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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46

244. 소꿉친구 – 통신

주신의 신력이 담긴 물품은 크게 세 가지로 급이 나뉜다.

사제의 축성을 받은 ‘축성품’이 그 첫 번째로 개인 소장이 가능했다. 딱히 어떤 효과가 있진 않으나 이를 지니면 악을 물리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에 결혼을 앞둔 연인이 흔히들 나눠가질 반지에 축성을 받았다.

두 번째는 신물(神物)이다.

사제가 축성을 내려 상대적으로 금방 만들어지는 축성품과 달리 신물은 대단히 오랜 세월에 걸쳐 만들어지는 물건이었다.

신물의 기반이 되는 물품에는 정해진 양식이 없다. 조각상인 경우가 많으나 때로는 그림이기도, 자잘한 장식품이기도 했다.

신물이 이처럼 다양한 형태를 띠는 까닭은 신물이 탄생하는 원인과 관계가 깊었다. 신을 믿는 성직자가 오래도록 ‘마음’을 쏟아온 물품이 신물이 되기 때문이었다.

신물이 탄생하는 방식이 밝혀진 이후로 신물의 형태가 규격화됐다.

성직자는 자신이 신물을 남길 수 있기를 희망하며 신물로 쓰이기에 알맞은 물건을 찾았고, 십자교회는 아예 수도교회 교육 시설을 졸업하는 사제, 성전사, 수도사들에게 적당한 크기의 조각상을 나눠주었다.

개인의 취향을 고려해 일곱 성인의 조각상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게 하였는데, 신물의 개수가 비약적으로 증가하진 않았다. 신물은 예나 지금이나 드물게 만들어졌고, 각 지역의 교회에 비치되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성물(聖物)이다.

성물은 만들어지는 게 아니었다. 그것들은 ‘발견’되었다.

성물이라 해서 외형상 어떤 특징이 있진 않았다. 아주 평범한 물건인 경우가 대다수였는데, 신물과 다른 점이 있다면 성물은 주변 환경에 영향을 미쳤다.

공기가 유달리 가라앉는 곳이 있다. 이유 없이 고요하고, 메아리쳐야 할 소음이 아스라이 멀어져간다. 그 고요 속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는 것 같으면 주위에 발견되지 않은 성물의 존재를 의심해봄 직했다.

수천 년의 역사 동안 발견된, 또는 성물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물품은 약 오십여 점.

아스란 왕국이 보관하던 마우닌 왕과 레티이 여왕의 혼인서약서처럼 전쟁으로 인해 소실된 것도 있었고, 아카이아 제국 황제의 상징이었으나 십자교회의 손에 들어가 역대 성녀들의 소지품이 된 왕홀(王笏) 같은 것도 있었다.

제1 성인, 아즈라가 짚고 다니던 나무 지팡이와 황동 술잔도 성물일 것으로 추정되었는데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어쨌든 온 대륙, 각지의 교회에는 하나 이상의 신물이 있었다. 해당 교회에 파견된 사제는 그 신물의 권위를 빌어 제사를 올리고, 필요에 따라 통신의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그건 이곳 브리지트 교회도 마찬가지다. 저녁이 되어 한산해진 예배당, 일렁이는 백여 개의 촛불 아래에서 브리지트 교회의 사제가 통신을 준비하고 있었다.

앞에는 드라진 후작, 연결의 대상은 콘라드 왕국의 추기경, 수신자는 최근 소문이 자자한 레안 드 예리엘 왕자였으나 그는 침착한 어조로 통신 매뉴얼을 읊었다.

“후작님, 여기 앉으시지요. 아시겠지만 통신은 한 번씩 번갈아 가며 진행됩니다. 전달할 내용을 말로 해주셔도 되지만, ‘아’와 ‘어’가 다르다고, 제가 억양이나 표현을 잘못 해석해 전달할 수도 있으니 가급적 글로 써서 넘겨주세요.”

