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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68

266. 약혼관계 – 약속

홍련달이 해를 잡아먹었다. 그러나 붉게 드리운 암막, 어둠 속에서도 거지 남매는 밝게 빛났다. 그들은 마치 하나인 것처럼 섬뜩한 핏빛에 휘감겨 화사하게 웃었다.

레오는 공황에 빠졌다. 토리돔의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마법사들은 저의 머리를 자명종처럼 흔들며 게거품을 뿜었다.

“오 오끄르륵… 칸타 티고페이악! 포, 포프르논 브뮤엑제카디누!”

경고! 경고를 알리는 외침이었다.

그들의 발작은 레안과 레리아나가 아스가르드 평원을 사뿐히, 허나 쏜살같이 가로질러 다가오면서 빠르게 잦아들었다.

‘도… 도대체.’

쟤들이 왜 저기에? 이건 대체…?

생각하고 자시고 할 틈이 없었다. 레오는 부리나케 레나를 안고 달아나려 했으나,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공포에 홀려 남매를 바라보았다.

레안과 레리아나는 어느덧 평원을 반쯤 가로질러 토리돔에 근접해 있었다. 근접했다 하기엔 먼 거리이지만 그렇게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남매가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붉게 타오르는 금빛 눈동자를 들어 서로를 바라보더니 입을 맞췄다.

불경한 혀 놀림.

인륜을 어긴 관계가 이어졌다. 레안과 레리아나의 몸에 땀과 홍조가 맺혔다. 그들은 마치 중요한 의식을 치르듯 느리게 움직였고, 한겨울, 두 여린 몸에서 뿜어진 증기가 형태를 갖춰나갔다.

홍련달 붉은빛에 비친 그 형상은 거대했다. 지평선에 닿은 아스가르드 평원이 비좁고, 요새 토리돔을 한 아름에 안을 법하다.

양의 동그란 뿔이 머리에 달렸다.

위아래로 찢어진 금빛 눈동자는 뱀을 닮았으나 얼굴은 사람이었다. 이마부터 시작된 말 갈기가 등을 지나 물고기 비늘이 돋은 꼬리까지 닿았고, 놈은 다섯 손가락, 독수리의 노란 갈퀴로 목을 어루만지며 저주받은 목소리로 환호했다.

– 아스트로! 내 고향아! 수천 년의 기다림 끝에 돌아왔노라.

아스타로트 대공(‘Astro’th 大公)의 목소리였다. 레오는 사시나무처럼 몸을 떠는 레나를 끌어안고 그 고대부터 존재해온 아신의 강림을 넋 없이 바라보았는데…

“흐, 흐아아아악!”

“…오, 오빠?”

레안이 황급히 동생에게서 떨어졌다. 성기에 이슬이 어려 있었다. 레리아나는 얼굴이 창백해진 오라비를 순간 알아보지 못했다.

황금빛을 빼앗긴 눈동자와 머리, 낯선 상황이 혼란스럽다.

난 분명 오빠의 손에 이끌려 마차에 오르고 있었다. 빨리 달아나야 한다는 말에 “왜?” 물어본 게 그녀가 기억하는 마지막 장면이었다.

“오빠. 이, 이게 무슨…?”

레리아나는 제가 옷을 입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망연자실, 그녀의 앞에서 알몸으로 무릎 꿇은 오라버니의 깨진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경악에 물든 그의 얼굴엔 생기가 없었다. 레안은 정신이 나간 표정으로 그와 마찬가지로 색깔을 잃어버린 동생을 바라보다 “꺼… 꺼어어어어어억…” 목 매인 신음을 흘렸다.

아스타로트 대공이 ‘황금빛’ 눈동자를 굴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공포스럽게 둥근 눈으로 빙그레, 그가 사랑하는 남매에게 말했다.

– 왜 그래? 너흰 서로 사랑했잖아. 아, 그땐 ‘바네카 라오노’가 묘약을 먹여서 그랬었던가? 하하하! 아무렴 어때. 난 너희의 모든 걸 원해.

