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Chapter 273

271. 약혼 Ep – 상처

‘이런 개 같은!’

민서가 악을 질렀다.

빌어먹을 똥망겜, 주신 이 개새끼! ─ 욕설을 퍼부었지만, 그는 정신을 오래 유지할 수가 없었다. 민서는 어찌할 바 없이 레이 덱스터의 정신에 가려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치가 떨릴 정도로 화나고 배신감마저 느낄 일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정작 고난의 당사자가 된 레이 덱스터는 조각난 목걸이를 가만히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그게 뭐냐니깐? 목걸이?”

“…그냥 어디서 주운 거야. 레라, 나 먼저 들어갈게.”

걸음을 디디자 잘그락, 주머니에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없었던 은화가 차올랐다. 품에 둥그런 물체가 어리는 걸 느끼며 레이는 검을 검집에 꽂아 넣었다. 레라의 의아한 시선을 뒤로하고 공터를 떠났다.

하지만 그가 향한 곳은 그의 방이 아니었다. 난 방에 틀어박혀 있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그는 레라의 집에 들러 아주머니께

“오드르 차 좀 가져갈게요.”

말하곤 부엌에서 찻잔을 챙겼다.

커다란 동이 나무 뚜껑을 열자 시큼한 내음이 올라왔다. 지난가을에 두 가족이 다 함께 양팔 걷어붙여 짜낸 오드르 열매즙이다.

레이는 그걸 찻잔에 아주 약간 퍼담고선 점심을 준비하는 아주머니께 뜨거운 물을 얻어 희석했다.

비율은 물이 한참 많게.

그는 차가 아니라 맹물에 가까운 오드르 차를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윽고 거실. 불이 꺼져가는 벽난로에 장작 몇 개를 던져넣고 그 앞 탁자에 앉아 호로록 들이켰다. 생각에 잠겼다.

‘난’ 레라와 대련한 뒤 복기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희한한 기억이 쏟아졌다. 나와는 관계없는, 아니, 일곱 사람 중에 내가 포함된 기묘한 기억들이었다.

레브와 레아, 레안 드 예리엘과 레리아나 드 예리엘, 민서, 그리고…

레오 덱스터와 레라 아이나르.

마지막은 나와 동일한 인물이었다. 내 약혼녀와도.

이걸 대체 어디까지 믿어야 하지? ─ 생각하며 레이 덱스터는 기억의 허점을 찾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발동하는 {추적술}. 아버지는 지금 서재에 계신다. 레라는 날 훔쳐보는지 저기 창가에 있고. 뒤를 돌아보자 레라는 쏙 숨어버렸다.

레이가 고개를 돌렸다. 미안하지만 그녀에게 신경 써줄 여력이 없었다.

그는 탁 트인 거실에서 다리를 꼬고, 홍수처럼 쏟아지는 {뒷골목의 규칙}과 {귀족 사회}, {아신의 역사} 정보를 헤집었다. {사냥}, {합격술}, {방중술}, {전술}, {통솔}, {왕의 피}, {기품}, {신력 간파}… 온갖 능력이 그를 휘감았다.

생전 배워본 적 없는, 다채로운 검술이 머리에 그려졌지만, 레이는 즐겁지가 않았다. 능력 하나하나에 유쾌하지 못한 기억이 적어도 하나씩은 달려 있었다.

레이 덱스터는 발로 전해지는 벽난로의 온기를 느끼며 기억을 더듬어나갔다. 때론 분노하기도, 눈물이 왈칵 터지려는 걸 오드르 차와 함께 삼키기도 했다.

이윽고 레이가 중얼거렸다.

“바보 같으니…”

민서라는 녀석에게 한 말은 아니었다. 과거의 기억이 없던 자신, 레오 덱스터에게 한 말이다. 레이는 찻잔에 남은 걸 입에 마저 털어 넣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레라랑 장터에 가려고 했는데.

지금이라도 다녀오자 할까 했지만, 레라는 혼자 가버린 모양이었다.

