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Chapter 221

220. 거지남매 – 풍선

성 밖이 웅성인다. 반면 왕성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고요에 휩싸여 있었다. 긴장감과 기대감. 그 속에서 간단한 조찬을 먹은 왕자는 방으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었다.

쉬라인 고딕 테페스트리 (shrine gothic tapestry). 이 시대 신사를 위한 최고의 직물이다.

푸른 벨벳이 매끄러운 광택을 빛냈고, 그 위로 새겨진 자수가 화려하다. 레오가 금자수로 빽빽한 소맷부리를 잠그는 사이, 시녀들이 그의 어깨에 숏 케이프(short cape)를 걸쳐주었다.

숄더 로빙이다. 왕자는 자연스럽게 허리를 세우고, 가슴을 폈다. 그래야 하는 옷이고, 그래야 하는 날이다.

– 아키네.

레오가 예리엘 왕가의 공식적인 후계자로 선언되는 날이었다. 그가 당당한 걸음걸이로 3층 방을 나서는 사이, 2층의 공주도 채비를 갖췄다.

아름다우신 줄은 알고 있었지만. 시녀들은 감탄했다.

시폰(shiffon)을 소재로 한 하이얀 벨라인-드레스가 하늘거렸다. 투명하고 광택이 없는 그 가벼운 원단 위로 잎사귀 모양이 한겨울에 흩날리는 눈꽃처럼 빼곡한 레이스가 덮였다. 공주의 잘록한 허리를 줄기 친 가지들이 뒤덮고, 완만히 올라서는 가슴 곡선을 따라 나뭇잎이 무성했다.

V자, 깊이 파인 드레스.

뜸해지는 하얀 잎 사이로 드러난 가슴골이 연하다.

그 뽀얗고 부드러운 살결을 따라 시선을 올리면 오목하게 패인 쇄골이 아름답고, 긴 턱선의 유려함에 마른침을 삼키게 된다.

고귀한 공주님.

그녀의 하얗고 단단한 피부에 눈이 멀었다면, 연지 바른 붉은 입술에 눈길이 닿았을 때는 사랑에 빠진다.

가지런히 하얀 치아와 겨울 아침 눈밭처럼 새하얀 뺨, 그사이에 활짝 핀 붉은색을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그 강렬한 감정마저도 그녀의 눈동자와 마주쳤을 때는 맥없이 사그라들겠지만.

번쩍이는 황금빛. 시녀들은 감히 레나를 올려다보지 못했다. 가을 하늘 찬란한 노을처럼 빛나는 눈동자가 그녀를 정의했다.

아름답기만 한, 그저 예쁘디예쁜 공주가 아니다. 만인을 지배하는 왕족의 위엄이 그녀를 감싸고 있었다.

그대가 감히 눈을 들어 공주의 가슴골과 턱선을 훔쳐봤다면, 붉은 입술에 마음을 빼앗겼다면, 이제는 고개를 조아릴 시간이다. 허리까지 찰랑이는 금발 머리카락, 그 끄트머리만이 그대가 용기 내어 훔쳐보아도 좋을 것이었다.

또각. 그리고 뚜벅.

2층 침묵의 홀에서 왕자와 공주가 만났다. 레오 드 예리엘은 동생을 잠시 멀거니 바라보았다.

부쩍 커버렸구나. 핏덩이 같던 내 동생이, 이젠 숙녀가 다 됐구나.

열댓의 시녀들을 뒤로하고 당당히 앞선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어 줄 수 없었다. 다 커서 홀로 선 동생의 모습이 왠지 서글프다.

가슴으로 저릿한 통증을 느끼며 레오가 손을 뻗었다. 레나는 옅게 웃으며 오빠의 손에 손을 올렸다.

왕족의 후계자 수여식, 아키네는 아키넨과는 순서가 반대다. 레오는 레나를 이끌어 왕성의 가장 낮은 곳을 향했다.

오늘만큼은 깔끔이 차려입은 부엌데기들이 고귀한 왕자와 공주를 맞았다. 수백 필의 말이 깨끗이 씻겨진 마구간에선 마구간 지기들이 황송히 손을 모았고, 푸르른 잎이 돋아난 정원에선 정원사들이 허리를 굽혔다. 공주와 왕자도 같이 고개 숙였다.

왕성에서 일하는 이들과 인사를 나누는 것.

이것이 아카이아 제국 황실이 정한, 왕위에 오를 후계자가 행할 첫 번째 일이었다. 그들은 그들의 후손들이 가장 천한 이들과 눈높이를 같이한 뒤에 위로 올라가기를 바랐다.

