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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57

255. 약혼관계 – 고정된 이벤트

“이건 어때?”

레나의 검이 레오의 어깨를 스쳤다. 두 사람은 대련하는 중이었는데, 레나가 무슨 생각이 났는지 한 번 착지했던 자세에서 뒷다리 발목을 박차며 다시금 찌르기를 행했다.

레오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레나와 찰떡같이 붙어 가슴이 벅차도록 행복한 나날을 보낸 지도 두 달이 흘렀다. 데호르만의 사냥팀을 따라 사냥을 한 번 더 다녀왔고, 매일같이 검술 훈련에 정진했다.

레오는 살이 좀 붙었다. 언제나 노심초사, 미래를 걱정하여 근육만 남기며 바짝 말라갔던 지난 회차들과 다르게 레나와 마음 편히 먹고 마시는 동안 바위 같은 신체에 여유가 내려앉았다.

썩 보기 좋은 모습이다. 너무 예민하지도, 그렇다고 너무 나태하지도 않은 상태가 된 레오 덱스터는 레나를 차분히 가르쳐나갔다.

[ 레오 당신은 대륙 최강의 검사가 되었으나, 레나는 당신을 따라잡지 못했습니다. 위로의 뜻으로 {검술 스승} 능력을 드립니다. ]

“괜찮은데? 착지와 동시에 앞으로 나간다는 거지? 따라 해볼 테니까 막아봐.”

“응응. 어, 그렇게. 그렇게 하면 예상치 못한 공격이 가능… 얼레?”

하지만 레나는 레오가 자길 가르치고 있다는 걸 인지하지 못했다.

평소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레오가 특이한 수법을 많이 연구해왔고, 이렇게 하는 건 어떨까, 저렇게는 안 되나? 둘이서 토론하는 시간이 늘어난 정도였다.

레오가 능청스럽게 물었다.

“왜? 이게 아니야?”

“잠깐만, 그것보다 네가 방금…”

내가 찌르기를 쳐내곤 향하려 했던 방향으로 스텝을 밟았다. 검을 강하게 쳐냈음에도 레오의 검은 여전히 위협적인 위치에서 내려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게 왜 이렇게 되지?

고작 한 스텝 때문에.

레나는 잠시 검을 늘어뜨린 채 생각에 잠겼다. 방금 레오의 움직임에는 짚고 넘어가야 할 요소가 분명 있었다.

“레오, 너 방금 그거 어떻게 한 거야? 왜 이쪽으로 왔어?”

레오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네가 내 검을 올려 쳤잖아. 오른쪽으로.”

“그랬지.”

“그 반동을 이용해서 회전할 요량으로 그쪽으로 걸었지.”

“바보야. 그럼 누군 가만히 있냐? 등에 칼 꽂힐 일 있어?”

“하하. 그렇겠지?”

…우연인가. 레오를 재촉해 좀 전의 동작을 복기해본 레나가 한참을 궁리한 끝에 입을 열었다.

“방금 거기선 회전하기보다는 가만히 있는 게 더 나을 것 같아. 검 위치가 매서웠…… 아!”

검의 위치가 관건이었구나! 동작이 아니라.

말라붙은 대지에 빗방울이 떨어진 것처럼 언뜻 스쳐 간 깊은 무학의 정수를 레나가 빨아들였다. 몇 번 더 대련하면서 방금과 같은 상황은 쉽사리 나오지 않았지만, 레나는 “검의 위치, 검의 위치” 중얼거렸다.

정신이 완전히 딴 세상에 가 있는 레나 아이나르. 레오는 그녀의 연습 상대가 되어주며

‘이건 좀 오래 걸리겠군.’

레나의 성취를 가늠했다.

방금 것은 좀 어려운 개념이다.

기사의 힘이 쏠리는 검으로 공간을 장악하는, 제롬 신성 왕국의 왕자 클레오 드 프레데릭을 호위하던 ‘로이드 아그낙’ 근위기사단장의 검술이었다.

