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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8

28화 기사와 용병 (3)

28화 기사와 용병 (3)

나는 세실의 손에 들린 단검을 바라봤다.

세실은 일부러 내게 숨겼던 것 같지만, 나는 세실이 처음 단검 이야기를 꺼냈을 때부터 그것이 네몬과 연관된 일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암영의 살수들이 사용하는 단검은 특별하지 않다. 그런데도 세실이 ‘암영의 단검’이라고 특정했다면, 그것이 네몬의 단검이기 때문이다.

‘세실은 네몬에게 위협당한 적이 있으니까.’

네몬 블레오파드.

코드네임 시그마(Sigma).

껄끄러운 상대다. 아니, 이 세계에서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한회귀 세계관에는 카인을 비롯한 몇몇 정신 나간 인물이 등장하는데, 네몬도 그중 하나다.

아울러 그는 이 세계에서 가장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기도 하다.

“그 단검에 궁금증이 있는 거냐? 예쁜 꼬마.”

쿠의 목소리는 진지했다. 조금이지만 위협적인 느낌도 들었다.

“흠. 어디까지 말해야 할지 고민되는데.”

“전부. 다.”

“그럴 수는 없다. 예쁜 꼬마.”

“어째서.”

“나는 비밀로 가득한 한 마리의 고독한 늑대니까 말이다! 으하하하하!”

조금 전의 진중했던 모습이 연극이었던 것처럼 쿠가 낄낄대며 웃었다.

그러나 세실의 서늘한 표정을 보자마자 험험, 헛기침했다.

“음 그래. 일단은 너희를 미행하고 있었다는 말부터 솔직하게 해야겠구나.”

예상은 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늪에 빠진 나를 구한 것이 설명되지 않으니까.

“언제. 부터?”

“너희들이 마석 광산을 탈출하고, 너희를 추격하던 기병대가 전멸하고, 추가로 출진한 쾨르다시에의 전 병력이 싸늘한 시체가 되어버린 광경을 봤을 때부터.”

나는 놀랐다.

쿠는 쾨르다시에의 병력이 전멸한 사건을 귀로 들은 것이 아니라, 직접 봤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어떤 사정으로 비츠크 산맥을 오르고 있었다. 그러던 중 발견한 거다. 쾨르다시에 기병대와 소드마스터 에티엔의 주검을.”

쿠의 푸른 눈에서 모닥불의 불길이 일렁거렸다.

“에티엔의 가슴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부하들의 시체도 눈 뜨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참혹했지. 나는 그들이 무엇에게 당했는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그럴 만도 했다.

그들은 차원의 그림자에게 죽임당했으니까.

“단검은 그곳에서 주운 거다. 예쁜 꼬마.”

나는 덜미에 소름이 돋았다.

쿠의 말대로라면, 그날 에티엔에게 단검을 던진 자가 네몬 블레오파드였다는 뜻이니까.

‘네몬이 거기 있었다고? 아니, 그게 사실이라면 그는 왜 세실을 내버려 둔 걸까.’

세실은 암영의 특급 수배자다. 심지어 세실의 수배를 명한 이는 암영의 수장이자 세실의 아버지인 ‘일루산 블레오파드’.

제아무리 네몬이라도 수장의 명령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런데 대체 왜.

“보급로를 따라 들어가니 더 많은 병력이 죽어 있었다. 쾨르다시에의 본대였지. 그들의 시체는 앞의 시체들과는 달랐다. 인간의 솜씨였어. 그것도 아주 고도로 훈련된 살수의.”

세실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나는 쿠의 말을 토대로 상황을 분석해 봤다. 우리가 광산을 탈출하던 날, 그 숲에는 암영이 있었다. 세실이 눈치채지 못한 것으로 보아 1급 이상의 살수들이었을 거다.

그들의 지휘자는 네몬 블레오파드. 그런데 네몬은 무슨 이유에선지 세실을 보고도 못 본 체했다. 그리고 에티엔과 차원의 그림자 간의 전투를 주시하다가 단검을 던져 나와 카인을 구했다.

‘이게 말이 되는 상황인가.’

머릿속을 정리하려 했지만 더욱 복잡해졌다.

