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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66

264. 약혼관계 – 쿠스

잡목이 드문드문 우거진 평원에 피가 쏟아졌다. 레오는 온기가 채 가시지 않은 적병의 시신을 한데 모으고 근처 잡목 나뭇가지에 작은 매듭을 묶었다.

매듭에는 금일 날짜와 레나, 레오의 분대 번호가 적혔다. 적을 언제 처치했는지, 누가 이들을 잡았는지 기록한 것이다.

레오가 옥에서 풀려난 지 한 달이 흘렀다. 레나와 레오는 병사로 강등당했음에도 실력을 인정받아 마치 기사처럼 한 쌍으로 묶여 전장에 투입되었다.

한데 전선(前線)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길게 늘어나 있었다. 다른 분대를 찾으려면 수백 미터를 이동해야 할 정도로. 레오는 보급품을 충당하고자 갓 몰살한 적의 군장을 뒤적이다 고개를 들었다.

“왔어?”

“응. 그놈 발 한번 빠르네.”

레나가 달아난 적병을 처치하고 돌아온 것이었다. 그녀는 덜그럭, 허리춤에 치렁치렁하게 달린 장비를 부닥치며 레오의 곁에 주저앉았다.

“그러게 벗고 가지.”

“깜박했지 뭐야.”

레나는 그제야 벨트를 풀었다.

벨트에는 홀쭉한 물 가죽 주머니와 나무칼, 자잘한 도구, 부시(부싯돌을 쳐서 불이 일어나게 하는 쇳조각)와 부싯돌, 여분의 가죽끈 등이 담긴 주머니들이 매달려 있었다. 레나가 벨트를 갈무리하며 물었다.

“먹을 것 좀 나왔어?”

“조금. 그런데 이번에도 네가 싫어하는 거네.”

“으엑. 또 삶은 콩이구나. 벨리타 놈들은 어떻게 이런 걸 먹고 사나 몰라. 설탕물에 졸이고 만 거면 괜찮은데, 이상한 향신료가 섞여서…”

“향신료가 아니라 간장일 거야.”

“뭐든 간에, 내 취향은 아니야.”

레나가 검지 한마디만 한 크기의 콩을 집으며 투덜거렸다. 그래도 배가 고픈지 우물우물, 단맛과 짠맛이 공존하는 그것을 입에 털어 넣었다.

레오는 그녀가 먹는 문제로 고생하는 게 안타까웠지만, 그라고 해서 어쩔 도리가 있진 않았다.

식량 사정이 좋지 못하다.

끼니를 거를 정도는 아니나, 식량 배급이 종전의 삼 분의 이로 줄어들었다. 혹독한 결정이다. 허나 아스틴 왕국군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

벨리타 왕국 총사령관이 총력전을 선포했다. 징집 대상이 아니었던 주위 영지의 소작농들이 대거 징발되었는데, 이는 해당 영지를 소유한 귀족의 권리를 심각하게 침해하는 행위였다.

벨리타 왕국은 하나의 국가가 아니다. 수십 개의 귀족 가문이 뭉친 연합체로, 몇 가지 규칙이 있긴 하지만 각 가문의 영지와 소작농은 엄연한 그들의 소유였다. 심지어 전쟁에 참여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도 그들의 몫이었으나, (소드마스터 파벌인) 총사령관이 총력전을 선포해 전쟁 참여를 강제한 것이었다.

그 대가로 정계가 소란스러워지고 고발과 소송이 잇따를 테지만, 당장 전황은 벨리타 왕국에게 유리해졌다. 전쟁을 관망하던 영지들에서 병사가 일어나면서 아스틴 왕국군은 숨 막히게 드넓은 전선을 마주하였다.

여태껏 무시하고 내려온 마을들이 게릴라의 거점이 되었다. 포르테 백작이 이끌고 온 제1 기사단의 기사들이 소작농들과 함께 후방 보급로를 어지럽혔고, 진군하기 위해선 눈에 보이는 마을을 모조리 점령해야 했다. 속 터지게도 벨리타 왕국군은 빼앗길 것 같은 마을에 불을 지르고 달아나버렸다.

진퇴양난에 처했다.

