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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36

234. 소꿉친구 – 경(卿)

착각이 아니다.

{추적술}로 브라이언 경을 떠올린 레브는 방금 닫힌 성문 너머로 본 그 남자가 브라이언 경이 맞음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왜 여기에 있는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대수롭지 않게 스쳐 간 인연이고, 그다지 특별할 것이 없던 사람이라 더 당혹스럽다.

무언가가 변한 것일까? ─ 레브는 잠시 과거를 더듬으며 궁리했으나 이렇다 할만한 것이 없었다.

브라이언 경을 만났던 건 11번째 회차, 약혼관계 시나리오에서였다. 노구화호를 사냥하는 데 성공해 처음으로 {전쟁}을 회피했던 때였는데, 아버지(노엘 덱스터)의 인정을 받아 일종의 무사 수행을 떠났었다.

……그 끔찍했던 회차를 점잖게 표현하면 그렇다는 얘기다. 사랑하는 약혼녀의 가슴에 못을 박았던, 오직 상처만이 남은 과거였다.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제롬 신성 왕국의 기사들에게 대련을 청하려 국경을 넘었었고, 첫 번째로 들른 곳이 바로 ‘비도리닌 성’이었다.

슬하에 자녀는 없지만, 금슬이 좋은 노부부, 베르게르 아가타 남작과 아그네스 아가타 남작 부인이 있던 곳으로 브라이언 경은 아가타 남작가의 기사였었다.

그런데 그가 어째서 여기에 있는 것일까? 비도리닌 성에서 변화가 있었을 만한 것이라곤…

‘압오안돈을 잡았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짐작 가는 게 이것뿐이다. 사실 잡거나 말거나 아가타 남작도 별 신경을 쓰지 않던 마수라 그럴 가능성은 작아 보였지만, 반복되는 회차에 영향을 미쳤을 만한 게 그것밖에 없었다.

‘하지만 마수가 사라진 거랑 브라이언 경이 여기에 와 있는 게 무슨 상관이지? 아가타 남작가의 기사가 사이먼 백작가에 무슨 볼일이 있…’

– “걱정하지 말아요, 여보. 동생… 아니, 사이먼 백작께서는 틀림없이 도움을 주실 거예요. 사이먼 백작가는 제 친정… 인데, 기사님들이 많아서… 편지에 잘 적어두었어요.”

문득 떠오른 것이 있었다.

아그네스 아가타 남작 부인은 사이먼 백작가가 자신의 친정이라며 소개를 해주었었다. 한데 막상 백작가에 도착해 둘러보았을 때, 부인의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맞아. 뭔가 이상했었어. 이 대단한 사이먼 백작가에서 그 조그마한 남작가에 딸을 시집보낸 것도 이상했었고.’

뭐가 있긴 있는 모양이다. 레브는 과거에 미처 파헤치지 못했던 의구심을 되새김질하며 고개를 들었다. 사이먼 백작의 저택이 눈앞이었다.

단조롭지만, 웅장한 저택이다.

검소한 제롬 신성 왕국의 풍습에 따라 저택에는 장식이 가미되지 않았다. 중간중간에 돌출부를 만들어 단조로운 벽과 기둥에 재미를 더했으면 좋았을 터인데, 그런 건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만큼 건물의 무게감이 드러나는 구성이기도 하다.

레브는 건물의 무게를 지탱하듯 설치된 벽날개(flying buttress)들 아래를 지나쳐 이윽고 정문에 다다랐다. 마중을 나와 안내를 해주려 하는 총관에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수고스럽겠지만, 백작님을 모시고 나와 주게. 이 녀석을 저택에 들일 수는 없지 않은가.”

– 히힝!

“알겠습니다. 여쭤보겠습니다.”

총관이 거대한 말(도흑포마)을 올려다보곤 납득했다는 듯이 돌아섰다. 그가 백작을 데리러 간 사이, 레브는 제자들의 어깨를 한 번씩 두드려주었다.

“너무 힘 줄 것 없다.”

“네, 알겠습니다.”

기사인 체하느라 기합이 단단히 들어간 제자들의 긴장을 풀어주는 것이었다.

성격이 워낙 담백해 평소나 지금이나 안색에 별 차이가 없는 반느 비자인을 제외하고, 딱딱하게 굳은 청년들을 다독여준 레브는 미하에르 추기경이 타고 있는 마차로 다가가 말을 걸었다.

“이제 내리셔도 될 듯합니다.”

“…오른 왕국의 소드마스터께서 여긴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훗. 그런 수작엔 안 넘어간다.

레브는 빙긋 웃으며 북부의 거센 악센트를 섞어 답했다.

“제자들과 함께 여행 중입니다. 어떻게, 이제는 이 표식을 지워주실 마음이 생기셨습니까?”

“……”

“유감이로군요. 그럼 약속을 다시 하시지요. 추기경께서는 이제 좋을 대로 움직이셔도 좋습니다. 단, 저를 적대하고 싶지 않으시다면 그동안 있었던 일을 잊으십시오. 움베르토 사이먼 백작에겐 저희에게 실수로 표식을 찍었는데, 지울 방법이 없다고만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 마침 나오시는군요.”

