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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86

284. 약혼 Ep – 청련달

봄이 왔지만, 서늘한 북부 대지에는 아직 살얼음이 남아 있었다. 중무장한 기사들 갑옷 안에는 두툼한 모피 한 장씩은 덧대어지고, 고삐를 잡은 손에는 장갑이 씌워졌다.

아놀프 왕자가 어렵사리 내어준 제1 기사단의 기사들이다. 그들은 길을 무척 서두르고 있었다.

기동할 때는 갑옷을 벗어 마차에 실어 나르는 게 보통이지만, 그들은 무장한 채로 말을 달렸다. 기사의 수발을 들어주는 종자도 없다.

시간을 아끼고자 끼니를 말 등에서 육포 따위로 때우기도 하였는데, 못해도 몇 주일은 걸리는 여정을 이런 식으로 지속할 수는 없었다. 말이라는 게 그렇게까지 편리한 이동 수단이 아니기 때문이다.

말의 피로를 풀어주고자 기사단은 자주 휴식을 취했고, 본의 아니게 그 덕택을 톡톡히 보는 사람이 있었다. 레라가 못내 미안해하며 레이에게 고삐를 넘겨주었다.

“매번 고마워.”

“괜찮으니까 가 봐.”

– 히힝!

쿠스가 진절머리 난다는 듯이 콧김을 뿜었다. 레라의 기마술이 워낙 엉망이라 우직한 쿠스에게도 곤혹이었다. 레라가 녀석의 뺨을 두드려 위로해주려 했지만, 쿠스는 고개를 흔들어 거부 의사를 밝혔다.

“얼른 가 봐. 기다리시겠다.”

레이가 물통을 챙겨 가고, 레라는 검을 챙겨 아르펜 남작을 찾아갔다. 기사단장인 아르펜은 몇 가지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그는 지도를 살피며 “더 빠른 길은 없나? 이쪽에는 역참이 없어?” 앞으로의 진행 방향을 논의하다가 고개를 돌렸다.

“왔어? 잠깐 몸 풀고 있어. 금방 갈 테니까.”

기사들이 저들의 장비를 점검하고, 각자 할 일을 맡아 하는 동안 레라는 말을 타느라 뻐근해진 허벅지를 풀었다. 검을 다잡고 몇 가지 동작을 반복했을 무렵에 아르펜이 다가왔다. 그는 군말 없이 대검을 치켜들었다.

고개를 까닥, 대련이 시작됐다.

검술을 가르쳐주겠노라 하였지만, 아르펜은 누굴 가르쳐본 적이 없었다. 해서 그는 대련만을 반복하였고, 레라는 스스로 터득하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아르펜의 검술엔 눈에 띄는 특이점이 있었으니…

“그렇게 막으면 이렇게 될 거라고 했지.”

아르펜이 제 검의 검신(劍身)을 움켜쥐었다. 그는 마치 창을 다루는 것처럼 검 손잡이와 검신을 벌려 잡고는 레라의 검을 압박해왔다.

이러면 아르펜이 딱히 힘을 쓰지 않아도 밀릴 수밖에 없었다. 상식을 벗어나는 검술에 레라는 처음에는 당혹해했었다.

손잡이를 잡아 다루며 날이 붙은 검신으로 상대를 베어낸다는, 어찌 보면 당연한 원칙을 깨뜨린 것이다. 아르펜은 이렇게 말했다.

“검을 손으로 잡으면 안 된다는 법이 있어? 내 맘이지.”

무언가 억하심정이 있는 듯 퉁명스러웠지만, “정말 대단해요! 알바세테 부족이 낳은 최고의 천재라는 게 허언이 아니었군요!” 살살 구슬리자 아르펜은 우쭐해 하며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자화자찬을 싹 빼고, 요약하면 이랬다.

그는 원래 도끼를 다뤘었다.

그리고 검과 도끼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아마도 손잡이의 너비일 것이었는데, 자코브 모드레드와 맞붙어본 이후 검을 들어야겠다고 생각한 아르펜에게 검은 무척 불편한 무기가 아닐 수 없었다.

