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Chapter 23

23화 한밤중의 손님 (1)

23화 한밤중의 손님 (1)

우리는 다시 말을 달렸다.

‘서둘러야 해.’

머릿속이 복잡했다. 나는 세실을 처음 본 순간, 그 정체불명의 그림자가 세실이었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자는.

직감처럼 무언가가 떠올랐다.

‘암영.’

암영(暗影).

아스트레아 대륙에서 가장 비밀스러운 살수 집단.

<그들은 자신을 ‘암영’이라 불렀다. 스스로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그들이 암영인지 몰랐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들을 만난 자는 반드시 죽고 말았으니까.>

세실은 암영에서 매우 특별한 위치의 살수였다.

비록 지금은 도망자 신세가 되어 그들의 추격을 받고 있지만.

‘그런 세실조차 눈치를 채지 못했어.’

그것만이 아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에티엔 역시도 단검이 투척되기 전까지는 그자의 존재를 몰랐던 것 같다.

소드마스터에게 기척을 감출 수 있는 실력자. 게다가 그런 실력을 갖추었음에도 세실을 습격하지 않은 암영의 살수라고?

‘아니야. 암영이라면 세실을 내버려 둘 리 없어.’

“데미안! 저길 봐!”

나는 테오가 가리키는 곳을 봤다. 마차 한 대가 널브러져 있었다. 용병으로 보이는 사내들도 죽어 있다.

우리는 군마에서 내려 상황을 살폈다. 두 용병 말고는 시체가 보이지 않는다.

‘용병이 아니라 도적이었나.’

용병으로 고용되었다가 본색을 드러낸 것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마차를 습격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다른 사람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저들은 마차의 주인을 죽이고 버린 듯하다. 그러고는 훔친 마차를 타고 이동하다가 누군가에게 습격당했다.

‘카인.’

나는 범인이 카인이라고 확신했다.

다른 도적이 일을 벌인 것이라면 멀쩡한 말 두 마리를 두고 갔을 리 없으니까.

“쓸만한 물건을 찾아보자.”

돈이 될 만한 물건은 모두 카인이 쓸어간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마차 안에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물건을 찾았다. 옷과 담요.

우리는 각자의 몸에 맞는 옷을 골랐다. 세실이 멍하니 서 있었기에 내가 적당한 옷을 골라 주었다.

“이게 좋겠어.”

나는 입고 있던 옷을 벗고 물 묻은 천으로 대강 몸을 닦은 뒤 새 옷을 입었다. 테오, 족제비, 덩치도 옷을 갈아입었다. 그런데 그때까지도 세실은 내가 쥐여준 옷을 들고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얼른 갈아입어 세실.”

“이따가.”

“언제 추격대가 올지 몰라. 서둘러 이곳을 벗어나야 해.”

침묵하던 세실이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마차를 끌던 말들의 상태를 살폈다. 다친 곳은 없어 보였기에 타고 가도 될 듯했다. 우리 일행은 모두 승마술 적성을 가지고 있다.

“79번이 광산에 있었다는 사실은 우리만의 비밀로 하자.”

세실이 없는 틈을 타 일행에게 속삭였다. 나는 세실의 정체가 발각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특히 카인에게는.

잠시 후 세실이 마차에서 나왔다. 일행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세실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깨끗해진 얼굴에 깔끔한 옷. 찰랑거리는 긴 머리칼에서는 반짝반짝 윤기가 흘렀다.

“지금 모습은 너무 눈에 띌 것 같은데.”

“어째서.”

나는 세실의 머리를 살짝 헝클어뜨렸다.

광산이 아니니 검댕을 바르는 건 오히려 눈에 띌 테고, 그렇다고 옷을 더럽히는 것도 좋은 방법은 아니었다.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저 반짝이는 머리를 조금 평범하게 만드는 정도겠지.

“이제 됐어.”

화난 고양이 같은 얼굴로 내가 하는 짓을 지켜보던 세실이 냉큼 손을 뻗어 내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머리. 눈에 띄어.”

“그래?”

“예쁜. 금발.”

“예쁜 금발?”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껏 거울을 본 적이 없으니 내 머리가 어떤지 잘 몰랐다.

하긴, 조원들도 나를 금발 약골이라 불렀었지. 빌어먹을 털북숭이도 금발에 묘한 집착을 보였었고.

“잠깐만.”

나는 다시 마차를 뒤져 모자 두 개를 찾아냈다. 이렇게라도 세실과 내 머리를 가리는 편이 좋을 것 같다.

그러자 족제비도 어디서 우스꽝스러운 모자를 찾아 썼고, 그 모습을 본 테오가 배를 쥐며 웃자 울상이 되어 모자를 벗었다.

우리는 여분의 옷과 담요를 챙겼다.

“출발하자.”

테오, 족제비, 덩치는 이제 각자의 말을 몰았다.

나는 세실과 함께 말을 탔다.

“세실.”

등 뒤의 세실에게 속삭였다.

“미리 말해두겠는데, 나는 당분간 카인을 찾을 생각이 없어.”

