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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84

282. 약혼 Ep – 두 아버지

말파스는 여덟 개의 날개를 달고도 날지 못했다. 십여 년 전에 발발한 구일 전쟁 당시, 배불리 먹은 탓이다.

피해자들의 무구로 뒤덮인 날개는 무거웠고, 반짝이는 걸 좋아하는 까마귀의 욕심은 끝이 없었다. 하지만, 강했다.

“커헉!”

수레만 한 부리가 기사의 몸을 쪼았다. 조류가 으레 그러하듯 녀석의 머리는 신속하게 움직였다.

눈을 깜박이면 반대쪽을 바라보고 있다. 다시 눈을 깜박이면 고개를 갸웃, 이쪽을 조준한다.

눈이 마주친 당신은 죽었다.

날카로운 부리에 내장이 쪼이건, 머리가 떨어졌다. 기사들은 감히 놈에게 접근할 수가 없었다.

사실, 접근하려 해도 쉽지 않았다.

말파스가 날개를 푸드덕, 털어낼 때마다 녀석을 둘러싼 강철 폭풍이 거세어졌다.

[철륜환(鐵淪環)]

날개에서 떨어진 쇳조각이 녀석을 감싸고 돌았다. 어느 대전사가 탄식했다시피 놈은 마수 따위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나마 기사들이 힘내어 버티는 까닭은

“날 보라고! 날!! 이 새대가리야!”

흩날리는 쇳조각에 피투성이가 되어가며 싸우는 소드마스터, 아르펜 알바세테 덕분이었다.

하지만 말파스는 아르펜을 무시하기로 작정한 듯했다. 아르펜이 달려들거든 푸다닥, 껑충 뛰어 다른 먹잇감을 찾았고, 쇳조각이 비산했다. 레이도 무시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주신의 사도와 장난감.

무엇이 위험하고, 위험하지 않은지 구분할 줄 모르면 이렇게 긴 세월을 살아오지 못했을 것이다. 까앙- 가까스로 부리를 막은 성전사의 방패가 움푹 파였다.

“이봐, 레이. 저거… 후우. 잡을 수는 있는 거냐?”

도저히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아르펜이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레이의 몸에서도 땀과 피가 비에 젖은 것처럼 흘러내렸다.

“…잡아야 합니다.”

단정적으로 말했지만, 레이도 수심에 잠겨 있었다. 당당히 맞서 싸워줬던 오리아스가 고마울 지경이니 말 다 했다.

말파스는 영악했다.

위협이 되는 상대를 피해 다닐 뿐 아니라 인간이 얼마나 사소한 것에 약해지는지를 알았다.

놈은 출병식을 위해 설치된 8계단 나무 연단을 뛰어다니며 밟았다. 철 발톱으로 우드득, 밟은 자리를 망가뜨렸는데, 녀석에겐 상관없겠지만, 사람에겐 환장할 노릇이었다.

사람은 바닥이 평평하지 않으면 힘을 쓰기 어렵다. 기울었다면 하다못해 단단하기라도 해야 한다.

한데 여기저기 구멍이 뚫리고 부서진 연단은 발을 내디디면 끼익-, 나무판자가 위태로웠다. 행여나 연단이 무너져 왕께서 다치실라, 판자가 겹겹이 들어가 발이 빠져봤자 무릎께지만, 싸우기가 대단히 곤란해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내려가자니… 연단 아래에선 시민들이 몰려들고 있다.

지금은 기사들에게 무식하게 돌진할 뿐 조직적이지 않은데, 말파스를 내버려 두면 어찌 될지 모를 일이었다. 말파스가 연단 위에서 느긋하니 병법을 부리지 않을는지… 그러면 정말 죽도 밥도 안 되리라고 레이는 생각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냐?”

아르펜이 바닥에 빠졌다가 나오면서 물었다. 그와 어울리지 않는 비단옷이 엉망이다. 레이는 손가락질해 그나마 희망적인 사실을 짚었다.

“녀석의 날개가 줄었어요.”

과연, 말파스의 날개 개수가 줄어들었다. 8개였던 것이 지금은 6개였고, 3장에 달했던 길이도 짧아졌다.

