전부였다.

엄격하게 지켜져야 할 순서였으나, 오늘은 아키넨을 준비하는, 일종의 리허설을 하는 날에 불과하다. 해서 원래 귀족들도 우르르 따라와야 할 것이지만, 왕자가 아량을 베풀었다.

왕의 침전은 4층. 한 층 한 층이 높은 왕궁의 꼭대기에 있었으므로 나이 든 가주들이 고작 리허설을 위해 오르기엔 너무 높았다. 해서 오늘은 가능한 한 약식으로, 대략적인 순서만 맞춰본 뒤 조촐한 연회를 가지는 것으로 일정을 잡았다.

귀족들은 1층의 연회장에서 왕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한마디의 말도 오가지 않는 적막 속에서 이윽고 그들은 4층에 올라섰다. 몸에 좋은 향초 내음이 진동하는 그곳에는 카데릭 드 예리엘, 콘라드 왕국의 왕(王)이 십 년이 넘게 투병 중인 침소가 있었다.

“신의 축복이 있기를. 왕께서 다음 주에 의식을 되찾으시길 기원합니다만, 만약 그러지 못하시면 왕자님께서 순서를 진행하셔야 합니다. 먼저 이쪽, 왕자님께선 침상 가까이 오셔서 왕의 쾌유를 기원하시고…”

예법관이 아카이아 제국의 관례를 떠들었다. 하지만 에릭 왕자는 별로 귀담아듣지 않는 듯했다.

솔직히 왕이 일어나지 못하리란 거 누구나 안다. 혈색이 새까맣게 변색하고 썩은 듯한 악취가 십 년이 넘게 진동하는데, 왕이 이제라도 깨어날 수 있으리라고 믿는 게 우스운 일이다.

왕은 단지 베르크 추기경이 쏟아붓는 어마어마한 축복에 목숨줄을 간신히 붙들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신 다음에는 추기경님께서 왕의 용태를 확인해 주셔야 합니다. 물론, 다음 주에 추기경님께서 판단하시겠지만, 왕께서 정무를 보기 힘드실 것 같다면 그 사실을 이곳에 모인 귀족분들께…”

베르크 추기경은 예법관이 주저리주저리 고지식하게 떠드는 걸 흘려듣지 않았다. 어쨌거나 (누가 왕이 되든 간에) 그가 해야 할 일이었기에 그는 순서를 꼼꼼하게 기억해 두었고, 중간에 힐끔, 에릭 드 예리엘 왕자를 훔쳐보았다.

“다음은 돌아가신 왕비께 인사를 드리러 갈 차례입니다. 아이나스 드 예리엘 왕비님의 방에 제사상을 마련해 두었습니다. 이제 그곳으로…”

“이만하면 됐다.”

“네?”

“가서 향을 피우면 된다는 것 아니냐. 그 정도는 나도 할 줄 알고, 해본 적도 많으니 연습은 이만하면 됐다는 말이다.”

“하오나 왕자님. 아키넨을 치르는 후계자가 올리는 예법과 왕자님께서 평소에 왕비께 올렸던 예법은 다릅니다. 예리엘 왕가의 정당한 후계자로서 이제는 그분을 어머니로…”

“정당한 후계자로서? 이제는?”

에릭 드 예리엘 왕자가 예법관을 매섭게 쏘아보았다.

아차.

단어를 잘못 배치해 뱉었음을 깨달은 예법관이 찔끔 움츠러들었다. 에릭 왕자는 그를 살기 어린 눈으로 노려보다 말했다.

“내려가라. 난 옷을 갈아입고 갈 터이니 너는 귀족들에게 곧 연회가 시작될 것이라 일러라.”

“아, 알겠습니다.”

꼴도 보기 싫은 예법관이 황급히 자리를 비웠다. 에릭 드 예리엘 왕자는 저자와 마찬가지로 별로 보고 싶지 않은 더러운 주신의 앞잡이, 베르크 추기경을 향해 억지로 미소 지으며 말했다.

“베르크 추기경님, 고생이 많으십니다. 혼자 오셨어도 되는데… 사제와 성전사들을 잔뜩 데려와 주셨더군요.”

“네. 왕국의 새 주인을 맞이하는 날인데, 교회에서도 그만한 성의를 보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도 그럼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베르크 추기경이 휙 돌아섰다.

예의상 몇 마디 말이나 붙이고 돌려보내려던 에릭 왕자는 잠깐 어처구니없이 서 있다가 허! 숨을 뱉었다. 저 돈벌레가 웬일로 그냥 돌아가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평소 같으면 왕의 치료비가 어쩌고저쩌고, 돈을 한 푼이라도 더 뜯어가려 했을 터인데…

아버지를 치료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명목상 “그럼 치료를 그만둬라.”라고 말할 수는 없었기에 정말이지 짜증나는 인간이었다.

