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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80

278. 약혼 Ep – 연결고리

“성녀에게 물어보면 알겠지.”

얄밉게도 아르펜은 이 한 마디로 상황을 정리했다. 신탁에 대해 다시 이야기하던 레이는 허탈해졌다.

왜 내가 손해를 본 기분이지?

하지만 아르펜의 뒤이어진 말에는 허탈을 넘어 살짝 화가 치밀었다.

“처음부터 성녀한테 연락해보라고 했으면 빨랐을 것을… 쯧쯧. 얼레?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노엘, 일어나게. 언제까지 잘 셈인가.”

“…음? 아… 끝났습니까?”

“그래. 자넨 하나도 안 변했군. 내가 성녀에게 연락해보기로 했네. 흠, 일단 자네는 내일부터 기사단으로 출근하도록. 신탁이 맞든 틀리든 복직하기로 한 데엔 변함이 없으니까. 왕자님께도 말씀드려야겠어.”

“…남작님. 왕자님께 말씀드리는 건 상관없지만, 만약에라도 이 일이 왕의 귀에 들어가면 곤란합…”

아르펜이 귀찮다는 듯한 손동작으로 그의 말을 딱, 끊었다.

“아 거 젊은 친구가 걱정이 많군. 말도 많고…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하지 마.”

…으득. 레이의 턱에 힘줄이 튀어나왔다. 뭐 이런 인간이 다 있지? 한마디 쏘아붙이려다가 그만두었다.

“예. 그엄 잘~ 부탁드입니다. 아라보시고 연낙즈세요.”

“그래, 그래. 이럴 게 아니라 바로 교회에 가봐야겠군. 집사! 마차를 대령하게. 아! 두 대로!”

아르펜이 마차를 타고 떠났다.

레이와 노엘은 그가 빌려준 마차를 타고 덱스터 가의 저택으로 돌아가는데, 레이가 시근덕거렸다.

“아버지. 그런데 저 사람 믿어도 되는 겁니까?”

노엘은 그런 아들을 이해한다는 듯이 부드럽게 말했다.

“아르펜 선배님을 처음 만나는 사람은 다들 그렇게 생각한단다. 걱정하지 말려무나. 경거망동할 사람은 아니니까. 어쨌든 모두 계획대로 되지 않았니.”

“그렇긴 하죠…”

아르펜 알바세테가 믿어줄 거라 생각하지 않았던 레이는 최후의 카드로 성녀를 염두에 두었다.

성녀에게 교회의 통신을 넣는 건 제아무리 귀족일지라도 어려운 일이라 통신을 넣고 답신을 받기까지 몇 달을 기다려야 했지만, 대륙에 단 셋뿐인 소드마스터의 질문이라면 답이 금방 돌아오리라 생각한 것이다.

말파스를 상대하기 위해 바르나울 교회의 전력을 빌릴 필요도 있었으므로, 결과적으로는 잘 되었다. 잘 되었는데…

후.

레이는 한숨으로 짜증을 털어냈다. 아쉬운 쪽은 나니까. 온수와 냉수를 가릴 때가 아니다. 그는 마차 창틀에 턱을 기대고 앞으로의 일을 계획했다. 그때,

“옌센을 기억하는 모양이더구나.”

아버지가 나지막이 물었다. 레이는 조용히 고개를 돌렸을 뿐, 답하지는 않았다.

노엘이 말을 이었다.

“옌센은 아무것도 모른단다. 아직도 이베라가 살아 있는 줄 알겠지. 사실 오늘 녀석을 만나면 어떻게 대해야 할지 걱정했다. 왠지 네가 알고 있는 눈치여서 더 그랬다.”

원래 레이의 계획은 이게 아니었다. 아르펜을 설득하러 가기 전에 제2 기사단장인 옌센 바일레이를 찾아가 성녀에게 연락해달라 ‘요구’할 생각이었다.

옌센은 메리엘 성녀의 남동생이다.

하지만 깜박 잊었던 게, 옌센은 수도에 있지 않았다. 전쟁을 준비하러 국경에 나가 있어서 옌센의 저택 앞에서 걸음을 돌렸고, 노엘의 권유로 아르펜을 찾아가게 된 것이다.

옌센. 옌센 바일레이.

