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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81

279. 약혼 Ep – 몽유병

“우리 엄마는~ 요롷게 뛰지요~ 밤산책을 나~ 와~ 서~.”

날이 흐려 무척이나 음산한 공터, 세 명의 아이들이었다. 레이는 그 노랫가락을 지나쳐 붉게 물든 골목길을 따라가길 잠시, 중간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장신구 가게가 둘.

란과 앤을 가리키는 {추적술}이 이 두 가게를 지목했다. 란이 언니라고 했던가, 레이는 오른쪽 가게로 발을 들였다. 팔찌와 같은, 주로 가죽으로 된 장신구를 파는 가게였다.

“어서 오세요.”

하지만 팔기보단 만드는 데에 중점을 두었는지 가게는 공방(工房)이 공간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레이는 엮던 끈을 내려놓고 손님을 맞이하는 짙은 흑발의 여인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란 아비커?”

“네. 소개를 받아 오셨나요?”

레이는 잠시 말을 삼갔다.

거짓말하기 전에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정해두는 과정이다. 초면이면서도 그녀의 이름을 알고, 찾아올 이유가 있는 사람이라면…

레이가 꾸벅, 묵례했다.

“…무슨 일이죠?”

“부고를 전하러 왔습니다. ‘버논’이라는 상단주를 아시지요? 그분이 돌아가셨습니다.”

“네?? 버, 버논 아저씨가요?”

버논은 란, 앤 자매와 함께 에이브릴 성에 왔었던 상인이다. 브리나 자작의 후원을 받아 상단을 꾸렸다고 들었는데, 그 대가가 자작령에 가서 밀수일을 해주는 것이었다.

자작령에 도착해 그 사실을 알게 된 버논은 동료 상인들과 함께 달아나고, 기사의 추격을 받아 죽는다.

아니, 죽었다. 그들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레이는 비좁은 작업대 앞, 탁자를 밀쳐 의자를 꺼내 앉았다. 확인해야 할 게 있다는 태도로 물었다.

“죄송하지만 당신이 란 아비커가 맞는지부터 짚고 넘어가야겠네요. 저는 돌아가신 버논 씨의 재산을 분배하는 일을 맡게 된… 유안이라 합니다. 반갑습니다. 먼저 신분증을 볼 수 있을까요? 자유민이시죠?”

“아… 네. 그… 잠시만요.”

란 아비커가 공방 안쪽에 들어가 부스럭거리더니 이내 문서를 가지고 돌아왔다. 하지만 그건 정규 발급된 신분증이 아니라…

“혼인증서군요.”

“그거면 충분하지 않나요?”

“자유민이시라면서요. 관청에서 발급한 신분증이 없습니까?”

레이는 일이 귀찮게 됐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란은 많이 당혹스러운 기색이었다.

“어, 없어요. 잃어버렸나 봐요.”

“흠… 알겠습니다. 지금은 이걸로 만족하지요.”

레이는 ‘지금’을 강조하곤 손에 들린 혼인증서로 눈을 돌렸다. 당연히 교회에서 발급한 것이었는데, 레이의 눈이 동그래졌다.

“결혼을 열두 살에 하셨습니까?”

“네, 좀 일찍 했어요.”

조금이 아닌 것 같은데… 레이가 연달아 질문했다.

“여기엔 성함이 ‘란’이라고밖에 적혀 있지 않군요, 란 아비커(avviker) 씨. 성을 왜 누락하셨죠?”

“그, 그게…”

란이 말꼬리를 흐렸다. 적잖이 당황하던 그녀는 심통이 났는지 눈을 흘기며 되물었다.

“그런데 제가 왜 제 신원을 당신한테 증명해야 하죠? 버논 아저씨 이야기나 해주세요.”

– 덜그럭.

“…이렇게까지 말씀드리려 하진 않았는데… 전 버논 씨의 재산을 분배하는 일을 맡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주변인을 조사하는 임무도 맡고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왜 성을 누락하셨죠?”

