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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87

285. 약혼 Ep – 바눈 라우노

사원은 활짝 열려 있었다. 레이와 레라는 꼴깍, 숨을 삼키며 사원 주위를 둘러보았다.

정사각형의 사원 각 면에는 여섯 개의 기둥이 세워져 있었다. 벽은 완전히 메워지지 않고 천장과 약간의 공간을 두고 있어서 사원 내부가 얼핏 보였다. 적어도 주거가 목적이 아님은 분명하다.

하지만 누군가가 우리를 지켜보는 느낌이 들었다.

등골이 싸늘해질, 적대적인 시선은 아니고, 아장아장 걷는 아이가 뒤에 선 아버지로부터 받을 법한, 일방적인 신뢰가 어린 시선이었다.

조금은 모순적이다.

아버지가 물가에 내놓은 아이를 걱정하면 걱정했지 과연 신뢰하겠는가.

하지만 레이는 그렇게 느꼈다. 나를 아끼는 거대한 무언가가 공경을 담아 내게 눈짓하고 있음을.

언젠가 느껴본 듯해서 고민하던 레이는 이윽고 그 느낌의 출처를 알아차렸다. 우리가 레안 드 예리엘일 적에 바르트 경으로부터 이런 시선을 받았던 것 같다.

“아빠?”

레라도 비슷하게 느꼈는지 표정이 묘했다. 하지만 아빠라니? 일방적인 신뢰라는 게 주로 아버지로부터 느낄 수 있는 것이라지만, 레이의 결론은 ‘충의(忠毅)’였다. 노엘이나 데호르만을 연상케 할만한 게 아니었는데, 레라는 황급히 달려 나갔다.

“아빠!!”

– 아빠- 아빠- 아빠- 빠- 빠 빠.

텅 빈 사원에 레라의 목소리가 울렸다. 허망하게. 여기에 데호르만이 있을 리 없는 것이다.

우리가 뭐에 홀린 걸까? 세 칸의 계단을 밟아 뒤따라온 레이는 사원 내부를 돌아보았다.

사원의 내부는 하나의 셀라(cella)로, 바깥에서 본 열주(列柱)가 안에서도 고스란히 보였다. 안과 밖의 차이점이라곤 그 기둥들 사이에, 벽이라기보다는 담장에 가까운 것에 새겨진 부조(浮彫)들이 보인다는 것이었다.

인간의 이야기.

담장에는 어느 인물들의 이야기가 조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높이가 상당해서 담벼락을 따라 위를 올려다본 레이는 어째서 사원의 벽이 벽답지 않게 천장과 구분되어 있는지를 알아차렸다.

조금도 채색되지 않은 그 조각품들에서 눈을 껑충 뛰어 천장을 올려다보거든 빽빽이 새겨진 기하학적인 문양에 눈이 어지러웠다.

인간과 격을 달리하는 존재.

유일신, 주신(主神)의 형상이다.

신은 오로지 관념만으로 이해할 수 있기에, 신의 면모(面貌)는 별과 같은 점(點)과 별자리 같은 선(線)으로 에둘러 표현될 뿐이었다.

인간 사고의 범주를 넘어선 신을 경외하며 고개를 한계까지 치켜들면 보이는 달(月). 네모나게 뚫린 사원 천장에 청련달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 달빛이 파랗게 내리쬐는 바닥에는 한 자루의 검이 고고히 박혀 있었는데…

레이는 그곳에 작게 새겨진 낙서를 발견하곤 몸 둘 바를 몰랐다. 그 낙서란 다름 아닌

– 보리스 아이나르 왔다 감!

목탄으로 지진 듯한 자국이었다.

…같은 인간이라 죄송합니다.

얼굴이 다 화끈거리는 걸 느끼며 발로 그 목탄 자국을 지워버렸다. 그때 레이는 바닥에 꽂힌 검이 그의 검과 마찬가지로 진동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이게 우리를 여기로 이끈 것이다. 레이가 검을 조심스럽게 움켜쥐었다. 그러자 메시지가 소리 없이 떠올랐다.