그렇다고 헤르만 포르테 백작을 죽인 지금, 회군할 수는 없었다. 벨리타 왕국에게 명분을 쥐여준지라 군을 물리면 놈들이 만반의 대비를 마치고 거꾸로 침략해올 터였다.

아스틴 왕국군 수뇌부는 고심 끝에 결론을 내렸다. 기호지세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아스가르드 평원을 손에 넣어 우리가 승리했음을 만천하에 알리고, 아스트로 산의 요새, 토리돔을 수성하다가 요새와 평원을 포기하는 대가로 종전 협정을 맺자는 게 중론이었다.

그들은 협상 가능성을 끝내 놓지 않았다. 아놀프 드 클라우스 왕자가 벨리타 왕국의 정계 상황을 설명해 발상의 전환을 끌어냈다.

벨리타 왕국의 정계를 양분하던 소드마스터 파벌이 머리를 잃었다.

변경백도 아닌 사람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할 정도로 군권을 마음껏 휘두르던 헤르만 포르테 백작이 사라졌으니 곧 베나르 타티안 후작을 필두로 한 왕당파가 득세할 터였는데, 그 말인즉슨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지금 악을 쓰고 있는 적 총사령관이 실각할 가망이 있었다.

그러니 일단 이겨야 한다. 그리고 양보해야 한다.

전에는 왕자가 모욕당한 걸 빌미로 아스가르드 평원까지 욕심껏 먹어볼 생각이었으나, 지금은 랑즈라 앞의 강을 국경으로 삼는 것으로 감지덕지해야 할 처지였다.

결과적으로 아스틴 왕국군은 진격을 택했다. 그 결과가 이 모양이다.

아스틴 왕국군은 어마어마하게 넓어진 전선과 실낱같은 보급로를 유지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뒤늦게 도착한 지원군으로 후방을 확충하고 기존 부대는 지평선이 보이는 아스가르드 평원에 수백 미터 간격으로 흩뿌려졌다. 레오와 레나는 그 최전선에 있었다.

이런 상황이니 보급이 잘 이뤄지지 않았다. 백인대, 본대에서 종종 전령을 보내 식량과 물을 전해주곤 했지만, 배급량도 줄고, 그마저도 일주일에 한 번꼴이었다.

벨리타 왕국의 군량으로 허기를 채운 레나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에잉, 저기 또 온다.”

혀를 차며 검을 집었다.

깊어진 가을 찬바람. 하얀 입김이 허공을 수놓았다. 레오는 착 가라앉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전방을 응시하였다. 저 지평선 멀리에 우뚝 솟은 ‘아스트로 산’이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 * *

때로는 걸출함보다 성실함이 높게 평가받는다.

최전선에서 무료한 싸움을 이어가던 레오 덱스터는 ‘이대론 안 돼.’ 탈것을 소환해 적 진영을 헤집을까 고민했다. 하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수만 명이 맞붙은 전장에서 ‘내가 이렇게 잘났소.’ 건방을 떨고 싶지 않아진 그는 레나와 함께 병사로서의 임무를 묵묵히 수행해나갔다. 백인장의 명령이 전진이면 전진하고, 후퇴면 후퇴했다. 파도에 속한 작은 물결처럼 순응이란 것을 배웠다.

가슴속에 부글거리는 것이 없냐면 그렇진 않다. 그러나 자신이 가진 능력이 본디 자신의 것이 아니고, 자신이 레나의 삶과 행복에 저당(抵當) 잡혀 있음을 깨달았다.

내 마음대로 날뛴 대가가 레나의 강등이라니.

내가 소드마스터라는 뿌듯함보다 그게 더 슬프다. 레오는 마치 조련당한 말처럼 차분해졌다.

실은 먼젓번 밤에 탈것을 소환해보았다. 레나와 번갈아 불침번을 서며, 그녀가 잠들었을 때 아스가르드 평원을 향해 휘파람을 길게 뽑았다.

드넓은 평원과 달빛을 뚫고 달려온 말은 반테가 아니었다. 레브가 소환했을 땐 정이 많고 눈치 빠른 갈색 마(馬)였으나, 레오의 소환에 응한 건 새까만 흑마였다.

“…쿠스.”

– 푸르륵.

