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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69

267. 약혼관계 – 자취방

– 이게 누구야. 아하하하하하하! 붉은 까마귀, 말파스로구나. 이번에 네 덕을 좀 봤네.

“레나, 레나. 정신 차려. 제발.”

레오가 소리 죽여 말했다. 그러나 레나는 공포에 질려 발을 떼지 못했고, 일렁이는 달빛 아래에서 까마귀 문신을 한 전사가 차분히 제안했다.

“아스타로트. 북부를 내게 다오. 네가 있는 남부를 탐내지 않겠다. 나도 주신에게 원한이 있다.”

다섯 장(丈)에 달하는 강철 날개가 그의 등 뒤로 넘실거렸다. 깃 하나하나가 도검과 같은 날붙이로 이뤄져 흉악하기가 그지없었다.

하지만 도저히 아스타로트 대공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양 머리 대공은 네모난, 가지런해서 더 소름 끼치는 이를 드러내며 비웃었다.

– 저런. 그것참 안타깝네. 그런데 어쩌지? 네가 나랑 협상할 처지가 된다고 생각해?

“…”

– 깃털이나 다듬으면서 기다리고 있어, 말파스. 전쟁에서 이겨서 기분 좋았을 텐데… 큭큭큭. 날개를 허무하게 뺏기고 싶지 않으면 힘내라구. 너희 소드마스터가 가만있지 않겠지만 말이야. 그러고 보니 우리 소드마스터를 죽여준 놈은 어디 있을까? 옌센이랑 레오, 레나라고 들었는데…

“협상하지 않겠다는 건가?”

야만인 전사가 끈질기게 물었다. 아스타로트는 피식, 그 전사를 손톱으로 찍어버리는 것으로 답변을 대신하였다.

까마귀 깃털이나 날개, 꼬랑지 등의 문신을 한 아비커(avviker) 부족 출신 야만인은 그 전사 외에도 많았지만, 말파스는 더 이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아스타로트는 킬킬거리며 허리를 숙여 토리돔을 둘러보았다. 거대한 독수리 갈퀴로 짚은 성벽이 와르르 무너지고, 그는 찾으려던 사람을 금방 발견할 수 있었다.

레오 덱스터와 레나 아이나르. 아이나르 부족의 관례에 따라 깃발 두 개에 신랑과 신부의 이름이 대문짝만하게 걸려있어서 못 찾을래야 찾지 못할 수가 없었다.

아스타로트는 헤르만 포르테 백작을 죽여준 인간에게 감사를 표하려 고개를 낮추었는데…

– 아, 거기. 네놈들이로구나. 고맙다. 덕분에 마음 편히 강림할 수… 응? 뭐야, 이름이 잘못됐잖아. 레이 덱스터, 레라 아이나르인데 왜…

그 순간 폭풍이 몰아쳤다.

레이 덱스터를 중심으로 파동이 일어나 아스가르드 평원 너머로까지 번져나갔다. 아스타로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레오넬?

어디서부터 놀라야 할지 모르겠다. 마치 아즈라처럼, 토들러 아키우넨의 환생이 하나 더 있는 게 놀라웠으나, 그는 곧 이놈이 신의 장난감이라는 걸 눈치채버렸다. 이게 어떻게 가능하지? 생각한 아스타로트가 이윽고 무언가를 깨닫고는 분통을 터뜨렸다.

– 제기랄! 난 굴레에 얽매이지 않았단 말이다! 그런데 세계(世界)를 이딴 식으로 속박하다니!

세계가 통째로 복사(複寫)되었다. 굴레에 얽매였든, 얽매이지 않았든. 레오넬이 동시대에 둘 이상 존재할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그렇다면 주신은, 이 세계는…

마음껏 복사된 것이다. 주신의 마음에 쏙 드는 세계만 남고 나머지는 버려진 게 틀림없었다.

아스타로트가 분노에 찬 괴성을 내질렀다. 그러는 한편, 진명이 밝혀짐과 함께 레이 덱스터의 눈앞으로 텍스트가 떠올랐다.

[ 업적 : 귀속 아이템, 3/3 ]

[ ‘귀속 아이템’ 업적이 소멸됩니다. ]

[ 퀘스트 : 수호자, 3/3 – 다른 레오를 모두 만났습니다. 귀속 아이템을 전부 개방했습니다. 세 명의 소드마스터를 만났습니다. ]

[ ‘수호자’ 퀘스트가 해금됩니다. ]

[ 퀘스트 : 수호자(守護者), 1/4 – Barbatos ]

메시지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끼릭끼릭, 뭘 계산하는 듯하더니 몇 줄의 텍스트가 세 장의 삽화(揷畫)와 함께 추가되었다.

