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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2

22화 합류 (2)

22화 합류 (2)

테오가 와락, 나를 끌어안았다.

“옆에는 누구야? 가만. 79번이면 C조의?”

테오는 세실을 기억하지 못했다.

세실이 존재감을 숨기는 능력은 과연 대단하다.

만약 세실이 저 멍한 표정을 바꾸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는다면 카인도 알아보지 못할 거다.

“자세한 건 나중에 설명할게.”

대충 둘러댄 나는 족제비와 덩치를 돌아봤다. 그런데 나머지 조원들이 보이지 않았다.

“······고블린에게 당했어.”

테오가 비통한 얼굴로 말했다. 이제 보니 족제비의 눈은 울음으로 퉁퉁 부었고, 덩치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F조에서 살아남은 건 우리 넷뿐이다.

“조금만 쉬자. 테오.”

모두들 지쳐 보였다. 이대로 달린다 해도 제 속도를 내기는 어려울 거다.

나는 아공간에서 아스트라를 꺼냈다.

분명 몰래 꺼냈다고 생각했는데, 묘한 기척에 고개를 돌리니 세실이 고양이 같은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역시.”

세실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특별해. 너는.”

“······.”

못 들은 체하며 나는 아스트라를 다섯 조각으로 나눴다.

“우와 맛있겠다!”

족제비가 애써 환호했다. 아니, 정말로 기뻐하는 건가.

씨앗은 따로 챙겼다. 아스트라의 씨앗에는 특별한 마력이 깃들어 있다. 가지고 있으면 요긴하게 쓰일 날이 올 거다.

세실이 제 손에 들린 아스트라와 내 주머니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열매. 주머니.”

나는 조금 혼란스러웠다.

소설 속의 세실과 눈앞의 세실이 다소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카인도 소설과 다른 면이 있기는 했지만, 세실은 또 결이 달랐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세실이 왜 저러는지 알 것 같았다. 세실은 내게서 ‘그림자 도약’이라는 레이븐의 흔적을 찾았고, 그래서 마음을 열고 있다.

‘사실 나는 레이븐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데.’

아스트라를 베어 문 세실이 살짝 미소 지었다.

검댕으로 지저분한 얼굴이었는데도 순간 나는 가슴이 뛰었다. 워낙 다급한 상황의 연속이었기에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소설 속에서, 세실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외모를 지녔다는 표현이 자주 등장했다는 것을.

<대륙 제일의 세공사가 자신의 모든 신기를 불어넣어 만든 인형처럼 세실의 얼굴은 아름다웠다. 봄날의 잎새를 연상케 하는 유록빛 눈동자는 어느 전설 속의 샘물을 들여다보는 듯했다.>

심지어 무한회귀의 또 다른 주역이자, 대륙 전체에서도 손꼽히는 미녀인 ‘루나’와 ‘아리엘’마저 세실의 얼굴을 넋을 잃고 바라봤다는 대목도 있다.

‘그 때문에 독자들 사이에서는 진 히로인이라는 농담도 나돌았었지.’

애초부터 저런 뻗친 머리와 검댕으로 가릴 수 있는 미모가 아니다. 그런데도 세실은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참으로 대단한 연기가 아닐 수 없다.

나는 세실에게서 눈을 떼고 잡념을 지웠다. 이 위태로운 소설 속 세계에서 굳이 성 정체성에 혼란을 겪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그런데 문득 묘한 느낌이.

“······.”

옆을 보니 테오, 덩치, 족제비가 정지된 화면처럼 입을 벌린 채 굳어 있었다. 당연하게도 그들이 보는 대상은 하나였다.

나는 한숨을 쉬며 세실의 어깨를 쿡쿡 찔렀다. 그제야 사태를 깨달은 세실이 다시 멍한 표정을 했고, 정신을 차린 조원들은 헛기침을 뱉으며 식사에 집중했다.

***

————————

– 세실사랑: 세실이다! 세실 나왔다! ㅋㅋㅋㅋㅋ

└ 수달꼬리팡팡: 아 ㅅㅂ 간발의 차로 1등 뺏겼네

[RP가 2만큼 상승합니다.]

– 넙띠: 뭐야 이거 언제 리메함?

└ 수달꼬리팡팡: 넙띠 왔냐 ㅋㅋㅋ

[RP가 2만큼 상승합니다.]

– 딱풀전사: 데미안 검의 재능 각성!

[RP가 1만큼 상승합니다.]

– 바토리바라기: 근데 아스트레아의 천칭 나올 때마다 리메이크 훨 세지는 거 같다

└ Wkrrkalclsshadk: ㅇㅇ 지난번 기사 죽였을 때도 그랬음

[RP가 2만큼 상승합니다.]

– 연중하면개새끼: 작가ㅅㄲ 또 연중하면 집 찾아간다 그러니까 연참해라 ㅅㄱ

[RP가 1만큼 상승합니다.]

[RP가 1만큼 상승합니다.]

– 아이시테루나: 루나는 언제 나옴 ㅠㅠㅠ

[RP가 1만큼 상승합니다.]

