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Chapter 27

27화 기사와 용병 (2)

27화 기사와 용병 (2)

뭐라고?

나는 침착을 가장하며 앙리의 얼굴을 바라봤다. 우리를 떠보는 건가? 아니면 정말로 마을이 불타 없어졌어?

“왜 거짓말을 했지?”

대답해야 한다. 하지만 앙리의 말이 사실인지 판단하는 것이 먼저다. 만약 마을이 사라지지 않았는데 그것을 긍정한다면, 우리는 또 한 번 거짓말하는 것이 된다.

내가 읽은 무한회귀의 내용을 되새겼다. 그러자 어떤 기억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소설 초반에 카인이 죽였던 용병단장. 그가 술집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었다.

‘오랜만에 마을을 찾았는데 변한 것 없이 그대로더군. 시체마냥 새까맣게 타버린 건물들이 2년 전의 그날과 눈곱만큼도 달라지지 않았더란 말이야! 빌어먹을 늙은이. 지옥에나 떨어지라지!’

그곳이 보라클레르 마을이라는 언급은 없었다. 하지만 시기적으로는 딱 맞다.

나는 앙리의 얼굴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거짓말해서 죄송해요 기사님. 무서워서 그랬어요. 사실 저희는 보라클레르 마을 출신이 아니에요.”

“그럼 어디에서 왔지?”

“페르디나에서 왔어요. 물론 저희끼리는 아니고, 보호자 용병이 있었어요. 그가 시험을 통과하면 수습 용병을 시켜준다고 했어요.”

이것은 실재하는 페르디나 용병들의 전통이다. 마치 기사가 되기 위해 종자부터 시작하는 것처럼, 페르디나 용병에게는 그들만의 룰이 있다.

“그 보호자 용병은 어디에 있지?”

“몰라요.”

“모른다고?”

“그가 잠들었을 때 몰래 도망쳤거든요. 그 용병이 저에게 몹쓸 짓을 했어요.”

나는 겁이 난다는 듯 몸을 떨며 슬쩍 모자를 떨어뜨렸다. 그러자 모자에 가려졌던 나의 금발이 바람에 흩날렸고, 몇몇 기병이 나직이 탄성을 뱉었다.

기병 중 하나가 앙리에게 귀엣말했다. 나는 얼핏 들리는 말속에서 ‘광산’과 ‘노예’라는 낱말을 포착했다. 역시 이들은 탈출 노예에 대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분위기로 보아 우리를 잡기 위한 추격대는 아닌 듯하다.

‘그렇다면 이들의 목적은.’

답은 금세 떠올랐다.

이들은 페르디나로 가고 있다.

이유는.

‘용병단과 계약하기 위해서.’

에티엔이 죽고 보름이 넘게 지났다. 적어도 브리앙스 백작령과 분계선을 맞댄 ‘로슈포르 후작령’과 ‘오비니 백작령’에는 소식이 닿았을 테지. 이 세계에는 첩자들이 셀 수 없이 많으니까.

호시탐탐 브리앙스 백작령을 노려왔던 로슈포르 후작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브리앙스 백작도 그것을 안다. 그래서 페르디나와 가장 가까운 루베르 자작령에 명을 내렸고, 앙리 몽포르가 이 중차대한 임무를 맡게 된 거다.

‘앙리는 서둘러 페르디나로 가야 해. 지금 그에게 중요한 것은 탈출 노예를 잡는 것이 아니라 페르디나의 우수한 용병을 선점하는 거야.’

그런 와중에 우리에게 온 것은 아마도 그의 올곧은 성품 때문일 것이다. 어린아이 다섯이 이런 허허벌판을 지나는 것이 마음에 걸렸겠지.

“괜찮아요. 저희는 알아서 페르디나로 돌아갈 수 있어요.”

“너희들. 정말로 페르디나에서 온 것이 맞나?”

조금 전 앙리에게 귀엣말했던 기병이 나섰다.

“네, 맞아요.”

“그렇다면 저 검은 어디서 났지? 페르디나에는 수습 용병이 되기 전에는 검을 소지할 수 없다는 규율이 있을 텐데.”

빌어먹을.

“혹시 그 보호자 용병을 죽이고 검을 훔쳐 달아나던 길이 아니냐? 그게 아니면.”

기병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마석 광산을 탈출한 노예라든지.”