“······.”

나는 세실에게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카인을 찾아 주겠다고 거짓말을 해 봐야 장기적으로 좋을 게 없다는 판단이 들어서였다.

“너는 카인을 찾아 떠날 거야?”

“······나중에.”

“나중에 언제?”

“묻지. 마.”

다행이었다.

세실이 당장 떠나지 않는 것만으로도 일단 안심이다.

“어디로. 가?”

세실이 물었고, 나는 일행에게 말머리를 붙였다.

그러고는 모두에게 들리도록 말했다.

“페르디나로 갈 생각이야.”

나는 페르디나에 대해 일행에게 설명했다. 왜 그곳으로 가야 하는지, 그곳에 도착하면 어떤 긍정적인 일이 있는지.

내 말이 이어질수록 테오와 족제비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런데 덩치의 반응이 묘했다. 무언가를 골몰히 생각하는 표정.

머지않아 우리는 깎아지른 듯한 벼랑으로 양옆이 막힌 협곡을 달리게 되었다. 주위를 살피던 나는 말을 멈춰 세웠다.

“데미안?”

“잠깐만. 테오.”

리메이크 스킬을 사용해 길을 막아볼 생각이었다. 지난 회차에서 거목을 쓰러뜨렸을 때처럼 암석을 무너뜨리면 되겠지.

나는 벼랑을 향해 팔을 뻗었다.

[리메이크를 시전합니다.]

.

.

.

[리메이크 시전이 취소됩니다.]

[발현 범위가 시전자의 능력을 초월했습니다.]

뭐라고?

[해당 리메이크를 발현하려면 더욱 향상된 조건이 필요합니다.]

나는 리메이크 스킬 발현에 영향을 주는 세 가지 요소를 떠올렸다.

[아스트레아의 천칭]

[플레이어 레벨]

[RP]

이 중에서도 나는 ‘아스트레아의 천칭’에 주목했다.

그동안 아스트레아의 천칭 메시지가 떠오른 상황은 세 번이다.

‘카인과 처음 전투했을 때. 기사를 죽이기 위해 거목을 쓰러드렸을 때. 마석 단검을 라이프 스톤 검으로 변환시켰을 때.’

그때의 나는 각각 어떤 의식 상태였지?

첫 번째의 나는 카인에게 이입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카인이 실제가 아닌, 소설 속 인물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인지했다.

두 번째와 세 번째는 달랐다. 나는 조원들을 구하기 위해, 그리고 이 세계에 위협이 될지 모를 균열을 막기 위해 움직였다. 즉, 그때의 나는 이 세계를 현실처럼 인지했던 것 같다.

그렇다는 것은.

‘이 세계를 현실로 인지할 때 리메이크의 힘이 강화되는 건가.’

단언할 수는 없다.

첫 번째 아스트레아의 천칭 메시지가 떠올랐을 때도 나는 통찰 스킬을 개화하며 능력의 향상을 경험했으니까.

그렇다면 정답은 무엇일까.

지금의 나는 답을 내릴 수 없었다.

***

며칠이 지났다.

우리는 초원을 달리고, 나무 열매를 따 먹고, 으슥한 곳에서 쪽잠을 자며 이동을 계속했다.

추격대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 점을 다행스러워하면서도 의아하게 여겼다.

‘우리의 흔적을 찾지 못한 걸까.’

그럴 가능성도 있겠지만 낙관할 일은 아니다. 흔적을 찾지 못했다면 병력을 쪼개서라도 움직이겠지.

‘이대로는 위험해.’

우리의 승마술은 서투르다. 게다가 나는 에티엔에게 단검을 던진 자의 정체를 알지 못한다.

그것과 관련해 세실과 이야기한 적이 있다. 나는 레이븐에게 들은 것처럼 꾸며 암영을 언급했다.

세실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가장 유력한 후보는 암영(그중에서도 블레오파드)이지만, 그럼에도 자신을 공격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가장 가능성 없는 후보로도 여기는 듯했다.

‘이야기. 해줘.’

‘무슨 이야기?’

‘레이븐.’

세실은 종종 레이븐에 관해 물었다. 나는 내가 아는 지식을 활용해 적당히 세실의 물음에 답했다. 그때마다 세실은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가 돌연 우울한 얼굴을 하기도 했지만.

“정말 그 길로 가자고 데미안? 굳이 말을 버리고?”

“왜 그래야 하는데! 나, 나는 싫어! 테오! 네가 뭐라고 말 좀 해 봐!”

테오가 놀라 물었고, 족제비는 울상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말을 버리고 늪지를 통과하자고 일행에게 제안했다.

“추격대 안에는 우리가 페르디나로 갈 것이라 예상하는 자도 있을 거야. 하지만 그들에게 우리는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해. 설마 말을 버리고 늪지로 들어갈 거라고는 생각지 못할 거야.”

나는 ‘카론 늪지’에 그리 위험한 몬스터가 있지 않다는 것을 안다.

아울러 그곳에는 손에 넣고 싶은 특별한 물건도 있다.

“말에서 내려. 조.”

