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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64

262. 약혼관계 – 둡

똑.

서늘한 지하 감옥 바닥에 물방울이 떨어졌다. 똑. 똑. 주기적으로 떨어지는 물방울은 두런두런 잡담하는 간수들의 목소리와 함께 이 감옥에서 들리는 유일한 소리였다.

레오는 작은 탁자에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소지품을 모두 빼앗기고, 헤르만 포르테 백작과 싸우던 군복 차림 그대로였다. 하지만 날짜는 제법 흘러 있었다.

– 끼익.

감옥이라 하면 창살로 덮인 장면을 상상하기 쉬우나, 값비싼 철이 고작 죄수를 가두는 데 사용될 만큼 여유가 있진 않았다. 새까만 둡(이끼의 일종)이 덕지덕지 붙은 나무문이 열리며 한 중년의 사제가 들어왔다. 그는 “안녕하시오.” 인사를 돌려받지 못할 걸 알면서 인사를 건네곤 레오의 앞에 앉았다.

“오늘은 좀 어떻소? 식사는 하셨겠구려. 차… 날씨가 점점 추워지는구려. 이제 가을이니까 당연하지만, 추위는 매년 생소하지요. 아, 오늘 날씨는 꽤 맑았소. 당신도 햇볕을 좀 쬐어야 할 것인데, 간수한테 이야기해보겠소. 어디 보자, 그저께 우리가 어디까지 읽었더라… 그렇지. 주기도문을 배울 차례구려.”

아니다 이 양반아.

그가 이렇게 찾아와서 주기도문만 읊어준 것이 세 번째였다. 그러나 레오는 추궁하지 않았는데, 이것도 저 사제가 그의 입과 마음을 열게 하려는 속셈이기 때문이었다.

“전능하신 주신이시여.

이 땅에 은총을 내리시어 노력한 자가 배불리 먹게 하시고, 연인과 가족이 사랑하며 살 수 있게 이어준 주신이시여.

우리에게 시험을 내리소서.

불길과도 같은 업화(業火)에 우릴 던져 주소서.

우리는 우리가 당신의 자랑스러운 아들딸임을 증명하겠나이다. 주신께 받은 살과 피를 양분 삼아 찬란한 정신으로 보답하겠나이다. 나메르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사제는 레오가 무슨 생각을 하건 간에 주기도문을 마쳤다. 레오는 그의 민머리를 바라봤을 뿐이었으나, 그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어떻소. 참 쉽지요? 생각해보니 저번에도 읊어준 것 같은데, 기억이 안 나시나 봅니다.”

“…”

“자아. 그럼 주기도문도 배웠겠다, 이야기나 좀 나눠볼까요?”

“…”

“아차. 여기에만 계셨으니 할 말이 없으시겠습니다. 저는 오늘 환자들을 돌봤답니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군의관들은 정말 대단하더이다. 살을 실로 꿰매어 상처를 봉합하는데, 눈 깜짝하지 않지 뭐요. 저도 배워두면 좋을 것 같아서 요즘 노력하고 있지요. 상처를 봉합하고 치유의 축복을 내리는 편이 훨씬 경제적일 것 같아서요. 하지만 태도는 좀 고쳐줬으면 좋겠더군요. 좀 따끔할 거라니… 하하. 환자가 긴장하지 않게 배려한 것이겠지만, 그 군의관은 너무 능글맞소. 제가 그의 이야기를 했던가요? 그는…”

레오가 침묵하거나 말거나, 사제는 계속 떠들었다. 되려 언제 사형당할지 모를 죄수가 입을 닫고 있는 게 안타깝다는 태도여서 레오는 더더욱 입을 열고 싶지 않았다.

우린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

하필 레오가 기분이 정말 우울할 때 왔고, 그때부터 사제는 측은하다는 듯이 주기도문을 외우고, 잡담을 늘어놓았다. 과한 동정심에 레오는 더더욱 입을 열지 않았다.

그게 여태까지 이어진 것이다. 중년의 민머리 사제는 이제는 묻지도 않은 것까지 혼자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아, 그런데 제가 왜 전장에 나와 있는지 궁금하시겠습니다. 어이구, 이것 참. 일찍 말씀드렸어야 하는데 깜박했군요.”

