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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75

273. 약혼 Ep – 황철석

작은 텃밭이 정갈히 꾸며진 어느 가정집 마당. 작은 목검을 든 소년이 호기롭게 말했다.

“전 커서 이름값을 하는, 아빠처럼 용감한 기사가 될 거예요.”

“그러려무나 레이(Lei). 아들은 분명 그리될 거란다. 하지만 그 전에 엄마를 먼저 이겨야겠지?”

이베라 아이나르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다섯 살배기 소년은 밝게 웃으며 목검을 틀어쥐었는데, 바로 그때 한 사내가 대문에 나타났다. 피칠갑하고, 검에 맞아 광대뼈를 하얗게 드러낸 그 기사는 이베라를 보곤 안도한 듯이 풀썩 쓰러졌다.

“어, 엄마!”

레이 덱스터가 벌떡, 잠꼬대하며 일어났다. 데호르만의 코골이가 드르렁- 울리는 이곳은 마차에 기대어진 천막이었다.

레이는 하얀 입김을 뿜으며 잠시 그대로 앉아 있었다.

꿈… 이었구나. 아니, 꿈을 꿨구나. 생각하며 그는 마른세수해 정신을 차렸다.

아직 동트지 않은 새벽이었다. 모포를 젖히니 겨울의 차디찬 한기가 몸에 스며들었다. 둘러보니 가운데서 주무시고 계셔야 했을 아버지는 없고 깨끗이 접힌 모포만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레이는 데호르만이 깨지 않게 조심조심, 모포를 정돈하고 밖으로 나왔다. 천막 입구를 덮은 천을 열자 간밤에 쌓인 눈이 우수수 떨어졌다. 문 바로 앞에는 웬 커다란 덩어리가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소환된 흑마, 쿠스였다.

추워서인지 녀석은 제대로 누워서 자고 있지 않았다. 어젯밤에 모포를 덮어준 모습 그대로, 말들이 흔히 휴식을 취할 때 취하는 무릎을 꿇어앉은 자세였다.

레이는 녀석의 갈기에 묻은 이슬을 조금 털어주곤 마차를 한 바퀴 돌아보았다. 길을 서두르다 보니 미처 다음 마을에 닿지 못하고 노숙을 하였는데, 행여나 밤새 도둑이 들지 않았을까, 레라는 잘 자고 있는지를 확인한 것이었다.

역시나, 레라는 잘만 자고 있었다.

“일어났니?”

“네. 일찍 일어나셨네요.”

그때, 노엘이 등짐을 한가득 매고 돌아왔다. 땔감이다.

그는 지게를 옆으로 쏟아붓고는 부싯돌과 부시를 보관하는 쌈지를 찾아 품을 뒤적였다. 레이는 눈치껏 마차 마부석 아래에 있는 부싯깃을 꺼내어 가져왔다. 정확히 말하자면 부싯깃이 담긴 통이다.

이런 겨울철에 부싯깃을 미리 만들어 두고, 이슬에 젖지 않게 보관하는 건 중요한 일이었다.

부싯깃은 부시로 부싯돌을 쳐서 떨어지는 불똥을 받아내는 물건인데 바짝 마르고, 입자가 고울수록 좋았다. 북부에서는 ‘다네르’라는 식물의 잎을 불에 볶아낸 뒤 곱게 비벼서 만든 가루를 부싯깃으로 사용하는 게 보통이었다.

레이가 장작 하나를 골라 그 위에 부싯깃을 조금 덜어냈다. 아버지가 건네준 쌈지에서 부시와 부싯돌을 꺼내어 착착, 착. 불똥을 튀겼다.

불은 금방 붙었다. 레이는 후우- 후우- 부싯깃에 입김을 불어 넣어 불씨를 키웠고, 몽글몽글한 연기에 낙엽과 땔감이 차례로 추가되었다.

“확실히 제 것보다 아버지 것이 훨씬 좋네요.”