그동안 레나가 특별히 좋아했던 검술이 몇 개 있었다.

카트리나의 공격적이고 속임수가 난무하는 검술이 대표적이다. 8번째 회차, 처음으로 카트리나를 (팔이 멀쩡하게) 이겼던 때, 레나는 그녀의 검술을 자신의 것으로 재해석해 받아들였다.

그때의 레나는 강했다.

아버지의 ‘한 합의 여유를 숨기는 검술’을 보완하며 단숨에 성장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거의 평기사급이 아니었나 싶다.

물론, 카트리나의 검술은 이미 가르쳐줬다. 방금 레나가 고안해낸 연속 찌르기에 카트리나의 몸놀림을 연상케 하는 부분이 있었고, 레나는 카트리나의 검술에 담긴 요체를 터득해가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때처럼 급격하게 성장하지 못하는 까닭은 아직 피 튀기는 실전을 겪어보지 못해서, 아무리 내가 카트리나의 검술을 잘 흉내 낸다 해도 완전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었다.

레나가 로이드 아그낙 경의 검술을 선보였을 때는 그녀에게 파혼을 선언한 날이었다. 그때는 내 실력이 {검술.3v : 바르트류(流)}로, 평기사 수준을 훌쩍 뛰어넘은 시기였는데도 분노한 레나가 나를 꺾었다.

아마 레나가 가장 강했던 순간일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 “난! 네가! 내 실력이 부족해서 날 싫어하는 줄 알았어!! 이젠… 이젠 내가 더 강해! 그런데… 그런데 넌…!”

레나가 이를 악물고 수련에 박차를 가했던 회차였다. 제롬 신성왕국으로 무사수행을 떠나 수많은 기사와 대련했고, 그녀는 기어이 나를 따라잡았다. 고작 일 년 만에.

엄청난 속도다.

시나리오 시작 직후의 실력이 고작 준기사가 될까 말까 하다는 걸 고려하면 더욱더 그렇다. 민서, 그 새끼는 ‘공주 될 사람이 검은 휘둘러서 뭐 해?’ 그런 레나의 성장세에 신경조차 쓰지 않았지만.

후우.

레오가 숨을 뱉었다.

그는 레나네 집 쪽 테라스에 걸터앉아 검을 들어 올렸다 내렸다, 골똘히 생각에 잠긴 레나를 지켜보았다. 그는 평화롭던 나날이 오늘로 마지막임을 알고 있었다.

곧 데호르만이 우릴 부를 것이다. 지금쯤 부족장 회의가 열리고 있을 것이고, 레나가 대전사인 아버지를 대신해 전장에 나가야 한다는 소식이 전해질 터였다.

준비는… 됐다. 한 가지만 빼고.

“레나! 이거 마시면서 해.”

레오가 따끈한 오드르 차를 따르며 레나를 불렀다. 이제는 스텝을 밟아보며 골몰해 있는 그녀에게 다가가 잔을 건네주었고, 레나는 송글송글 흘러내리는 땀을 닦으며 활짝 웃었다.

“고마워.”

갑작스럽게 날아든 전쟁 소식에 술렁이기 시작한 에이브릴 성. 아직은 평화로운 공터에서 레나, 레오가 차를 나눠 마셨다.

* * *

“아야야야. 레오, 나 죽어어…”

“그러니깐 신발 끌지 말랬지.”

몇 주 뒤.

레나가 물집이 잡힌 자신의 발을 붙들고 낑낑거렸다. 번번이 신발을 꽉 매어줬음에도 레나는 행군 중에 발을 끌었고, 기어이 물집이 잡혔다.

이건 어찌할 수 없는 건가 보다. 고정된 {이벤트}. 레오는 쯧쯧, 레나를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만지지 말고 기다려.”

늘 그랬듯 레오는 취사장에서 뜨거운 물을 받아왔다. 어기적거리는 아이나르 부족 전사들에게 “너희도 뜨거운 물 받아다가 발을 담가.” 조언해주고는 천막에 맥없이 뻗어있는 레나의 발을 끌어당겼다.