떠오르는 의문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나는 광산 노예들이 탈출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소드마스터 에티엔이 출전한 이유도 그의 아우가 노예 중 한 명에게 살해당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됐지. 그래서 나는 탈출 노예들의 뒤를 쫓았고, 너희를 발견한 거다.”

거기까지 말한 쿠가 두 손을 펼쳐 보이며 덧붙였다.

“아아. 걱정은 하지 말거라. 나는 너희들을 붙잡아 현상금을 탈 생각은 없으니까.”

“지금 한 말은 전부 사실이야?”

듣고만 있던 내가 물었다.

“그래. 내가 한 이야기에 거짓은 없다.”

“우리에게 원하는 게 뭐지? 분명히 말하지만 우리는 살수 같은 건 본 적도 없어.”

쿠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러나 이내 껄껄 웃으며 술병의 술을 들이켰다.

“그래! 너희들이 본 게 없다면 굳이 물을 내용도 없겠구나! 하하하!”

“당신은 왜 우리를 돕는 거지?”

쿠는 쾨르다시에 사건에 관한 해답을 찾기 위해 탈출 노예의 뒤를 쫓았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가 우리에게 우호적인 모습을 보인 것도 납득이 간다.

하지만 늪에서의 일은 지나쳤다. 그때 나를 빨아들이던 늪의 흡력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그런데 세실의 말에 의하면, 쿠는 망설이는 기색 없이 늪으로 뛰어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나를 구하느라 그도 상당한 위험을 겪었다.

쿠는 왜 그런 위험을 무릅썼을까. 단순히 쾨르다시에 사건의 목격자를 찾던 중이었다면, 설령 내가 죽는다 해도 4인의 목격자가 남은 셈인데.

“엥? 왜 너희를 돕느냐고?”

쿠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다 큰 어른이 위험에 처한 아이를 돕는 것에 이유가 필요하다는 거냐?”

쿠가 어금니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지금까지 본 그의 웃음 중 가장 인간적인 미소였다.

“뭐, 내게도 너희 또래의 아이가 있거든.”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그의 입가가 조금은 애틋한 미소를 그렸다.

“사실 못 본 지 꽤 오래되었다. 그래, 얼마 전에 14살이 되었겠군. 요즘 들어 그 아이가 부쩍 보고 싶어졌는데, 마침 너희들을 보니 내버려 두기 영 찜찜해서 말이다.”

딱 거기까지만 했으면 좋았을 텐데, 또 쓸데없는 말을 덧붙이는 그였다.

“물론 너희 눈에는 내가 아직 새파란 총각으로 보였을 테지만 말이다. 실망시켜서 미안하군! 으하하하하!”

저 나불거리는 입.

“그리고 말이다.”

쿠가 우리를 부드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이제 보니 상당히 다양한 표정을 가진 자였다.

“나는 너희들이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원치 않게 마석 광산에 끌려간 것도, 어떻게든 살아남겠다고 발버둥 친 것도.”

나는 세실의 눈이 촛불처럼 흔들리는 것을 봤다.

“그 과정에서 몇 명의 어른이 죽었다 해도 말이다.”

나는 미소하는 쿠의 얼굴이 인자한 호랑이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호랑이가 인자하다니, 뭔가 말이 안 되는 것 같지만.

세실이 내 옷을 꼬옥 쥐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는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믿고 싶은 거겠지. 쿠를.’

말만으로 사람을 믿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사람은 말로는 무엇이든 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쿠는 말뿐만 아니라 행동으로도 보여줬다. 그래서 나는 혼란스러웠다.

저 사내를 믿어도 될까.

그래도 될까.

“당신은 용병이야?”

“암! 용병이지! 그것도 아주 뛰어난 실력을 가진 무적의 용병! 하하하하!”

“용병패를 보고 싶은데.”

무한회귀 세계의 모든 용병이 용병패를 지닌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용병패를 지닌 자는 그만큼 실력과 신용을 인정받는다는 뜻이기에, 확인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하하하! 금발 꼬마는 정말 까다롭구나!”

쿠가 여유 가득한 얼굴로 품속을 뒤졌다.

그의 표정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어? 어라? 어라라라?”