왕궁 곳곳을 돌아다닌 레나와 레오가 그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연병장이었다.

궁을 지키는 사람들.

근위병들이 도열하고, 근위기사단장과 제1 기사단장이 선두에 서서 왕자와 공주를 기다리고 있었다. 삼엄히 굳은 대열 앞에서 레나와 레오는 인사했다.

“전원- 발검(拔劍)!”

“충! 성!”

왕자와 공주가 뒤돌아섰을 때, 기사와 병사들이 검을 뽑아 하늘로 치켜들었다. 아침 햇살이 반짝- 검에 비치는 가운데 그들의 눈도 반짝여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었다.

꼭 하지 않아도 될 예식이다.

그러나 계단을 오르던 레오는 쿡 찌르는 동생의 팔꿈치를 느끼곤 뒤돌아섰다. 그네들이 바라는 대로 검을 뽑아 높이 치켜들었다.

오러블레이드.

이걸 보여달라고 떼를 쓴 것이다. 레오는 부족한 마나를 긁어모았고, 병사와 기사들은 환호했다.

순진할 정도로 무(武)를 숭상하는 이들이다. 반면 이윽고 다다른 계단 위, 정문에는 왕국의 문(文)을 상징하는 관료들이 있었다. 왕자와 공주 앞으로 나온 예법관이 모든 관료를 대표해 외쳤다.

“카데릭 드 예리엘 재위(在位) 21년, 콘라드 왕국의 후계자께 백관(百官)이 인사드리옵니다. 왕의 남은 통치 아래 백성의 어려움을 굽어살펴 왕께 간언하시고 정도(正道)를 지키는 성군으로 성장해 주소서!”

형식적이지만, 여기서 관료들의 인정을 받지 못하면 정문은 열리지 않는다. 레나와 레오는 이곳에서 자신의 포부를 밝혀야 했다. 두 사람은 각기 고운, 당당한 목소리로 답했다.

“백성이 배곯지 않고, 화목한 가정을 꾸릴 수 있게 하겠어요.”

“백성이 배곯지 않고, 교육받을 수 있는 왕국을 만들겠습니다.”

그제야 문이 열렸다. 금과 은으로 장식되고, 화려한 양탄자가 깔렸으며, 샹들리에가 온통 천장을 가린 전당이 펼쳐졌다. 그곳에서 귀족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른쪽에는 미디언 테르탄 공작을 선두로 한 테르탄 공작가의 파벌이, 왼쪽에는 데니스 아르네 후작을 선두로 한 신(新) 왕당파가 각자의 품계에 맞춰 자리해 있었다. 왕자와 공주가 입장하자 악사들이 음악을 연주했고, 레나와 레오는 각 가문의 가주들과 인사를 나눴다.

예리엘 왕가도 콘라드 왕국을 이루는 가문 중 하나다. 왕국을 대표하는 가문으로서 공경받을 뿐이고, 레오와 레나는 가주가 아닌 후계자였으므로 이곳에 있는 이들과 (원론적으로 보았을 때) 동등한 위치로 취급받았다.

해서 이곳은 오직 충성만을 바쳤던 여태까지의 과정과는 달랐다.

전당의 분위기는 다소 풀어져 있었고, 누가 건배사를 제의할 것인가, 아르네 후작과 테르탄 공작이 신경전을 펼치는 가운데 시녀들이 술과 음식을 날랐다. 모두의 손에 크리스탈 술잔이 쥐어졌을 무렵, 후작이 잔을 들었다.

“예리엘 왕가의 두 후계자께 권하옵니다. 대대손손 이어진 왕가의 영광을 빛내시고, 명예로운 가문들과 화합해 대업을 꿈꾸십시오! 후계자님들의 앞길에 명예와 영광, 축복이 있기를!”

“명예가 있기를!”

“영광이 있기를!”

귀족들은 각자가 바라는 후렴구를 후창했다. 흥겨움과 떠들썩함, 그러나 날 선 거래가 은밀하게 오가는 사이를 왕자와 공주가 가로질렀다.

그때, 다음 차례를 위해 계단을 향하던 그들을 크세니아 모나크가 가로막았다.

“왕자님. 설마 절 잊으신 건 아니시겠죠?”

“하하하. 그럴 리가요.”

아키네를 치르는 후계자에게 짝이 있으면 이 자리에서 공표하는 게 관례다. 없는 경우 즉석에서 구애를 받기도 했는데, 왕자와 모나크 남작 대리가 연을 맺었다는 건 이미 알려질 대로 알려진 사실이었다.