그자와는 짚고 넘어가야 할, 청산해야 할 과거가 있었다. 기억을 되찾은 레이의 기억 속, 피칠갑한 기사의 모습이 선명하다.

레이는 이를 꾸득, 악물었다가 힘을 풀었다. 자신이 아닌, 아버지를 위해서.

“…옛일인걸요.”

“그래. 옛날 일이지. 네가 마음을 다잡았으니 하는 말이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신 게 꼭 옌센의 잘못만은 아니란다. 내게도… 잘못이 있지.”

부자(父子)는 더는 말이 없었다.

침묵 속에서 마차가 달렸다. 이내 저택에 당도하였으나, 무겁게 닫힌 입은 열릴 줄을 몰랐다. 끼익- 쇠 경첩이 열리고, 두 사람의 다른 연결고리가 나타날 때까지.

“다녀오셨어요?”

레라 아이나르가 땀에 흠뻑 젖은 이마를 훔치며 인사했다. 노엘은 그녀를 통해 아내를 회상했고, 레이는 미소를 지었다. 겨우내 얼어붙은 대지에 새싹이 돋아나고 있었다.

* * *

후욱- 사각형의 탁자 위로 땀내가 풍겼다. 뜨거운 땀방울이 떨어지고, 남성스러운 근육이 터질 듯이 부풀어 흡! 흐읍! 상대를 꼬꾸라뜨리려 애쓰는 이곳은 바르나울의 어느 여관(Inn)이었다.

이 여관 1층은 ‘ㄱ’자 기다란 나무 탁자가 설치된 주점이고, 사람으로 붐볐다. 뻐드렁니, 딸기코, 사팔눈… 각양각색 군상의 환호와 함께 승자와 패자가 서로를 끌어안았다.

“와하하하! 멋진 승부였네. 자네, 대단하군.”

“하하핫! 힘으론 내 누구에게도 져본 적이 없건만. 괴물 같은 친구군. 데호르만이라 했지? 아이나르 부족의.”

“옳아! 자네는 바랄 아비커. 맞나? 하하하, 한 잔 받으시게! 라차르의 가호가 있기를!”

바랄이라는 전사는 “위대한 까마귀의 은총이 있기를!”이라고 외치며 건배한 뒤, 자리를 비워주었다. 술을 벌컥 들이켠 데호르만이 호기롭게 말했다.

“자, 자. 다음! 이 데호르만 아이나르에게 도전할 전사가 더 없는가? 없으면 이거 실망인데, 하하하!”

“여기에 있다! 난 톨루카 부족의 ‘칼리 톨루카’다!”

다음 도전자도 금방 나타났다.

이번엔 데호르만과 비교해 덩치는 작지만, 강단 있어 보이는 사내였다. 두 전사는 악수하고, 손을 맞잡은 그대로 탁자에 앉아 팔씨름을 시작했다. 주위를 둘러싼 전사들은 승패를 짐작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대낮인데도 사람이 많다.

숙박 시설에 술과 먹거리를 더해 파는 여관이라면 저녁에 사람이 많고, 낮에는 텅텅 비어 있는 게 자연스러우나 현재 바르나울의 여관들 상당수가 이런 상태였다.

아스틴 왕국 각지의 전사들이 초여름에 열릴 마우닌 대회에 참가하러 일찌감치 수도에 와있는 것이다.

아스란 왕국의 건국왕, 마우닌을 기리는 축제가 시작되려면 아직 멀었다. 하지만 이 축제는 왕실이라던지 하는 어느 집단이 주최하는 게 아닌, 북부의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여는 것이어서 미리 와서 그 과정을 즐기려는 사람이 많았다.

해서 이쯤 됐으면 위원회가 발족(發足)하고 각 분야의 사람이 모이는 둥 슬슬 축제 준비가 시작됐어야 하는데, 분위기가 그렇지 못했다.

벨리타 왕국에 전쟁이 선포될 거라는 소문이 파다하다.

왕실은 이미 동원령을 내렸다.

클라우스 왕가의 직속령인 바르나울에서는 징병이 시작됐고, 곧 왕국 각지에서 병사가 동원될 터라 축제 이야기가 쏙 들어갔다. 마우닌 대회를 기대하며 예까지 온 전사들은 난처해하며 상황을 주시하는 중이었다.

