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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77

275. 약혼 Ep – 돌아온 왕자

회색빛의 도시를 한 대의 마차가 가로질렀다. 브리나 자작가의 문양. 그러나 마차에 탑승한 이는 고작 자작 따위가 아니었다.

정작 마차의 주인인 브리나 자작은 마차를 호위하듯 곁에서 말을 달리고 있었다. 운동과는 거리가 먼 뚱뚱한 몸집이라, 낙마하면 큰일이 날 것만 같다.

휘청휘청.

말 등에 오른 돼지를 바르나울의 시민들이 보곤, 풉! 억눌린 실소를 터뜨렸다. 감히 귀족을 조롱거리로 삼을 수 없어서 뒤늦게 켁켁! 기침하는 척하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이런 치욕을 당하게 될 줄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마차 두 대를 준비해 왔으면 됐으리라. 그랬더라면 이렇게 꼴사나운 모습으로 말을 달리고, 평민들에게 우스운 눈요깃거리가 되지 않았을 터였다. 허나 마차 한 대를 고집한 건 브리나 자작, 본인이었다.

시민들에게 진귀한 눈요깃거리를 선사하며, 마차는 왕궁을 향해 달렸다. 이윽고 왕성에 도착하였고, 땀 범벅이 된 자작이 얼른 말에서 내려 고했다.

“왕자님. 도착했습니다.”

마차에서 내린 사람은 다름 아닌 아놀프 드 클라우스. 군청색 머리칼이 선명한 이 나라의 후계자였다.

아놀프 왕자가 다소 멋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편하게 올 수 있었습니다. 폐를 끼쳤군요.”

“폐라니요! 천부당만부당하신 말씀입니다. 시건방진 벨리타 왕국에서 욕을 보고 돌아오신 왕자님께 이런 것밖에 해드릴 게 없어 송구할 따름입니다.”

아, 그렇습니까? 그 마음 씀씀이 잊지 않겠습니다. ─ 라고 말하며 넘어가기엔 브리나 자작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땀으로 흥건한 곱슬머리와 말 안장에 비벼지기엔 너무 귀하고 연한 비단옷. 왕자는 사실 왜 이 작자가 마중 나오고, 하나밖에 없는 마차에 자신을 태웠는지 알았지만, 뭐라도 말할 수밖에 없었다.

“아닙니다. 큰 편의를 받았습니다. 왕자의 소관은 만백성의 민원을 취합해 왕께 고하는 것입니다. 지금 왕을 알현하러 가는 길이온데, 혹 건의하고픈 게 있으실까요?”

자작은 염치없이 답했다.

“클라우스 왕가의 그늘에서 작은 땅을 부치는 자로서 건의 사항이 없으면 태만함의 증거이겠지요. 물론 있습니다. 다름이 아니오라, 제 둘째 아들이 저 멀리 변방의 성 하나를 위임 통치하고 있습니다. 에이브릴 성이라는, 제롬 신성 왕국과 인접한 요충지이지요. 한데 이전에 그곳을 통치하던 자가 일을 어찌나 게으르게 했는지 꼴이 말이 아니랍니다. 둘째 아들이 근심하며 하소연하지 않겠습니까? 돈이 들어갈 곳은 많은데 자체적인 수입이 부족해 큰일이라고요.”

…이럴 줄 알았다.

왕자가 뒷짐을 지며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브리나 자작이 요구하려는 건 온 왕국의 귀족들에게 혈안이 된 사항이었다.

브리나 자작의 말이 이어졌다.

“왕국의 국방을 위해, 귀족 된 자로서 가만있을 수 없지요. 하지만 아시다시피 왕가로부터 위임된 땅에 귀족이 간섭하는 건 엄격히 금지돼 있습니다. 취지는 이해합니다. 허나 상황이 상황인 만큼, 저희 브리나 자작가가 에이브릴 성을 보수할 수 있게 법을 완화해주셨으면 합니다. 마침 제 영지와 에이브릴 성이 인접하니 행정구역을 묶어주시면 좋을 듯합니다.”