하지만 이제 내가 왕위에 오르니 눈치를 보는 것일까?

훗. 콧방귀 뀐 에릭 왕자는 끄으으윽… 피가 썩어들어가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아버지를 돌아보지도 않고 침소를 빠져나왔다. 3층, 왕자의 방으로 돌아와 시녀를 시켜 거추장스러운 망토를 떼어내고 연회복(宴會服)으로 갈아입었다. 침상에 곱게 개인 왕의 의복을 돌아본 그는 그제야 기분이 한결 나아져서 웃었다.

드디어 내가 왕이 된다.

십수 년의 노력 끝에 찾아온 달콤한 과실이었다. 타고난 혈통으로 거저 얻어먹은 결과물이 아니라.

혹자는 외할아버지인 테르탄 공작의 권력욕 덕분에 왕위 계승순위에서 앞선 레오 왕자와 레나 공주를 쫓아낼 수 있던 게 아니냐고 하겠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외할아버지, 라퍼트 테르탄 공작만큼 권력에 욕심이 없는 귀족이 드물었다. 그에게 건 매혹을 유지하느라 매달 살뜰히 모아온 신력을 쏟아부어야 했고, 왕자의 몸으로 오리아스 님께 바칠 제물을 마련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보석’이 있을 때는 잠을 자지 않아도 괜찮았기에 밤마다 남몰래 왕성을 빠져나가 제물을 구하러 쏘다녔고, 그런 생활을 십 년이 넘게 해왔다. 오로지 왕이 되기 위하여 희생한 나날이었다.

“하하하하하.”

에릭 왕자는 이젠 시녀들이 듣건 말건 웃음을 터뜨렸다.

오리아스님께서 말씀하시길, 왕위에 오르면 구태여 제물을 구하러 돌아다니지 않아도 좋다고 하셨다. 이 땅과 만백성의 주인으로서 썩어가는 모든 것에서 신력이 수급될 것이라 하셨고, 그렇게 50년만 왕으로 군림해주기를 바라셨다.

나쁠 것이 있는가.

무척 감사한 제안이었다. 소년일 적, 나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고,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최근 오리아스님께서 무슨 일인지 빨리 왕위에 오르라, 서두르셔서 일정이 더 앞당겨졌다.

그때, 푸흐흐흐흐흐흐 웃던 에릭 왕자의 웃음이 덜컥, 그쳤다.

루티나의 동쪽, 남쪽 시가지가 훤히 보이는 창가에 다가가 상쾌하니 둘러볼 생각이었는데, 창가 진열장에 놓인 어머니의 목걸이가 눈에 띄었기 때문이었다.

에릭 왕자는 어딘가 다소 맑아진 눈동자로 그 목걸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진열장에서 꺼내 들었다. 풀이 죽은 소년처럼 그걸 만지작거리더니 제 목에 걸었다.

별 이유는 없었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가자.”

자기도 모르게 옅은 한숨을 내쉰 왕자가 뒤돌아섰다. 시녀들은 돌려보내고, 근위기사들과 함께 귀족들이 기다리고 있을 1층의 연회장으로 향하였는데, 어쩐지 연회장이 고요에 휩싸여 있었다.

아무리 왕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린다지만, 백 명이 넘게 모여있을 귀족들이 조용하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에릭 드 예리엘은 이를 의아해하면서, 동시에 무언가를 조금 기대하면서 계단을 내려갔다. 그 연회장은 2층의 계단으로도 출입할 수 있었는데, 보통은 왕이 짜잔- 팡파르를 울리며 등장하는 곳이었다.

혹시 귀족들이 날 성대히 맞이하려고 조용한 것일까. ─ 기대하면서 계단의 중문(重門, 대문 안에 또 세운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곳엔 놀랍게 위를 올려다보는 귀족들이 있었다. 누가 준비했는지 기사들까지 잔뜩 도열해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으나, 그들의 시선은 내게만 쏠려있는 것이 아니었다.

역겨운 금발 머리.

황금빛 눈동자를 가진 청년과 영애의 정수리가 보였다. 그들이 뒤돌아 올려다보았을 때, 에릭 드 예리엘은 얼어붙었다.

“……이런 제기랄.”

“오라버니, 오랜만에 뵈어요. 기억은 안 나지만요.”

눈부시게 아름다운 아기씨. 에릭 드 예리엘이 어머니의 품계에 대한 자격지심으로 오래도록 꿈꿔온, 이사도라 왕가의 피를 물려받은 여인이었으나 맺어질 수 없는 여자였다.