[ 소꿉친구 레나의 진명을 알고 있습니다. 그녀에게 {신성}이 부여됩니다. ]

[ 약혼관계 레나의 진명을 알고 있습니다. 그녀에게 {마나 육체}가 부여됩니다. ]

[ 거지남매 레나의 진명을 알고 있습니다. 그녀에게 {면역}이 부여됩니다. ]

첫 번째 삽화에는 은빛 아우라에 휩싸인 레아가 담겨 있었다. 그녀는 흡사 성녀처럼 빛났다.

세 번째 삽화에는 금빛 눈동자를 멀뚱멀뚱 반짝이는 동생, 레리아나가 평범하게 그려져 있었고, 두 번째 삽화는 구태여 볼 필요가 없었다.

레라 아이나르의 몸에서 푸른색 광채가 뿜어졌다. 그 은은한 광채는 점차 잦아들었고, 공포에 질려 몸을 떨던 레라가 진정을 되찾아갔다.

“레라! 레라! 괜찮아? 정신이 들어? 말 좀 해봐.”

“허억! 레, 레이. 저게 도대체…”

“설명할 틈이 없어. 우리 당장 달아나야 해. 뛸 수 있겠어?”

레라 아이나르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가까스로 제 발로 섰다 뿐이지 몸이 여전히 걷잡을 수 없이 떨리고 있었다.

강림한 아스타로트. 그가 줄기줄기 뿜어내는 공포 앞에서 그나마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레이밖에 없었다.

아니다. 사실은 한 사람이 더 있었다.

“신이시여! 전사들에게 용기를! 이들이 맞서 싸울 적에게 선악의 철퇴를 내리소서!”

주신의 신력을 품은 민머리 사제였다. 그가 신력을 쥐어짜 주위 기사들에게 축복을 내렸다. 축복을 받은 기사는 숨을 헐떡이면서도 검을 다잡을 수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레이 덱스터는 아스타로트와 싸울 생각이 없었다. 전혀!

저놈과 싸우는 건 자살행위다.

그가 아신이라는 걸 제쳐놓고 생각하더라도 작대기를 휘두를 뿐인 검사가 그야말로 산만 한 덩치의 저 괴물을 상대할 방도가 없었다.

지금은 도망치는 게 맞다. 성녀를 불러오든 어쩌든…

레이가 다짜고짜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힘 좋은 흑마, 쿠스가 다그닥다그닥 계단을 뛰어 올라왔고, 레이가 레라를 들어 등에 앉혔다.

레라의 뒤에 앉아, 레이가 쿠스의 배를 박찼다.

히히힝! 쿠스가 군데군데 바위가 떨어진 계단을 내달렸다. 레이는 “비켜라! 비켜!” 소리치며 공포에 질려 하늘을 바라볼 뿐인 병사들을 스쳐 지나갔다.

“헉…! 헉! 끄으… 꺄아아아악! 오, 오빠!! 사, 살려…”

바로 그때, 아스타로트가 제 어깨에 박아넣었던 레안과 레리아나를 끄집어냈다.

그는 알몸의 남매를 잠시 움켜쥔 채 갈등하다가 미련을 버렸다. 수백 미터 높이. 아스타로트가 남매를 성벽에 내동댕이쳤다.

퍼석! 피가 튀기고, 그의 분노는 이제 레이와 레라에게 향했다.

– 이 빌어먹을 복제품들아! 감히 어딜 달아나느냐!

아스타로트가 울분에 젖어 거대한 손바닥을 내리쳤다. 나도 너희도, 모두가 복제품이다. 그는 불같이 성을 내며 가증스러운 신의 장난감을 부숴버리려 하였는데…

– 쩌엉!

독수리 갈퀴가 달린 손바닥이 레이와 레라를 내리찍은 순간, 청색의 빛이 터졌다. 둥그스름한 반구(半球)가 말을 탄 그들을 감싸 안았다.

[ 목걸이 – 예쁜 목걸이다. ]

그들을 보호해준 건 레라의 목에 걸린 청색 목걸이였다. 레이는 식은땀을 훔치며 쿠스를 더욱 재촉해 무작정 북쪽으로, 아스타로트 대공의 반대편으로 말을 몰았으나…

사실은 그도 알고 있었다.

절대로 도망치지 못하리라는 걸.

아스타로트가 훌쩍, 고작 한 걸음으로 토리돔을 건너뛰었다. 공포스러운 존재가 등을 보이고, 잠시나마 안도의 한숨을 돌린 민머리 사제가 한탄했다. 그는 쯧쯧쯧, 생에 미련이 없는 태도로 저 청년을 옥에서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세상의 모든 불행을 떠안은 듯한 표정을 짓던 청년이었다. 삶에 미련이 많은 티를 내면서도 입을 꾸욱 닫고 열지 않던.

이름이… 뭐였더라?

아, 그래. 여기 적혀 있군. 레이 덱스터.

어쩌다 일이 잘 풀려서 영웅으로 대접받을 때도 그는 웃지 않았다. 약혼녀라는 사람과의 결혼식이 열리고서야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는데… 어째서 그동안 그런 태도를 보여왔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는 거대한 불행에 쫓기고 있었다.