{추적술}이 편하긴 편하다.

그리고 그녀가 내 생일선물로 가죽끈을 사 오리란 걸 알았을 때는 울적했던 기분이 한결 나아져 있었다. 그는 부서진 목걸이를 벽난로에 던져 넣었다.

그럼 나는 이제 뭘 해야 하나.

레이는 꽤 질 좋은 가구가 배치됐음에도 을씨년스러운 거실을 잠시 거닐었다. 생각을 정리하고, 품에서 손거울을 꺼내 들었다.

솔직히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내가 이런 상황에 처했다는 게, 레라와 결혼하면 모든 게 끝이라는 것이.

하지만 손거울이 은은하게 빛나며 한 놀란 표정의 청년을 비췄을 땐 내가 믿고 자시고의 문제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거울 속 레브가 뒤로 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레이구나. 잠깐만 기다려. 모두 정지! 여기서 잠시 쉬었다 간다.”

거울 너머의 풍경이 마구 흔들렸다.

왁자지껄한 전사들과 말 울음소리.

“대장님! 시간이 애매하긴 한데, 식사를 준비할까요?” 외치는 반느 비자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생동감에 레이는 말문을 잃어버렸다. 이윽고 반듯한 이마를 가진 청년이 다시 거울에 나타났다.

“회차가 넘어갔구나. 거울이 고쳐졌어. 저번에 깨져서 버릴까 말까 고민했는데 다행이야. 레이, 반란은 어떻게 됐… 어엇?! 너 이름이 바뀌었잖아?”

“…”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약혼관계는 오늘 시작됐을 텐데… 레이, 내 회차에서 진명을 알게 된 거야?”

“…”

레이 덱스터가 계속 말이 없자 레브도 입을 다물었다. 그는 어쩐지 낯설게 느껴지는 레이를 관찰하다 질문을 던졌다.

“넌 누구야?”

“…난 레이(Lei)다.”

네가 레이인 걸 누가 모른대? 이 친구가 왜 이러는 걸까 ─ 궁리한 레브는 이내 이유를 짐작해냈다.

“기억이 돌아왔구나.”

“…”

“알아. 처음엔 좀 혼란스럽지. 하지만 곧 괜찮아질 거야. 나도 그랬거든.”

“…글쎄.”

레이 덱스터는 다소 부정적으로 답했다. 이 레브라는 친구가 자신의 과거를 거꾸로 ‘받아들이던’ 게 기억났기에.

하지만 이것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따질 생각은 없었다. 넌 너고, 나는 나니까. 레이가 입을 열었다.

“지금은 네 회차가 끝난 이후로 두 번째 회차다.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으니, 네가 질문해줬으면 좋겠다.”

“두 번째라고?! 여기서 반란을 일으키는 게 그렇게 어려웠어?”

“아니. 반란은 성공했다. 네 회차에서. 그런데 그게 우리가 추구해야 할 목표가 아니었다.”

“…그럼?”

“레나의 꿈을 이뤄주는 게 진엔딩 조건이었다. 레아의 경우는 사제가 되어 네게 축복을 내려주는 거였고.”

충격을 받았는지 레브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눈을 감고 숨을 고르길 한참, 그가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랬구나. 그러면 약혼관계 회차는 레라가… 이름이 예쁘네. 레라가 기사가 되는 것이었겠네.”

“…”

“그런데 뭐가 문제야? 두 번째라면서. 레라한테 네가 소드마스터라는 걸 또 들켰어?”

“…그래.”

레이는 적당히 긍정했다.

그 이후로 있었던 일을 구태여 전달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였다. 레이는 레브에게

“하리에 가이단을 찾아가든 레아를 찾아가든, 너 좋을 대로 해라. 이쪽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라는 취지의 말을 전하곤 연결을 끊어버렸다. 빠직- 금이 가 못쓰게 된 거울은 목걸이와 마찬가지로 벽난로에 던져 넣었다.

