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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85

283. 약혼 Ep – 나쁜 놈

바르나울이 발칵 뒤집혔다.

출병식을 보러 몰려들었던 시민들이 떼죽임당하고, 그 흉수가 왕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악신이었다는 소문이 일파만파 퍼져나갔다.

아놀프 드 클라우스 왕자는 흉흉해진 민심을 다잡으려 안간힘썼다.

왕의 부재를 틈타 제 잇속을 채우려는 귀족 무리를 억누르고, 외교관을 불러 벨리타 왕국에 선포한 선전포고를 철회하고, 수천의 시민이 죽은 남문 광장에서 영결식(永訣式)을 치러 시민들을 위로하는 둥 사태를 수습하려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그러나 부재한 왕권.

중앙집권체제의 핵심이 사라진 지금, 혼란은 왕위가 채워지기 전까지 들끓을 예정이었다. 정통 후계자이지만, 정식으로 왕위를 물려받지 못한 아놀프 왕자는 가야 할 길이 멀었다.

디에고 브리나 자작과 같은 몇몇 귀족들이 벌써 어느 왕족을 지목하며 속내를 드러낸 것이다. 정치적으로든, 외교적으로든 아스틴 왕국은 대내외적인 혼란에 휩싸여 갔다.

그러는 한편 레이 일행은… 이젠 일행이라기도 뭐하고, 레이와 레나, 달랑 남은 두 사람은 갓 만들어진 봉분 앞에 무릎 꿇고 있었다.

완연한 봄바람에 잡초가 흔들렸다.

이베라 아이나르, 레이의 어머니의 묘 옆에 노엘과 데호르만의 시신이 안장되었다. 레라의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졌다.

울기는 이미 많이 울었다.

남문 광장에서 예까지, 죽어서 더 무거운 데호르만의 시신을 어떻게 운반해왔는지 모를 정도로.

그럼에도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레라는 감정에 북받쳐 곁에 있는 레이에게 달려들었다.

“나쁜 놈! 이 나쁜 놈아…”

“…”

“알고 있었잖아. 알고 있었다면서! 왜 나한테만… 나한테만… 개자식들, 이 개자식들아!!”

남자들은 이상한 것에 홀린다.

남은 사람은 어쩌라고. 날 지키고 죽은 아버지마저 원망스럽다. 새된 고함을 지르며 레이의 가슴을 치던 레라가 얼굴을 감싸며 눈물을 터뜨렸다. 무릎 꿇고, 등을 굽힌 그녀는 이보다 작았던 적이 없었다.

레이가 레라를 부둥켜안았다. 놓으라며 몸을 흔들었지만, 억지로 끌어안았다. 이내 레라가 레이에게 매달려 울음을 터뜨렸다.

“난 어떡하라고. 이렇게 죽으면… 내가 어떻게 살라는 거야. 이 나쁜 놈들아. 나쁜, 나쁜 놈들…”

레이는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도 아버지를 잃었지만, 회차가 반복될 것을 알기에 고통이 덜했다. 레이는 되려 이를 악물었다.

아버지는 내가 죽인 것이나 다름없었다. 어쩌면 난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버지가 말파스에게 달려든 게 그렇게까지 놀랍지 않았던 걸 보면.

장인인 데호르만과 큰아버지 엘슨도 죽었다. 유안마저 엘슨의 시신을 끌어안은 채 쏟아지는 칼날에 맞아 죽었다. 내가 주위의 모든 사람을 파멸로 몰아넣었다.

삶이 망가져 가는 게 느껴진다.

눈이 어지럽고, 현실감이 없다. 현실감은 아집에 사로잡혔다. 레라의 머리를 감싸며 레이는 다짐했다.

난 그 어떤 대가를 치르는 한이 있더라도 내 어머니를 되살려야만 하겠다. 어릴 적, 어머니께선 날 지키다 돌아가셨다.