레이가 쌈지를 돌려주며 말했다. 노엘 덱스터는 어깨를 으쓱하며 “왕국 기사에게 보급되는 것이니까.” 여상히 답했다.

부싯돌에는 종류가 많다.

부싯돌을 치는 용도인 부시쇠로는 어디에서든 거무튀튀한 철이 사용됐지만(탄소가 다량 함유된 철), 부싯돌은 지역에 따라 천차만별이었다.

반투명한 하얀색을 띠는 차돌이 가장 흔해서 부싯돌이 정 없으면 이것을 이용하였고(차돌은 워낙 단단해서 불똥을 튀기기가 쉽지 않다), 일반적으로는 ‘플린트(Flint)’라는 날카롭게 잘 쪼개지는 돌이 부싯돌로 이용되었다.

레이가 가진 부싯돌은 플린트였다.

반면 노엘 덱스터가 가지고 있던 부싯돌은 황철석(黃鐵石)으로, 자연 상태에서 종종 정육각형(正六角形)을 띄고 겉보기가 금(金)과 흡사해 혼동하는 사람이 있어서 ‘바보 금(fool’s gold)’이라고도 불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부싯돌로서는 단연 으뜸으로 평가받았다.

플린트와 비교할 때 불똥이 서너 배는 더 잘 튀어서 혹한의 날씨에도 불을 붙이기가 수월했다. 그 덕분에 화톳불이 활활 타올랐다. 레이 덱스터는 화톳불에 양철 냄비를 얹어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타닥타닥

장작이 타오르는 소리를 들으며 부자(父子)는 잠시 가만히 있었다. 땔감을 더 넣어야겠다는 생각이 들 즈음에 노엘 덱스터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바르나울까지 얼마 남지 않았구나.”

“네. 거의 다 왔네요.”

“솔직히 그렇게까지 믿지는 않았단다. 신탁이라니… 하지만 네 말대로 곧 전쟁이 터진다더구나.”

“…”

“알고 있겠지만, 나는 정말 많은 사람을 죽였단다. 무고한 사람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지. 방해가 된다 싶으면 죽였고, 언제부턴가는 나와 생각이 다르다는 게 죽일 이유가 되어 있더구나.”

동트지 않은 새벽, 화톳불 빛이 노엘의 얼굴을 씁쓰레하게 비췄다.

“그때가 후회스럽다. 그냥 중립을 선언하고 가만히 가정을 지켰더라면 네 어머니가 그렇게 떠나지 않았을 텐데. 백번, 천 번을 후회해도 지난 세월을 되돌릴 수는 없더구나.”

“…”

“하지만 이제라도 바로잡아야 하겠지. 악신이라고 했지? 마르하스라는. 좀 구체적으로 묻고 싶구나. 수도에 도착하면 내가 뭘, 어떻게 도와주면 되겠니? 먼젓번에 이야기한 대로 아르펜 알바세테 남작님께 이 사실을 알리는 거로 충분할까?”

“…아마도요.”

“더 필요한 건 없고? 아빠는 제1 기사단 사람들 외에도 수도에 아는 사람이 많단다. 도움을 구해볼 만한 귀족도 많고.”

“그들이 제 말을 믿어줄까요?”

“글쎄다. 믿어줄 것 같진 않지만… 최선을 다해봐야지. 걱정하지 말려무나. 왕이 인간이 아니라는 걸 떠벌릴 생각은 없으니까. 가서 상황을 보고 준비해보자꾸나.”

“…네. 감사합니다.”

“감사하기는…”

노엘 덱스터가 빙긋 미소 지었다.

그는 자신보다도 덩치가 더 커진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화제를 돌렸다. 노엘이 분위기를 전환하려 꺼낼만한 이야깃거리라면…

“레라는 요즘 어떠냐?”

레라 아이나르밖에 더 있겠는가.