레이가 알바세테 남작의 문양이 새겨진 패(牌)를 탁자에 내려놓았다. 버논과는 관계가 없는, 남작가에 출입할 용도로 받아둔 것에 불과하지만 효과는 좋았다.

란이 움찔, 움츠러들었다. 그녀는 주저하며 말했다.

“…저희 부족이 십자교회의 공격을 받았거든요. 사실 전 자유민이 아니에요. 자유민인 남편과 결혼했을 뿐이에요.”

“그렇게 일찍 결혼하신 건 신원을 감추려 하신 겁니까?”

“아, 아니에요. 어머니가 어릴 적에 실종되셔서… 저랑 동생이 오갈 데가 없어서 민며느리로 일찍 혼인하게 된 것이지, 그럴 의도는 없었어요. 성은 혹시라도 문제가 생길까 봐 뺀 거고요.”

“더 자세히 듣고 싶군요. 저도 조금은 압니다. ‘얼음섬’ 출신이시죠?”

“네.”

“어떻게 도망치신 겁니까? 십자교회의 포위망을 빠져나가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요. 더군다나 얼음섬에선 배도 띄우지 못한다 들었는데…”

“걸어서 도망쳤어요. 배는 못 띄우지만, 바다가 얼어서 건널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대전사였던 아버지는 성전사들과 싸우시고… 어머니가 저랑 동생을 데리고 달아났어요.”

란이 공방 구석에 놓인 도끼를 곁눈질했다. 깃털이 달린 도끼. 레이는 저게 누구의 것인지 짐작하였다.

“…그러면 같이 달아났다는 어머니는 왜 실종되신 겁니까? 얼음섬으로 돌아가셨나요?”

“아니요. 저희를 어느 마을에 숨겨놓고 얼음섬에 다녀오긴 하셨는데, 그때는 아버지의 도끼를 찾아 돌아오셨어요. 실종되신 건 저희를 데리고 수도에 온 다음이에요.”

“어머님께서 고생이 많으셨겠군요. 어린아이를 둘이나 데리고… 그런데 실례지만, 실종이라고 하셨는데, 정말 그런가요?”

란의 눈이 매서워졌다.

“그게 무슨 뜻이죠?”

“정말 실종되신 게 맞나 싶어서요. 외람된 말씀이지만, 당신과 동생을 두고 달아난 게 아닌가요? 성인인 지금은 이해하실 수 있잖아요.”

“아니요!”

란이 버럭 고함쳤다.

“절대 그럴 리 없어요! 저도 애가 있어서 알아요. 먹일 게 없으면 제 살이라도 깎아서 먹이는 게 부모고, 입힐 게 없으면 자기가 헐벗는 한이 있어도 입히는 게 어미의 마음이에요. 절대, 절대… 그럴 리 없어요.”

레이는 란의 격한 반응에 움찔했다. 하지만 동시에 의아하다.

홀로 애를 키우던 아주머니가 수도에서 실종될 일이 무에 있겠는가.

삶이 고달파 애들을 두고 달아났으리라 짐작할 만도 한데, 다 큰 성인이 절대! 그럴 리 없다며 역정을 내는 게 되려 이상한 일이었다.

레이는 란의 감정이 가라앉을 때까지 잠자코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시근덕거림에 분노가 섞여 있음을 발견한 순간, 확신했다.

레이가 나지막이 물었다.

“당신은 당신의 어머니가 사라진 이유를 아는군요.”

란이 제 입술을 깨물었다.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으나, 그녀는 하고픈 말이 있는 듯했다. 망설이기에, 레이가 예를 갖춰 말했다.

“실례했습니다. 저는 사실 버논 씨의 재산을 분배하러 온 사람이 아닙니다. 유안도 아니고요. 저는…”

레이가 사과했다. 그는 자신이 소드마스터임을 알리고, 신탁을 받아 말파스라는 악신을 잡으러 왔노라 고백했다. 이 여자와는 말이 통할 것 같아서였다.