“앗 뜨…! 뜨거워.”

“참아.”

민서가 알려준 방법이었다. 물집을 뜨거운 물에 불려서 저절로 터지게 하는. 손으로 터뜨리는 것보다 훨씬 위생적이고 발의 피로를 푸는 데에도 좋았다. 잠시 인상을 찌푸리던 레나의 표정이 이내 편안해졌다.

“아으… 이제야 좀 살겠네. 레오, 넌 어째 멀쩡하냐?”

“힘들다고 발을 끄니까 물집이 잡히는 거 아냐. 차분하게 걸으면 물집이 안 잡혀.”

…자기가 대한민국 육군 병장 출신이라고 했던가. 병장(兵長). 병사를 대표하는 사람이라니, 의외로 민서는 군에서 높은 직책까지 올라봤던 사람인가보다.

‘그런데 검술 실력은 왜 그 모양일까? 설마 참모… 는 아니겠고.’

알 도리가 없다.

민서의 기억은 굉장히 희미했다.

그의 부모님으로 추정되는 사람의 얼굴이 눈코입이 빠진 채 떠오르고, 채하라는 연인은 크세니아와 이미지가 겹쳐 아예 대체되었다. 그녀에게 못되게 굴었다는 죄책감만이 흉터가 되어 남았다.

그가 살던 세계도 ‘민주적인’, 그러나 ‘먹고 살기 힘든’, ‘평등하지만 불평등한’, ‘과학이 발달해 풍요로운’과 같은 식으로 추상적인 개념만이 떠올랐는데, 퍽 모순이 아닐 수 없었다. 그가 희한한 세계에 살았던 건지 아니면 뭘 잘못 판단하고 있던 건지도 알 도리가 없었다.

“무슨 생각해?”

“…어떤 바보 같은 친구 생각.”

친구… 가깝게 오래 사귄 사람을 뜻하는 말인데, 이것 외에는 자신과 민서의 관계를 정의할만한 단어가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불순물은 좀 과하고.

온갖 끔찍한 기억이 쏟아졌던 시나리오 초반이 지났다. 어찌 됐건 간에 민서를 (멍청한) 친구로 정의한 레오가 돌아누웠다. 비좁은 천막 안, 그의 곁에는 물통에 발을 담근 채 나란히 누운 레나가 있었는데… 그녀의 눈이 샐쭉하다.

“바보 같아서 미안하네요!”

“너 말고.”

“웃기지 마. 흥! 물집 좀 잡힐 수도 있지. 나만 잡혔나. 꼴도 보기 싫으니까 당장 나가… 꺄악!”

“야 이 멍청아!”

“어, 어떻게 해. 이, 이것 좀…”

잔뜩 토라진 척, 레나가 홱 돌아누우면서 발을 담그고 있던 물통이 넘어졌다. 물바다가 되자 황급히 일어나려던 레나는 위로는 높이가 낮은 천막 지붕에 머리를 들이받고, 아래로는 연해진 물집을 밟았다.

딸랑 얄팍한 기둥 몇 개로 세워둔 천막이 무너진 건 당연하다. 레나는 물바다에 엉덩방아를 찧으며 천막을 마저 무너뜨렸다.

한참을 허우적댄 끝에 두 사람이 무너진 천막에서 기어 나왔다. “둘이서 뭣들 하는 거냐?”, “뭘 했길래 천막이 무너져?” 주위에선 전사들이 폭소를 터뜨렸다. 레나는 새빨개진 얼굴로 무릎 꿇고 양팔을 들었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용서해 주라. 응?”

귀엽다.

순간 화가 났던 레오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쪼그라들어 벌을 서는 레나를 내버려 두고 천막을 고치기 시작했다.

“나… 이제 팔 내려도 돼?”

“안 돼. 천막 다 고칠 때까지 그러고 있어.”

“내, 내가 고칠게…”

“안 된다면 안 돼.”