그녀는 착 가라앉은 분위기를 눈에 띄게 환기해주었다. 레이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잘 배워요. 어지간한 준기사들은 레라 혼자서도 다 때려잡을 거예요. 본인은 모르지만… 기사랑도 한 판 붙어볼 만해요.”

{마나 육체} 덕분이었다.

레라의 몸놀림이 전과 비교할 수 없이 좋아졌다. 그녀의 약점이었던 완력(腕力, 팔의 힘)도 보충이 돼서 매번 한 발짝씩 양보하고 카운터만을 노리던 버릇을 저도 모르게 고쳐나가고 있었다.

힘겨루기를 포기해선 뛰어난 검사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카트리나랑 쌍으로 붙어 다니던 데로스라는 녀석은 이젠 레라가 단독으로 상대할 만해. 몇 달만 지나면 압살할 수 있을 테고. 하지만… 아직도 느려.’

만약 노엘의 형, 엘슨이 들었다면 벌컥 분통을 터뜨렸을 생각이다. 고작 두 달 만에 준기사를 뛰어넘어 기사를 상대할 수 있게 되었으면 가히 천재라 불려도 손색이 없는 성장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이가 이것이 느리다고 평가하는 까닭은 그와 그녀가 상대해야 할 적이 너무 강하기 때문이었다.

시간도 촉박하다.

[ 레나 키우기 ]는 길어야 3년이라는 제약이 달려 있었다.

명시적으로 표기되진 않았다.

하지만 플레이타임이 얼추 그 정도일 수밖에 없었는데, 소꿉친구 시나리오는 레아가 금방 사제가 되어버리면서, 약혼관계 시나리오에서는 적령기를 맞은 레라가 빨리 기사가 되어 레이와 결혼하고파 해서다.

엔딩이 찾아오는 시기와 관련해서는 거지남매 시나리오가 유독 특이한데, 거기라고 아주 다르진 않았다.

레리아나를 시집도 안 보내고, 어떤 직업도 갖지 못하게 방에만 가둬두지 않는 한, 엔딩을 미룰 방법이 없었다. 그게 대략 2년이다.

더군다나 말파스를 잡으러 가는 지금은 사실상 그녀를 성장시킬 시간이 없다고 봄이 옳았다.

말파스는 전쟁을 사랑하는, 승리의 아신. 전쟁을 벌여 신력을 수급하고, 승리하면 크게 강해지는 놈이었다.

지난 회차가 그랬다.

거지 남매를 잡아먹은 아스타로트한테는 찍소리도 못하고 물러났지만, 다섯 장에 달하는 강철 날개를 펄럭이던 녀석의 위용은 대단했다. 아스틴 왕국이 승리했기 때문에, 그게 아니더라도 전쟁을 통해 신력을 대량으로 획득했기 때문이었다.

전쟁이 본격화되기 전에 녀석을 잡아야 한다. 그것도 기왕이면 기사단이 출정하지 않았을 때.

따라서 이번에 레라가 활약할 수 있는 여지는 많지 않았다. 나도 베드 엔딩을 피하려면 실력을 감춰야 하고.

그래서 아버지께 부탁한 것이었다.

이 몸이 소드마스터요, 전면에 나서지 않고도 아르펜 알바세테 남작과 기사단을 움직이려면 한때 제1 기사단의 기사였던 그가 필요했다. 그만한 전력이면 말파스를 충분히 잡을 수 있었다.

물론 사제와 성전사도 필요하니 이쪽도 알아봐야 하는데… 레이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방법은 생각해둔 바가 있었다. 그것과 함께 풀어야 할 과거의 매듭이 떠올라 기분이 나빠졌을 뿐이었다.

“끓네요. 슬슬 요리를 시작해야겠어요. 아버지는 조금 쉬다 오세요.”

“그래. 네가 생각보다 요리를 잘하더구나. 그럼… 데호르만 이 친구를 깨워볼까? 하하. 세상모르고 잠드는 건 부녀(父女)가 똑같다니깐.”