[ 당신의 것이 아닙니다. ]

“……레라. 이리 와 봐.”

“뭐야 그게?”

레라는 아직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사원의 고요하지만, 인기척이 느껴지는 공기가 그녀를 안절부절못하게 했다.

“이거 한 번 잡아 봐. 안 뽑히네.”

“네가 못 뽑는 걸 나더러 어떻게 뽑으라고. 으악! 이것도 움직이잖아.”

레라가 진동하는 손잡이를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다리에 힘을 주어 확 뽑으려 하였는데, 아무런 저항 없이 딸려와서 레라는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아이고오. 뭐야! 그냥 뽑히잖아!”

레라가 검을 끌어안은 채 볼멘소리를 뱉었다. 하지만 레라와 레이, 두 사람은 검이 뽑히는 순간 하늘에 걸린 청련달이 빙글, 회전했음을 눈치채지 못했다.

주저앉은 그녀만큼이나 커다란 검과 그걸 어깨에 걸친 레라.

영락없이 속아서 엉덩방아를 찧었지만, 호기심이 생긴 레라는 검을 돌려보았다. 그러는 한편, 레이는 다시금 떠오른 메시지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 축하합니다. ‘레라’에게 아이템이 귀속되었습니다. ]

검은 검신의 절반이 하얀색이었다. 마누비움처럼, 마치 신의 피가 묻어 변색된 듯한 그 검의 이름은

아보타(A’ bota).

무력을 제외한 거의 모든 걸 동생에게 의존했던 왕, 토들러 아키우넨에게 레이시아가 선물한 검이었다.

* * *

“와, 이거 진짜 좋아 보인다. 내가 가져도 되겠지?”

레이는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건 메시지 창이 인정한, 두말할 것 없는 그녀의 소유였다. 노엘이 검을 가져간 탓에 아무거나 주워다 쓰고 있던 레라가 기뻐하다 말했다.

“그보다, 여긴 뭐 하는 곳이지? 나 왠지 기분이 이상해. 꼭 누가 쳐다보는 것 같아. 싫은 기분은 아니지만…”

레이가 어깨를 으쓱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보리스 할아범의 말에 귀 기울였어야 했다. 인제 와서 후회해봤자 어쩔 수 없는 일이라 레이는 고요한 사원을 다시 돌아보았다.

담벼락에 새겨진 부조가 힌트가 될 것 같다. 다가가려는 찰나, 사원 구석에 이질적인 석판이 깔려 있는 걸 발견했다.

다른 곳은 전부 빛나는데, 저것만 그렇지 않다. 다가가 살펴보니 바닥에 박힌 그 석판은,

“무덤이네.”

누군가의 묘를 덮은 뚜껑이었다.

석판에는 아주 오래된, 아카이아 제국 시절에도 사어(死語) 취급을 받던 문자가 적혀 있었다. 그래도 아카이아 제국어의 원형이어서 단어 몇 개를 가까스로 읽어내었다.

“어리석은… 연심. 충성스러운 신하, 여기 잠들다. 어? 바눈 라우노?”

레이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는 사람이야?”

“가만히 좀 있어 봐. 나도 이렇게 읽는 게 맞는지 모르겠으니까. 내가 알기론 라오노(Laono)인데, 왜 여기엔 라우노(Launo)라고 적혀 있지?”

이 사람이 내가 아는 그 바눈이 맞다면, 이건 바눈 ‘라오노’로 발음하는 게 옳았다.

바눈 라오노는 인류 최초의 귀족이자 토들러가 거둔 첫 번째 신하였다. 귀족의 후계자 수여식을 그의 이름을 따서 ‘바눈’이라고 부를 정도로 유명한 위인이라 헷갈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여긴 잘못 적혀 있다.