나는 본능적으로 세실의 팔을 붙잡았다. 여기서 세실이 나서면 모든 것이 허사가 된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가 수습 용병을 꿈꾸고 있다고 말한 이상, 검을 가진 이유를 설명할 길이 없다.

용병의 것을 훔쳤다고 할까? 아니다. 그러면 절도를 인정하는 셈이 된다. 게다가 저 기병은 살인을 의심하고 있다. 그렇다고 다시 한번 말을 번복할 수도 없다. 그때는 앙리도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

영원과도 같은 몇 초가 흘렀다. 앙리의 눈빛이 점점 차가워졌다. 나를 몰아붙이던 기병의 눈에 승리자의 거만함이 깃들었다. 그가 다른 기병들에게 눈짓했고, 모든 기병이 검을 뽑았다.

그때였다.

“어어어어어이!”

이곳의 모든 이가 놀라 돌아볼 정도로 우렁찬 목소리가 벌판을 울렸다.

“드디어 찾았다 금발 꼬마! 으하하하하!”

저 멀리에서 천둥 같은 웃음을 내지르며 말을 달려오는 사내.

쿠였다.

.

.

.

“깜빡 잠든 사이에 여기까지 왔을 줄이야! 이거 참 당돌한 녀석들이로군! 으하하하!”

말에서 내린 쿠가 내 몸을 번쩍 안아 올렸다.

그러자 우리를 향했던 기병들의 검이 일제히 쿠를 겨눴다.

“더러운 변태놈! 정말로 저 어린아이를 건드린 거냐!”

쿠가 나타난 순간, 기병들의 머릿속에서 지금까지 내가 한 말은 모두 사실이 되어버렸다.

“부끄러운 줄 알아라! 용병!”

“힘겹게 달아난 아이들을 기어코 쫓아오다니! 그야말로 변태성욕이 뇌를 지배하는 자로군!”

“에에에엥?”

쿠가 얼빠진 얼굴로 기병들과 나를 번갈아 봤다. 그러던 중 쿠의 눈길이 앙리를 발견했고, 큰 소리로 외쳤다.

“아이고! 이거 앙리 몽포르 경이 아니십니까! 하하하하!”

“오랜만이오. 쿠.”

앙리가 부드럽게 미소하며 쿠의 인사를 받았다.

나는 두 가지 이유에서 놀랐다.

하나는 쿠와 앙리가 제법 친해 보였다는 점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쿠의 이름이 정말로 ‘쿠’였다는 것.

“저 아이가 말하기를 쿠, 자네가 낸 시험을 통과하면 수습 용병을 시켜 주기로 했다던데. 맞나?”

쿠가 껄껄 웃으며 답했다.

“아! 맞습니다! 요 녀석들을 쓸만한 용병으로 키우려고 실습을 좀 하고 있었지요! 하하하!”

“저 아이가 또 말하더군. 자네가 몹쓸 짓을 했다고. 그래서 자네가 잠든 틈을 타 도망쳤다고 하던데, 이것도 사실인가?”

쿠가 쩌억 입을 벌리며 나를 돌아봤다.

내가 서둘러 말했다.

“그 몹쓸 짓이라는 건 쿠가 너무 혹독하게 용병 훈련을 시켰다는 말이었어요. 오해하셨다면 죄송합니다.”

내 말이 어이가 없을 법도 했지만 앙리는 우리를 만난 후 처음으로 크게 웃었다.

그러자 기병들도 따라 웃었고, 한참 만에 웃음을 멈춘 앙리는 우리에 관해 쿠와 짧은 대화를 나눈 뒤 기병대를 이끌고 사라졌다.

오후의 황량한 벌판에는 쿠와, 그가 타고 온 말과, 아이 다섯만이 남았다.

쿠가 우리를 돌아보며 히죽 웃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위험할 뻔했구나. 꼬마들아.”

우리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기병대의 대장이 앙리 경이어서 다행이었다. 그는 요즘 시대에 보기 어려운 고결한 기사거든.”

여전히 대답 없는 우리를 보며 쿠가 말했다.

“얼굴이 다들 말이 아니구나. 이런 때는 역시 맛 좋은 고기를 먹어야겠지?”

“고, 고기가 있어요?”

저도 모르게 외친 족제비가 테오의 험한 눈빛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껄껄껄 웃은 쿠가 우렁차게 외쳤다.

“아니! 없다!”

그 말에 가장 얼굴이 썩어 들어간 이는 놀랍게도 세실이었다.