노엘 덱스터가 천막을 향했다.

이윽고 천막이 출렁이며 거구의 데호르만이 잠에서 깨어나고, 밖으로 나오다 입구에서 곤히 자고 있던 쿠스에 걸려 넘어졌다. 깜짝 놀란 쿠스가 마차를 걷어차고, 고정쇠가 빠져 혼자 굴러가기 시작한 마차에서 레라가

“지, 지진이야!!”

외치며 잠옷 바람으로 튀어나오는 둥, 아침 댓바람부터 야단법석이 일어난 이곳은 바르나울까지 고작 닷새를 남겨둔 어느 겨울의 숲 자락 능선이었다.

* * *

“우와!! 여기가 수도야?”

레라의 감탄사를 뒤로하고, 그들은 바르나울에 입성했다. 수만의 인구로 북적이는 도시에 감탄한 사람은 레라밖에 없는 듯, 일행은 성문을 무심히 지나쳤다.

마차를 끌고 들어가는 것이라 검문이 있었는데, 이건 노엘이 은퇴한 기사의 증표를 보이는 것으로 금방 해결됐다. 병사들은 증표에 새겨진 이름을 보곤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노엘 덱스터.

바르나울에서만큼은 우는 아이의 울음도 그치게 만드는 악명 자자한 기사가 돌아온 것이었다. 병사들 또한 바르나울의 시민이기에,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원망과 두려움, 경외심.

노엘은 그들이 어떤 표정으로 경례를 올리건 신경 쓰지 않고 길을 재촉했다. 조금도 변하지 않은 바르나울 거리를 이쪽, 저쪽, 손가락질해 찾아간 곳은 그의 고향집이었다.

다만 크게 변한 게 있었으니,

거리 곳곳에 비석처럼 새겨진 글귀들과 덱스터 가의 저택 담벼락에 빽빽이 새겨진 저주들이었다. 노엘은 구일 전쟁 당시 너무나도 유명해 전쟁으로 가족을 잃은 바르나울의 온 시민에게 원망의 대명사였다.

모두에게 공평하게 참혹했던 전쟁. 욕할 곳이 없으니, 이렇게라도 분풀이해야 속이 편했으리라. 하지만 정작 그도 사랑하는 부인을 전쟁으로 인해 잃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크하하하하! 자네는 정말 오래 살겠구만 그래. 이렇게 욕을 많이 먹었으니 무병장수하겠어.”

그때, 데호르만이 노엘의 어깨를 치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 화통한 웃음에 노엘 덱스터도 어깨를 으쓱하며 예나 지금이나 철 경첩 다섯 개가 달린 고향집 나무문으로 다가섰다. 문짝에 달린 금속 링으로

– 쿵쿵쿵.

문을 찧자 이윽고 한 사내가 문을 열었다. 노엘은 자신의 친형, 엘슨을 기대했지만, 문을 열어준 사내는 그와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었다.

“누구십…”

유안이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A Princess Is Raised After Death, Desperately Making Her a Princess, Princess is Raised by Death, RPOD, The Princess Is Raised After She Dies, 正規エンディングまで異世界ループ転生, 공주는 죽어서 키운다
Score 8.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19 Native Language: Korean
Minseo was trapped in [Raise Lena]. With the emotionless text, “[Starting Raise Lena]” he became Leo and was imprisoned in an unfamiliar worl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Uh-huh?” “Leo? Why the long face? You! Are you messing with me again?” There, he met his childhood friend, Lena, skillfully picking berries. The lovely Lena. Leo marries her in a peaceful mountain village… [Lena is married! Congratulations.] [You have failed to clear Raise Lena.] [Restarting.] The happiest moment. Lena disappeared. An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Huh? Lena!” “Why have you been spacing out? And why are you looking at me like that? You wanna get beat up?” Lena, clad in thick leather armor and a sword on her shoulder, stared at him with unwavering eyes. It was a different scenar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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