그럼에도 레이가 의아해하는 까닭은 표기가 잘못되었다기엔 석판의 상태가 양호하고, 당시의 U 발음이 지금과 달리 쓰였다기엔 옆에 적힌 이름, 바눈(Ban‘u’n)의 발음이 지금의 것과 같기 때문이었다.

뭐지? 라오노라는 성이 잘못됐을 리는 없는데?

최초의 귀족답게, 라오노는 유명한 성씨다. 오랜 세월의 풍파를 견디지 못하고 사라진 가문이지만, 위대한 장군부터 예술가까지, 걸출한 인물을 다수 배출하였고 개중에서 아직까지도 널리 알려진 인물을 꼽으라면 십자교회가 모시는 제2 성인, 콘스티노 라오노와 제3 성인, 라자르 라오노가 있었다.

그렇다고 이 석판의 기록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기도 어렵다.

신비로운 사원. 신이 굽어보는 이 장소에 거짓된 이름이 새겨졌을 리 없는 것이다. 하다못해 낙서하는 인간은 있을 수 있어도 본인의 이름을 거짓으로 고할 수는 없다. ─ 라고 생각하며 고민하는데,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오르빌의 라우노 패밀리. 그리고,

+ …카트리나에게 검술을 가르쳐주던 어느 날, 카시아를 만나러 간 레안은 팔이 부러진 거지를 만났다. 궁중 예법을 사용하는 그에게 흥미를 느껴 따라간 레안은 거지의 부탁을 받아 ‘라우노 패밀리’를 조사하는 것으로 한때 타탈리아 왕가의 시종장이었다는 거지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요청을 수행해나갔다… +

지난 회차 엔딩 텍스트에 떠 있던 정보였다.

왕가의 시종장이었다는 사람이 어쩌다 그런 꼴이 되었는지는 차치하고, 그 거지는 무슨 연유로 라우노 패밀리를 조사해달라 하였을까?

아무리 높게 쳐줘도 일개 깡패 집단에 불과한 것을.

레이는 바눈의 진짜 성(姓)이 세간에 알려진 라오노가 아닌, 라우노였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어쩌다가 잘못 알려졌거나, 뭐… 그랬던 모양이다. 아니면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거나.

‘그 라우노라는 패밀리랑은 이상하게 자꾸 엮이네.’

회차 초반, 거지남매 시나리오의 힘겨운 생활로 인해 밑바닥을 긁다가 알게 된 곳이었고, 9번째 회차에 카시아를 통해 정식으로 가입했다.

카시아가 굴레에서 풀려난 이후로는 레안이 크세니아도 만났겠다, 라우노 패밀리와는 더는 인연이 없을 줄 알았는데, 라우노 패밀리가 크세니아가 일하는 극장을 관리하고, 레리아나가 산티안 라우노라는 소년에게 퍽 호감을 보이면서 계속 엮여온 것이었다.

그러던 게 이젠 아예 ‘조사해야 하는’ 것이라니.

참 뭐가 뭔지 알 수가 없다고 생각하며 레이는 바눈 라우노를 머리에 담아두었다. 이건 거지남매 시나리오에서 레안 드 예리엘이 처리할 문제였다.

석판에서 눈을 뗀 레이는 레라와 함께 사원의 셀라(cella)를 한 바퀴 돌았다. 오랜만에 나온 데이트인데, 담벼락에 그려진 부조라도 구경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조각화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인간의 이야기이고, 주인공처럼 그려진 인물이 몇 안 되어서 보기에 어려움은 없었지만, 해당 장면이 누구의, 어떤 상황인지를 설명해주는 글귀가 없었다. 게다가 은유의 표현인지는 모르겠으나 어떤 인물의 외형이 장면마다 제각각이었다.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소년. 그의 머리에는 뿔이 돋아나 마치 괴물처럼 그려져 있었는데, 그 바로 다음 장면에서는 정상이었다.