화나지 않았지만, 레나가 저러고 있는 꼴을 더 보고 싶었다. 레나는 홍당무가 돼서 고개를 푹 숙였다. 착하게도 팔은 든 채로.

하지만 너무 오랫동안 저렇게 두면 안 되겠지. 아이나르 부족 사람들과 지나가는 병사들의 시선에 씨익씨익, 미안하거나 부끄럽다기보단 슬슬 자존심이 상하려 하는 레나를 레오가 일으켜 세웠다.

완전히 난장판이 된 천막 앞에서 쪽, 복잡미묘한 표정을 짓는 레나의 뺨에 입을 맞췄다.

– 휘익!

“밖에 나와서 이젠 눈치 볼 사람도 없다 이거냐? 푸하하하! 쟤네들 전쟁터에서 결혼하게 생겼네 그래.”

우리가 약혼한 사이라는 건 모두가 안다. 이를 다시금 상기시킨 레오는 레나와 함께 천막을 고치고, 안에 드러누웠다. 한동안 말이 없던 레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레오.”

“왜?”

“우리 결혼 말이야…”

너랑 나랑 나란히 기사가 된 다음에 하면 안 될까? 내가 여자라서, 아이도 낳아야 하고 낳고 싶지만, 육아 문제로 꿈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레오가 빨랐다. 레오는 그녀의 속마음을 꿰뚫어 봤다는 듯이 말했다.

“미안한데 결혼은 천천히 하자. 전쟁이 끝나고 기사가 된 다음에 해도 늦지 않잖아. 아, 기왕이면 우리… 기사 서임을 받으면서 결혼하는 건 어떨까?”

허억.

레나가 토끼 눈을 뜨며 숨을 몰아쉬었다. 레오는 자기가 뭘 잘못 말한 건가 걱정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되려 그 반대였다.

꿈에 그리던 결혼식이다.

하늘하늘한 드레스가 아닌 단단한 갑주를 입고 레오와 부부의 연을 맺는 것. 레나는 레오가 자신과 같은 생각을 했다는 게 너무 기뻐서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어지간해선 눈물을 보이지 않는 레나였기에 레오는 당황해버렸다. 마지막에 기사 서임을 받으면서 결혼하자는 건 그냥 그러면 좋겠다 싶어서 던진 말이었는데…

좁은 천막 안에서 무릎을 꿇고 양손에 얼굴을 파묻은 레나. 레오도 덩달아 그녀 앞에 무릎을 꿇었다.

톡, 닿은 무릎이 새삼 뜨겁다. 할 건 다 해본 연인임에도.

레오가 레나의 어깨를 부둥켜안았다. 레나는 레오의 귀밑에 눈물을 묻히며 속삭였다.

“약속한 거다. 우리 약속한 거야. 꼭 그렇게 결혼하기로.”

“…그래. 약속했어. 반드시 그렇게 될 거야. 그렇게… 만들고야 말겠어.”

마지막은 레오가 자신에게 하는 다짐이었다. 레나와 레오의 심장이 같은 박자로 두근두근, 장밋빛 미래를 그렸다.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A Princess Is Raised After Death, Desperately Making Her a Princess, Princess is Raised by Death, RPOD, The Princess Is Raised After She Dies, 正規エンディングまで異世界ループ転生, 공주는 죽어서 키운다
Score 8.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19 Native Language: Korean
Minseo was trapped in [Raise Lena]. With the emotionless text, “[Starting Raise Lena]” he became Leo and was imprisoned in an unfamiliar worl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Uh-huh?” “Leo? Why the long face? You! Are you messing with me again?” There, he met his childhood friend, Lena, skillfully picking berries. The lovely Lena. Leo marries her in a peaceful mountain village… [Lena is married! Congratulations.] [You have failed to clear Raise Lena.] [Restarting.] The happiest moment. Lena disappeared. An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Huh? Lena!” “Why have you been spacing out? And why are you looking at me like that? You wanna get beat up?” Lena, clad in thick leather armor and a sword on her shoulder, stared at him with unwavering eyes. It was a different scenar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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