발굽이 넓어 승마보다는 ‘농경’에 적합한, 힘이 좋고 성실한 녀석이었다. 몇 날 며칠을 부려 먹어도 당근 하나로 만족하는 녀석이어서 레오는 낮게 실소하고 말았다.

주신이 내게 뭘 바랐는지 알겠다.

놈은 내가 레나를 업어 달리지 않고 주인공으로 삼아 ‘키우기’를 바라는구나. 그녀가 행복해하는 모습을 당근 삼아 만족하라고…

그래. 내가 졌다.

레오는 여태껏 교회에 가지 않았다. 레나가 노구화호의 앞발에 맞아 다쳤을 때를 제외하고. 소꿉친구 시나리오의 레브가 레아 때문에라도 교회에 들락이고, 9번째 회차, 동생을 찾다 찾다 못해 십자교회에 귀의했던 레안 드 예리엘과 달리 레오는 교회엘 가지 않았는데, 시나리오가 시작되기 전의 과거에도 그랬던 듯했다.

어째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었다.

여태까지는 인간을 도구 다루듯이 험하게 옥죄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 그를 거부해왔다. 그러나 이젠 내가 주신의… 민서의 도구라는 걸 인정해야만 하겠다. 그 결과가 레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라면… 받아들이겠다. 좆 같지만.

레오가 고개를 돌려 덤불 속에서 새근새근 잠들어있는 레나를 바라보았다. 어둠에 잠긴 끝없는 하늘과 달, 지평선에 닿은 평원이 있었으나 그의 눈에는 레나만이 보였다. 그녀만이 내게 주어진 모든 것이었다.

별똥별이 떨어지고, 레오가 고개를 돌렸다. 묵묵히 선 쿠스의 갈기를 쓰다듬어 잡념을 털어버렸다. 그러다 문득 생각했다.

‘나한텐 쿠스, 레브한테는 반테면… 레안에게는 우디인가.’

암말이라니. 얼굴이 번지르르해서 여자가 많이 꼬이는 그 녀석에게 잘 어울린다. 하얀 백마인 것도 왕자인 그에게 잘 어울리고… 설마 소환했을 때 다리를 절진 않겠지?

─ 생각하며 레오는 쿠스를 돌려보냈다. 쿠스는 붉은 달빛을 피해 어둠 속으로 녹듯이 사라졌다.

전쟁이 계속됐다.

벌을 받듯이 레나와 레오, 둘로만 편성됐던 분대는 레나가 십인장으로 승진하면서 커졌다.

어려운 전황 속에서도 공훈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그들을 인정한다는 듯이 레나는 머지않아 백인장에까지 올랐다.

레오는 지은 죄가 있어서 승진하지 못했다. 레나의 분대원으로 남아 있었는데, 그러는 편이 레오에게도 좋았다. 지휘관이 되어 레나와 갈라지기보단 그녀의 곁에 있는 게 훨씬 나았으니까.

그는 백인장이 된 레나에게 {전술}을 조언해주었다. 레나 아이나르는 훌륭한 검사가 될 소질이 있고, 이미 훌륭한 검사였으나, 지휘관으로서는 영 실격이었다.

전략과 병참 등을 이해하지 못해서 장군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하고 천인장이 되기도 무리였다. 10개의 십인대를 부리는 백인장이 그녀의 지휘관으로서의 한계였다.

이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레오도 무리하지 않았다. 백인대들끼리도 연계를 통해 큰 성과를 이룰 수 있지만, 흐르는 대로, 레나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로 조언해주었다.

“끄응. 머리 아파 죽겠네. 차라리 내가 나가서 싸우는 게 훨씬 속 편하겠다.”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지.”

“응? 어떻게?”

“너라면 적 백인장이… 쩌어기에 보이면 어떻게 할 거야?”

“당장 때려잡아야지! 어딜 감히 지휘관이 앞으로 튀어나와? 뒈질라고. 앗!”

“바로 그거야. 여기 앉아봐. 내가 그림으로 설명해줄게.”

“아~ 잠깐!”

레나가 손바닥을 번쩍 치켜들었다.

실처럼 가늘어진 눈으로 바닥에 그림을 그리려던 레오를 쏘아보며 말했다.