애당초 절벽에서 뛰어내린 사람이 어떻게 목숨을 부지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는 중간중간 괴물의 형상으로 그려졌다.

또, 어떤 인물은 다른 인물로 아예 대체되기도 했다.

어느 번민하는 사내에게 ‘약병’을 내미는 여성이 있었는데, 몇 장면이 지나자 그녀는 번민하던 사내의 옷을 입고, 그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

솔직히 돌에 새긴 조각화라는 게 그렇게까지 섬세하지 못해서 착각한 것일 수도 있다.

조각화에서 사람을 구분할 방법이라곤 해당 인물에게 줄기차게 입힌 의상과 얼굴의 주요한 특징밖에 없으니, 그 사람의 나이가 들거나 신분이 바뀌는 등의 사건이 생기면 흐름이 끊어지는 것이다.

레이와 레라는 조각이 참 멋지네, 정도로만 부조를 감상하고 마지막으로 또 뭐가 숨겨져 있지 않을까… 뒤져본 뒤에 그 신비로운 사원을 떠났다. 바눈 라우노의 무덤을 제외하면 눈여겨볼 만한 것이 없었다.

하지만 레이와 레라가 떠나고, 정적을 되찾은 사원에 희끄무레한 형상이 나타났다.

왕성한 곱슬머리와 둥그런 코로 묘사된, 번민하던 사내였다. 그는 협곡을 따라 사라져가는 두 사람을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그때, 힘 있는 목소리가 그를 돌려세웠다.

= 바눈 라우노. 네 어리석은 옛 주군과 레이시아를 재회하니 어떠하냐. 감격스러우냐?

– …그렇지 않습니다, 라차르 님.

전투와 명예의 화신이 다시 물었다.

= 그럼 과거의 영광을 잃어버린 모습에 실망하고, 슬퍼하였느냐? 아니면, 희생한 너를 기억하지 못해 분노하였느냐?

– 그렇지도 않습니다, 라차르 님.

= 그럼 어떠하였느냐?

만 년의 세월을 기다려온 바눈은 고요히 되물었다.

– 라차르 님이야말로 어찌 제게 그리 물으십니까? 저분들은 레오넬 님도, 레이시아 님도 아니지 않습니까. 제가 바눈 라우노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요. 짓궂으시군요.

라차르의 웃음에 사원이 흔들렸다. 그는 천둥과도 같이 웃었고, 바눈이 조심스럽게 질문하였다.

– 저 제물들은 언제까지 공양돼야 합니까. 아직도 용서하지 못하시겠습니까?

라차르는 빙긋 웃었다. 청련달이 구름에 가리고, 사원이 희미하게 사라져갈 즈음에 답해주었다.

= 머지않았다. 다음이 마지막일 터이니, 네 기다림은 곧 끝나리라.

이윽고, 청련달이 사라진 협곡에는 공터만이 남아있었다.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A Princess Is Raised After Death, Desperately Making Her a Princess, Princess is Raised by Death, RPOD, The Princess Is Raised After She Dies, 正規エンディングまで異世界ループ転生, 공주는 죽어서 키운다
Score 8.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19 Native Language: Korean
Minseo was trapped in [Raise Lena]. With the emotionless text, “[Starting Raise Lena]” he became Leo and was imprisoned in an unfamiliar worl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Uh-huh?” “Leo? Why the long face? You! Are you messing with me again?” There, he met his childhood friend, Lena, skillfully picking berries. The lovely Lena. Leo marries her in a peaceful mountain village… [Lena is married! Congratulations.] [You have failed to clear Raise Lena.] [Restarting.] The happiest moment. Lena disappeared. An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Huh? Lena!” “Why have you been spacing out? And why are you looking at me like that? You wanna get beat up?” Lena, clad in thick leather armor and a sword on her shoulder, stared at him with unwavering eyes. It was a different scenar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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