레오는 잠시 레나의 손을 놓고 크세니아의 허리를 감쌌다. 이 사람이 나의 반려가 될 사람이오, 귀족들에게 인사하는 사이 레나는 그 모습을 우두커니 지켜보고 있었다.

몇몇 젊은 귀족이 다가와 레나에게 춤을 청하였으나, 그녀는 상냥히 미소 지어 돌려보냈다.

크세니아와 헤어지고, 레오가 다시 동생의 손을 붙든 건 2층 계단 위에서였다. 예리엘 왕가의 왕족들에게 크세니아를 소개한 뒤, 레나와 레오는 더 높이, 3층 어머니의 방을 향했다. 돌아가신 왕비께 향을 올리고 우르르 따라오는 귀족들과 함께 왕의 침전을 향했다.

이것 또한 원래는 없어야 하는 과정이다.

귀족들과 인사한 다음에 왕과 왕비가 왕족들을 이끌고 후계자를 맞이해야 할 것이었으나 왕비는 죽고, 왕은 몸져누웠기에 이런 과정이 추가되었다.

“신께서 그대들을 축복하시길.”

베르크 추기경이 4층, 왕의 침전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잠시 성호를 그으며 왕자와 공주를 위한 축복의 기도를 올렸고, 4층까지 따라 올라온 이들은 저린 다리를 쉬일 수 있었다. 이윽고 추기경이 말했다.

“왕께서 기다리십니다.”

놀라움이 번졌다.

왕이 깨어났다고? 그럼 어떻게 되는 거야? 성급한 속삭임을 일축한 베르크 추기경이 문을 연 순간, 메시지가 떠올랐다.

[ 업적 : 왕 4/7 ]

“레오 드 예리엘 왕자님과 레나 드 예리엘 공주님께서 알현을 청하옵니다.”

시종장에게 설명을 듣고 있는 왕.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었는지 청색 머리칼이 부스스한 그는 십 년이 넘게 저주에 시달리던 카데릭 드 예리엘이었다. 그는 남색 눈동자를 들어 훌쩍 자란 왕자와 공주를 맞았다.

“내 아들아, 딸아… 이리 오너라.”

혈색을 되찾았으나 비쩍 마른 왕이었다. 회한이 어린 눈으로 장성한 아들딸을 바라보던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키네라니. 너희가 고생이 많았다고 들었다. 이리… 더 가까이 오겠느냐?”

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다.

의심투성이. 강박적일 정도로 경계심이 짙어진 레오는 아버지를 훑어보았다. 여태껏 아무 사건도 터지지 않은 것조차 믿지 못하겠다.

그러나 이 빠짝 마른 노인이 위협이 될 것 같지 않았고, 예상이 적중했다. 왕은 왕자와 공주의 손을 잡고 원통해 할 뿐이었다.

“날 용서해라. 몹쓸 병에 걸려 너희를 고난에 빠뜨렸구나.”

“…아닙니다.”

“아니기는… 아름답게 자랐구나. 어머니를 꼭 닮았어. 그런데 왜 시종장이 너희들의 이름을 달리 부르는 것이냐? 레안, 레리아나. 이름을 바꾸었느냐?”

[ 업적 : 귀속 아이템 2/3 ]

[ 검 – 파괴되지 않음. ]

[ 거울 – 이용 불가. ]

[ 목걸이 – 예쁜 목걸이다. ]

아무도 느끼지 못했겠지만, 레안은 공기가 파앙! 터져나가는 걸 느꼈다. 그를 중심으로 돌풍이 몰아쳤고, 시종장과 베르크 추기경, 귀족들을 포함한 세상의 모든 이들이 에릭 왕자에게 쫓겨났던 왕자와 공주의 이름을 잊어먹었다. 그건 아들딸의 진명을 뱉은 왕도 마찬가지였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왕자님과 공주님의 이름을 잘못 말씀드렸습니까?”

“아니다. 내가 정신이 하나도 없구나. 왕위를 빨리 물려주어야겠어… 날 일으켜다오.”

“아직은 힘에 부치실…”

“어서. 가주들께서 보는 앞에서 누워있을 수만은 없지 않으냐. 아, 변경백님들. 오랜만에 뵙소이다. 테르탄 공작과 아르네 후작은 오지 않으셨나 보오?”

“…테르탄 공작과 아르네 후작은 작위를 물려주었습니다. 미디언 테르탄 님이 공작 각하이시고, 데니스 아르네 님이 후작이십니다. 그리고 미디언 테르탄 공작님께선 서부 변경백 자리를 내려놓으셨습니다.”