남매가 타고난 모든 걸 빼앗았다.

더 가져갈 게 없어 이젠 쓸모없지만, 사랑에 쓸모를 따질 이유가 있을까. 아스타로트가 남매를 한 손에 움켜쥐었다. 레리아나가 비명을 지르고, 레안이 참담하게 바둥거렸다.

– 토들러 아키우넨. 네가 약속했잖아. 네 피에 숨어있던 날 깨우며 레이시아를 다시 만날 수만 있으면 뭐든지 하겠다고. 난 약속을 지켰어. 이번엔 네가 지킬 차례야. 우리는 영원히 함께할 거야.

조금은 질책하듯이 말한 아스타로트가 레안과 레리아나를 제 오른쪽 어깨에 박아넣었다. 어깨는 어딘가 비어있던 것처럼 남매를 집어삼켰고 거기서 달콤한 공포가 흘러나왔다.

스흐읍. 아스타로트가 대기를 들이마셨다. 짜릿한 충만감에 휩싸여 평원에 발을 디뎠다. 그가 먼 옛날에 뿌려둔 검은 이끼가 발굽을 감쌌다.

공황에 빠진 제물들.

아스타로트가 인간들로 북적이는 토리돔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는 그쪽엔 관심이 없었다. 인간은 오르빌에서 넘치도록 먹었다. 부리나케 회군해온 군대도 모조리 그의 제물이 되었다. ‘1’의 효율로.

아스타로트는 제 키만 한 아스트로 산을 독수리 갈퀴로 파헤치기 시작했다. 절벽이 무너져 토리돔을 덮쳤고, 그는 감상에 젖어 들었다.

아아. 레오넬이 여기서 뛰어내렸었지. 그는 바위에 묶인 날 견과류와 공포를 먹여 키우고, 풀어주었어.

더러운 주신이 그를 앗아갔지만, 레오넬은 나를 다시 불렀다. 사랑스럽게도 제 피를 걸고 맹세했다.

자신의 {혈통}을 주겠노라고. 후손의 피에 숨어지낼 수 있게 해주며 우리가 다시 만나는 날,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걸 넘기겠노라고.

그건 까마득한, 일만 년의 미래를 바라본 약속이었다. 그럼에도 흔쾌히 받아들였다.

너를 사랑하니까.

너와 네 동생만이 내가 사랑하는 유일한 생물이니까.

아스타로트는 레이시아가 낳은, 레오넬의 아들의 피에 숨어 수천 년을 기다려왔다. 아카이아 제국 황족의 피를 따라 언제고 반드시 돌아올 그를 기다렸건만…

– “네가 왜! 왜 거기에 있느냐!”

이천오백 년 전, 레오넬은 황족이 아닌 몸으로 나타났다.

아즈라.

그는 쓸모없는 평민에, 더러운 주신을 모시는 사제였고, 또! 약속을 저버리며 아카이아 제국의 황제인 나를 몰아붙였다.

힘껏 싸웠지만, 아스타로트는 얄팍한 나무 지팡이를 든 아즈라를 어찌하지 못했다.

마법이 통하지 않았다. 자유로워야 할 마나가 주신의 명을 받아 꽁꽁 얼어붙었고, 아스타로트는 달아났다. 바로 여기, 아스트로 산으로.

하지만 아즈라는 내가 이곳으로 도망칠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뒤따라왔다. 모진 지팡이질을 견디다 못한 아스타로트는 황제의 몸을 벗어던졌다. 아카이아 제국의 남부를 총괄하는 도시, ‘바도보나’로 날아가 그곳을 담당하던 다른 황족의 피에 숨어들었다.