클라우스 왕가에는 내전으로 주인을 잃어 귀속된 땅이 많았다. 아스틴 왕국과 아스터 왕국. 아스란 왕국이 반으로 갈라졌으니 휴전 이후 아스틴 왕국은 아스터 왕국을 지지했던 귀족들을 추방했다.

그리고 남은 땅을 꿀꺽, 국유화했는데 국토의 절반에 달하는 영지를 왕가가 직접 통치하긴 무리였다.

봉건제 하 빈약한 행정 시스템의 한계다. 해서 왕가는 그 영지들을 대리 통치할 인물을 뽑아 파견하는 것으로 행정 공백을 메웠다.

여기까진 좋다. 문제는,

공교육의 부재. 대리인으로 보낼 사람이 귀족밖에 없었다. 귀족의 급감으로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졌지만, 집결된 권력을 뒷받침할 지식인층이 없는 것이다. 결국, 귀족가의 둘째 또는 서자들에게 기회가 돌아갔다.

훗날의 일이지만, 이는 신체제를 표방한 구체제의 재탕으로 평가받았다. 농경을 기반으로 한 봉건제가 상업 계층에 의해 몰락하기까지는 더 오랜 세월이 걸렸고, 당장은 귀족들이 제 아들이 위임통치하는 땅을 저희 가문의 영지로 편입하고자 온갖 술수를 부리고 있었다.

눈앞의 이 뚱보처럼.

아놀프 드 클라우스 왕자가 옅은 한숨을 뱉었다.

속셈이야 뻔하지만, 국방 문제를 명분 삼았으니 그에 걸맞은 답변을 돌려주어야 하겠다.

“그렇군요. 그런 고충이 있으신 줄은 몰랐습니다. 하지만 왕께서 세운 법을 제 마음대로 해석해 완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구체적인 자료를 종합해 올려주세요.”

“구, 구체적인 자료요?”

“네. 에이브릴 성의 유지보수 상태와 예상 보수 비용, 수입과 지출 현황이 필요합니다. 에이브릴 성을 통치 중인 분이 아드님이라 하셨으니 관청을 통할 게 아니라 직접 구해오시는 게 빠르겠습니다. 또, 그 성에 거주하는 부락이 있겠지요? 행정구역이 묶이는 것에 대한 토착민들의 동의서도 함께 제출하세요.”

이런 일이 너무 잦아서 왕자는 숨 돌릴 필요도 없이 말했다.

보나 마나 아들과 짜고 위조해서 가져올 것이었는데, 이렇게까지 완곡하게 ‘안 된다.’ 못을 박았음에도 그리한다면 그때는 감찰관을 파견해 문서를 대조할 생각이었다. 사실은 그렇게 밀려 있는 합병 요청만 일곱 개가 넘었다.

그리고 하하, 토착민들의 동의를 얻으려면 돈깨나 써야 할 것이다. 그 정도까지 써가면서 영지를 합병하려 한다면 뭐… 왕실 입장에서는 승낙해도 손해가 아니었다.

아카이아 제국으로부터 독립한 이래, 자유민으로 분류된 토착민(북부의 야만인)들은 마우닌 왕과 레티이 여왕의 후손인 우리 클라우스 왕가를 절대적으로 지지하니까.

그들이 혜택을 받아 세를 불리는 게 곧 왕가의 힘이라는 걸 아놀프 드 클라우스 왕자는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이런 빌어먹을.’

디에고 브리나 자작의 어깨가 축 처졌다. 이러면 아침부터 개고생한 게 말짱 헛고생인지라 낯빛이 어두워지려는 걸 애써 다잡으며 말했다.

“지,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제가 성급했군요. 곧 증빙 서류를 준비해 오겠습니다.”

“그러시지요. 왕국의 국방을 위해 애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긍정적으로 검토하겠습니다.”

왕자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로 브리나 자작을 돌려보냈다.

하지만 왕자는 되돌아가던 자작이 시민들이 웅성거리는 말을 듣곤

“뭐? 노엘 덱스터?!”

반색해 달려간 것을 알지 못했다. 그는 왕궁에 입궐했다.