.

.

.

숲을 달리며 나는 댓글창을 확인했다.

내용을 보아하니 균열이 소멸한 직후 한 화가 끝난 것 같다.

[현 플레이어 레벨(Lv.20)에서 스킬 발동을 위해서는 최소 20의 RP가 필요하다.]

리메이크 스킬을 발현하기 위한 RP의 최소 보유량이 20으로 늘었다.

이제는 스킬 발현에 더욱 신중해야 한다.

RP를 모으는 일은 쉽지 않다.

“조금 더 가면 군마를 묶어둔 장소가 있어.”

다행히 군마들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군마 두 마리에 사람 다섯.

몸이 가벼운 나와 세실, 족제비가 끼어 타면 어떻게든 될 것 같다.

테오 일행이 군마의 매듭을 풀고 마갑(馬甲)을 벗기는 동안, 나는 보급로에 쓰러진 두 기사의 시체로 다가갔다.

‘챙길 수 있는 건 다 챙겨야지.’

나는 기사들의 검과 단검을 풀었다. 갑옷이 탐이 나긴 했지만 우리가 착용하기엔 너무 크고, 또 눈에 띄었다.

더 가져갈 것은 없나 살피던 중 그들의 손에 끼워진 반지를 발견했다. 모양이 같은 것을 보니 쾨르다시에 기사단의 상징인 것 같다.

‘일단은 챙겨두자.’

두 개의 반지를 아공간에 넣은 나는 조원들과 무기를 나눈 뒤 군마에 올랐다.

내가 가장 앞에 앉았고, 그 뒤로 세실과 족제비 순으로 앉았다. 족제비가 뒤로 떨어질 것 같다며 구시렁댔다.

이히힝!

두 마리의 군마가 보급로를 달렸다. 어둠에 물든 숲은 음산했다. 나는 미니맵과 먼지의 기척에 신경을 집중했다. 살아남은 기병이 있을지 모른다. 어쩌면 기사도.

한참을 달려도 추격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생존자는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안심할 수 없다.

‘에티엔이 죽었어. 쾨르다시에 남작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범인을 잡으려 할 거야.’

현 쾨르다시에 가문의 가주인 ‘루이스 쾨르다시에’는 에티엔의 아버지다.

또한 에티엔은 쾨르다시에 가문의 후계자이자, 소드마스터다.

‘남작은 범인을 잡기 전까지는 결코 추격을 멈추지 않겠지.’

그간 알아낸 정보를 취합해, 나는 이 숲이 오를리안 왕국의 어디쯤인지 짐작했다.

아울러 나는 광산을 탈출한 뒤의 목적지도 정해 두었다.

‘페르디나.’

페르디나는 오를리안 왕국의 남동쪽 끝단에 위치한 용병 도시다.

내가 페르디나로 가려는 가장 큰 이유는, 그곳이 치외법권의 성격을 띤 독립 도시이기 때문이다.

‘페르디나에는 용병, 상인, 모험가뿐만 아니라 살인자나 정치범까지도 몰려들지.’

페르디나는 마치 작은 국가처럼 운영된다.

지리적으로는 오를리안 왕국에 속해 있지만, 정치적으로는 완전히 독립된 자치구다.

그곳의 지배 세력인 ‘페르디나 평의회’는 쾨르다시에 가문의 추격대가 도시를 들쑤시는 상황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소설에서 카인이 한동안 머무른 곳이기도 하고.’

소설 초반에 카인이 몸담았던 용병단은 페르디나를 주요 거점으로 활동했다.

따라서 내게는 페르디나에 대한 지식이 있다. 지금의 카인은 알지 못하는.

‘일단 페르디나에 도착하기만 하면 돼. 그러면 한숨 돌릴 수 있어.’

그때까지는 위험한 강행군을 해야 한다.

다행인 점은 일행에 세실이 포함됐다는 거다.

물론 영원하지는 않겠지. 세실은 내가 카인을 찾을 것이라 기대하며 합류한 거니까.

“데미안! 숲이 끝이 보인다!”

마침내 우리는 끝도 없이 이어질 것 같았던 숲을 벗어났다. 동녘 하늘에는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나는 잠시 멍하니 그것을 바라봤다.

“······서, 성공이야! 탈출에 성공했어! 우리가 탈출에 성공했다고 테오!”

족제비가 소리쳤다.

덩치가 우우우! 포효했고, 테오는 환히 웃는 얼굴로 나를 돌아봤다.

“녀석들도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그랬으면······ 만약 그랬으면······ 흐흑······! 흑······!”

족제비가 울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것에 신경 쓸 수 없었다.

[튜토리얼 시나리오가 종료됩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뜬금없는 메시지와 함께 레벨이 세 단계나 올랐다.

그뿐 아니라 그 아래로 계속 메시지가 떠올랐다.

“잠시 쉬었다 가자. 말들도 지쳤을 거야.”

마침 가까운 곳에 냇물이 흐르고 있었다.

