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Chapter 243

241. 소꿉친구 – 결혼식

“저는 당신을 뵙기는 두 번째인걸요. 그렇지 않나요? 바르바토스의 사도님.”

무늬가 없는 붉은 카펫이 폭신하고, 탁자도 없이 성녀를 마주할 의자들만 덩그러니 배치된 접견실에서 레브와 레오 덱스터는 말문을 잃어버렸다.

지난 회차를 기억하는 이가 우리 외에도 있을 줄이야. 성녀가 그런 그들을 향해 빙그레 웃음 지었다.

“놀라셨군요.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으실 텐데… 앉으세요.”

레브와 레오 덱스터가 착석했다.

레브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만 뻥긋거렸고, 레오는 까드득, 이를 악물며 물었다.

“당신은 다 알고 있었습니까?”

“무엇을요?”

“우리의…”

레오가 의자 손잡이를 으스러지게 움켜쥐었다. 생글거리는 성녀의 뺨을 모질게 쳐버리고 싶은 걸 가까스로 참으며 말했다.

“우리의 개만도 못한 신세를요.”

“그럴 리가요. 저라고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해요. 신께서는 제게 그때그때 필요한 것만을 알려주신답니다. 레오 덱스터라 하셨죠? 당신을 뵙기도 처음이고요.”

“그럼 신께 여쭤주십시오. 우리가 뭘 잘못했길래 이러는 건지.”

“흠…”

성녀가 말똥말똥 고운 눈을 위로 살짝 치켜들었다. 잠시 천장을 올려다보는가 싶더니 입을 열었다.

“토들러 아키우넨이 저지른 죗값을 치르는 중이랍니다.”

“그걸 왜 우리가…”

레오넬과 레이시아.

짐작 가는 것이 있어서 레오가 입을 닫았다. 성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저도 모르지요. 이렇게 뵙게 된 것도 신의 뜻일진대, 당신들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주시겠어요?”

제법 긴 이야기가 이어졌다.

정신을 차린 레브는 그간 있었던 일을 차분히 설명했다. 첫 회차부터 지금까지. 성녀는 가끔 눈물을 글썽였는데, 그녀는 레브의 이야기만 듣고 있는 게 아닌 듯했다. 때때로 허공을 응시하다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당신이 오른 왕국의 왕이 되고, 다음에는 레오 님을 왕위에 올리신다는 거군요.”

“네. 그래야 레아와 레나 아이나르를 공주로 만들 수 있을 테니까요. 저희를 도와주시겠어요?”

“…그 레아라는 분은 여기에 와 계시죠?”

“네. 수도교회 교육 시설에 입학한 지 1년쯤 됐겠네요.”

“그렇군요…”

성녀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언가를 말할 듯 말 듯 입을 오물거리던 성녀는 두 청년을 뚫어지게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제가 어떻게 해주기를 바라시나요?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건 많지 않아요. 당신들께는 도움이 필요치 않기도 하고요.”

“그게 무슨 뜻이죠?”

우리에게 도움이 필요치 않다니. 레오 덱스터가 물었다. 하지만 레브는 예상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고, 성녀가 짧게 답했다.

“주신께서 당신들을 지켜보고 계세요.”

답변은 이걸로 충분할 것이었으나 레오는 이해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해서 성녀가 설명을 덧붙였다.

“필요한 것이 있다면 이미 주어졌을 거라는 뜻이에요. 전 신께서 왜 당신들을 제게 인도하셨는지도 모르겠는걸요.”

“누가 우리를 인도했다는 겁니까. 전 제 의지로 이곳에 왔습니다.”

“맞아요. 틀린 말씀은 아니에요. 그럼 왜 왔는지 알려주시겠어요? 그러면 제가 도움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르죠.”

레오는 제가 바라는 것과 궁금한 것을 쏟아내었다. 레브와 달리 그는 원하는 게 많았다.

“전 레나라는 제 약혼녀와 여기서 결혼할 겁니다. 성녀님께서 주례를 봐주셨으면 합니다.”