사제들의 축복을 얻어맞고, 광범위한 능력을 사용한 탓이다. 녀석도 크게 무리하고 있었다.

“조금만 더 버티면 될 것 같아요. 피해가 크겠지만…”

레이의 눈을 따라 아르펜이 고개를 돌렸다. 저 밑, 단상 아래에서는 피보라가 몰아치고 있었다.

달려드는 시민들과 마지못해 칼부림하는 기사들. 광장이 점차 붉게 변해가고 있었는데, 말파스가 불러온 붉은 안개 때문인지 피보라 때문인지 구별할 수가 없었다.

‘괜찮아… 모두, 모두 되살아나게 될 거야. 회차가 재시작되면…’

레이는 죄책감에 휩싸였으나 아르펜은 쯧, 혀를 찼을 뿐 싱겁게 고개를 돌렸다.

사람 좀 죽는다고 나라가 망하는 것도 아니고… 바르나울의 시민이 다 죽어도 왕자만 무사하면 된다고 생각하며 아르펜이 “방비를 굳혀라! 시간을 끈다!” 외쳤을 때였다.

“어? 아버지?”

기사들이 말파스의 기세에 움츠러든 때기도 했는데, 노엘 덱스터가 연단에 올라왔다. 그는 차분히 가라앉은 눈으로 아들을 바라보곤 아르펜과 정 반대되는 말을 외쳤다.

“시민들이 죽고 있다! 당신이 기사라면, 만백성의 우러름과 특권을 누려온 기사라면, 의무를 다해야 할 때다! 방패를 치우고 검을 들어라! 명예가, 함께할 것이다!”

“아버지!!”

노엘이 돌진했다.

하지만 돌진한 사람은 노엘밖에 없었다.

철륜환(鐵淪環).

무쇠 폭풍에 뛰어든 그는 이내 말파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 ……

말파스의 고개가 갸웃, 꺾였다.

벌써 수십의 기사를 쪼아먹은 저 흉측한 부리가 섬광처럼 쏘아질 터라 주위에 깔린 기사들은 탄식하고 말았다. 그리고 결과도 크게 다르진 않았지만…

‘한 합의 여유를 숨기는 검술’.

노엘이 나무 바닥을 부수며 뛰어오른 것과 거대한 까마귀의 부리가 튀어 나간 건 거의 동시였다.

목표가 뛰어올랐음을 감지한 말파스가 방향을 조정하였고, 피 묻은 부리는 노엘의 배를 관통했다.

그러나 레라의 검을 역수로 움켜쥔 손이 반대였다. 노엘은 평소와 달리 왼손을 위로 해서 손잡이를 쥐었고, 역수인 지금은 왼손이 검날 받침에 붙어 있었다.

그리고 오른손으론…

– 까아악!!

못을 박듯, 하반신이 날아간 노엘이 손잡이를 때렸다. 왼손으로 조준한 검이 녀석의 콧구멍에 박혔다.

코에 이쑤시개를 있는 힘껏 박아넣으면 저럴까. 말파스가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 이를 본 어느 젊은 전사가 부끄럽다는 듯이 외쳤다.

“그래! 우리 지금 뭣들 하는 거야? 평소에 전사랍시고 거들먹거리다가 진짜 시련이 닥치니까 겁먹은 거야? 기억해둬라! 내 이름은 칼리 톨루카! ‘마샤’의 남편이자 톨루카 부족의 전사다!”

칼리 톨루카가 방패 대용으로 쓰던 나무판자를 던져버리곤 철륜환에 뛰어들었다. 쇳조각에 뺨이 베었으나, 그는 멈춰 서지 않았다.

처음부터 이랬어야 하는데.

마샤한테 언젠가는 꼭 대전사의 시련을 치를 거라고, 나만큼 용기 있는 전사는 없다고 큰소리치던 내가 숨어만 있을 순 없잖아!

칼리 톨루카는 용감히 산화한 노엘을 따라 말파스에게 도전하였고, 녀석이 정신을 못 차리는 틈에 놈의 발가락을 찍었다.