…솔직히 그건 좀 궁금하다.

십자교회는 사제가 아스틴 왕국과 벨리타 왕국 간의 전쟁에 끼어들지 말 것을 명했다. 매번 발생한 일이라 놀라울 것도 없지만, 이 사제는 왜 여기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민머리 사제가 자신이 들고 온 호롱불에 머리를 빛내며 말했다. 호롱불보다 그의 머리가 더 밝았다.

“전 토리돔에 있는 교회에서 일하던 사제였습니다. 아, 오해하지는 마십쇼. 지금도 사제입니다. 그런데 전쟁이 터지고, 수도교회에서 이 전쟁에 관여치 말라 명하지 뭡니까. 나 원 참. 신성한 교회를 욕하고 싶진 않지만, 부당한 처사이더군요. 그래서 전 그냥 전선으로 나왔습니다. 죽어가는 병사들을 내버려 둘 수 없어서요. 제가 뭘 하든 그건 교회가 아니라 제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파문하라면 하라죠. 신을 받드는 데 사제직은 별로 중요한 게 아니니까요. 뭐… 파문하고 싶어도 한동안은 못 할 겁니다마는. 하하. 교회들이 다 문을 닫았거든요.”

“네?”

“어? 드디어 입을 여셨군요.”

“…”

레오는 도로 입을 다물었다. 사제는 허허롭게 웃으며 무척 기쁘다는 듯이 말했다.

“그렇게 나아가는 겁니다. 죽음은 끝이 아닌 시작입니다. 분명 두려우시겠고, 두려운 것이 맞지만 꽁꽁 싸매고 있을 것도 아니지요. 사람들은 자신이 언젠가 죽으리란 걸 잊고 싶어 합니다. 죽음만이 피조물에게 주어진 유일한 공평(公平)임에도요.”

제기랄. 그래서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레오는 몸이 바짝 달아올랐다.

교회가 문을 닫았다고?

처음 듣는 이야기다. 그가 기억하는 한, 교회들이 문을 닫았던 적이 없었다. 레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제가 계속 떠들어댔다.

“자신이 언젠가 죽으리라는 걸 되새김질하며 사는 게 오히려 좋습니다. 그러면 하루가 소중하고, 가족을 더욱 아끼며, 주위 사람들에게 예의 바르게 되지요. 자신이 언젠가 죽는다 생각하면 세상에 만연한 불신과 증오는 부질없습니다. 언젠가 저 사람도 죽고, 나도 죽을 테니까요. 그래야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겁니다. 뭐, 사랑까지는 저도 과하다고 생각하니 용서할 수 있다는 정도로 하지요. 서로를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가짐이 중요한 것입…”

“교회가 왜 문을 닫았습니까?”

레오가 기어이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사제는 눈을 똥그랗게 뜨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런 게 궁금하십니까? 보아하니 교회에 열심히 다니던 분도 아닌 것 같은데…”

“네. 궁금합니다.”

“뭐… 원하시면 말씀드리지 못할 것도 없지요. 사실 아주 최근 일입니다. 전장에서 부상병들을 돌보다가 벨리타 왕국군이 밀리면서 여기, 랑즈라에 와 있을 때 벌어진 거거든요. 왕명이랍니다. 벨리타 왕국의 왕께서는 십자교회가 전쟁에 사제를 동원치 못하게 한 게 무척 불쾌하셨던 모양입니다. 모든 교회를 폐쇄하라는 명이 떨어졌고, 추기경이 수도에서 쫓겨났답니다. 참 얄궂죠. 그 명령을 교회의 통신으로 하달했으니까요. 전달한 사람은 랑즈라가 점령당한 걸 몰랐나 봅니다.”

“…”

레오는 다시 침묵했다.

듣고 싶은 이야기는 다 들었기 때문에, 자신의 고민을 공유할 가치가 없기 때문이었다. 레오가 생각에 잠겼다.

‘여태껏 이런 일이 없었는데.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잠깐, 지난 소꿉친구 회차 때도 이랬었나?’