“어렵지 않은 부탁이네요. 일정을 잡아보겠어요.”

“감사합니다. 그럼… 레브, 잠깐 줘 봐. 그럼 이것은 무엇입니까?”

레오가 받아든 건 레안의 어머니의 유품, 청색 목걸이였다.

레오가 아직 가지지 못한 귀속 아이템이다. 한데 이건 레오의 어머니의 유품인 장검과 레브의 어머니의 유품인 거울과 달리 용도가 분명치 않았다. 예쁜 목걸이라니.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성녀는…

“예쁜 목걸이네요.”

목걸이 설명란에 적힌 것과 똑같이 말했다. 그 이상 설명할 것이 없다는 태도로.

“이게 예쁜 목걸이인 줄은 어떻게 아셨습니까?”

“보이는 대로 말씀드린 건데요?”

“…성녀님께도 네모난 창이 보이시는 겁니까?”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성녀가 아리송한 눈으로 레오를 바라보았다. 바보가 된 기분을 느낀 레오는 본론으로 돌아갔다.

“이 목걸이의 용도를 알고 싶습니다.”

“그리 말씀하시는 걸 보면 아주 특별한 물건인가 보네요. 잠시만요, 여쭤볼… 아, 미안해요. 비나르 신께서 알 필요 없다고 하시네요.”

“어째서죠?”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비나르 신께선 말씀이 너무 많으셔서… 때가 되면 절로 알게 될 것이니 잘 보관하라 하시네요. 그 레나라는 약혼녀분께 드리는 건 괜찮답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레오가 곰곰이 생각에 잠긴 레브의 오른손을 낚아챘다. 오리아스의 낙인이 찍혀 있을 손바닥을 펼쳐 보이며 물었다.

“여기에 찍힌 낙인이 보이십니까? 이걸 지워주세요.”

레브는 이 레나와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녀석이 웬일이지?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음 회차에서 이 낙인이 레오에게 갈 거라는 생각이 들자 납득이 됐다.

성녀가 레브의 손바닥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말했다.

[ 디버프 : 오리아스의 발자국 – 도발, 달아날 수 없습니다. 11년 11개월 11일 11시 11분 11초. 고정됨 ]

“일그러진 17각형이라. 대단하네요. 입체감을 띤 걸 보니 신의 문자를 제법 읽을 줄 아나 봐요. 지워드리는 건 어렵지 않은데…”

메리엘이 레브를 힐끗 바라보았다.

“지우지 않는 편이 낫겠네요. 걱정하지 말아요. 이건 곧 없어지게 될 거예요.”

레오가 그냥 지금 지워주면 안 되겠느냐 재차 청했지만, 성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레브를 향해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레오, 그만해. 성녀님께서 안 지우는 편이 나을 거라 하시잖아.”

“…우리한테 또 무슨 짓거리를 하려고…”

“응? 뭐라고?”

“아니야, 됐어. 그럼 성녀님.”

“네, 말씀하세요.”

“저와 레나의 진명을 알려주세요.”

성녀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그녀는 어째서 신께서 이 남자를 자신의 앞으로 인도하였는지를 깨닫고 옅게 웃었다.

비록 벌을 내리셨지만, 신께서는 이들을 정말 아끼시는구나. 이렇게 사소한 것까지 챙겨주려 하시다니.

메리엘이 고개를 저었다.

“죄송하지만 알려드릴 수 없어요. 하지만 왜 오셨는지는 알겠네요. 레오 덱스터 님, 당신이 가진 거울을 제게 보여주세요.”

뭘 해주려는 걸까?

하지만 레오도 고개를 저었다. 거절하는 건 아니고, 거울이 수중에 없어서였다.

“그 거울은 레나가 가지고 있습니다. 그게 왜 필요하십니까?”

“당신도 그 거울을 사용할 수 있게 해드리겠어요. 결혼식 날에 그걸 꼭 가져오도록 하세요. 하하. 중요한 용무가 끝났으니 더 이야기해봤자 사족에 불과하겠군요. 그만들 돌아가셔도 좋아요.”