이젠 못 찾겠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게 된 아스타로트는 그 황족의 정신을 차지해나갔다. 그는 황제의 동생이었는데, 공양 효율이 높지 않은 몸이어서 제쳐둔 바 있었다. 그래도 황제를 제외하면 그가 아는 황족 중에서 가장 효율이 좋은 녀석이었다.

0.008 정도로.

그나저나 빌어먹을. 레오넬이 또 약속을 깨버렸으니 이를 어쩐다. 아니, 그보다도 황족이 아닌 몸으로 태어나면… 내가 어찌할 방도가 없지 않은가.

아스타로트는 수심에 잠겼다.

허나 십수 년 뒤, 아즈라가 기어이 그를 찾아냈다. 온 대륙을 돌아 찾아온 아즈라는 전보다 훨씬 강해져 있었다. 그는 웬 산골짜기 소녀와 사제들, 당시로서는 생소한 ‘성전사’라는 기사를 동료로 삼아 나타났다.

이때만큼은 아스타로트도 참지 않았다. 위대한 제국, 황족의 이름으로 바도보나의 시민을 몰살하며 그가 사랑하는 거짓말쟁이와 맞서 싸웠다.

그러나 도저히 이길 수가 없었다. 아즈라는 강했고, 그의 동료들 또한 만만찮았다.

아스타로트는 뒤늦게 달아나야 함을 깨달았지만, 그때는 이미 늦었다. 저번에는 없었는데, 아즈라가 황동 술잔을 들어 창공을 새하얀 돔으로 덮어씌웠다.

죽는다.

아즈라의 하얀 눈썹이 휘날렸다. 아스타로트의 어깨에 지팡이가 박히고, 소멸하려는 찰나 아스타로트는 반짝, 살아날 구멍을 발견했다.

두려움 따위라곤 없는 사제와 성전사들, 하얀 돔 안에는 달아날 곳이 없었다. 그러나 저 구석의 산골짜기 소녀에게서 두려움이 느껴졌다.

반색하며, 아스타로트가 외쳤다.

– 인간의 마음에 공포가 있는 한! 나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반드시, 도래할 것이다!

그건 소녀의 두려움을 매개로 한 약속(約束, 맺을 약, 묶을 속)이었다.

아스타로트의 혼이 소멸했다.

허나 아즈라는 놈을 또 놓쳤음을 한탄했다. 한숨을 내쉬며 ‘회차’를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나 고민하였으나, 그러려면 산골짜기 소녀 ‘레이나’를 죽여야만 했다. 아즈라에겐 여벌의 목숨이 남아 있지 않았다.

무너지려던 자신을 번번이 붙들어준 소녀를 차마 죽일 수 없었던 아즈라가 기도를 올렸다.

자신이 이룬 업적이 불완전함을 인정하며, 인간에게 악과 맞서 싸울 힘을 내려달라고. 자신의 모든 걸 바칠 터이니 이 소녀를 죽이지 않게 해달라고 빌었다.

그러자 하늘이 열렸다.

가시 면류관을 쓴 고결한 희생의 여신 보아르가 빙긋 웃으며 나타나 소녀에게 찬란한 빛을 내리쬐었다. 레이나는 성녀가 되고, 아즈라는 자신이 곧 사라지리란 걸 알아차렸다.

아즈라가 레이나의 마음에서 튀어나온 두려움을 거둬들였다. 아스타로트가 건 약속을 돌돌 말아 황동 술잔에 집어넣었고, 술잔을 뒤집어 봉인해버렸다. 그는 이 지역, 바도보나 성 근방에서는 누구도 살아선 안 된다는 말을 남기며 사라졌다.

그렇게 아스타로트의 도래는 수천 년이 미루어졌다. 아카이아 제국은 성녀를 중심으로 세워진 십자교회와 손잡고 대륙의 모든 이종족을 토벌했다. ‘인간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천명하며 황금기를 구가하였고, 역사가 으레 그러하듯, 쇠퇴와 번영을 반복해 지금, 7 왕국 시대를 맞이하였다.