아니다.

시기로 따지면 지금은 레브가 버섯을 키우는 에우타 부족 마을에서 에넨을 구해줬을 무렵이었다.

거울로 레브를 깨웠으니 이번엔 또 다르게 진행되었을 테지만, 지난 회차와 비교하면 그랬다.

한데 그 이후에 루테티아에 갔을 때는 이런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온 대륙의 정보가 모이는 수도교회에서 성녀까지 만났는데, 이런 중대한 사건을 듣지 못했을 리 없었다.

그렇다는 건 지난 거지남매 시나리오와 관계없이 이번에 뭔가 변했다는 건데… 이번에 발생한 사건이라곤 아스틴 왕국군의 진격이 빨라진 것과 헤르만 포르테 백작이 죽었다는 것밖에 없었다. 설마 레브가 뭘 하진 않았을 테고.

‘전쟁이 불리하게 돌아가는 바람에 아스타로트 대공이 화가 났나? 그의 수족인 포르테 백작이 죽어서?’

벨리타 왕국의 왕, 카로만 드 타탈리아는 인간이 아니다. 인간이었겠으나 끝없는 고대부터 존재해온 아스타로트(Astroth) 대공에게 잡아먹혀 껍데기만 남아 있었다.

아무래도 그가 열 받은 모양이다.

자칫 성녀가 오르빌에 찾아가는 날에는 아주 박살이 날 것인데, 이런 행동을 한 걸 보면 뭐가 꼬여도 단단히 꼬인 게 틀림없었다.

아신이란 그런 존재였다. 엄청나게 강하고, 무시무시하지만 십자교회가 온 대륙에 뿌린 신력에 제약당했다. 공양 효율이 극도로 낮아서 힘을 모으기도 힘든데, 아무리 힘을 모아도 넘어설 수 없는 존재가 있었다.

주신. 아니, 주신까지 갈 필요도 없이 성녀(聖女).

[ 업적 : 성녀의 세례(洗禮) – 레오에게 {신력 간파} 능력이 부여됩니다. ]

지난 소꿉친구 회차 때 보았다. 성녀에게로 흐르는 무한한 신력을.

그녀의 몸이 터질 지경으로 들어찬 신력은 하늘까지 닿아 있었다. 주신의 신력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성녀를 가득 메웠고, 그게 너무나도 압도적이라 성녀의 몸에 가득 들어찬 신력은 불과 한 줌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아신들은 그녀를 절대로 넘어설 수 없다. 내가 오러블레이드로 대륙을 쪼개버리지 못하는 것만큼이나. 아니다. 그 이상으로 불가능하다. 그건 희망이라도 있지.

레오가 아신을 신경 쓰지 않게 된 계기였다. 아스틴 & 아스터 왕국의 왕들도 말파스와 할파스, 합쳐서 마르하스(Halmas)라는 아신에게 거의 잡아먹혔지만, 그들에게라고 뾰족한 대책이 있을 턱이 없었다.

조용히, 성녀의 눈에 띄지 않게 살아가는 게 고작이었고, 오리아스처럼 내 앞길만 막지 않으면 신경 써야 할 이유가 없었다.

생각을 정리한 레오는 다시금 침묵으로 빠져들었다. 이런 쓸데없는 생각이나 하기엔 당장 그가 처형당할지도 모를 처지였다.

설마 내가 처형당하겠느냐 생각하지만,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 그가 구금된 사유는 직권 남용죄와 왕실 모독죄. 사형을 피할 수 없는 죄목들이 붙어 있었다.

헤르만 포르테 백작과 대화하던 왕자가 어떤 결단을 내리기 전에 월권을 행한 게 문제였다. 사령관도 아닌 게 병사에게 명령했으니 직권 남용죄이고, 왕자를 무시했으니 왕실 모독죄다. 거기에 국가적 중대사를 멋대로 판단하여 결정지었으니 반역 혐의도 있었다. 만약 백작을 잡지 못했다면 옥에 가두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즉각 사형당했을 터였다.