“잠시만요. 아직 여쭤볼 게 많…”

레오 덱스터가 외쳤지만, 성녀는 볼일이 끝났다는 듯이 의자에 몸을 묻었다.

성전사들이 저벅저벅, 발걸음 소리로 두 청년에게 자리에서 일어날 것을 권하는 그때, 여태껏 침묵하던 레브가 입을 열었다.

“성녀님.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무엇인가요?”

“서쪽에 ‘우에나’라는 부족이 있습니다. 그곳에 계신 할머니가 아신을 섬기는데, 미하에르 추기경을 만나게 됩니다. 이를 막아주십시오.”

“…그게 당신이 바라는 전부인가요?”

“네. 다른 건 제가 알아서 할 수 있습니다.”

성녀가 후훗, 웃음을 터뜨렸다.

“어째서 당신이 ‘첫 번째’인지 알 것 같군요. 바라는 대로 해드리겠어요. 앞으로는 미하에르 추기경이 순례를 나가는 일이 없을 거예요. 그럼 결혼식 날 뵙겠어요.”

이윽고 레브와 레오는 십자교회 본당을 나서고 있었다. 레오 덱스터가 투덜거렸다.

“쳇. 물어볼 게 많았는데. 결과적으로 도움 된 것도 없잖아. 나중에 가면 다 알게 된다고… 에라이 그런 말은 나도 하겠다. 안 그러냐?”

“…”

“음? 넌 또 왜그… 어? 저기 레아 아니냐? 맞네.”

레오들의 시력은 꽤 좋았다. 저 멀리 레아가 어느 수습생과 함께 걸어가고 있었고, 레브는 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레오 덱스터가

“뭐해? 안 가고. 기다려줄 테니까 인사하고 와.”

레브의 등을 떠밀었으나 레브는 움직일 줄을 몰랐다.

아신, 세레스가 한 경고 때문이다. 레오 덱스터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어투로 물었다.

“너 어차피 왕 되면 레아한테 연락할 거 아니야? 설마 레아를 만나지도 않고 공주로 옹위하면서 끝내려는 건 아니겠지?”

“……가자.”

“뭐? 이런 멍청…”

뒤를 돌아보지 않으려 애쓰며 레브가 성큼 앞서나갔다. 레오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허! 탄식했다.

레브의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자기주장이 강하지 않은 레브는 남의 말을 잘 들었다. 민서의 생각도 곧잘 받아들였고, 성격도 유순한 편이다.

하지만 이건 레아와 제 인생에 관계된 일이 아닌가. 자기애가 강한 레오는 “어휴, 저 병신.” 한마디 하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 * *

다음 달 겨울. 레오 덱스터와 레나 아이나르의 결혼식이 열렸다.

수도교회의 전당에서 치러진 그 결혼은 비록 급하게 준비되었지만, 입이 떡 벌어질 만큼 대단한 하객들이 참석해 빛을 더해주었다.

클레오 드 프레데릭 왕자가 프레데릭 왕가를 대표해 참석했다.

최근 그와 연애를 시작한 오스카 백작의 영애가 함께하면서 귀족들이 앞다퉈 참석을 예약하였고, 결혼식의 규모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레오 덱스터와 레나 아이나르가 누군지는 알 바 아니다.

자칫 결혼식이 초신성처럼 떠오른 프레데릭 왕가와 제롬 신성 왕국의 대귀족, 오스카 백작가에게 밀려 병풍이 될 뻔하였으나, 메리엘 성녀가 몸소 주례를 본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결혼식은 온 귀족과 세간의 관심을 받았다.

레오와 레나가 알콩달콩, 깨를 볶는 동안 레브가 그들의 결혼식을 준비해주었다.

대외적으로 알려진 사람이 레브뿐이라 대단하신 소드마스터께서 직접 하객을 맞았다. 레브의 제자들 중 여성인 이들은 어여쁜 신부의 들러리가, 우락부락한 남자들은 근사한 신랑의 호위가 되었다.