옷 안에 숨어든 벌레라도 찾는 것처럼 쿠가 온몸을 뒤적거렸다. 어라라! 뭐지! 내 용병패가 어디로 갔지이이이!

그는 결국 등짐을 뒤집어 탈탈 털어댄 뒤에야 용병패를 찾을 수 있었다.

“자! 본 적은 있느냐! 이몸이 무려 금패 용병님이시다! 하하하하!”

마치 암행어사라도 출두한 듯한 자세를 취하며 그가 내민 것은 정말로 금색 용병패였다. 동패나 은패를 지닌 용병보다 몸값과 신용이 더욱 높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런데 저런 물건을 저렇게 아무렇게나 굴리다니.

“우와! 저, 저도 보여주세요!”

“마음껏 봐라 족제비 꼬마! 으하하하하!”

족제비가 눈을 빛내며 달려들었다. 테오도 별반 다르지 않았고, 덩치는 지금까지 본 중 가장 놀란 얼굴로 용병패를 구경했다. 그러자 세실도 은근슬쩍 자리에서 일어나 무리에 끼어들었다.

“이런이런, 소개가 늦었군! 내 이름은 ‘쿠’다! 너희들의 이름은 뭐냐!”

며칠 전에 했던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하는 쿠를 보며 나는 말문이 막혔다.

그런데 옆에서 풋! 하는 작은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목소리가 이어졌다.

“세실.”

나는 세실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가명을 쓰게 할까 했는데, 벌써 말해버렸다.

“우리 예쁜 꼬마의 이름은 세실이구나. 그럼 금발 꼬마는 이름이 뭐냐.”

“데미안.”

나는 굳이 가명을 쓸 필요가 없다.

애초에 내 진짜 이름도 아니고.

“테오.”

“조, 조아킴.”

“휴고.”

나머지 일행도 이름을 밝혔다.

쿠가 큰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그래! 모두 좋은 이름이구나! 테오! 조조아킴! 휴고! 하하하하!”

“조조아킴이 아니고 조, 조아킴이에요······!”

“그래! 조조아킴! 하하하하하!”

쿠는 이름 외에 다른 것을 묻지는 않았다.

그저 세실에게 원한다면 그 단검을 주겠다고 말했다. 물론 세실은 치를 떨며 거절했다.

“쿠. 어디.”

“내 목적지 말이냐? 나는 페르디나로 갈 생각이다.”

앞뒤 문맥을 다 잘라 먹은 세실의 말을 쿠는 잘도 알아들었다.

“너희들도 특별한 목적지가 없다면 페르디나에 가보는 것이 어떠냐. 나와 함께한다면 별다른 의심을 받지 않고 성문을 통과할 수 있을 거다. 이래 봬도 나는 제법 유명한 용병이거든. 물론 실력이 뒷받침되기 때문이지만 말이다. 으하하하하!”

쿠는 물어보듯이 말했지만, 나는 그가 우리의 목적지를 알고 하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은 해볼게요.”

“오오! 금발 꼬마가 드디어 존댓말을 하는구나! 그래그래. 그렇게 예의가 발라야 나중에 예쁜 색시를 얻을 수 있는 거다!”

······그게 대체 무슨 상관일까.

게다가 두 번이나 이름을 물어놓고 또 ‘금발 꼬마’라고 부르다니.

***

“저기 보이냐? 금발 꼬마. 저 성벽 너머가 바로 페르디나다.”

대체 왜 이름을 물어봤던 걸까.

언덕에 오른 우리는 저 멀리 보이는 페르디나의 전경을 바라봤다.

우리는 드디어 페르디나에 도착했다.

“용병의 도시 페르디나여! 내가 왔다! 하하하하하!”

쿠의 외침에 화답하듯 스트라이더가 푸르릉, 투레질했다.

스트라이더 위에는 세실이 오도카니 앉아 있었다. 쿠는 세실을 예뻐했다. 예뻐서 그런가 보다.

“데미안.”

세실이 내게 손을 뻗었다. 말 위에 올라와서 함께 보자는 것 같다. 나는 고개를 저었지만 쿠가 나를 번쩍 들어 세실의 뒷자리에 올려놨다.

“우리. 도착했어.”

세실이 환히 웃으며 나의 손을 잡았다.