민머리 사제는 “왕자님! 어서 대피하십시오! 기사님들도 어서!” 사람들을 재촉함과 함께, 우리에게 시간을 벌어준 청년을 위해 기도했다.

저들이 무사히 달아날 수 있기를.

그리고 아까 못다 한 혼인 기도문을 마저 읊어주었다.

[ 축하합니다! ]

“뭣? 아, 안 돼!”

아스타로트의 발길질을 피해 말을 달리던 레이는 시야가 붕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다급히 팔다리를 휘저었으나 메시지는 무심히 떠오를 뿐이었다.

[ 레나의 꿈이 이뤄졌습니다. ]

[ 진엔딩 2/2 : 완료 ]

[ 레나 키우기를 플레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든 시나리오를 클리어하셨습니다. 플레이어께서는 게임을 종료하실 수 있습니다. ]

‘이건 아니야! 이건 아니라고!’

차라리 날 죽여! 이, 이렇게 끝날 순 없어! ─ 고함쳤지만, 부질없었다. 동그란 구체가 된 레이는 동실동실, 붉게 물든 하늘로 날아올랐다.

진엔딩이다. 당신이 만든 엔딩을 감상하라는 듯이 느리게 날아오르는 동안 레이가 절규했다.

아주 잠깐 정신이 분리되며 머뭇거렸기 때문인지 쿠스가 아스타로트의 발길질에 채였다. 저쪽에 남겨진 레라와 레이는 수십 미터를 날아가 나뒹굴었다. 덤불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결말을 알고 있었다.

‘레… 레라! 레라! 아… 아아아… 아아아아아아악!!’

이딴 것이 진엔딩이라니.

레이는 피를 토할 것만 같았다. 동그란 구체가 아니었다면 실지로 그러했으리라.

하지만 그것조차 끝이 아니었다. 아스타로트가 정확히 그의 눈높이로 날아오른 레이를 동그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무시무시하게 고개를 들이밀며,

이것이로구나.

이게 신이 만든 장난감이로구나.

레이의 정신을 덮기 시작한 주신의 정이십면체를 노려보았다. 익숙한 어둠이 깔리며 엔딩 크레딧이 떠올라야 할 것이었는데… 아스타로트가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 쿵!

– 쿵! 쿵!

– 쿵!

– 쾅!

– 쾅! 쾅!

– 쩡!

수없이 두드린 끝에 정이십면체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홍련달빛이 내부로 스미고, 금이 간 부위에 손을 넣어 뜯어버렸다.

마지막엔 아스타로트가 팔을 들었다. 달빛을 그러쥐어 붉게 타오르는 손으로 꺼져라!!! 외치며 정이십면체와 레이의 정신을 후려쳤다.

“커허억!”

새빨간 독수리 갈퀴에 맞아 날아간 그는 하염없이 떨어졌다. 세상이 빙글빙글 회전하고, 구역질이 치밀어오를 즈음에 털썩, 민서가 바닥에 떨어져 신음했다.

몸이 깨지도록 아프다. 부러진 게 틀림없는 갈비뼈를 고통스럽게 매만지던 민서는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몸이 아파? 내가?

눈을 떴다.

암막 커튼이 달려 어두컴컴한 가운데, 노트북 화면이 빛났다. 그가 떨어진 바닥엔 벗어 던진 옷가지가 카펫처럼 깔려 있었고, 방음이 되지 않는 벽 너머에서 비트가 빠른 대중가요가 여과 없이 들려왔다.

“어어?”

민서가 고개를 들었다.

너저분한 책상. 그 위에 절반은 풀고, 절반은 새것처럼 깨끗한 공무원 수험서들이 즐비하다. 몰래 핀 담배 냄새와 패배감이 감도는 이곳은…

그의 자취방이었다.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A Princess Is Raised After Death, Desperately Making Her a Princess, Princess is Raised by Death, RPOD, The Princess Is Raised After She Dies, 正規エンディングまで異世界ループ転生, 공주는 죽어서 키운다
Score 8.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19 Native Language: Korean
Minseo was trapped in [Raise Lena]. With the emotionless text, “[Starting Raise Lena]” he became Leo and was imprisoned in an unfamiliar worl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Uh-huh?” “Leo? Why the long face? You! Are you messing with me again?” There, he met his childhood friend, Lena, skillfully picking berries. The lovely Lena. Leo marries her in a peaceful mountain village… [Lena is married! Congratulations.] [You have failed to clear Raise Lena.] [Restarting.] The happiest moment. Lena disappeared. An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Huh? Lena!” “Why have you been spacing out? And why are you looking at me like that? You wanna get beat up?” Lena, clad in thick leather armor and a sword on her shoulder, stared at him with unwavering eyes. It was a different scenar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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