“제 절친의 결혼식에 참석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네, 네. 알겠습니다. 언제라도 한 번 찾아뵙지요. 안으로 드시지요. 왕자님께서는 조금 전에 들어가셨습니다.”

수도 없이 악수하고, 솔직히 전혀 필요 없지만 생판 모르는 귀족의 이름을 방명록에 기입하던 레브는 예식이 시작되고서야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왁자지껄 발 디딜 틈이 없던 로비가 한산해졌다. 음악 소리. 친구의 결혼식을 보지 않을 수는 없는지라 레브는 슬쩍 일어나 결혼식장 대문 너머를 들여다보았다.

하이라이트를 놓쳤다.

성녀의 주례와 축복이 끝나고, 레오와 레나는 혼인선언문을 맞들어 읽고 있었다.

여태껏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광경이다. 몇 번 결혼해봤지만, 매번 “…한 쌍의 부부가 탄생했음을 신께 고합니다.”라는 사제의 주례와 함께 엔딩이 찾아왔었다.

저 두 사람은 키 차이가 참 바람직하구나. ─ 생각하며 흐뭇해하던 레브는 문득 씁쓸해졌다.

난 저렇게 결혼하지 못할 거다. 레아와 결혼하더라도 엔딩이 난 이후일 테고, 이번이 나의 마지막 회차이겠지.

그제야 레브는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 애원하던 레안 드 예리엘의 마음에 공감할 수 있었다. 어찌 됐건 클리어가 된다면, 다시 한다고 해서 클리어된 게 취소되진 않을 터이니 한 번 더 살아보고 싶다. 엔딩 이후의 이야기를 텍스트로만 우물거리다 사라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민서의 권한이다.

민서가 우리 모두를 행복하게 해주고 떠나겠노라 맹세하긴 했지만, 수십 년째 사랑하는 연인과 가족을 만나지 못한 그가 탈출을 미뤄줄지는 불확실했다.

더군다나 민서가 생각하는 해피 엔딩의 기준이 상당히 속물적이고 낮은 편이었기에… 그래서 레안이 왕자의 고고한 체통에도 불구하고 애원한 것이다. 그도 소꿉친구 시나리오가 시작되면 자신과 자신의 왕국의 참담한 미래가 바뀔 것이라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어려움이 있을지언정 직접 누리는 것과 옆에서 지켜보는 것의 차이는 크다. 낮게 한숨을 내쉰 레브가 뒤돌아섰다.

예식장 안에서는 레오가 하라는 키스는 안 하고 레나의 코에 자신의 코를 비비며 애를 태우고 있었다.

입술을 움찔움찔. 레나 아이나르는 얼굴을 붉히면서도 정말 밝게, 행복하게 웃었다. 레아를 만나지 못한 레브의 가슴이 저릴 정도로.

그리고 며칠 뒤, 레브 일행은 루테티아를 떠났다.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A Princess Is Raised After Death, Desperately Making Her a Princess, Princess is Raised by Death, RPOD, The Princess Is Raised After She Dies, 正規エンディングまで異世界ループ転生, 공주는 죽어서 키운다
Score 8.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19 Native Language: Korean
Minseo was trapped in [Raise Lena]. With the emotionless text, “[Starting Raise Lena]” he became Leo and was imprisoned in an unfamiliar worl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Uh-huh?” “Leo? Why the long face? You! Are you messing with me again?” There, he met his childhood friend, Lena, skillfully picking berries. The lovely Lena. Leo marries her in a peaceful mountain village… [Lena is married! Congratulations.] [You have failed to clear Raise Lena.] [Restarting.] The happiest moment. Lena disappeared. An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Huh? Lena!” “Why have you been spacing out? And why are you looking at me like that? You wanna get beat up?” Lena, clad in thick leather armor and a sword on her shoulder, stared at him with unwavering eyes. It was a different scenario.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