지금이라도 돌아가야 할지, 기왕 온 김에 참전해야 하는지. 전사들이 각자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자신을 데호르만 아이나르라 소개한 거구의 전사가 나타나

“세상에 나보다 힘이 센 사람이 있나? 없지, 없어! 와하하하하하하!”

여관들을 돌아다니며 힘자랑했다.

이런 말을 듣고도 도전하지 않으면 전사가 아니다. 무료했던 전사들이 벌떼처럼 몰려들었고, 107승 3무 0패. 연승이 쌓여갈수록 엉덩이가 무거운 대전사들마저도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

데호르만이 자주 찾아오는 여관 주인장은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에겐 술과 음식이 공짜다.

데호르만을 이기는 전사에게 소정의 상금을 주겠다 공언한 다른 숙소 주인장까지 있어서 여관 주인장은 심판을 자처하였다. 물론, 데호르만에게 물심양면 다하는 심판 말이다.

“109승 3무 0패! 그만, 그만! 여기까지. 좀 쉬었다 하지 그래. 마침 밥때가 됐는데 식사들 해. 오늘의 특선 요리가 준비돼 있지!”

푸핫! 뻔한 상술에 폭소가 터졌다.

그러나 전사들이 웃음을 터뜨린 데엔 다른 이유도 있었다.

“‘오늘의’ 특선 요리라고? 내가 여길 일주일째 오는데, 여태 ‘사냥꾼 스튜(Hunter’s Stew)’밖에 안 줬어!”

“영원한 스튜(Perpetual Stew)겠지! 오늘의 특선 요리라는 게 아주 틀린 말은 아니구먼. 푸하하하!”

이렇게 말하면서도 전사들은 주인장이 내주는 질퍽한 스튜를 받아들었다. 포타지(Pottage, 야채나 곡물, 여건이 허락하는 대로 고기나 물고기 따위를 넣어 질게 끓인 수프나 스튜)의 일종이지만, 이 음식에 사냥꾼 스튜, 영원한 스튜, 끝없는 스튜 등 다양한 별명이 붙은 까닭은 그 조리법 때문이었다.

보통은 사냥꾼 스튜라 불린다. 한데 이 음식의 특별한 점은…

“음. 봄이 오긴 오나 보군. 라디무 말고도 다른 야채가 들었는데?”

“내 것엔 나물도 있네.”

아무 재료나 들어간다는 것이었다.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재료면 뭐든지 솥에 집어넣어 끊이고, 먹고 남은 스튜에 또 다른 재료를 넣어 끓이고, 먹고, 또 끓이고를 반복한다.

그래서 영원한, 끝없는 스튜다.

절대로 바닥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의외로 맛은 좋다. 온갖 재료의 풍미가 더해지고 더해져 깊은 감칠맛을 내는데, 이 스튜는 주인장의 자랑거리였다.

“맛있을 수밖에 없지. 이 스튜는 구일 전쟁 때도 끓었단 말이야. 내 아버지가 끓이고, 할머니가 끓이고, 증조할아버지도 끓였어. 아, 걱정하지는 마. 가끔 솥을 닦으니까. 푸하하하하! 자네들 표정이 가관이었어, 방금. 엇? 어서옵쇼!”

아주 짧은 순간 정적이 흐른 여관에 한 청년이 들어섰다. 그는 입맛이 떨어졌는지 사발만 한 스튜를 두고 망설이는 데호르만 곁에 다가와 앉았다.

“잘 돼 가요?”

“…그래. 식사는 했냐?”

“네. 레라랑 먹고 나왔죠.”

레이 덱스터였다. 자신의 것을 덜어주려던 데호르만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다시 수저를 들었다.

먹을 것 앞에서 죽상을 쓰면 천벌 받는다.

레이가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그런데 이렇게 하면 전사들이 정말 우릴 도와주나요?”

“그럼. 당연하지. 물론 돕는 거야 자유지만… 꿀꺽, 넌 토착민이 아니어서 잘 모르겠지만, 한 번이라도 안면을 트면 우린 형제야. 기다려 봐. 내가 여기 있는 전사들을 모두 데려갈 테니까. 시련을 나 혼자 독점하면 안 되지.”