네모난 턱을 가진 중년의 사내, 움베르토 사이먼 백작이 나타났다. 그는 벽에 달린 담쟁이덩굴을 뜯어 먹기 시작한 도흑포마를 놀라운 표정으로 올려다보며 걸어오다가, 막 마차에서 내리는 미하에르 추기경을 보곤 안색이 복잡해졌다.

신성의 표식이 찍힌 소드마스터와 추기경, 이게 대관절 무슨 조합인지 몰라 당황하는 것일 터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레브 비자인이라 합니다.”

“반갑습니다. 움베르토 사이먼입니다. 추기경님도 계셨군요. 이게 어찌 된 영문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레브는 짐짓 팔짱을 끼었다.

추기경이 어찌 나올지 기다리는 한편 그를 은연중에 압박하는 것이었는데, 미하에르 추기경은 레브를 적대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듯했다.

“가는 길에 다소간의 마찰이 있었습니다. 귀인들을 무뢰배로 착각해 신성의 표식을 찍어버렸지 뭡니까. 해서 모셔왔습니다. 표식이 반년가량 지속될 것인데… 이분들의 생활에 불편함이 없게 도와주십시오.”

사이먼 백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셨군요. 어렵지 않은 부탁입니다. 제가 보증을 서 드리지요. 이것도 인연인데, 안에서 차라도 한잔하시겠습니까?”

“저는 좋습니다.”

레브가 ‘는’에 억양을 주어 답했다. 이를 눈치챈 추기경은 피곤하다는 핑계로 성전사들과 함께 총관을 따라 사라졌다.

“너희들은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라. 도흑포마가 말썽부리지 않게 잘 지켜보도록.”

“넵! 다녀오십셔! 오실 때 먹을 것 좀 가져다주시고요.”

루벤의 유쾌한 답변을 뒤로하고, 백작과 레브는 응접실에 들어섰다. “제자분들이 참으로 듬직하시군요.” 말문을 여는 백작에게 레브가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추기경님께서 ‘또’ 공연한 부탁을 하셨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른다. 레브는 추기경과 사이먼 백작의 관계를 추론하며 떠보았다.

“그 공사(工事) 말입니다.”

그 뚜렷한 지적에 움베르토 사이먼 백작의 표정이 굳었다. 하지만 백작은 일단 모르쇠를 내밀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어떤 공사를 말씀하시는 건지요.”

“하하. 보메르 화산 동남쪽의 땅을 점유하신지… 꽤 됐지요?”

– 쪼르륵.

그때 시녀가 들어와 레브와 백작 앞에 찻잔을 놓고 상쾌한 향이 나는 푸니타 잎으로 찻물을 내렸다. 잠시 침묵하던 백작은 시녀가 자리를 비우고서야 입을 열었다.

“왕실에서 나오셨습니까?”

“부탁을 받았다고만 해두죠. 그나저나 신기하군요. 이 신성의 표식이란 건요. 저도 제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하하. 보증은 서주시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어떤 오해가 있으신 모양인데, 그 땅은 저희가 불법으로 점거한 게 아닙니다. 제 누이 되는 사람에게 속한 땅으로, 백작가에서 위임하여 통치하고 있을 뿐입니다. 왕께 승인도 받았습니다.”

뭐? 불법이 아니었어?

레브는 자신의 추론이 다소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하지만 백작이 보이는 긴장감이 수상쩍어 아는 것을 죄다 던져보았다.

“아아, 아그네스 아가타 남작 부인 말씀이시죠? 알고 있습니다. 저 멀리 비도리닌 성에 계시더군요. 슬하에 자녀도 없이…”

사이먼 백작의 주홍색 눈동자가 흔들렸다. 생각해보니 이것도 참 이상하다. 누이라는데, 백작과 남작 부인은 왜 이렇게 다르게 생겼을까? 사각 턱부터, 눈동자까지.

레브는 백작을 유심히 관찰하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그런데 중간에 말을 잘못하였는지 백작의 긴장감이 완화되는 것을 느꼈다.

“…누님과 자주 연락하지 않으시는 듯하더군요. 많이 섭섭해하시겠습니다. 너무 멀리 시집을 가셔서 집이 그리우실 텐데 말이죠.”

“네. 자주 연락을 드려야 하는데, 나이를 먹으니 어렵더군요. 저도 제 누이가 무척 그립습니다. 생각난 김에 오늘 편지라도 한 통 써봐야겠습니다. 그나저나 도흑포마는 어떻게 길들이신 겁니까? 아주 오랫동안 골치를 썩였는데, 감사합니다.”

이게 아닌가?

백작가는 몰락한 아그낙 가문의 영지를 불법으로 점거하고 있다. 당신은 추기경과 어떤 야합을 맺었을 것이다. 나는 왕실의 부탁을 받아 조사를 나온 위대한 소드마스터님이시니 좋게 말할 때 실토해라.