당연히 후작이 왕자와 대화하는 인물이겠거니, 오해한 것이었다. 에브니 드라진 후작은 동행한 청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통신을 사용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네.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말이 뜯어먹기 좋게 푸석푸석한 머릿결을 가진 청년이었다. 자리에 앉은 그는 사뭇 익숙한 동작으로 깃펜을 잡았고, 헛다리를 짚은 사제는 아무렴 어때, 기다렸다.

“어디보자…” 잠시 고민하던 청년이 쓱쓱 글을 적어 내밀었다. 이를 집어 든 사제는 어깨를 으쓱, 별달리 말하지 않았다. 종이에는

/ 수신자 확인. 소꿉친구로부터. /

라고 적혀 있었다. 자기가 누구랑 대화하는 건지 먼저 확인해야겠다는, 불신이 가득한 행동이었다.

속고만 살았나.

하지만 사제는 제 임무를 다했다. 브리지트 교회의 신물인 얄팍한 책에 손을 올렸다. 책 제목은 종이가 헤져서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묵상하듯이 가만히 있던 사제가 다른 손으로 답신을 받아적었다. 레브는 그제야 저 건너편에 레안이 있음을 확신했다.

/ 수신자 확인. 거지남매로부터. /

이제는 거칠 것이 없었다. 레브는 깃펜을 빠르게 놀렸고, 드라진 후작이 심심하게 기다리는 사이 수십 장의 메시지가 오갔다.

/ 소꿉친구는 먼젓번과 유사하게 진행됐다. 레아는 수도교회로 가고, 나는 준비에 착수했다. 큰 문제 없이 진행되었으나 마법 전력 확보에 차질이 생겼다. /

/ 소아렐 데메트리 오거튼 백작을 설득하지 못했나. /

/ 설득했다. 하지만 볼리뉴 마탑의 도움을 받기 어려운 상황이다. /

/ 마법사가 필요한가. /

/ 계획을 변경했다. 콘라드 왕국의 조력이 필요하다. /

/ 말하라. /

듬직하다.

하지만 레브는 여기서 잠시 깃펜을 놀리길 멈추고 사제를 올려다보았다.

레안과 주고받는 이 통신이 십자교회의 귀에 들어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는데, 십자교회의 수장인 성녀가 우리를 도와주겠다 하였으므로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했다.

저쪽에서 통신을 매개하는 사람 역시 베르크 추기경이니 염려할 것이 없고…

레브의 깃펜이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종이엔 더 중대한 이야기가 담겼다.

/ 앨제어 드 로그넘 왕자가 공작위에 올랐다. 그는 올해 콘라드 왕국의 국경을 침범할 것이다. 가이단 후작의 군대와 함께. /

답장은 좀 늦게 돌아왔다.

/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다. /

/ 걱정하지 말라. 가이단 후작은 우리 편이다. 앨제어 드 로그넘 왕자가 콘라드 왕국을 병합하고 싶어 하는 듯하다. 이를 이용하겠다. /

/ 지난 회차가 그렇게 끝났는가. /

이번 답장은 더 늦게 돌아왔고, 레브는 뜨끔했다. 거울로 이야기할 때 하지 못한 이야기가 고스란히 되돌아왔기 때문이었다.

이건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총명한 레안은 결말을 듣는 것만으로 자신과 동생의 미래가 어떻게 끝났을지 추측해내고야 말겠지.

잠시 머뭇거리던 레브가 다시 깃펜을 잡았다.

/ 그래. /

쉼표도, 물음표도, 말 줄임표도 들어갈 길이 없는 통신 속에서 레브는 죄책감을 느꼈다.

뻣뻣하게 긍정할 수밖에 없는 나를 용서해라. 너는 훌륭한 왕이자 위대한 장군이 되었노라고, 네 왕국을 끝내 지켜냈노라고 구구절절 설명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아이셀 왕국으로 시집간 동생도 오빠에게 편지 쓸 때마다 이랬을까.