그러곤 순식간에 잡아 먹혔지만 이에 용기를 얻은 대전사들이 각자의 이름을 밝히며 달려들었다. 방패를 들고 돌격하는 성전사까지 생겼다.

“야이, 빌어먹을 놈들아! 처음부터 이럴 것이지… 전원 돌격! 내 이름은 아르펜 알바세테, 알바세테 부족이 낳은 최고의 천재이자 대전사, 그리고 무려 소드마스터이시니라!”

성전사든 대전사든… 전사는 다들 저렇게 다혈질일까. 하지만 노엘이 남긴 말과 행동에 냉정한 왕국 기사들의 심장도 뜨겁게 뛰고 있었다. 이윽고 뒤가 없는 돌격, 총력전이 벌어졌다.

물론 말파스는 만만하지 않다.

녀석은 기사들이 떼로 몰려들자 여섯 개의 강철 날개로 주위를 빗질하듯이 쓸고, 부리를 쉴 틈 없이 놀렸다. 둘러싼 기사들을 단상 아래로 밀치며 하나씩 없애나갔다.

그러기를 한참, 말파스가 우뚝 멈추었다. 무슨 생각인지 고개를 치켜든 채 움직이지 않았는데, 눈은 마치 장군처럼 전황을 살피었다.

“뭐야? 갑자기 왜 저래?”

말파스가 날개를 넓게 펼쳤다. 그러곤… 날아올랐다!

허나 보기에도 힘겨운 작태였다.

정말 가까스로 수 미터를 날아올랐을 뿐, 어디로도 가지 못하고 떠오르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이제야 손맛을 보려던 아르펜이 고함쳤다.

“내려와, 이 개… 새 새끼야!”

– …더 큰 승리를 위하여.

도검으로 이루어진 말파스의 날개가 산산이 터져나갔다. 녀석은 무거운 날개를 털어버리곤 붉은 까마귀, 본연의 모습이 되어 동쪽으로 휙- 싱겁게 날아가 버렸다.

그러나 날개를 털어버린 결과는 싱겁지 않았다. 단상 위에 있던 사람들이 기겁해 소리 질렀다.

“모두 피해!!”

날개에 달려 있던 수천 개의 무구가 비처럼 쏟아졌다. 단상 아래에서 싸우던 제2 기사단원과 수천의 시민들을 향하여.

* * *

“레라야.”

딸을 끌어안은 게 얼마 만일까.

소녀일 적에 안아 들었던 게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다 큰 딸과 아비의 관계란 그런 것이다.

“레라야. 너 좀 무거워졌… 욱! 허허, 힘도 좋지.”

레라의 팔꿈치가 명치에 꽂혔다. 데호르만은 발악하는 딸을 멈춰 세우려 애쓰고 있었다.

레라에게 검이 없는 게 천만다행이다. 엘슨을 보고 오겠다던 딸은 빈손으로, 그러나 몽롱한 눈으로 되돌아왔다.

시민들이 계속 죽어 나가자 균형을 맞추려는 혈전(血戰)에 사로잡힌 것이다. 데호르만은 장성해 출가를 앞둔 딸이 사고 치지 못하게, 그리고 행여나 기사의 손에 죽지 않도록 붙들었다.

데호르만만 이러고 있는 건 아니었다. 난장판이 된 곳곳에서 수많은 이들이 자신의 부모, 형제, 자식 또는 연인을 눈물겹게 붙잡고 있었다.

피범벅이 된, 살벌한 기사를 향해 질질 끌려가는 사람도 많았다.

데호르만은 힘이 워낙 장사여서 그럴 일은 없었다.

하지만 혈전에 의해 시민군의 적으로 지정된 몸인지라 그의 커다란 몸에 칼이 드문드문 꽂혀 있었고, 딸은 무술을 단련했다.

발버둥 치는 힘이 강하다.

기특하게도. 누굴 닮았는지.

날아드는 주먹이 매섭다.

훌륭한 기사가 되려면 아무렴, 내 딸이 게으르지 않았구나.

데호르만은 피투성이, 멍투성이가 되면서도 아비를 두들겨 패는 딸이 고깝지 않았다. 이대로만 있어 다오, 천지신명께 기도했다.