길이는 (종류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도끼보다 훨씬 긴데, 손잡이는 무진장 좁다.

어지간한 양손검 손잡이도 그의 곰 같은 두 손이 들어가기 버거웠고, 쥐더라도 손잡이가 너무 아래에 있어서 휘두르는 힘을 조절하기가 여의치 않았다.

도끼 머리 바로 아래에까지 길게 붙은 도낏자루, 그걸 쥐는 간격으로 강약을 조절하는 데 익숙한 아르펜에게는 큰 난관이었다.

이런 난관에 부닥치면 대부분은 “검을 들었으면 검의 도를 따라야 하는 법이지.”라며 순응했을 테지만, 자존심이 세고 꼴같잖은 기사를 많이 보아온 아르펜은 그까짓 검도(劍道)라는 걸 무시해버렸다.

손잡이고 나발이고… 내가 쥐는 곳이 손잡이고, 때리는 곳이 검날이 아니겠는가.

그 희한한 고집으로 인해 그의 검술은 독특한 방향으로 발전했다.

검의 날은 좀 무디게, 대신 거대하게 제작한 아르펜은 자신이 본래 사용하던 도끼술과 엮어서 검을 마치 막대기처럼 다루기 시작했다.

손바닥을 접어 검날을 안전하게 쥐는 요령을 터득한 이후로는 거칠 것이 없었는데, 이는 그가 자신과 무기를 하나로 여기는 ‘마스터’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해서 누굴 가르쳐보기도 처음이지만, 가르쳐준다고 해서 배울 수나 있을까… 아르펜은 그 효과를 의심하고 있었다.

이 당돌한 약혼녀 아가씨는 분명 시간을 낭비하는 것일 텐데. 아니, 그보다도 제 남자 친구가 소드마스터인데 왜 나한테 배우겠다는 거야? 딴생각하는 순간이었다.

“어쭈구리?”

레라가 검을 눕혔다. 안전한 검면을 손바닥으로 받치며 그를 밀어내기 시작하는데, 그 동작은 아르펜의 검술을 닮아 있었다.

잠시 놀라워하던 아르펜이 히죽 웃었다.

“이거 가르칠 맛이 나는 제자로구먼. 역시 제법이야. 그럼 하나만 더 보여줄까?”

아르펜이 손잡이를 놓았다.

검을 아예 거꾸로 잡아 긋자 싸아아악- 검과 검이 마찰하였다. 이윽고 그의 검날 받침(Cross guard)이 레라의 검날 받침에 턱, 걸렸다.

“이런 다음에 비틀면, 짜잔!”

“엇?!”

아르펜이 검날을 쥔 손을 안으로 밀어 넣었다. 십자 형태의 검날 받침에 레라의 검날 받침이 걸리면서 레라는 그가 팔을 밀어 넣는 대로, 그 반대 방향으로 밀려났다.

사소한 지레의 원리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수법이었고, 팔이 얽혀 대응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목에 검이 닿기까지는 순간이었다. 이번에도 허망하게 패배한 레라는 무언가를 깨달았는지 검을 넋을 놓고 내려다보았다.

베고, 찌르는 게 전부가 아니다.

필요하면 흘리고, 역이용하고, 걸어 재끼는 등, 무기술이란 적을 거꾸러뜨리는 수단에 불과한 것이지 거기에 검(劍)에 대한 존중이나 고상함 따위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다.

아르펜의 검술은 이를 당당하게 부정하는 것이었다. 다만 의아한 게 있어서 레라가 중얼거렸다.

“남작님.”

“왜, 한 번 더 보여줘?”

“남작님께서는 왜 맨날 그런 옷차림이죠?”

맥락을 뛰어넘은 질문에 아르펜은 어리둥절하다가 곧 그녀가 한 질문의 취지를 이해했다. 아르펜이 다소 퉁명스럽게 답했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는 제자로구먼. 몰라 나도. 귀족이 되면 마냥 좋을 줄 알았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고…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야. 출발할 준비나 해.”