“하, 하지만 테오······!”

우리는 며칠간 함께했던 말을 마지막으로 쓰다듬었다. 군마들은 알아서 집으로 돌아갈 거다. 나머지 말들은 군마를 따라 움직이겠지.

멀어지는 네 마리의 말을 우리는 한동안 바라봤다.

***

[‘드림 위스퍼’를 채집했습니다.]

◎ 드림 위스퍼

[늪지에서 자라는 달달한 향을 가진 보라색 약초.

섭취하면 수면을 유도해 준다.

다른 약초와 배합하면 다양한 효과의 약을 만들 수 있다.

과도하게 섭취할 경우, 장시간 무의식 상태에 빠질 수 있다.]

카론 늪지에 들어서고 닷새가 지났다.

계절이 바뀐 것처럼 공기가 뜨겁다. 더운 습기가 온몸에서 땀을 흐르게 했고, 축축한 진흙에 수시로 발이 빠졌다. 벌레들은 이곳이 마치 자신들의 왕국인 양 우리에게 덤벼들었다.

“이잇! 저리 가! 벌레 새끼들!”

족제비가 투덜거렸다.

어김 없이 낮이 저물어 갔고, 우리는 노숙할 장소를 찾았다.

바위와 야생 풀로 둘러싸인 봉우리는 늪지 안의 작은 섬 같았다. 일행이 바위를 정리해 앉거나 누울 곳을 만드는 동안 나는 불을 피웠다.

늪지에 들어설 것을 대비해 아공간에 마른 땔감을 넣어뒀었고, 부싯돌과 돼지기름도 있었기에 어려움은 없었다.

“장작. 주머니.”

장작을 꺼내는 나를 보며 세실이 중얼거렸다.

불을 피우자 벌레들이 알아서 불 속으로 뛰어들었고, 독을 품은 작은 동물들이 스멀스멀 자리를 피했다.

우리는 모닥불에 개구리를 구웠다. 늪지에 들어선 이후 개구리는 우리의 주된 식량이었다. 족제비는 세실을 개구리 사냥꾼이라고 불렀다.

“와. 맛있다. 그치? 테오.”

첫 불침번은 나였다. 피곤함에 지친 일행은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이 들었다.

그런 줄 알았는데.

“모닥불. 예뻐.”

세실이 깨어 있었다.

나는 세실의 연녹색 눈동자를 돌아봤다.

“안 졸려? 세실.”

“데미안.”

“응.”

“카인. 만나면.”

“카인?”

왜 뜬금없이 카인의 이야기를 꺼내는 걸까.

“말하지. 마.”

“뭘?”

“나에. 대해.”

“카인은 너를 봐도 79번인지 모를걸?”

세실이 고개를 갸웃했다.

“정말로?”

“응. 확실해.”

소설 속에서도 못 알아봤으니까.

“걱정 마 세실. 너에 대한 건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아. 네가 블레오파드라는 사실도.”

“응.”

“그러니까 너도 조심해. 블러디드를 사용하는 기술은 되도록 감추는 편이 좋아.”

“응.”

동그란 눈을 몇 차례 깜빡이던 세실이 말했다.

“데미안.”

“응.”

“괜찮은. 거야?”

“뭐가?”

“나와. 다니는 거.”

갑작스러운 물음에 나는 무어라 답해야 할지 몰랐다.

“나. 즐거워.”

세실이 잠시 머뭇대다가 덧붙였다.

“데미안과. 다니는 거.”

그렇게 말하는 세실을 보고서야 나는 깨달았다.

세실은 나와 함께하며 겪는 일들이 신기하고 재미있는 거다.

그동안 평범한 또래와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왔으니까.

“데미안. 불침번.”

그 말을 남긴 세실이 머리끝까지 담요를 뒤집어썼다. 그러고는 고른 숨소리를 냈다.

하지만 길지 않았다.

“데미안.”

세실이 담요를 박차며 몸을 일으켰다.

나는 반사적으로 미니맵을 봤고, 변화를 포착했다.

누군가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세실. 일행을 깨워.”

나는 검을 쥔 채 모닥불 너머의 어둠을 노려봤다.

상대는 기척을 숨길 생각이 없는지 대놓고 발소리를 울렸다.

이윽고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새치 가득한 지저분한 흑발에, 아무렇게나 돋아난 수염을 가진 거구의 사내였다.

[대상이 통찰에 저항했습니다.]

뭐라고?

“오. 멋진 모닥불인데? 꼬마들이 아주 제법이잖아. 하하하!”

호탕한 웃음을 터뜨린 거구의 사내가 털썩 모닥불 앞에 앉았다.

나는 상대에게 통찰이 통하지 않았다는 것에 놀랐다.

지금처럼 저항 메시지가 뜬 경우는 눈앞의 사내를 제외하면 에티엔이 유일했다.

‘설마 이자도 소드마스터?’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Status: Ongoing
The protagonist, an infinite regressor, found himself possessed within a novel where the original protagonist had gone mad and turned dark. Now, with my unique abilities, I must write a new ending for the story.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