레오 덱스터는 레안 드 예리엘처럼 왕족도 아니고, 레브 비자인처럼 야만인을 대표하는 장군도 아니었다. 일개 준기사가 이만한 일을 벌였으니 군법에 회부되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하지만 이건 아놀프 드 클라우스 왕자가 결정하기 나름이기도 했다.

법 위에 왕족이 있다.

왕이 하는 말이 곧 법이고, 왕자의 말이 곧 사법과 군사, 행정 명령인지라 그가 레오의 행동을 어떻게 해석해주느냐에 따라 결과가 크게 달라질 수 있었다.

물론 왕실 모독죄는 왕자라 할지라도 덮어줄 수가 없다. 클라우스 왕가의 대표자는 오직 왕(王), 하나뿐이라 왕자가 왕실 모독죄를 공식적으로 덮으려 들었다가는 후계자라 할지라도 왕에 대한 반역을 저지르는 것과 동일하게 취급받았다.

신분의 제약이 이렇게 강하다. 때로는 왕자조차도 어찌할 수 없는 게 있는 것처럼.

햇살 한 점 들어오지 않는 감옥에 갇혀있어서일까, 레오는 부정적인 생각만이 들었다. 처음부터 자신이 소드마스터라는 걸 밝혔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터였다.

이제 와서 밝히기엔 늦었다. 내가 이렇게 대단하신 소드마스터라 죽이면 손해일 거요, 주장하는 건 왕자가 그를 구금하기 전이라면 모를까, 인제 와서 하는 건 왕자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럼 이대로 꼼짝없이 사형을 당해야 하나. 지금이라도 저 나무문을 부수고, 레나를 데리고 달아나면…

아버지가 죽는다.

아버지뿐만 아니라 엘슨 큰아버지, 레나의 부모님, 친족으로 묶인 아이나르 부족 전체가 연좌제에 걸려 몰살당할지도 몰랐다.

그렇게 달아난다 해서 행복할까. 과연 레나가 행복해하고, 기사가 될 수나 있을까.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으음. 다시 말이 없으시구려. 시간도 늦고 했으니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내일모레 다시 오지요.”

사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상의 모든 불행을 떠안은 것만 같은 표정을 짓는 청년에게 무어라 말해주고 싶지만, 그가 스스로 입을 열지 않으면 그로서는 도와줄 방법이 없었다.

그저 이렇게… 종종 찾아와 주기도문을 외우고 호롱불을 밝혀주는 것 외에는.

‘그래도 오늘은 말 몇 마디라도 꺼냈으니까.’

민머리 사제는 그것만으로도 저 불쌍한 청년에게 한발 다가섰다고 생각하며 옥을 나섰다. 그가 호롱불을 들고 나가자 레오가 있는 독방이 어둠에 잠겼다.

똑. 똑.

간수와 대화하는 사제의 목소리와 물방울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레오는 ‘사형수의 담요’라 불리는 둡이 어제보다 더 번졌다는 생각에 몸서리쳤다. 신비하게도 둡은 죽음을 앞둔 사람 근처에서 빠르게 번져나갔고, 수많은 사형수를 공포에 떨게 하였는데

여긴 레오밖에 없었다.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A Princess Is Raised After Death, Desperately Making Her a Princess, Princess is Raised by Death, RPOD, The Princess Is Raised After She Dies, 正規エンディングまで異世界ループ転生, 공주는 죽어서 키운다
Score 8.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19 Native Language: Korean
Minseo was trapped in [Raise Lena]. With the emotionless text, “[Starting Raise Lena]” he became Leo and was imprisoned in an unfamiliar worl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Uh-huh?” “Leo? Why the long face? You! Are you messing with me again?” There, he met his childhood friend, Lena, skillfully picking berries. The lovely Lena. Leo marries her in a peaceful mountain village… [Lena is married! Congratulations.] [You have failed to clear Raise Lena.] [Restarting.] The happiest moment. Lena disappeared. An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Huh? Lena!” “Why have you been spacing out? And why are you looking at me like that? You wanna get beat up?” Lena, clad in thick leather armor and a sword on her shoulder, stared at him with unwavering eyes. It was a different scenar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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