“…이런. 실례했소.”

못 볼 꼴을 보인 왕이 허탈하게 웃었다. 힘겹게 몸을 일으켜 왕자와 공주의 손을 잡으며 선언했다.

“이들을 후계자로 인정하는 바요. 가주들께서는 부디 내 아들딸을 잘 보필해 주시오. 국정은… 앞으로 레안 드 예리엘 왕자가 이끌 것이며, 차차 모든 권한을 양도하겠소.”

뼈밖에 남지 않은 손이 레리아나와 레안의 손을 힘껏 움켜쥐었다.

기억도, 추억도 없는 아버지였지만 레안은 그의 미안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레리아나도 그리 생각했는지 표정이 묘했다. 계단을 내려오는 길, 동생은 아버지께 붙잡혔던 손을 만지작거렸다.

“오빠.”

“왜?”

“…아니야.”

웅성거리는 귀족들을 이끌고 레안과 레리아나는 왕궁을 나왔다. 연병장의 기사들이 왕자와 공주를 호위하였고, 이내 왕성 정문이 열렸다. 우레같은 환호가 광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왕자님이시다! 레안 드 예리엘 왕자님 만세!!”

“콘라드 왕국 만세! 레리아나 공주님도 만세!”

아키네의 마지막 차례, 왕국민들에게 인사하는 시간이었다. 레안 드 예리엘 왕자와 레리아나 드 예리엘 공주가 손을 흔들자 와아아아아아! 광장에 모인 인파의 함성이 루티나를 날려버릴 듯했다.

레안은 잠시 그 함성을 온몸으로 받았다. 오르빌의 거지로 시작해 드디어… 그러나 그는 금방 동생에게로 관심을 돌렸다.

“레나… 아니, 레리아나야. 우리가 여기까지 왔어. 이젠 여기가… 우리가 살아갈 곳이야.”

“우리가 살아갈 곳…”

동생도 무척 감격스러운지 가슴에 손을 얹고 숨을 고르고 있었다. 백성들과 왕성을 번갈아 보던 그녀는 활짝 미소 지었다. 눈물이 또르륵 흘러내렸지만, 미소가 더 진했다.

“그래. 여기가 내가 살아갈 집이야. 오빠랑 평생, 행복하게…”

“뭐라고?”

– 쿵짝쿵짝!

축제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시끄러운 풍악이 울렸다.

왕자와 공주는 여덟 필의 백마가 끄는 마차에 올라 루티나를 한 바퀴 행진했고, 기분 좋은 혼란 속에서 예법관이 선언했다.

두 사람이 공식적인 후계자가 되었다는 선언. 이와 함께 레안의 시야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다소 늦게 찾아온 엔딩이었다.

혹시 레나가 공주가 되는 게 엔딩이 아닌 건 아닐까, 방심한 레안이 동생의 손을 급히 움켜쥐었다. “행복해야 해.” 인사하려 했으나, 그의 시야는 풍선처럼 날아오르고 있었다.

돌아보는 자신과 동생의 정수리가 보인다. 레안은 평소와는 달리 어두워지지 않고 둥실둥실 멀어져가는 동생을 향해 손을 있는 힘껏 뻗어보았지만, 그럴 수 있는 손이 없었다.

그리고 동생을 더는 구별해낼 수 없을 만큼 날아올랐을 무렵, 넓은 광장을 가리며 메시지가 떠올랐다.

[ 축하합니다! ]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A Princess Is Raised After Death, Desperately Making Her a Princess, Princess is Raised by Death, RPOD, The Princess Is Raised After She Dies, 正規エンディングまで異世界ループ転生, 공주는 죽어서 키운다
Score 8.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19 Native Language: Korean
Minseo was trapped in [Raise Lena]. With the emotionless text, “[Starting Raise Lena]” he became Leo and was imprisoned in an unfamiliar worl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Uh-huh?” “Leo? Why the long face? You! Are you messing with me again?” There, he met his childhood friend, Lena, skillfully picking berries. The lovely Lena. Leo marries her in a peaceful mountain village… [Lena is married! Congratulations.] [You have failed to clear Raise Lena.] [Restarting.] The happiest moment. Lena disappeared. An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Huh? Lena!” “Why have you been spacing out? And why are you looking at me like that? You wanna get beat up?” Lena, clad in thick leather armor and a sword on her shoulder, stared at him with unwavering eyes. It was a different scenario.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