쿠가 껄껄 웃었고, 테오와 덩치도 미소 띤 얼굴로 나를 봤다. 족제비만이 스트라이더의 등에 올라오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저 멀리 왼쪽으로 보이는 바다가 세르펜타인 해협이다. 그 너머에는 대륙의 등뼈라고 불리는 세르펜타인 산맥이 있지. 보이냐? 저기 구름 위로 빼꼼 고개를 내민 뾰족한 머리 말이다.”

우리는 눈을 가늘게 뜨며 해협 너머를 봤다. 잘 모르겠다. 보이는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그보다 나는 선명한 하늘 아래 우뚝 선 페르디나의 성벽에 눈길이 갔다. 용병들의 도시답게 굳세고 튼튼해 보인다.

“오! 쿠 아닌가!”

“이거 오랜만이군, 쿠!”

성문에 도착하자 경비병들이 반갑게 알은체했다. 쿠의 말대로였다. 그들은 우리를 의심하는 기색 없이 형식적인 검문을 마친 뒤 성벽 안으로 들여보내 줬다.

너무 쉬워서 맥이 빠질 정도였다.

사실 나는 페르디나에 도착하면 어떤 식으로 성문을 통과해야 할지 내내 고민했었다.

“예뻐. 마을.”

세실이 눈을 빛내며 주변을 둘러봤다. 도시는 복잡하고 활기찼다. 무기를 파는 상인, 길거리 음식을 먹는 이들, 왁자지껄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용병과 모험가들이 보였다.

테오와 족제비도 입을 헤벌리며 주위를 구경했다. 덩치는 묘하게 침착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너희들, 머무를 곳은 있는 거냐?”

쿠의 물음에 나는 아공간에서 반지를 꺼냈다. 숲의 보급로에서 챙겨뒀던, 기사의 반지.

“이걸 돈으로 교환하고 싶어요.”

반지를 손에 들고 살피던 쿠가 나직이 말했다.

“이건 아무 데서나 팔면 안 되겠는데.”

“왜요?”

“쾨르다시에의 물건이라는 게 발각될 수 있으니까.”

역시 이 반지는 쾨르다시에 기사단의 상징이었다.

“하나뿐이냐?”

잠시 고민한 나는 나머지 하나도 아공간에서 꺼냈다. 어차피 내가 처분할 수 없는 물건이다.

“두 개가 전부에요.”

“내게 맡긴다면 며칠 내로 돈으로 바꿔서 가져다주마. 어떻게 할래? 금발 꼬마.”

“그렇게 해주세요.”

“에엥?”

쿠가 눈을 둥글게 뜨며 말했다.

“금발 꼬마! 갑자기 왜 이렇게 착해진 거냐? 당연히 싫다고 할 줄 알았는데!”

나는 인상을 썼고, 세실은 쿡쿡 웃었다.

쿠는 우리를 ‘황소머리 여관’이라는 곳에 데려갔다.

“이게 누군가. 정말 오랜만이군, 쿠.”

여관 주인이 쿠를 보자마자 반색했다.

쿠가 여관 주인과 이야기하는 동안 우리는 빈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네모난 나무 테이블이었는데 묘하게 향긋한 냄새가 났다.

“그런데 웬 아이들인가?”

“아아. 사정이 있어 잠시 맡고 있네.”

“다 함께 머무를 생각인가?”

“아이들만. 함께 있는 편이 나을 테니 큰 방으로 부탁하네.”

“그 정도로 큰 방은 지금 없네. 작은 방 두 개를 준비하지.”

쿠가 고개를 끄덕였고, 여관 주인이 흘끗 우리를 봤다.

“용병으로 키울 생각인가?”

“뭐, 생각 중이지.”

“얼마 전에 검은 갈기의 오스카도 저 또래의 아이들을 데려왔다더군. 용병으로 키울 셈인 것 같던데.”

‘오스카’라는 이름이 내 주의를 끌었다.

검은 갈기의 오스카.

소설 초반, 카인이 소속됐던 용병단의 단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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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Status: Ongoing
The protagonist, an infinite regressor, found himself possessed within a novel where the original protagonist had gone mad and turned dark. Now, with my unique abilities, I must write a new ending for the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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