“하하하! 그런 얼굴 하지 마라 예쁜 꼬마! 고기는 공수하면 되는 거야!”

쿠가 품에서 단검 두 자루를 꺼냈다.

세실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이거라면 싱싱한 짐승 한 마리 잡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지. 어때 꼬마들. 함께 사냥해 볼래?”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우리는 다시 쿠의 손에 떨어졌고, 당장은 달아날 수 없다. 그렇다면 배울 수 있는 것은 배워 두는 편이 현명하겠지.

나는 쿠를 향한 의심을 지우지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먼지에게서는 부정적인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고, 또 그가 앙리와 친분이 있다는 사실이 조금이나마 의심을 녹여냈다. 게다가 미니맵 속의 쿠는 어느새 우호적 대상으로 바뀌어 있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쿠가 만족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 사내라면 역시 사냥을 할 줄 알아야지! 하하하하!”

쿠가 앞장섰고, 우리는 그의 뒤를 따랐다.

조심스레 족제비가 말했다.

“저기······ 쿠 아저씨.”

“누가 아저씨라는 거야!”

쿠의 호통에 족제비가 히익! 몸을 움츠렸다.

세실이 내게 속삭였다. 쿠는 아저씨라고 부르는 것을 무척 싫어한다고.

아저씨라고 부르지 말라며 재차 호통친 쿠가 평소의 히죽 웃는 얼굴로 돌아왔다.

“무슨 일이냐. 족제비 꼬마.”

“아, 저기, 그, 말은······ 갑자기 어디서 났어요?”

“아아, 스트라이더 말이로구나. 이 녀석은 원래 내 말이다. 카론 늪지에 들어서기 전에 잠시 헤어졌는데, 약속한 장소에서 다시 만난 거지.”

“마, 말과 약속을 한다고요?”

쿠는 대답 대신 히죽 웃으며 말의 갈기를 쓰다듬었다. 스트라이더는 윤기가 흐르는 갈색 털을 가진, 아주 잘생긴 말이었다.

해가 완연히 서쪽 하늘로 넘어갈 무렵 우리는 남서쪽 숲에 도착했다.

“먼저 투척의 기본에 대해 알려주지.”

나와 덩치는 1레벨의 투척술 적성을, 세실은 5레벨의 투척술 적성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쿠의 설명을 집중해서 들었다.

아직 투척술 적성을 개화하지 못한 테오와 족제비는 더 열심이었다.

“자, 이제 시범이다. 잘 봐라.”

먼 곳의 나무에 표식을 남기고 온 쿠가 단검을 던졌다. 한 자루씩 따로 던질 줄 알았는데, 쿠는 두 자루의 단검을 동시에 던졌다.

“그럼 확인해 볼까.”

쿠가 의기양양한 걸음으로 앞장섰다.

확인해 보니 단검 두 자루는 모두 표식에 적중했다.

“어떠냐! 나의 실력이! 으하하하하!”

뱀처럼 혀를 빼며 웃어댄 쿠가 우리에게 여기서 기다리라고 했다. 그러고는 아까 단검을 던졌던 곳보다 더 멀리 달려가 앞구르기와 옆구르기를 하더니, 훌쩍 뒤로 텀블링하며 단검을 투척했다.

불안정한 자세로 던진 단검은 이번에도 표식에 명중했다. 세실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5레벨의 투척술을 가진 세실이 저렇게 놀랄 정도라면 쿠의 투척 실력은 확실히 범상치 않은 경지였다.

“단검 좀 던져 주겠냐! 금발 꼬마!”

나는 나무에 박힌 단검을 빼서 쿠에게 던졌지만 목적지에 닿기 전에 떨어졌다. 그 정도로 쿠는 먼 곳에 있었다.

“형편없구나 금발 꼬마! 하하하!”

이어 조금 전보다 두 배는 이리 뛰고 저리 뛰던 쿠가 한 손으로 물구나무서기를 하며 단검을 던졌다.

이번에도 적중이었다.

“으하하하하!”

위풍당당하게 걸어온 쿠가 수염 가득한 턱을 치켜들며 우리를 내려다봤다. 당연히 콧구멍은 대문짝만하게 벌어진 채였다.

그렇게 투척술 훈련이 시작됐다.

.

.

.

[투척술(Lv.2)을 획득합니다.]

[투척술(Lv.3)을 획득합니다.]