여성임에도 그보다 왕위 계승순위에서 앞서는 그의 배다른 동생,

레나 드 예리엘 공주였다.

공주가 꾸벅, 무척이나 우아하게 인사하며 미소 짓는 가운데 착잡하게 돌아보는 청년도 있었다.

사실 공주보다는 이쪽이 에릭 드 예리엘 왕자로 하여금 욕설을 뱉게 만들었다.

왕비의 첫아들. 그것도 아카이아 제국 황족의 상징인 금발 머리와 황금빛 눈동자를 동시에 달고 태어난 데다가, 머리카락에는 예리엘 왕가를 상징하는 청색까지 섞여 외견만으로도 그는 왕위에 오르기에 적합한 후계자였다.

마음을 다잡기 전의, 어린 시절의 에릭 왕자가 자신의 머리카락 색과 눈동자 색을 얼마나 원망했었는지 모른다. 그 꼴도 보기 싫은 놈이, 왕위 계승 1순위를 가진 녀석이 눈앞에 있었다. 그것도 하필이면 아키넨을 목전에 둔 날에.

에릭 드 예리엘은 비명처럼 이놈을 당장 끌어내라고 외치려 했다. 그러나 레오 드 예리엘이 먼저 그에게 손가락질하며 명했다.

“기사들은 저 파렴치한 왕자를 붙잡아 내 앞에 무릎 꿇려라.”

“뭐, 뭣?!”

– 스르르르릉.

이백이 넘는 왕국 기사들, 심지어 근위기사들까지 검을 뽑았다. 그들의 검끝은 모조리 에릭 왕자를 향해 있었고, 에릭 드 예리엘은 정신이 멍해졌다.

이를 막아서는 귀족도 없었다.

상당수의 얼굴엔 참으려 하지만 숨기기 어려운 비웃음이 걸려 있었다. 나머지, 그의 편을 들어줬어야 할 귀족들은 기사들의 행동에 놀란 것인지, 아니면 전세를 뒤집기 어려움을 알았기 때문인지 잠자코 침묵하고 있었다.

“에릭 왕자! 무릎 꿇으십시오.”

도검의 산. 하지만 날붙이는 계단 아래에만 있던 게 아니었다.

계단 위, 에릭 왕자를 호위하던 근위기사들까지도 그의 등에 칼을 들이밀었다. 어쩐지 평소에 나를 따르는 근위기사가 아닌 다른 녀석들이 호위를 선다 했더니… 그 말인즉슨 근위기사대장까지 저놈의 편에 붙었다는 뜻이었다.

“크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에릭이 웃었다.

이렇게 된 이상 나는 더 이상 왕자라고 부를 수도 없겠구나. 하지만

“왕비에게서 태어난 게 뭐가 그리 대수라고! 좋아. 정말 대단하구나, 내 동생아! 그러나 누가 신께 선택받은 후계자인지를… 알려주겠다.”

“당장 무릎꿇으십…!!”

“오리아스(Oriax) 님이시여!”

에릭 왕자가 팔을 번쩍 들어 올렸다.

눈에서 붉은 광채가 번쩍이더니 연회장 천장에 거대한 구멍이 뚫렸다. 에릭에게 칼을 들이밀었던 근위기사들은 튕겨져 계단 아래로 떨어졌고, 그곳에 있던 모든 이들은 경악에 휩싸여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개중에 움직이는 이라곤 동생의 눈을 가리며 감싸 안는 레오와 검을 높이 치켜든 백발의 노인, 베르크 추기경뿐이었다.

“라차르 신이시여!”

연회장 한가운데, 베르크 추기경이 검무(劍舞)를 올렸다. 새하얀 주신의 신력을 사방으로 흩뿌리며.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A Princess Is Raised After Death, Desperately Making Her a Princess, Princess is Raised by Death, RPOD, The Princess Is Raised After She Dies, 正規エンディングまで異世界ループ転生, 공주는 죽어서 키운다
Score 8.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19 Native Language: Korean
Minseo was trapped in [Raise Lena]. With the emotionless text, “[Starting Raise Lena]” he became Leo and was imprisoned in an unfamiliar worl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Uh-huh?” “Leo? Why the long face? You! Are you messing with me again?” There, he met his childhood friend, Lena, skillfully picking berries. The lovely Lena. Leo marries her in a peaceful mountain village… [Lena is married! Congratulations.] [You have failed to clear Raise Lena.] [Restarting.] The happiest moment. Lena disappeared. An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Huh? Lena!” “Why have you been spacing out? And why are you looking at me like that? You wanna get beat up?” Lena, clad in thick leather armor and a sword on her shoulder, stared at him with unwavering eyes. It was a different scenar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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