이런 식으로 백작의 속내를 끌어낼 요량이었던 레브는 곤란해졌다. 백작이 우려하는 어떤 연결고리를 놓친 게 틀림없었다.

그 이후로 대화는 영양가 없이 흘러갔다. 추기경이 부탁한 ‘공사’를 다시 주제로 올려보았으나, 백작은

“그 땅에 작물이 자라지 않아서요. 추기경님이 그 땅을 농지로 개간하는 게 좋지 않겠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려운 일이지만, 성공하면 영주민들의 생계에 보탬이 되겠지요.”

가볍게 받아넘겼다. 아쉽게도 찻잔이 바닥을 드러내면서 레브는 대화를 이어갈 구실을 잃어버렸다.

“보증은 필요 없으시다 하셨지요? 방을 내어드리겠습니다. 원하시는 만큼 머물다 가십시오. 그리고 돈 걱정이야 없으시겠지만, 돈이란 건 다다익선이 아니겠습니까? 도흑포마를 잡아주신 것에 대한 약소한 보답이라 생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사이먼 백작이 손뼉 쳐 시종을 불렀다. 머지않아 시종이 커다란 목함을 가져왔고, 그 안에는 묵직한 순금이 들어 있었다.

레브는

“고맙소.”

별말 없이 뇌물을 받았다. 백작의 말마따나 돈은 필요 없지만, 그러는 편이 그의 경계를 누그러뜨릴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이래선 곤란한데.

배정받은 방으로 들어온 레브는 침대에 드러누우며 혀를 찼다.

괜히 보증이 필요 없다고 말했나.

그냥 보증을 받아 루테티아로 갔으면 될 것을.

뭔가 있는 것 같아서, 그리고 과거에 레오 덱스터를 골탕 먹였던 백작과 에우타의 할머니를 반복해서 죽여왔을 추기경이 마음에 안 들어서 잔머리를 굴렸다. 그런데 본전은커녕 손해를 본 기분이었다.

‘짜증 나네.’

심증은 가는데 뭐가 어떻게 된 건지 구체적인 정황을 모르겠다.

정말 수틀리면 백작을 때려눕히곤

“추기경이랑 무슨 약속을 했어! 당장 말하지 못해!”

협박할 수는 있겠지만, 레브는 그렇게 멋대로 행동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당장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 있었고, 내년에는 오른 왕국에서 반란을 일으켜 왕위에 오르실 몸이었다.

팔베개를 베고 생각을 가다듬던 레브는 자리에서 일어나 반느를 호출했다. 잠깐 나갔다 올 테니 경계를 늦추지 말라 명한 뒤, 조용해진 백작의 저택을 빠져나왔다.

{추적술}

사람을 찾는 데에 이보다 유용한 능력은 없다.

사이먼 백작령의 성에서까지 빠져나온 레브는 (다행히 조금 전에 본 경비대장이 아직 근무 중이었다.) {추적술}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허름한 길거리를 가로질렀고, 채 한 시간이 흐르기 전에 목표로 한 사람을 찾아내었다.

위생 상태가 불량해 보이는 숙소, 그 1층의 어두운 식당에 브라이언 경이 앉아있었다. 마침 식사하는 중이었는데, 그 덕분에 레브는 그가 ‘경(卿)’이라는 경칭이 붙을 수 없는 사람임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포크와 나이프를 주먹으로 움켜쥐어 사용하고 있다.

포르테(forte)를 능수능란하게 사용하던 검술의 달인이 고작 식기를 바르게 쥐지 못하는 것이었다.

“누구십… 허업!”

고개를 든 브라이언이 조금 전에 봤던 소드마스터를 알아보았다.

관리받지 못한 수염과 서툰 식기 활용으로 그에 덕지덕지 붙은 음식물. 고된 노동으로 굽은 등. 레브는 한때 간신히 동수를 이뤘던 기사의 꼴에 왠지 가슴이 아렸다.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A Princess Is Raised After Death, Desperately Making Her a Princess, Princess is Raised by Death, RPOD, The Princess Is Raised After She Dies, 正規エンディングまで異世界ループ転生, 공주는 죽어서 키운다
Score 8.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19 Native Language: Korean
Minseo was trapped in [Raise Lena]. With the emotionless text, “[Starting Raise Lena]” he became Leo and was imprisoned in an unfamiliar worl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Uh-huh?” “Leo? Why the long face? You! Are you messing with me again?” There, he met his childhood friend, Lena, skillfully picking berries. The lovely Lena. Leo marries her in a peaceful mountain village… [Lena is married! Congratulations.] [You have failed to clear Raise Lena.] [Restarting.] The happiest moment. Lena disappeared. An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Huh? Lena!” “Why have you been spacing out? And why are you looking at me like that? You wanna get beat up?” Lena, clad in thick leather armor and a sword on her shoulder, stared at him with unwavering eyes. It was a different scenar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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