후우. 이제는 내 머리에 쏟아진 끔찍한 기억들이 진짜라는 걸 인정해야만 하겠다.

하지만 레이는 이걸 유감스럽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그는 기억을 되새김질하듯 불붙은 벽난로를 한참 바라보았는데, 그의 입가엔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 미소는 점점 커져만 갔다.

급기야 자신의 가지런한 이를 활짝 드러내며 웃었고, ‘어쩌다 나와 레나가 주신의 장기말이 되었을까. 정말 재수도 없구나.’ 늘 푸념하던 레오 덱스터답지 않게, 옅게 전율하며 중얼거렸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자신이 앞으로 무엇을, 그리고 왜 해야 하는지 깨달아버린 그는 곧장 서재로 걸음을 돌렸다. 문 앞에서 잔뜩 들뜬 숨을 고르고, 노크했다.

– 똑똑.

“들어와라.”

아버지는 흔들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계셨다. 구일 전쟁 이후, 아니,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 스스로 책에 파묻혀버린 아버지께 고백했다.

“아버지. 드릴 말씀이 있어요.”

“뭐냐? 어쩐지 기분이 좋아 보이는구나.”

“그 전에 잠시… 실례할게요.”

레이가 느릿한 동작으로 어머니의 유품을 꺼내 들었다. 노엘 덱스터는 아들이 검을 뽑아 드는 걸 의아하게 바라보다 눈이 휘둥그레졌다.

검이 찬란하게 불타올랐다. 하지만 뒤이어진 아들의 말보다 더 충격적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아버지. 제가 신탁을 받았어요. 구일 전쟁을 일으킨 건 마르하스라는 악신이고, 주신께서 제게 놈을 물리치라 하셨어요.”

“이게 대체… 그게 무슨 말이냐.”

노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린 왕의 의문사로 촉발된 내전. 그 아수라장을 겪은 노엘 덱스터는 자신을 포함한 수많은 이들이 무엇을 위해 서로 싸웠는지, 그토록 많은 피를 흘렸는지 궁금해했다. 전쟁으로 인해 아내를 먼저 떠나보내고 회의에 젖어 살아가고 있었는데…

레이가 단호하게 말했다.

“말씀드린 그대로예요. 지금 우리 왕국의 왕, ‘파올로 드 클라우스’는 인간이 아닌 악신이에요. 아버지, 절 도와주세요.”

레이는 아버지께 도움을 청하는 게 조금도 껄끄럽지 않았다. 오히려 왜 여태껏 아버지께 도움을 청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세상 그 누구보다도 든든한 내 편인데.

과거의 기억이 없었기 때문이지만, 몸을 너무 사렸다. 또, 기억이 없던 탓에 간과하고 알아보지 않았던 게 한 가지 더 있었다.

어머니.

민서와 지난 회차의 나‘들’은 어머니에 대해 알아보지 않았다. 용감한 내 어머니. 비록 일찍 돌아가셨지만, 그분은 나의 모든 것이었다.

레라와 약혼하기 전까지만 해도 난 어머니를 위해 살았고, 지금도 그분이 그립다. 내가 레라를 사랑하는 건 어쩌면 어머니를 그리워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꼭 레라처럼, 어머니는 기사가 되고파 마우닌-레티이 대회에 참가했던 아이나르 부족의 전사셨으니까.

어머니는 그 대회의 진행을 돕던 아스란 왕국의 기사, 그러니까 아버지를 만나 곧장 결혼하시고, 날 낳으셨다. 그리고 수년 뒤에 터진 구일 전쟁에 휩쓸려 돌아가셨는데…

‘신이시여, 다시 감사드립니다.’

레이는 레나 키우기라는 게임이… 악독하기만 했던 주신이 우리에게 무엇을 안배하였는지 깨달았다. 레나 ‘키우기’라는 이름답게 레나들을 위해 헌신해야 할 뿐 우리에겐 그 무엇도 주어지지 않을 줄 알았건만,

[ 퀘스트 : 수호자(守護者), 1/4 – Barbatos ]

어쩌면 어머니를 되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레이의 심장이 쿵덕거렸다.