구일 전쟁 당시, 옌센 바일레이가 찾아왔다. 치명상을 입어 광대뼈를 하얗게 드러낸 옌센은 여기, 어머니의 묘가 있는 이 고향 집에서 치료를 받고 떠났다. 그게 파국의 시작이었다.

옌센은 크리스탈 수정 광산을 운영하여 한창 잘 나가던 팜필리 백작을 암살하는 데 실패하고 도망쳐온 것이다.

그것만이었으면 뒤를 쫓기진 않았을 터였다. 당시엔 워낙 흔하게 벌어지는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언쟁을 벌이고 단독으로 백작가에 쳐들어간 옌센을 노엘이 뒤늦게 따라갔고, 옌센이 소란을 피우고 달아난 사이에 팜필리 백작을 죽여버렸다. 백작의 죽음에 분노한 사병들은 노엘과 옌센의 뒤를 쫓았다.

경험이 많고,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는 노엘은 감쪽같이 사라졌지만, 옌센은 그러지 못했다.

옌센의 흔적을 찾아낸 사병들이 그의 뒤를 쫓아 이베라와 레이가 숨어지내던 가정집을 급습하였고, 이베라는 다섯 살배기 어린 아들을 옷장에 넣었다. 동생의 은신처가 웬 병사들에게 발각됐음을 알아챈 엘슨이 용병들을 이끌고 부리나케 달려왔을 때는, 이베라의 복부에 검이 박혀 있었다.

“엄마! 엄마! 열어줘! 제발…”

“이 개자식들이! 다 죽여버려!”

엘슨이 병사들을 도륙하고 이베라를 살폈다. 하지만 그녀는 죽어가고 있었다. 옷장에 갇혀있던 레이가 우당탕, 쏟아지듯이 넘어져 나왔다.

“어, 엄마…”

“…레이야.”

어머니가 검을 들고 필사적으로 싸우는 걸, 아들을 지키고 본인은 능욕당하지 않으려 발버둥 치는 걸, 레이는 문틈으로 울부짖으며 지켜보았다. 이베라가 힘겹게 손을 들어 새파랗게 질린 아들의 뺨을 쓸었다.

“어디 다친 데 없지?”

“난 안 다쳤… 하지만 엄마가…”

“엄만 괜찮아. 엄마 어땠어? 멋지게 싸웠지?”

레이는 이때 두고두고 후회할 말을 뱉고 말았다.

“멋지긴 뭐가 멋져. 이렇게 다쳤는데. 저, 정말 괜찮은 거지?”

“…응. 아들, 엄마한테 약속 하나만 해주지 않으련?”

이베라가 레이의 작은 손을 꼬옥 붙들었다.

“행복해야 한다. 너만은 꼭…”

바람이 이는 봉분.

십여 년 전의 어린 레이는 어머니의 묘 앞에서 맹세했다. 내전이 끝난 즉시 은퇴하고, 이사를 준비하는 아버지를 올려다보며

“전 행복할 거예요. 행복이 뭔진 모르겠지만, 반드시… 나만 행복할래요. 그리고 위대한 기사가 되어 돌아오겠어요. 행복하고 용감한… 아버지 같은 기사가.”

꼬물꼬물, 여물지 않은 입으로 말했다. 노엘은 차마 아들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세간이 실린 마차에 몸을 실었다. 그때, 레라가 말했다.

“말파스가 어디로 갔을지 안다고 했지? 알려줘.”

눈물을 닦아낸 얼굴이었다. 그러나 레이는 알 수 있었다.

푸르게 타오르는 눈동자. 자신과 마찬가지로 그녀의 행복 또한 영영 날아갔음을.

삶이 망가진 두 용사는 부모님께 절을 올린 뒤 그곳을 떠났다.

* * *

“이미 연락했어. 하지만 믿지 못하겠다더군.”