쇠가 타는 냄새.

밖에서 타닥, 토독, 빗방울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쏴아아- 쏟아지는 장대비로 변했다. 레이는 다시 자리에 앉았고, 침묵이 이어졌다. 이윽고 란이 중얼거렸다.

“말파스…”

란이 자리에서 일어나 뒤돌아섰다.

그녀가 상의를 벗었다. 옷이 떨어지고, 흑단처럼 짙은 머릿결이 출렁, 그녀의 하얀 허리를 가렸다. 란이 제 머리숱을 움켜쥐고서야 굴곡진 등이 드러났다. 거기엔…

붉은색 까마귀가 그려져 있었다.

도검이 낭자한 전쟁터를 배경으로 그 붉은 까마귀는 땅에 박힌 대검에 올라타 고개를 오만하게 치켜들었다. 그런 문신이다.

란이 옷깃을 여미며 말했다.

“제 어머니는 마르하스 님을 섬기던 제사장이셨어요. 저와 앤은 그걸 물려받을 사람이었고요. 어머니는… 실종되신 게 아니에요. 저와 동생을 그분의 신도로 만든 다음 날, 자기 발로 떠나셨죠… 왜 그러셨는지 몰랐는데, 이제야 알겠네요. 전, 어머니의 기도를 들었어요.”

란이 자신의 과거를 풀어놓았다.

한참 뒤, 천둥이 치고 골목길에서 노래를 부르던 남자아이가 비에 홀딱 젖어 돌아와

“엄마. 나 왔… 엄마? 왜 울어?”

물었을 때, 란은 더 이상 마르하스의 신도가 아니었다. 더는 몽유병에 시달려 남문 시장을 쏘다니지도 않을 테지만, 오래도록 기다려온 어머니가 영영 돌아오지 못하리란 걸 깨닫고 아들을 부둥켜안았다.

레이는 옆집에 있었다.

* * *

비를 맞으며, 레이는 저택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마차를 타면 될 일이지만,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란과 앤.

그녀들에게 들은, 그녀들의 삶이 기구하다. 열두 살. 한창 사랑받을 나이에 부모를 잃고, 생판 모르던 남자와 살을 맞대며 살아온 그들의 삶은 현실에 무뎌져, 사람 사는 게 다 이런 거지, 동그랗게 마모돼 있었다.

란과 앤은 예전 회차에서는 마수를 잡고 싶어 했단다.

저들이 누리지 못한 전사로서의 삶을 누려보려 버논이 만든 상단에 몸을 실었다. 하지만 에이브릴 성에 거의 도착했을 무렵에 노구화호의 공격을 받아 죽었다.

우리가 노구화호를 사냥해 없앤 뒤에야 그 기구한 삶이 변화했다. 무사히 에이브릴 성에 도착해 함께 대전사의 시련을 치를 사람을 찾아 나섰고, 기억이 나지 않는 14번째 회차 때 레오와 레나를 만나 설각사록이라는 마수를 사냥했다.

추측건대, 그때 굴레에서 풀려났을 것이다. 코린 경이 그랬던 것처럼, 그녀들의 바람이 충족된 거다.

하지만 훨훨 풀려나 코빼기조차 보이지 않는 코린 경과 달리 란과 앤은 마르하스라는 아신에게 묶여 있었다.

굴레에서 풀려난 몸뚱어리.

말파스는 기뻤으리라. 제가 써먹고 버린 제사장의 딸들이 어느 날 보니 아주 귀한 것이 되어 있었을 테니까. 아르펜 알바세테 남작이 전쟁에 참전조차 하지 않게 된 까닭은 이 때문이었다.

의도한 건 아니겠으나, 말파스가 란 또는 앤으로 몸을 교체할까 봐 왕의 주위를 떠나지 않은 거다.