하지만 하늘도 무심하시지.

“모두 피해!!”라는 고성과 함께, 하늘이 어두워졌다. 위를 올려다본 데호르만은 “허어…” 중얼거렸다.

도검이 비처럼 쏟아진다.

저어기, 건물 사이로 숨을 수만 있으면 참 좋을 텐데. 발버둥 치는 딸을 데리고 가기엔 무리일 듯싶다.

데호르만은 몸무게로 레라를 깔아뭉갰다. 턱을 치는 딸의 머릿결을 쓸며 속삭였다.

“엄마한테 효도해야 한다. 내기는 졌지만… 어깨 주물러 드리고.”

아들을 가지지 못해서 불만이었던 적이 있었다. 아들에게 사냥을 가르치고, 함께 사냥하러 다니는 삶을 꿈꿨었다.

하지만 딸아, 너는 눈에 넣어도 조금도 아프지 않겠더구나. 어이고, 방금 친 건 좀 아팠다. 쑥쑥 커가는 너를 보는 게 내 행복이었고, 자랑이었다.

네가 대전사인 아비를 믿고 게을러질까 걱정했지만, 너는 단 한 번도 그러지 않았지. 어쩌면 레이, 그 녀석 덕분인지도 모르겠구나.

솔직히 그 녀석, 맘에 안 들었다.

어렸을 때만 해도 영 비리비리한 게 사내 구실 못 할 것 같았고, 그러면서도 세상에 남자는 아빠 빼고 다 늑대 아니겠냐.

하지만 네가 그 샌님한테 졌다고 질질 짜면서 왔을 때 느꼈단다. 네가 녀석과 결혼하게 되리란 걸.

‘심술부리지 말았어야 했는데…’

둘이 약혼할 때 반지를 맞춰줬어야 했다. 사제의 축성을 받은 반지를 가지고 있었더라면…

– 퍽.

검이 데호르만의 등에 꽂혔다.

데호르만은 레라의 몸이 어디 삐져나온 곳이 없나 확인하곤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출렁출렁한 살집이 이토록 뿌듯한 적이 없다.

– 퍽. 퍽.

“끄으… 행…”

“응? 뭐야, 아오! 아빠! 무거워!! 이게 무슨 짓이…… 아빠?”

데호르만의 고개가 툭, 떨어지고 붉은 안개가 걷힌 광장은 수천 개의 도검이 내리꽂힌 전쟁터가 되어 있었다. 울음바다, 통곡이 울리는 그곳으로 시민들이 몰려들었는데…

“우, 우리가 정말 잘못된 신을 섬기고 있었구나. 앤, 우린 이제 어쩌면 좋… 어? 앤, 왜 그래?”

“넌 이제 쓸모가 없구나.”

소름 끼치게 낮은 목소리. 앤이 기겁한 란의 가슴을 찔렀다.

“앤… 너…”

앤은 언니의 시신을 시쳇더미로 밀쳐버리곤 말파스가 사라진 동쪽으로 몽롱한 걸음을 돌렸다.

사랑하는 남편과 두 자식을 두고 떠나는 그녀의 머리엔 낡디낡은 깃털 머리끈이 달려 있었다.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A Princess Is Raised After Death, Desperately Making Her a Princess, Princess is Raised by Death, RPOD, The Princess Is Raised After She Dies, 正規エンディングまで異世界ループ転生, 공주는 죽어서 키운다
Score 8.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19 Native Language: Korean
Minseo was trapped in [Raise Lena]. With the emotionless text, “[Starting Raise Lena]” he became Leo and was imprisoned in an unfamiliar worl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Uh-huh?” “Leo? Why the long face? You! Are you messing with me again?” There, he met his childhood friend, Lena, skillfully picking berries. The lovely Lena. Leo marries her in a peaceful mountain village… [Lena is married! Congratulations.] [You have failed to clear Raise Lena.] [Restarting.] The happiest moment. Lena disappeared. An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Huh? Lena!” “Why have you been spacing out? And why are you looking at me like that? You wanna get beat up?” Lena, clad in thick leather armor and a sword on her shoulder, stared at him with unwavering eyes. It was a different scenar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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