작년, 벨리타 왕국의 초청을 받아 떠났던 왕자의 귀환이었다. 팡파르가 울리고 근위병이 도열해 그를 맞이했으나 아놀프 왕자의 표정은 썩 밝지가 않았다.

최강대국, 벨리타 왕국에 다녀온 건 좋은 경험이었다.

그곳의 문화와 동향을 파악했고, 아카이아 제국으로부터 이어져 발전해온 법과 행정 시스템을 곁눈질했다. 또, 우리 왕국의 것과는 비교가 안 되는 거대한 시장을 인상 깊게 보았고, 수백 대의 마차를 보유한 상단의 상단주를 초청해 대담하기도 했다.

이 경험은 내가 장차 왕위에 올라 왕국을 이끌어가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었다.

그뿐만이겠는가.

벨리타 왕국의 정계 상황을 피부로 느꼈다. 그곳은 우리 왕국과는 전혀 달랐다.

짧게는 수백 년, 길게는 수천 년의 역사를 짊어진 귀족 가문들.

벨리타 왕국에는 좀 전의 디에고 브리나 자작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대귀족들이 판을 치고 있었다.

개중에서도 한 가문이 돋보였다.

아스틴&아스터 왕국의 클라우스, 아이셀 왕국의 이사도라, 콘라드 왕국의 예리엘, 오른 왕국의 로그넘, 제롬 신성 왕국의 프레데릭 왕가와 비교해도 크게 꿀리지 않는 그 거대 가문은 바로…

타티안 후작가였다.

타티안 후작가의 현 가주는 베나르 타티안이라는 인물이었다. 흔히 벨리타 왕국 서부의 지배자로 불리는데, 아놀프 드 클라우스 왕자는 그가 크게 저평가받고 있다는 생각을 지우기 어려웠다.

타티안 후작가에 대해서는 당연히 알고 있었다. 오히려 귀족들이 잘 모르고 왕족들만 아는 역사인데, 상인 가문으로 그 시작을 알린 타티안 후작가는 아카이아 제국 시절 무려 ‘금화의 주인’으로 불렸다.

단순히 돈이 많아서가 아니다.

그들이 화폐를 찍어냈기 때문이다.

금화와 은화, 동화라는 동전으로 대표되는 작금의 통화 시스템을 만든 가문이 타티안 후작가이고, 후작가는 아카이아 제국의 조폐(造幣, 화폐를 만듦)를 담당했었다.

지금은 그만뒀다. 동화를 제작하는 데 필요한 황동이 귀해지면서 손을 뗐다고 했던가… 여튼 인류 역사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가문이다.

벨리타 왕국에 다녀온 아놀프 드 클라우스 왕자는 당연히 베나르 타티안 후작도 만났다.

얼어붙은 푸른 눈동자와 기울어진 초록 천칭이 인상 깊었다. 그는 새로운 무언가를 꾸미고 있었다.

‘아스틴과 아스터, 벨리타. 세 왕국 간의 접경지대에 관심이 많아 보였지… 나름 내색하지 않으려 하긴 했지만.’

뭔지는 몰라도 상업과 관계된 것일 터였다. 아무렇게나 시간이 되는 상단주를 초청해 대담할 때도 후작의 이름이 거론될 정도니, 그가 벨리타 왕국의 상업에 미치는 영향을 익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엄청난 가문이 숨을 죽이고 있단 말이지. 고작 포르테 백작가라는 기사 가문에게 밀려 정권을 내어줄 정도로.

정권을 잡았느냐 못 잡았느냐가 이미 왕국을 현실적으로 좌지우지하고 있는 가문에게 별로 중요한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 이면에 무엇이 있느냐… 그게 관건인데,

‘내가 신경 쓸 건 아니지.’

후작과 척을 지지 않았으면 됐다.

왕자가 보기에 후작은 무서운 사람이었고, 그가 뭘 원하는지 파악해가며 적당히 교섭해나가고 있었다. 아놀프 드 클라우스 왕자의 가슴을 아프게 한 사건은 다른 것이었다.

나를 초청한 공주가 내 면전에서 다른 이와 키스를 했다.