……그게 뭐 좋은 거라고. 레이는 도통 이 야만인 전사들의 생리를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굳이 말하진 않았다.

아버지, 노엘 덱스터는 기사단으로 출근하고, 레라는 훈련에 박차를 가하고, 데호르만은 야만인 전사들과 안면을 터 가는 요즘, 막상 레이는 할 일이 없었다.

아르펜 알바세테 남작한테서 언제 답이 올까(정확히는 성녀한테서), 기다리다가 생각난 것이 있어서 밖에 나왔다. 여긴 가는 길에 잠깐 들른 것이다.

란과 앤.

굴레에서 풀려난 그 자매를 한번 찾아봐야겠다. 그녀들로 인해 변한 것이 있으니까.

아르펜 알바세테 남작이 지난 회차에 전장에 나오지 않았다.

사실 지난 회차뿐만 아니라, 쭉 전장에 참전하지 않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란과 앤을 만났던 회차가 14번째 회차이고, 만약 그들이 아르펜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다면, 계속 그러했을 것이다.

‘난’ 지난 약혼관계 회차 때 마수를 사냥하고 싶어 했다는 그 애 엄마들이 아르펜에게 영향을 미쳤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소드마스터가 뉘 집 애 이름도 아니고. 그녀들보다는 거지남매 회차의 영향이었을 거로 추측했다.

하지만 지난 회차를 겪으며 생각이 원점으로 돌아왔다.

거지남매 회차는 영향을 받았을 뿐이라 알바세테 남작이 전장에 출전하지 않은 건 약혼관계에서 자체적으로 발생한 것이어야 했다. 그럼 남은 게 그 자매들밖에 없었다.

당연히 이미 아르펜에게 물어봤다. 란과 앤 아비커라는 이십 대 후반의 토착민 전사 아가씨들을 아느냐고.

아르펜은 모른다고 답했다. 혹시 자기한테 소개해주려 그러냐고 (염치도 없이) 되물었다가 결혼해 애까지 있다는 말에 실망한 기색이었다.

예상한 대로 연결고리가 없다.

그러나 아스타로트가 강림하고, 말파스가 강철 날개를 휘날리며 나타난… 그 개판이 난 회차 덕분에 알게 된 것이 있었다. 소드마스터의 존재 이유까지 알게 된 지금은 그 연결고리가 무엇일지 조금은 짐작하고 있었다.

레이는 “그럼 너무 무리하시진 마시구요.”, 장인어른이나 다름없는 데호르만에게 인사를 건네고 여관을 나섰다. 그는 {추적술}이 일러주는 길을 따라 바르나울 내성 남쪽에 있는 장터에 들어섰다.

{추적술}이 방향을 직선으로만 알려주는지라 레이는 길을 조금 헤맸다. 좌판이 바닥을 뒤덮고, 골목길이 사방으로 뚫린 장터를 돌아다니던 그는 이윽고 등줄기가 섬찟 곤두서는 걸 느꼈다.

여기다.

붉게 그려진 팔각형의 신력. 말파스의 것이 분명한 자취가 눈앞의 골목길을 뒤덮고 있었다.

그 골목길은 장터 깊은 곳, 수공업자들이 일하는 거리로 이어져 있었다. 조심스럽게 발을 들인 레이의 귀로 아이들의 노랫가락이 들렸다.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A Princess Is Raised After Death, Desperately Making Her a Princess, Princess is Raised by Death, RPOD, The Princess Is Raised After She Dies, 正規エンディングまで異世界ループ転生, 공주는 죽어서 키운다
Score 8.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19 Native Language: Korean
Minseo was trapped in [Raise Lena]. With the emotionless text, “[Starting Raise Lena]” he became Leo and was imprisoned in an unfamiliar worl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Uh-huh?” “Leo? Why the long face? You! Are you messing with me again?” There, he met his childhood friend, Lena, skillfully picking berries. The lovely Lena. Leo marries her in a peaceful mountain village… [Lena is married! Congratulations.] [You have failed to clear Raise Lena.] [Restarting.] The happiest moment. Lena disappeared. An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Huh? Lena!” “Why have you been spacing out? And why are you looking at me like that? You wanna get beat up?” Lena, clad in thick leather armor and a sword on her shoulder, stared at him with unwavering eyes. It was a different scenar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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