‘지난 회차가 도움이 되긴 됐네.’

바로 이전 회차에서 본 게 부족한 연결고리를 메웠다. 요새 토리돔에 난데없이 나타난 말파스, 그는 어느 ‘아비커’ 부족 전사의 몸을 빌어 등장했다. 까마귀 깃털 문신이 있던.

이를 통해 말파스가 제 신도의 몸을 조종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그걸 란과 앤이 앓고 있다는 몽유병과 연관 짓는 건 어렵지 않았다. 다만 어떻게 해결하느냐가 문제였다.

말파스가 사용하지 못하게 란과 앤, 두 자매를 죽여?

그럴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놈의 ‘민간인 살해’ 업적이 골치였다.

민간인을 살해할수록 미약하게 불행해지는, 그 업적이 쌓였다간 후에 문제가 생길지도 몰라서 일단 란과 앤을 만나보는 쪽을 택했다.

여차하면 다른 사람을 시켜 죽이려 했는데, 란이 제 어머니에 관해 미심쩍게 생각하던 게 있어서 천만다행이었다. 그녀의 도움으로 앤과도 이야기가 끝났다. 그들은 이제 마르하스를 섬기지 않을 터였다.

‘이걸로… 그녀들에 대한 내 몫을 다 한 건가.’

어쩌면 치명타로 작용했을지도 모를 걸 처리한 거지만, 그리고 그럴 의도로 접근했지만, 레이는 그렇게 생각하거나 기뻐하지 않았다.

모두 주신이 깔아놓은 길일 뿐이기에… 내가 내 어머니를 되살리려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필연적인 선택’의 연속이었다.

끝이 정해져 있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하더라도. 그 무엇을 비틀려 하더라도, 정해진 과정이다.

문득, 레이는 ‘굴레’란 게 뭔지 알 것 같았다. 레브가 느꼈던 얇고, 서늘한 실타래가 자신과 세계를 옭아매고 있었다. 내가 이걸 느낄 수 있는 이유는 아마도

‘민서 때문이겠지.’

오직 그만이 이 세계에 종속되지 않았으니까. 본인을 ‘플레이어’라고 가볍게 칭하지만, 그가 있기에 시간이 반복되고, 변화했다.

레이는 ‘언젠가 얼굴을 맞대고 사과할 날이 올까…’ 생각하며 도착한 덱스터 가의 저택으로 발을 들였다. 들였는데…

‘뭐지?’

추적추적 비가 내려서 분위기가 이런 것일까. 노엘 덱스터와 레라 아이나르, 데호르만, 엘슨과 유안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레이! 이리 와 봐. 너 없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 줄 알아? 참 나 어이가 없어서. 아니 글쎄…”

화가 단단히 났는지 레라가 콧김을 뿜으며 말했다.

“브리나 자작인지 돼진지 모를 돼지 새끼가 왔다 갔어.”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A Princess Is Raised After Death, Desperately Making Her a Princess, Princess is Raised by Death, RPOD, The Princess Is Raised After She Dies, 正規エンディングまで異世界ループ転生, 공주는 죽어서 키운다
Score 8.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19 Native Language: Korean
Minseo was trapped in [Raise Lena]. With the emotionless text, “[Starting Raise Lena]” he became Leo and was imprisoned in an unfamiliar worl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Uh-huh?” “Leo? Why the long face? You! Are you messing with me again?” There, he met his childhood friend, Lena, skillfully picking berries. The lovely Lena. Leo marries her in a peaceful mountain village… [Lena is married! Congratulations.] [You have failed to clear Raise Lena.] [Restarting.] The happiest moment. Lena disappeared. An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Huh? Lena!” “Why have you been spacing out? And why are you looking at me like that? You wanna get beat up?” Lena, clad in thick leather armor and a sword on her shoulder, stared at him with unwavering eyes. It was a different scenar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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