남자로서 화가 난다?

그럴 리 있겠는가. 왕국의 미래를 짊어진 왕족이 그런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에 휘둘려선 안 된다.

하지만 나는 분노했다.

분노를 표했다.

감히 아스틴 왕국의 왕자를 모멸하다니. 이건 단지 나, 개인을 욕보인 게 아니라 우리 왕국을 욕보인 것이었다.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클로에 드 타탈리아 공주.

그대가 무슨 생각으로 날 모욕했는지 알고 싶지 않소. 그대의 오라버니, 클리안 드 타탈리아 왕자는 당신이 종종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을 한다며 날 위로했지만, 엎질러진 물을 되담을 수는 없는 것이오.

당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는 말하지 않겠소. 아름다우시더구려. 하지만 난 전쟁을 가슴에 품었소.

그대가 아스가르드 평원의 진창에 무릎 꿇고 사죄하길 바라며 그대들의 수도를 떠났고, 내 백성들을 야만인으로 치부하는 그대들을 벌할 생각이었소. 당신의 왕국이 우리 왕국보다 강대국이니 쉽지 않겠지만, 내 평생의 목표로 삼으려 하였소이다.

그러나

백성들이 무슨 죄요.

내 사랑하는 왕국의 아들딸들, 형제들이 그 잘난 명예를 위해 목숨 바칠 이유가 없음을 깨달았소. 그네들의 삶을 지키는 게 왕이 해야 할 일이라고… 난 배웠소.

어릴 적, 돌아가신 선왕께.

그분은 훌륭한 분이셨다오. 요절하지 않으셨더라면 틀림없이 위대한 성군이 되셨을 분이오.

하지만 그분은 없고, 내가 그분이 통치했어야 할 땅의 반쪽을 물려받을 터이니 클로에 드 타탈리아, 당신을 용서하리다. 아니, 잊으리다.

─ 라고… 다짐했다.

그러나 그가 오르빌을 떠나 조국으로 돌아왔을 때, 국경엔 제2 기사단장인 옌센 바일레이와 바일레이 남작, 구일 전쟁을 승리로 이끈 총사령관이 국경을 시찰(視察, 두루 돌아다니며 실지의 사정을 살핌)하러 나와 있었다. 왕자를 마중 나온 게 아니라.

명백한 전쟁 준비였다.

이미 왕명이 떨어져서 돌이킬 수 없다는 말에 아놀프 드 클라우스 왕자는 탄식했다.

아! 처음부터 초청에 응하지 말았어야 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나와 타탈리아 공주가 맺어지면 제국으로부터의 독립 이래 벨리타 왕국과 우리 왕국 간에 싸여온 해묵은 감정이 풀리리라 기대했건만! 되려 전쟁을 일으키고 말았구나!

이기든 지든, 수많은 사람이 죽을 것이다. 책임을 통감한 그는 호흡을 다스리며 아버지를 찾아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높은 왕좌에 앉아 있길 좋아하는 왕을 알현하였다.

반짝이는 걸 좋아하는 왕. 파올로 드 클라우스가 아들을 무감정한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A Princess Is Raised After Death, Desperately Making Her a Princess, Princess is Raised by Death, RPOD, The Princess Is Raised After She Dies, 正規エンディングまで異世界ループ転生, 공주는 죽어서 키운다
Score 8.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19 Native Language: Korean
Minseo was trapped in [Raise Lena]. With the emotionless text, “[Starting Raise Lena]” he became Leo and was imprisoned in an unfamiliar worl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Uh-huh?” “Leo? Why the long face? You! Are you messing with me again?” There, he met his childhood friend, Lena, skillfully picking berries. The lovely Lena. Leo marries her in a peaceful mountain village… [Lena is married! Congratulations.] [You have failed to clear Raise Lena.] [Restarting.] The happiest moment. Lena disappeared. An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Huh? Lena!” “Why have you been spacing out? And why are you looking at me like that? You wanna get beat up?” Lena, clad in thick leather armor and a sword on her shoulder, stared at him with unwavering eyes. It was a different scenar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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