아르펜 알바세테 남작이 휙, 뒤돌아섰다. 우락부락한 그와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귀족의 복식, 터질듯한 비단옷을 입은 아르펜은 부자연스럽다 못해 우스꽝스러운 걸음으로 사라졌다.

토착민 출신으로 귀족이 된 최초이자 유일한 사례가 그였지만, 그리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 * *

레라와 레이를 포함한 기사단은 아스터 왕국을 향해 꾸준히 달렸다.

역참에 들러 말을 교체해가며 쉼 없이 달린 그들이 하루 숙박한 곳은 관문이 머지않은 안타로프 대협곡 부근의 한 마을이었다.

기사단이 국경을 무단으로 넘어갈 수는 없기에 교회에 들러 자코브 모드레드 백작에게 통신해 허락을 구할 요량이었고, 기사들은 짧게나마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마침 청련달이 파랗게, 아름답게 뜬 날이었다. 날씨도 썩 좋은 데다 강행군하느라 둘만의 시간을 가진 지 오래되었기에 레이와 레라는 아르펜의 허락을 받아(“…아주 팔자가 좋군. 마음대로 해.”) 마을 근처에 건설한 숙영지를 나섰다.

하지만 고요해서일까, 막상 레이와 레라는 대화하지 않았다. 웃고 떠들기엔 가슴에 묻은 아버지가 크다.

잠시 말을 달린 레이는 한 언덕 아래에서 멈췄다.

이곳에 와 보기는 이번으로 두 번째였다. 안타로프 대협곡에 처음 와보는 레라에게 보여주고픈 것이 있어서 레이는 말없이 언덕을 올랐고, 레라는 잠시나마 데호르만을 잊을 수 있었다.

새하얀 대협곡이 펼쳐져 있다.

산과 평야를 쪼개며 수십 가닥으로 갈라진 협곡들. 마치 인위적으로 난도질당한 것만 같은 풍경에 숨을 삼켰다.

토들러 아키우넨이 레이시아를 잡아간 라차르 신과 싸우다 생긴 흔적이라는 전설이 과연 그럴듯하다.

양손검 두 개를 동시에 휘둘렀다는 아키우넨, 인류 최초의 소드마스터이자 왕이었다는 그는 얼마나 강했을까. 대지를 쪼개어 협곡을 만들 정도라면 신에게 상처를 입히는 게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라차르 신의 피가 쏟아져 만들어졌다는 하얀 돌, ‘마누비움’이 그 증거였다. 정말 피가 묻은 것처럼 안타로프 대협곡은 하얗게, 푸른 달빛을 받아 빛났다.

“레이.”

“응.”

레라는 불러놓고는 말이 없었다. 그러기를 한참, 다시 입을 열었다.

“레이.”

“듣고 있어.”

“…이것 받아.”

레라가 허리춤에서 기다란 가죽끈을 꺼내어 건네주었다. 그에게 줄 생일선물로 에이브릴 성에서 미리 구입해둔… 생일도 뭣도 아니었지만, 레이는 잠자코 받아들었다.

“생일선물이야. 나도 네 생일 아닌 거 알지만 혹시 못 줄 수도 있으니까.”

“…그럴 일은 없어.”

“나도 그러길 바라.”

“그러길 바라는 게 아니라, 절대로 그런 일이 없을 거야.”

“넌 어떻게 그렇게 확신해?”

레라가 쏘아보았다. 그녀는 화가 난 것 같았다.

“내가 바보인 줄 알아? 네가 아직도 나한테 뭘 숨기고 있는 거 알아. 말 안 해주는 이유가 있겠거니, 안 물어보는 것뿐이야.”

“…”

레이가 입을 다물자 레라는 후우, 한숨으로 화를 털어내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 아래서 화내기엔 그녀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았다.

그리고 아버지의 죽음을 레이의 탓으로 돌리며 쏟아냈던 말들이 지금은 그녀에게 상처가 되어 있었다. 뱉은 말을 되담을 수는 없기에, 레라가 억지로 미소 지었다. 오늘만큼은 좋은 여자 친구로 기억됐으면 좋겠다.