타향살이의 어려움을 감추고, 정략 결혼한 남자가 사실 좋은 사람이라 치켜세우고… 레리아나, 우리의 동생아. 넌 외로운 왕비로 살았겠구나.

이윽고 답장이 들어왔다. 레안 드 예리엘은 담담히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 어떻게 이용할 생각인가. /

한숨을 내쉰 레브는 다소간의 앙금을 담아 적었다.

/ 국경에서 앨제어 드 로그넘 공작을 살해하겠다. /

종이를 받아 든 사제는 흠칫 놀라는 기색이었다. 레브가 그를 빤히 바라보았고, 잠시 후에 답장이 돌아왔다. 마찬가지로 다소간의 분노가 담긴 글귀였다.

/ 지원하겠다. 무엇이 필요한가. /

레브는 앨제어 드 로그넘 공작을 살해하는 데 필요한 걸 요구했다. 레안이 걱정을 표했으나 레브는 간단하게 답했다.

/ 레오가 합류했다. /

그것으로 충분했는지 레안은 다른 것을 물어보았다.

/ 레나는 어떤가. /

/ 요리를 배우는 중이다. 동생은 요즘 어떤가. /

/ 티안과 매일 놀러 다닌다. /

아, 산티안이 안 죽었구나.

레리아나를 살리고 대신 죽었던 녀석이… 레브는 가슴 한켠이 따뜻해지는 걸 느끼다 문득 생각난 것이 있어서 물어보았다.

/ 오르빌에서 왜 그렇게 오래 머물렀는가. 카트리나 때문인가. /

레안은 거지남매 시나리오 시작점을 기준으로 다음 해 여름까지 오르빌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아버지, 카데릭 드 예리엘이 붕어하는 겨울. 에릭 드 예리엘 왕자의 즉위식에 맞춰 거사를 일으켰는데, 지나치게 느린 움직임이었다.

그 때문에 아버지가 병사하지 않았는가. ‘아직’ 아버지를 만나본 적이 없는 레안이 그를 신경 썼을 리 만무하지마는.

레안은 즉위를 앞두고 있었다.

혹시 그게 목적이었을까? 하지만 레안의 답변은 레브의 추측을 보기 좋게 빗나갔다.

/ 팔이 부러진 거지를 기억하는가. /

* * *

며칠 뒤, 머릿수가 크게 불어난 레브 일행은 가이단 후작의 영지를 향하고 있었다.

에브니 드라진 후작의 기사들이 대거 합류했다. 레오와 레나까지 포함해 서른다섯 명이 된 그들은 포근해진 봄바람을 정면으로 쐬었다.

몸이 게을러지는 위험한 계절이다.

허나 레브는 검술을 체득하길 태만히 하지 않았는데, 최근에 레오와 정식으로 대련해보았다가 무참히 패했기 때문이었다.

같은 소드마스터이고 동일한 무기를 들었지만, 상대가 되지 않았다. 심지어

[ 업적 : 기사 ‘26’명 – 기사를 상대할 때 더 강해집니다. min(1) ]

레오 덱스터가 은퇴한 ‘기사’여서 레브만 기사 살해 업적의 도움을 받았는데도 패했다.

뭐, 변명하자면 레오는 레브보다 마수 사냥 업적 카운터가 하나 더 높으니까…

‘에라이. 그까짓게 영향을 미치면 얼마나 미친다고.’

그냥 검술 센스가 부족한 거다. {검술.3v : 바르트류(流)}, {검술.4v : 자코브류(流)}, {검술.5v : 포르테류(流)}… 이 정도로 동일한 검법과 경지라면 체급이 다르더라도 어느 정도는 맞상대할 수 있어야 했다.

레오 덱스터가 한마디 했다.

“업적이랍시고 능력을 주면 그게 검술의 전부인 것 같아? 남의 검술을 완벽하게 따라 하더라도 그 검술의 창시자를 이길 순 없어. 거기엔 그만의 사상이 담겼기 때문이야.”