바르바토스를 잡은 뒤, 소꿉친구 시나리오가 변했다. 바르바토스가 사라진 그곳에 레브의 어머니가 살아계셨고, 따라서 그분이 돌아가셨던 건 바르바토스와 어떤 연관이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그건 거지남매의 어머니, 아이나스 드 예리엘도 마찬가지였다.

정황상 오리아스를 섬기는 에릭 드 예리엘 왕자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으로 보이는데, 만약 오리아스가 소멸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리고 구일 전쟁을 일으킨 마르하스가 사라진다면 어머니는, 나의 어머니는…

되살아나지 않겠는가.

혼란스러워하는 아버지와 대화를 마치고 공터로 나온 레이가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하하하하! ‘수호자’라니.

거창한 이름이 달리고, 해내지 못하면 세계가 파멸할 것처럼 굴었지만, 이 퀘스트의 목적은 우리의 어머니를 되살려주기 위함이었다. 잘 생각해 보면, 지난 회차를 제외하면 아스타로트건 마르하스건 오리아스건 간에 강림한 적이 없었다. 엔딩 크레딧에 나온 우리는 대부분 천수(天數)를 누렸다.

소꿉친구 시나리오의 바르바토스.

약혼관계 시나리오의 마르하스.

거지남매 시나리오의 오리아스.

그러면 아스타로트는 여기에 왜 끼었을까? 누구의 어머니를 살려주려고? 하하하하. 우리의 어머니를 살려줄 테니, 아스타로트는 덤으로 잡아주길 바라는 건가 보다.

레이는 눈발이 흩날리는 공터를 추운 줄도 모르고 어슬렁거렸다.

회차 제한과 사망 제한에 가로막히고, 목걸이가 부서진 지금 앞길이 막막한 건 변함이 없었다.

그렇지만 진엔딩은 레나들을 위해, 퀘스트는 레오들을 위해 존재한다는 걸 알아챈 이상 미래가 두렵지만은 않았다. 지난 과거가 모두 레나들을 행복하게 하고, 어머니를 되살리기 위한 과정이었다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레이 덱스터가 하늘에서 떨어진 눈송이 한 점을 움켜쥐었다. 주먹을 으스러지게 움켜쥐는 그때, “레이! 아까부터 혼자 뭐 하는 거야?” 레라가 나타났다.

레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의 약혼녀에게 말했다.

“레라. 우리 바르나울에 가자. 나 어머니 산소에 성묘하러 갈 거야. 이젠… 가도 될 것 같아.”

“…!”

눈송이가 흐드러지게 쏟아지는 공터, 레이의 발자국이 도처에 찍힌 그곳이 하얀 정적에 휩싸였다. 레이는 각오를 다졌고, 레라는 말없이 그를 뒤에서 안아주었다.

상처가 많은 약혼자를 위하여.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A Princess Is Raised After Death, Desperately Making Her a Princess, Princess is Raised by Death, RPOD, The Princess Is Raised After She Dies, 正規エンディングまで異世界ループ転生, 공주는 죽어서 키운다
Score 8.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19 Native Language: Korean
Minseo was trapped in [Raise Lena]. With the emotionless text, “[Starting Raise Lena]” he became Leo and was imprisoned in an unfamiliar worl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Uh-huh?” “Leo? Why the long face? You! Are you messing with me again?” There, he met his childhood friend, Lena, skillfully picking berries. The lovely Lena. Leo marries her in a peaceful mountain village… [Lena is married! Congratulations.] [You have failed to clear Raise Lena.] [Restarting.] The happiest moment. Lena disappeared. An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Huh? Lena!” “Why have you been spacing out? And why are you looking at me like that? You wanna get beat up?” Lena, clad in thick leather armor and a sword on her shoulder, stared at him with unwavering eyes. It was a different scenario.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