아스타로트는 어쩌면 영영 도래하지 못했으리라. 제1 성인으로 추대된 아즈라의 경고가 지엄해 누구도 바도보나 성터에 접근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우닌 왕과 레티이 여왕이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고, 어느 날, 아즈라 성인에 대해 알지 못하는 한 북부 출신의 야만인이 바도보나 성터에 발을 들였다.

“이건 뭐다냐?”

보리스 아이나르. 그 젊고, 혈기 왕성한 청년이 황동 술잔을 챙겨 바도보나 성터를 떠나버렸다. 자신이 무엇을 풀어준지도 모른 채.

* * *

갈퀴에 무언가가 걸렸다.

먼 과거를 회상하며 감회에 젖어 있던 아스타로트가 정신을 차렸다. 아스트로 산을 파헤치기에 집중했고 이윽고 과거에 자신을 속박했던 그것을 찾아내었다.

움켜쥐어 잡아당겼다. 드드드드득, 산을 부수며 줄줄이 튀어나온 그것은 ‘굴레’. 레오넬이 풀어주기 전까지 이걸로 바위에 묶여있었다.

오직 레오넬만이 내 굴레를 풀어줄 수 있었다. 그가 특별한 이유다. 하지만, 아스타로트는 굴레에서 풀려난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주신은 나를 직접적으로 어찌할 수 없다. 굴레에서 풀려났으니까.

그러나 이게 존재하는 한, 그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로울 수가 없어서 아스타로트가 굴레를 잡아당겼다. 이로 깨물고, 갖은 방법으로 애썼지만 굴레는 도무지 끊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직도 힘이 부족한가. 아스타로트의 눈이 토리돔을 향했다.

무너진 절벽에 반쯤 매몰된 토리돔에는 공포에 질려 덜덜 떠는 인간들이 있었다. 한데 개중에 멀쩡한 인간이 있었다. 그가 아스타로트에게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아스타로트. 협상을 하자.”

그는 레오가 아니었다.

까마귀 문신을 한 야만인 전사가 흉악한 날붙이와 같은 붉은빛에 휩싸여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러는 한편, 레오 덱스터는 지릴 것만 같은 공포와 갈기갈기 찢어지는 흉폭함 사이에서 정신을 다잡으려 안간힘쓰고 있었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다그쳐 레나를 안고 달아나려 했으나, 일어날 리 없었던 일식(日蝕)과 불길하게 빛나는 홍련달. 사형수의 담요로 뒤덮인 대지와 이를 굽어보는 아스타로트 대공. 어둠에 젖은 요새에서 강철로 된 날개를 펄럭이는 붉은 까마귀, 말파스.

달아날 길이 보이지 않았다.

레오는 덜덜덜, 몸서리치는 레나 아이나르를 끌어안은 채 주춤주춤 뒷걸음치는 게 고작이었다. 아스타로트 대공이 웃음을 터뜨렸다. 평원의 모든 공기를 집어삼키며.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A Princess Is Raised After Death, Desperately Making Her a Princess, Princess is Raised by Death, RPOD, The Princess Is Raised After She Dies, 正規エンディングまで異世界ループ転生, 공주는 죽어서 키운다
Score 8.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19 Native Language: Korean
Minseo was trapped in [Raise Lena]. With the emotionless text, “[Starting Raise Lena]” he became Leo and was imprisoned in an unfamiliar worl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Uh-huh?” “Leo? Why the long face? You! Are you messing with me again?” There, he met his childhood friend, Lena, skillfully picking berries. The lovely Lena. Leo marries her in a peaceful mountain village… [Lena is married! Congratulations.] [You have failed to clear Raise Lena.] [Restarting.] The happiest moment. Lena disappeared. An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Huh? Lena!” “Why have you been spacing out? And why are you looking at me like that? You wanna get beat up?” Lena, clad in thick leather armor and a sword on her shoulder, stared at him with unwavering eyes. It was a different scenar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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