가르침은 직관적이고 이해하기 쉬웠다.

덕분에 나는 짧은 시간에 3레벨의 투척술을 손에 넣었다.

“훈련은 여기까지다. 슬슬 사냥을 시작하지 않으면 제때 잠을 잘 수 없거든.”

동료들의 스테이터스를 확인하니 세실의 투척술은 한 단계 상승해 6레벨, 덩치는 나와 같은 3레벨, 테오와 족제비는 2레벨이 되어 있었다.

“기척을 죽이고 나를 따라와라. 사냥감을 발견하면 다 같이 단검을 던지는 거야. 움직이는 짐승을 맞히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니 집중해야 한다.”

타깃을 찾은 쿠가 우리에게 손짓했다. 나는 두근두근 뛰는 심장을 느끼며 세실을 돌아봤다. 세실도 나를 봤고, 눈이 마주치자 환히 웃었다. 나는 깨달았다. 세실도 나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보이냐? 붉은 털 멧돼지다.”

우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덩치는 크지 않지만 담백한 맛이 일품이지. 기대해라 꼬마들아. 지금까지의 고기보다 더욱 맛있을 테니.”

쿠는 살금살금 사냥감과의 거리를 좁혔다. 어느 순간 그가 단검을 들었고, 그것을 신호로 우리는 단검을 던졌다.

뀌에에엑!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붉은 털 멧돼지가 고꾸라졌다.

나와 덩치의 단검은 멧돼지의 복부를, 쿠와 세실의 단검은 흉부에 꽂혔다. 아쉬워하는 테오와 족제비의 탄식이 들렸다.

“가자! 하하하하!”

쿠가 내 등을 탁! 치며 쿵쿵쿵 달려갔다. 우리도 쿠를 따라 달렸다.

“고기 파티 시작이다! 하하하!”

쿠는 모닥불 피우는 것도 능숙했다. 그가 쌓아 올린 모닥불은 잘 만든 고대의 건축물 같았다.

우리는 타오르는 모닥불과, 고기를 손질하는 쿠를 번갈아 바라봤다. 잠시 후 쿠가 자신만만한 얼굴로 손질된 고기를 가져왔다.

“오늘의 고기는 여섯이 먹다가 일곱이 죽어도 모를 거다. 으하하하하!”

쿠가 기다란 나무줄기에 고기를 끼운 뒤, 불길이 잦아들기 시작한 모닥불에 가져갔다. 고기 익는 향긋한 냄새가 숲의 공기를 채웠다.

“빠, 빨리 먹으면 안 될까요?”

“서두르면 안 돼, 조. 고기는 어떻게 굽느냐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

“오, 잘 아는구나 대장 꼬마. 하하하하!”

쿠가 잘 익은 고깃덩이를 작은 꼬치에 끼워 건네줬다. 우리는 꼬치의 양쪽 끝을 잡고 후후 불어가며 먹었다.

엄청난 맛이었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하다. 여러 향신료 덕분인지 불쾌한 냄새도 없었다.

“맛이 어떠냐. 꼬마들아.”

우리는 대답할 겨를도 없이 고기를 먹었다.

함께 고기를 뜯고 술을 들이켜던 쿠는 우리가 고깃덩이를 하나 해치울 때마다 히죽 웃으며 새로운 고기를 건네줬다.

“천천히 먹거라. 고기는 아직 많으니까.”

돌연 세실이 나를 보며 깔깔 웃었다. 세실이 소리 내어 웃은 건 처음이었기에 나는 놀란 눈으로 세실을 돌아봤다.

그제야 세실이 왜 웃었는지 알 것 같았다. 세실의 입가에는 고기에서 묻은 검댕이 잔뜩 발려있었다. 나 역시도 비슷한 상황이겠지. 서로의 얼굴을 확인한 테오, 족제비, 덩치도 배를 잡으며 웃었다.

“쿠.”

그렇게 즐거운 식사를 마친 뒤, 세실이 쿠에게 말을 걸었다.

“응? 예쁜 꼬마.”

세실의 얼굴에 희미하게 남아있던 미소가 지워졌다.

“이거. 설명.”

세실의 손에는 단검 한 자루가 들려 있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Status: Ongoing
The protagonist, an infinite regressor, found himself possessed within a novel where the original protagonist had gone mad and turned dark. Now, with my unique abilities, I must write a new ending for the story.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