“검 줘 봐. 내가 묶어줄게.”

레라가 레이의 허리춤에서 검을 빼앗았다. 헤진 손잡이를 새 가죽끈으로 교체해주려 하였는데…

“어?”

“…어?”

레이의 검이 웅- 웅- 미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 이거 왜 이래?”

이럴 때면 정말이지, 진심으로 민서가 아쉽다. 또 뭔 일인지 알 수가 없어서 레이가 뒷목을 어루만졌다.

“귀, 귀신 들렸나? 훠이!”

혼자 진동하는 검을 쥐고 있자니 덜컥 무서워진 레라가 검을 냅다 던져버렸다. 그래도 레이 어머니의 유품이라 버릴 생각까진 없었지만, 바위에 수직으로 떨어진 검은 묘한 균형을 잡다가 뒤로 넘어가고 말았다.

악! 안돼! 두 사람이 달려들었을 때는 검이 언덕 아래, 협곡으로 굴러떨어져 있었다.

“어, 어떡하지? 미안해. 내가 가서 주워올게.”

“기다려. 내가 다녀올게.”

다행히 그렇게 깊은 협곡은 아니었다. 경치가 근사한 언덕이라 그런지 오가는 사람이 만든 듯한 비탈길이 있어서 레라와 레이는 조심조심, 돌멩이를 떨구며 내려갔다.

그러는 동안 레라는 미안하다는 말을 스무 번이 넘게 했다.

“발 조심해. 미안해… 괜히 나 때문에…”

“괜찮다니깐. 여기도 예쁘네. 봐봐. 달빛이 반사돼서 그런지 위에서 보는 것보다 더 예쁘다.”

“그러네… 미안해.”

협곡 아래에 내려와 위를 올려다보니 하얗게 빛나는 벼랑과 청련달, 별이 박힌 밤하늘이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하지만 바닥에 떨어진 검은 아직도 우웅- 우웅- 진동하고 있었다. 강도가 더 세진 것 같아서 레라는 영 불안한 얼굴이었다.

“이게 왜 이러지?”

“귀신 들렸어. 귀신이 들린 게 분명해. 레이, 그거 교회에 가져가는 게 좋지 않을까? 사제님이라면 분명히… 앗!”

그때였다. 레라가 협곡 더 깊은 곳을 손가락질했다. 그곳은 진동에 맞춰 새파랗게 빛났다가 다시 하얘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홀린 듯 그 빛나는 협곡을 걸어 내려가자 약간 넓은 공간이 있었다. 협곡 위쪽은 좁아져 청련달만 간신히 빛을 비추는 곳이었는데,

그곳에서 푸르게 빛나는 사원이 고요히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 “진짜로 있다니까! 신비로운 사원이. 내 눈으로 똑똑히 봤어! 청련달이 뜬 밤이었지…”

치매 걸린 노인, 보리스 아이나르의 목청이 스쳤다.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A Princess Is Raised After Death, Desperately Making Her a Princess, Princess is Raised by Death, RPOD, The Princess Is Raised After She Dies, 正規エンディングまで異世界ループ転生, 공주는 죽어서 키운다
Score 8.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19 Native Language: Korean
Minseo was trapped in [Raise Lena]. With the emotionless text, “[Starting Raise Lena]” he became Leo and was imprisoned in an unfamiliar worl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Uh-huh?” “Leo? Why the long face? You! Are you messing with me again?” There, he met his childhood friend, Lena, skillfully picking berries. The lovely Lena. Leo marries her in a peaceful mountain village… [Lena is married! Congratulations.] [You have failed to clear Raise Lena.] [Restarting.] The happiest moment. Lena disappeared. An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Huh? Lena!” “Why have you been spacing out? And why are you looking at me like that? You wanna get beat up?” Lena, clad in thick leather armor and a sword on her shoulder, stared at him with unwavering eyes. It was a different scenar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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