“내가 그렇게 바보는 아니거든? 그러니까 내가 백인장 깃발 들고서 앞으로 나가면 적들이 알아서 달려들 거다, 이거 아니야. 죄다 덤불에 숨어 있어서 찾기도 힘든데, 내가 미끼가 되면 된다는 거네. 오케이! 좋았어. 당장 가…”

이번엔 레오가 손을 들었다.

레나가 본대의 분대원들에게 명령하려는 찰나에 그녀의 입을 검지로 꾸욱, 막아버렸다. 분대원들은 이젠 그러려니, 못 본 척했다.

“에퉷퉷! 뭐야, 왜?”

“그냥 가면 안 되지. 네 역할을 대신할 사람을 정해줘야지. 그리고 적도 바보가 아니야. 아마 함정이라고 생각할걸? 그러니까 다른 분대들을 좀 노출시키면서… 되게 성질 급한 백인장인 것처럼 굴어야… 기사가 오는 건 괜찮은데, 마법사가 올 수도 있어. 그때는…”

“응. 응.”

레오가 쓱쓱, 바닥에 그림을 그렸다. 나와 레나가 있는 이상 소규모 접전에서 패할 리 없지만, 가능하면 그녀가 부대를 지휘하는 지휘관으로서 공을 세우기 바라서였다.

그편이 기사 서임을 받기에 더 도움이 될 듯했다.

기사는 때로는 현장 지휘관이기도 하다. 후방에서 소작농들을 이끌고 우리의 보급로를 어지럽히는 벨리타 왕국의 기사들처럼. 전술 능력이 갖춰져 있으면 좋은데, 무력은 이미 충분하고, 검증받을 루트가 있었다. 옌센 바일레이가 알아서 해주겠지.

“오…”

레나가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고마워.” 말하며 병사들에게 명령하였고, 레오는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게 내 역할이다.

레나가 빛날 수 있게 해주는.

이것도 기분이 썩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며 레오가 무장을 갖췄다. 레나의 백인대는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는 아스틴 왕국군 사이로 조용히 명성을 떨쳐갔는데…

“적이 보이지 않습니다.”

어느덧 겨울, 아스틴 왕국군이 아스가르드 평원을 반쯤 밀어붙였을 무렵이었다. 전령이 달려와 레나에게 보고를 올렸다.

“전진하라 하신 지역을 샅샅이 뒤졌습니다. 적이 없습니다. 어떻게, 더 전진할까요?”

전령이 연달아 도착했다. 그들은 입을 모아 적이 사라졌음을 알렸고, “현 위치에서 대기하라.” 천인대장을 만나러 간 레나 아이나르는 이게 비단 우리 쪽 전선에서만 발생한 일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전선 곳곳에 구멍이 뚫렸다.

악착같이 게릴라를 벌이던 기사들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종종 말을 타고 전장을 순회하던 마법사도 언제부턴가 보이지 않았다. 신병 교육조차 받지 못한 소작농 출신 징발병들만 전선에 남아 억울하게 죽어가고 있었다.

뭐지?

아스틴 왕국 수뇌부는 당혹스러워하면서도 군대를 진군시켰다. 놈들이 토리돔에 들어가 수성하기로 마음먹었나보다 생각하며 깎아지른 절벽이 웅장한 아스트로 산 앞에 당도해 거대한 요새를 바라보았으나,

그마저도 비어 있었다.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A Princess Is Raised After Death, Desperately Making Her a Princess, Princess is Raised by Death, RPOD, The Princess Is Raised After She Dies, 正規エンディングまで異世界ループ転生, 공주는 죽어서 키운다
Score 8.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19 Native Language: Korean
Minseo was trapped in [Raise Lena]. With the emotionless text, “[Starting Raise Lena]” he became Leo and was imprisoned in an unfamiliar worl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Uh-huh?” “Leo? Why the long face? You! Are you messing with me again?” There, he met his childhood friend, Lena, skillfully picking berries. The lovely Lena. Leo marries her in a peaceful mountain village… [Lena is married! Congratulations.] [You have failed to clear Raise Lena.] [Restarting.] The happiest moment. Lena disappeared. An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Huh? Lena!” “Why have you been spacing out? And why are you looking at me like that? You wanna get beat up?” Lena, clad in thick leather armor and a sword on her shoulder, stared at him with unwavering eyes. It was a different scenar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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