저의 응접실에서, 아르펜 알바세테 남작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자코브, 그 친구는 아직도 나한테 악감정이 있는 모양이야. 턱 좀 날아간 것 가지고 쪼잔하기는. 그래서 정 내 말을 못 믿겠으면 성녀한테 물어보라고 했지.”

“…그렇군요. 그럼 저희는 서둘러야겠습니다.”

“뭘? 왜?”

레이가 답했다.

“말파스는 할파스에게 날아갔을 겁니다. 두 놈은 본디 하나니까요. 그런데 정체를 들켰다는 걸 알면 할파스가 무슨 짓을 할지 모릅니다.”

“흐음… 루테티아에서 성전사단이 출발했다던데, 걔네들을 기다렸다가 같이 가면 안 되나?”

“너무 오래 걸립니다. 그땐 녀석도 대비가 됐겠지요. 마누비울(아스터 왕국의 수도)의 시민들이 몰살당할지도 모르니 우리가 먼저 가서 상황을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참, 왕자님께서는 언제 즉위하십니까?”

“기사를 빌리려고? 글쎄… 내가 보기엔 올해는 글렀어. 귀족들이 왕가를 뜯어먹으려고 벌떼처럼 들고일어난지라, 기사를 빼낼 수나 있을지 모르겠네.”

여러모로 안타까운 소식이었다.

마르하스를 잡으러 갈 기사단을 빌리지 못하는 것도 아쉽지만,

[ 업적 : 왕 5/7 ]

이 업적을 채우지 못하게 됐다.

말파스가 본색을 드러내기 전에 왕을 알현했으면 좋았을 거다. 하지만 놈이 내가 신의 장난감임을 알아보지 못하리란 보장이 없었다.

기본적으로 무기를 소지하지 못하는 왕궁에서 녀석과 맞붙게 되면 큰일이라 즉위한 아놀프 드 클라우스 왕자로 대신하려 하였는데, 일이 생각대로 풀리지 않은 것이었다.

어쩔 수 없지. 레이는 마르하스를 잡고 돌아오는 길에 들려야겠다고 생각하며 말을 받았다.

“힘 좀 써 주십시오. 악신을 상대하려면 기사 하나가 아쉽습니다.”

“말씀드려보겠네. 그보다… 옆에는 누구야? 딱 봐도 토착민 전사인데. 혹시 나한테 소개해주…”

“제 약혼녑니다.”

레이가 어림도 없다는 듯이 잘라 말했다. 이 양반은 딸뻘의 아가씨한테 염치도 없네. 레라가 인상을 잔뜩 찌푸린 아르펜에게 인사했다.

“레라 아이나르라고 합니다. 실례지만,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싫어. 빌어먹을 세상. 누군 귀족이 돼도 장가를 못 가는데, 이마에 피도 안 마른 게 약혼까지… 음?!”

– 쐐액!

우아한 앉은뱅이 차 테이블 위로 검이 내달렸다. 도자기 찻주전자를 가르며 레라가 검을 휘두른 것이다.

하지만 아르펜 알바세테 남작은 투덜거리던 와중에도 반응했다.

찻잔을 든 손으로 레라의 검을 꽝! 내리쳐 찍어누르곤, 다소간의 노기를 담아 말했다.

“이보세요, 약혼녀 아가씨. 장난이 심한데?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야? 이 몸이 바로 알바세테 부족이 낳은 최고의 천재이자 대전…”

“조용히 하고 받아요! 아직 안 끝났으니까.”

“얼씨구? 레이. 이 아가씨 점심에 뭐 잘못 먹었어?”

이 여자가 왜 이래? 물었지만, 레이는 “아이고…” 혀를 차며 찻잔을 들고 빠져나갈 뿐이었다. 거 말로 해도 충분히 들어줄 사람이라니깐…

하지만 레라는 성질 급하게 발차기를 날렸다. 그러면서 내리 찍힌 검을 비틀어 뽑으려 하였는데,

– 콰드득.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르펜은 한 손으론 레라의 검을 움켜쥐고 다른 손으론 날아온 다리를 막았다. 이제야 몸을 일으키는 아르펜이 거대하다.