레브는 욱해서 한마디 했다.

“그럼 네 사상은 뭔데?”

“나는…”

레오가 말꼬리를 흐렸다. 요리를 가르쳐달라고 반느 비자인을 귀찮게 하는 제 부인을 바라보더니 말없이 돌아서 버렸다.

싱거운 녀석.

그러나 나름대로 어떤 조언이 되었으므로 레브는 자신만의 검술을 궁리했다. 그러다 체력이 달려서 검을 내려놓고 다른 생각을 했다.

레안이 들려준 이야기였다.

그는 다음에 거지남매 회차를 다시 할 기회가 있거들랑 팔이 부러진 거지를 만나지도 말고, 부탁을 받더라도 거절하라고 조언했다.

팔이 부러진 거지. 누군지는 아주 희미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아주 옛날, 두 번째 거지남매 회차였던가. 크세니아는 만난 적도 없고, 카트리나를 오르빌에서 만나게 될 줄은 상상하지도 못하고, 카시아의 신발 가게가 어디에 있는 줄도 모르던 때였다.

첫 번째 거지남매 회차에서 카시아의 도움을 받았던지라 동생을 데리고 그녀를 찾아가는 길이었다. 결말은 좋지 않았지만… 어쨌든, 가는 길에 거지 패거리에게 붙들려

– “이봐, 너희들은 뭔데 둘이서만 돌아다녀? 시장에서 매번 보이던데 좀 심하지 않아? 어디서 자는진 몰라도 자꾸 너희만 일찍 와서 먹을 걸 챙겨가면 어떡해? 우리는 다 같이 나눠 먹는데.”

– “뭘 좀 빌어먹고 살려면 사람들 눈치도 봐야 하니까 너희도 따라줬으면 하는데? 둘만 돌아다니는 것보다 같이 있는 게 좋은 점도 많아.”

협박인지 권유인지 모를 제안을 받았던 적이 있었다.

물론 레오는(자신의 성도, 진명도 모르던 시절이다.) 거절했는데, 그때 그런 권유를 한 거지의 팔이 심하게 뒤틀려 있었다. 부러진 걸 치료하지 못하고 내버려 둬서 아예 못쓰게 된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왜 갑자기 그 거지를 언급하는 걸까. 알아서 설명해주겠거니, / 기억한다. / 라고 답신을 보내려던 레브는 흠칫했다.

그때는 알지 못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 거지는…

궁중 예법.

왕실의 예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팔이 뒤틀렸음에도 움직이는 손길이 어딘가 고풍스러운 맛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귀족 사회} 정보가 없던 때라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었다.

레안이 아주 제한적인 길이로 경고했다.

/ 그의 부탁을 들어주다 보면 아스타로트 대공을 만나게 된다. 나는 아슬아슬하게 빠져나왔다. 처음부터 만나지 않는 게 좋으니 다음에는 카시아를 만나러 가지 말아라. / 라고.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A Princess Is Raised After Death, Desperately Making Her a Princess, Princess is Raised by Death, RPOD, The Princess Is Raised After She Dies, 正規エンディングまで異世界ループ転生, 공주는 죽어서 키운다
Score 8.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19 Native Language: Korean
Minseo was trapped in [Raise Lena]. With the emotionless text, “[Starting Raise Lena]” he became Leo and was imprisoned in an unfamiliar worl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Uh-huh?” “Leo? Why the long face? You! Are you messing with me again?” There, he met his childhood friend, Lena, skillfully picking berries. The lovely Lena. Leo marries her in a peaceful mountain village… [Lena is married! Congratulations.] [You have failed to clear Raise Lena.] [Restarting.] The happiest moment. Lena disappeared. An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Huh? Lena!” “Why have you been spacing out? And why are you looking at me like that? You wanna get beat up?” Lena, clad in thick leather armor and a sword on her shoulder, stared at him with unwavering eyes. It was a different scenar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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