지친 군마들이 물을 마시고 풀을 뜯는 동안 나는 풀밭에 앉아 메시지를 확인했다.

[아공간(Lv.1)이 2레벨로 진화합니다.]

[아공간이 커졌습니다.]

주머니 속의 먼지가 방방 꼬리를 휘둘렀다.

나는 씩 웃으며 먼지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잘 되었다. 안 그래도 공간이 부족하다고 여겼었는데.

[미니맵(Lv.3)이 4레벨로 진화합니다.]

[이제부터는 리메이커에게 우호적인 대상도 미니맵에 표시할 수 있습니다.]

‘오.’

우호적 대상을 미니맵에 띄워봤다.

떠오르는 표식은 넷.

테오, 덩치, 족제비, 그리고 세실이었다.

신기했다. 소설 속에서는 카인의 심복이 되는 세실이 내게 우호적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

[통찰(Lv.2)이 3레벨로 진화합니다.]

[리메이커에게 우호적인 대상에 한해 통찰의 위력이 증가합니다.]

나는 바로 세실에게 통찰을 시전했다.

————————

◎ 세실■■ 블레오파드 [14세], [Lv.47]

◎ 속성: [그림자]

◎ 특성: [침착함], [■■■], [발달된 감각], [의존적], [애착적], [강박적], [기만적], [밤눈], [■■■], [■■■], [잠입], [■■■ ■■■]

◎ 적성: [검술 Lv.3], [단검술 Lv.5], [■■ Lv.3], [■■ Lv.2], [■■■ Lv.2], [■■■ Lv.2], [투척술 Lv.5], [승마술 Lv.3]

◎ 일반 스킬: [은신 Lv.3], [■■ Lv.3], [매복 Lv.4], [■■ Lv.3], [절삭 Lv.5], [■■■■ Lv.3], [■■ ■■ Lv.2]

◎ 전용 스킬: [트리플 블레이드 Lv.6(봉인)], [그림자 결속 Lv.4], [그림자 걸음 Lv.3], [그림자 도약 Lv.4]

————————

과연 세실의 스테이터스는 이전보다 많은 내용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드러난 레벨은 47.

하지만 실질적인 레벨은 50 이상일 거다.

‘속성은 역시 그림자.’

의아한 것은 이름 옆에 붙은 두 개의 검은 사각형이었다.

◎ 세실■■ 블레오파드

‘세실’은 줄여 부르는 애칭이었던 건가?

하긴, 테오의 진짜 이름은 ‘테오도르’고, 족제비는 조가 아니라 ‘조아킴’이었으니까.

그럼에도 쉬이 납득이 가지 않았다. 무한회귀를 셀 수도 없이 정주행한 내가 세실의 진짜 이름을 몰랐다니.

‘뭐, 어차피 중요한 것도 아니고.’

특성란을 살펴보자 눈에 띄는 두 가지 항목이 있었다.

[의존적]

[애착적]

앞서 드러났던 ‘강박적’과 더불어 세실의 숨겨진 성격을 잘 드러내는 특성이다.

저 특성들 탓에 소설 속 세실이 죄책감의 대상인 카인에게 의존하고, 애착을 넘어 집착했던 거니까.

[트리플 블레이드 Lv.6(봉인)]

스킬란을 본 나는 깜짝 놀랐다.

세실이 이 시점에 ‘트리플 블레이드’를 가지고 있었을 줄이야.

블레오파드만의 독창적인 무기인 ‘블레이드’는 기사의 오러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기사는 마력을 오러로 변환시켜 검에 깃들이지만, 블레오파드는 그림자의 힘, 즉 ‘영력(影力)’을 손끝으로 집약해 어두운 검의 형태로 발현한다.

‘하지만 봉인 상태.’

누군가 임의로 스킬을 봉인하지는 않았을 거다. 그것이 가능한지도 의문이고.

아무래도 소중한 이의 죽음으로 찾아든 세실의 후유증은 언어적인 측면만이 아닌 것 같다.

“왜. 봐.”

시선을 느낀 세실이 고양이 같은 표정으로 다가와 내 옆에 앉았다.

나는 조각처럼 빛나는 세실의 얼굴을 보다가 문득 말했다.

“그때는 고마웠어. 세실.”

“······?”

“소드마스터의 공격으로부터 나를 구해준 거.”

당시에는 몰랐지만, 에티엔에게 단검을 던져 내 목숨을 구한 것은 세실일 터였다.

물론 따지고 보자면 내가 아닌 카인을 구하기 위해서였겠지만.

“소드. 마스터?”

“소드마스터가 나와 카인에게 오러를 발현하려 했을 때 네가 도와줬잖아. 단검을 던져서.”

세실의 얼굴이 굳어졌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세실의 눈을 보며 나는 덜컥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에티엔의 공격으로부터 나와 카인을 구한 것은 세실이 아니다. 그렇다면 누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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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Status: Ongoing
The protagonist, an infinite regressor, found himself possessed within a novel where the original protagonist had gone mad and turned dark. Now, with my unique abilities, I must write a new ending for the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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