“이익!”

그는 손바닥을 접어 검날을 요령 있게 잡았다. 비틀어도 요지부동인지라 레라가 과감하게 검을 버리며 주먹을 날렸다.

“흐음. 제법이긴 한데…”

주먹은 날아가는 족족 아르펜의 곰 같은 손바닥에 막혔다. 주먹에 닿은 손바닥이 바위처럼 단단했다.

이대론 안 되겠다 판단한 레라가 허리를 낮추며 빙글. 발차기로 바닥을 쓸었고, 아르펜은 정강이를 들어 막았다. 그 사이 레라가 바닥에 떨어진 검을 회수했다. 아르펜이 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뭘 하자는 거야? 이유라도 알려줘야 할 것 아니야.”

“소드마스터님께서 절 가르쳐주시길 바라요. 제게 그만한 가치가 있다면… 요!”

끝음절과 함께 찔렀다. 아르펜은 피식, 웃고는 안면을 딱딱히 굳히며 돌변해 고함을 질렀다.

“날 스승으로 모시겠다고? 그럼 목숨을 걸어라!”

고작 도끼 따위를 쓴다고 멸시할 때는 언제고, 소드마스터가 되자마자 가르침을 청한다고 알랑거리던 기사 놈이 한둘이 아니었다.

역겹게도.

– 까앙!

언제 집었는지 아르펜의 대검이 레라의 검을 사선으로 올려 쳤다. 아르펜은 성큼, 박살이 난 테이블을 밟으며 나아가 레라를 위압적으로 내려다보았다.

아르펜은 무섭게 생겼다.

키가 크고 덩치가 굵어서 정면에 서면 오금이 저릴 지경이다. 우락부락, 험상궂은 얼굴에 눈꺼풀마저도 없다시피 해서 어지간한 강심장도 그를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했다.

이렇게 살기를 흘리며 노려보거든 왕국의 기사란 것들도, 배움을 청한다며 찾아온 것들도 깨갱, 한심하게 몸을 움츠릴 뿐이었는데…

‘뭐야?’

눈앞의 아가씨에게서는 그런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그렇다고 호승심을 불태우는 것도 아니다.

고개를 들어봐야 할 만큼 크고, 툭 튀어나와 포근해 보이는 뱃살, 든든하게 느껴지는 덩치.

레라는 그녀의 아버지, 데호르만을 떠올리고 있었다. 울음이 왈칵 터진 그녀는 목적을 잊어버리곤 냅다 검을 내질렀다.

“야 이 나쁜 놈아!”

“…내가?”

아르펜은 당황해버렸다. 난 여자 손도 잡아본 적 없는데… 칼날과 발차기가 날아들었다.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A Princess Is Raised After Death, Desperately Making Her a Princess, Princess is Raised by Death, RPOD, The Princess Is Raised After She Dies, 正規エンディングまで異世界ループ転生, 공주는 죽어서 키운다
Score 8.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19 Native Language: Korean
Minseo was trapped in [Raise Lena]. With the emotionless text, “[Starting Raise Lena]” he became Leo and was imprisoned in an unfamiliar worl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Uh-huh?” “Leo? Why the long face? You! Are you messing with me again?” There, he met his childhood friend, Lena, skillfully picking berries. The lovely Lena. Leo marries her in a peaceful mountain village… [Lena is married! Congratulations.] [You have failed to clear Raise Lena.] [Restarting.] The happiest moment. Lena disappeared. An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Huh? Lena!” “Why have you been spacing out? And why are you looking at me like that? You wanna get beat up?” Lena, clad in thick leather armor and a sword on her shoulder, stared at him with unwavering eyes. It was a different scenar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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